문묘
문묘(
연혁[편집]
신라[편집]
고려[편집]
- 983년 (성종 2)에 박사 임노성이 송에서 돌아와 바친 <태묘당도>, <사직당도>와 그 기록, <문성왕묘도>, <제기도>, <72현찬기> 등 도서를 국자감에 안치했다.
- 1020년 (현종 11) 최치원을 문묘 종사하고, 1022년 (현종 13) 설총을 문묘 종사(
從 祀 ) 하였다. - 1303년 (충렬왕 5) 안유가 문묘 황폐를 개탄해 국학 대성전을 신축하고, 박사 김문정을 원나라 보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및 제기·악기·경서 등을 가져와 비치하였는데, 이러한 공로로 1319년 (충숙왕 6) 문묘 종사(
從 祀 ) 되었다.
조선[편집]
- 1407년 (태종 7) 한양에 현재의 성균관 문묘가 완성되어 대성전에 공자 신위를 정위에 봉안하고, 안자, 증자, 자사, 맹자 4성을 배향 하였다. 그 밑의 공문 10철[1]을 종사 함으로써 유학의 큰 도통이 정리되었다.
- 연산군 때에 문묘의 신판(
神 版 )을 태평관으로 옮긴 뒤 그 안에 짐승을 기르는 등 한동안 문묘 기능을 상실했다가 중종반정 후 복구되었다. - 중종반정 이후 조광조를 비롯한 개혁 세력들은 세조와 연산군 시대를 거치면서 자의적으로 행사된 왕권을 견제하고 막을 수 있는 이상적인 이념을 문묘 종사라 생각하고 4현(
四 賢 )[2]의 문묘 종사를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이후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포함한 5현(五 賢 )[3]의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 1517년(중종 12) 정몽주의 종사가 이루어졌다.
-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으나, 1604년(선조 37) 중건을 계기로 5현(
五 賢 )의 종사가 다시 논의되었으나, 선조는 이언적의 출처가 불분명하다 등의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 광해군이 즉위하자 성균관의 유생 및 지방의 유생들도 조직적으로 참여하고, 예조, 대간, 대신들도 그 의견에 동조하여 1610년(광해군 2)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 이른바 5현(
五 賢 )의 문묘 종사가 이루어졌다. - 이이·성혼 등의 종사 때에는 서인·남인간의 학맥과 현실 정치가 연결되어 1681년(숙종 7) 문묘 종사되었으나,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출향되었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때 복향되었다. 김장생도 1688년(숙종 14)에 종사 되었으나 이듬해 기사환국으로 출향되었다가 1717년(숙종 43)에 복향되었다.
- 송시열·박세채 등의 종사 때에도 노론과 소론·남인의 대립으로 강력한 반발이 있었으며, 송시열·송준길은 1756년(영조 32)에, 박세채는 1764년(영조 40년)에 문묘 종사가 이루어졌다.
- 김인후의 종사는 1796년(정조 20)에 이루어지는데, 그의 당색은 따질 수 없으며 호남 제일의 유현으로 그동안 정치적으로 소외 되었던 호남 학파를 끌어 안는 효과를 가져왔다.
- 조헌·김집의 종사는 영조 때부터 노론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논의되었으나, 1883년(고종 20) 이루어졌다.
- 조선 후기에 최종적으로 제사 공간인 대성전 중앙에 공자를 정위에 모시고, 동⋅서무에 4성(
四聖 )을 배향하고, 다시 10철(哲 )과 송조 6현(賢 )[4]을 종사하였다. 동⋅서무에는 10철을 제외한 공자의 72제자를 비롯하여, 한⋅당⋅송⋅원대의 22현 및 우리나라의 18현 등 총 137명의 위패를 종사하였다.
