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정 (1471년)
심정
沈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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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부원군 ( | |
신상정보 | |
출생일 | 1471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531년 (61세) |
사망지 | 조선 평안북도 강서 |
국적 | 조선 |
부친 | 심응 |
모친 | 증 정경부인 달성 서씨 |
배우자 | 정경부인 하양 허씨 |
종교 | 유교(성리학) |
심정 沈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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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71년 양력 11월 7일/음력 윤 9월 25일 조선 한성부 |
사망 | 1531년 12월 3일 조선 평안북도 강서 |
사인 | 사형(사약에 의한 사사) |
거주지 | 조선 |
성별 | 남성 |
국적 | 조선 |
별칭 | 정지( 소요정( 문정공( 화천군( 화천부원군( 곤정(袞貞) 지혜주머니( |
학력 | 1495년(연산군 1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감 1502년(연산군 8년) 알성시 문과에 을과 2위(전체 3위)로 급제 |
직업 | 문신, 유학자, 시인, 공신, 정치인 |
종교