현대[편집]
- 1949년 전국 유림 대회를 개최하여 우리 문묘에 중국의 유학자들인 공문 10철과 공자의 72제자 및 한⋅당⋅송⋅원대의 22현까지 봉안하는 것은 사대주의 표현이라 하여, 공자를 위시한 4성(
四聖 )과 송조 2현 정호·주희를 제외한 나머지 중국 94현의 위패는 매안(埋 安 )하고, 우리나라 18현을 대성전에 승봉키로 결의하였다. 또 전국의 향교에도 이와 같이 시행하도록 하였으나 이 개혁안에 대해 보수 유림들의 반발로 일제히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 1961년 2월 23일 전국 유림대회를 다시 개최하여 매안한 공문 10철과 정호·주희를 포함한 송조 6현[5]을 복위키로 결의하였다. 이후 대부분의 전국 향교도 이를 따랐다.
- 그리하여 현재 성균관 및 각 지방의 향교 대성전에는 공자를 정위(
正 位 )로 하여, 4성(四聖 )을 배향하고, 공문10철 및 송조 6현과 우리나라 동방 18현의 신위를 종사하고 매년 춘추 향사하고 있다.
종사 대상[편집]
문묘는 공자를 모신 사당이므로 문묘 종사의 기준은 당연히 공자의 도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얼마만큼 공헌했느냐가 될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있었던 문묘 종사는 대부분 도학(
이와 같이 역사가 선택한 동방 18현인은 권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가문이 좋다거나, 벼슬이 높다고 해서 선정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 중에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도 있지만, 벼슬과 출세를 마다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역사책에서 조차 흘려버리는 당대 석학들도 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잘났느냐, 누가 더 유명하냐가 아니다. 모두 나름대로 독창적인 자신의 학문 세계를 구축하고, 학자와 선비로서 양심과 도덕을 실천했느냐이다. 따라서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고, 학자로서 후세에 존경을 받고, 학문적 업적이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크고 높아야 선정되었던 것이다.[7]
종사 논쟁[편집]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중차대한 문묘 종사 인물을 정하는 일은 학통·당파·정치 정세 등에 따라 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출향되거나 복향되기도 하였으며, 위차가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반드시 중국의 예와 일치하지는 않았다.
정몽주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인 줄 알면서도 섬겼다는 이유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의심 받았다. 선조와 광해군 년간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5현의 종사시에 김굉필은 절조와 경학이 뛰어났으나 짧은 생을 살다 죽어 성경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하였다는 훈구파의 격렬한 반대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언적은 을사사화 때 처신으로 도덕성에 타격을 입고 출처에 대해 의심을 받았다. 이황 또한 소년 시절 기생과의 행적이 들춰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이는 한때 불교에 몸 담았던 전력 때문에 학문의 순정성을 의심받고, 성혼은 기축옥사와 임진왜란 때의 처신 때문에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둘의 위패가 문묘에서 출향되었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때 복향 되었으며, 김장생은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될 때 출향되었다가 1717년(숙종 43)에 다시 종향되었으며, 영조 때의 송시열·박세채의 종사 때에도 많은 분쟁을 야기하였다.
또한 성리학 외에 노장 사상이나 양명학 등 이단 논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인물들은 철저히 배격됐다. 서경덕이 그 대표적 예였다.[8]
그리하여 문묘 종사에 있어서 자격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비교적 자유스러웠던 인물들은 김인후 등 몇몇 뿐이었다. 이와 같은 문묘 종사는 단순히 선현에 대한 위패를 모시고 제사드리는 기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붕당의 명분과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로까지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비상식적인 것이 아니라, 나름의 논리와 학문적인 깊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배향[편집]
문묘 서차는 먼저 대성지성 문선왕 공자를 정위로 하여 남쪽을 바라보게 하고, 그 앞에 안자·증자·자사·맹자의 4성을 동서로 나누어 배향하였다. 공문 10철[9]과 송조 6현[10] 및 우리나라 동방 18현을 종사하였다.
동방 18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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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례 절차[편집]
조선조 문묘 관장은 성균관에서 하였다. 성균관의 이런 건물들을 묘우(
향사 일자는 중춘와 중추로 나누어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
향사일이 국기(
향사 절차는 성균관 대사성을 헌관으로 초헌관ㆍ아헌관ㆍ종헌관과 축ㆍ찬자ㆍ알자ㆍ찬인ㆍ사존ㆍ봉향ㆍ봉작ㆍ전작 등의 여러 집사들이 선임되어 향사 3일 전에 재계에 들어간다. 제복을 착용하고 제물을 차린 뒤 전폐례ㆍ초헌례ㆍ아헌례ㆍ종헌례ㆍ음복례 및 망예례의 단계로 진행한다. 서원으로 내려오면 더욱 간략하지만 대동소이하다. 의식이 끝나면 음희례를 하고 강론함이 보통이다.
의의와 평가[편집]
문묘는 공자와 4성을 비롯한 공문 10철 및 송조 6현과 우리나라의 신라·고려·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에서 공인한 최고의 정신적 지주에 오른 동방 18현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문묘 종사는 유학자로서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자 이상이며 최고의 명예로운 자리이다. 따라서 정공신이나 종묘 배향 공신들 보다 더 높은 명예를 누렸으며, 만인의 칭송을 받는 가장 존귀한 위치에 있다.
옛말에 "정승 3명이 죽은 대제학 1명에 미치지 못하고, 대제학 3명이 문묘배향 현인 1명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
그리하여 문묘 배향 현인을 배출한 각 가문은 그 어느 권문세가를 뛰어 넘는 국반(
기타 사항[편집]
문묘가 있었던 교육기관은 다음과 같다.
같이 보기[편집]
세계의 공자묘[편집]
중국 대륙[편집]
대만[편집]
- 타이완 공묘(
台灣 孔 廟 ): 타이난시.
한국[편집]
일본[편집]
- 유시마성당(
湯島 聖堂 )-도쿄도 분쿄구. - 공자묘-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타이[편집]
- 송크라나칼린 대학 공자 학원
- 매파루앙 대학 공자 학원
각주[편집]
- ↑ 공자 문하의 10명의 고제(
高弟 ). 안회·민자건·염백우·중궁·재아·자공·염유·자로·자유·자하(子 夏 )를 말한다. - ↑ 정몽주,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 ↑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 ↑ 송나라 6현 :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장재, 주희를 말한다.
- ↑ 정호, 주희, 주돈이, 정이, 소옹, 장재
- ↑ 〈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 저자 김용헌, 2010, 프로네시스. "인조 즉위 직후 서인 세력에 의해 추진되었던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둘의 위패가 문묘에서 출향되었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때 복향 됐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조선시대의 문묘 종사는 도학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나 학문이나 진리의 문제를 넘어 정치의 문제였고 권력의 문제였다. 문묘 종사만큼 학문과 권력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 ↑ 대한민국정책정보지(2017.02.24.) - [문화, 지금] 우리의 정신문화, '동국 18현', 이대현|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1]
- ↑ '조선 유학에 오늘을 묻다; 담일청허(
湛 一淸 虛 )의 기(氣 )로 조선에 학자가 있음을 알려라!' 주간조선 2013년 6월 10일 백민정 성균관대 교수 칼럼 게재 중 -'광해군 6년(1614년) 문묘 종사(從 祀 ) 논의에서도 이항복의 청원이 있었지만, 화담은 기수(氣 數 )에 치우쳐 이(理 )를 몰랐다고 본 전대 사림의 부정적 평가로 인해 제대로 논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화담집'중 연보) - ↑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인 공문 10철에 덕행(
德行 )으로는 안회(顔 淵 )·민자건(閔子騫)·염백우(冉伯牛 )·중궁(仲 弓 ), 언어(言語 )에는 재아(宰 我 )·자공(子 貢 ), 정사(政事 )에는 염유(冉有)·자로(子 路 ), 문학(文學 )에는 자유(子 游 )·자하(子 夏 )가 있다. - ↑ 주돈이·정호·정이·소옹·장재·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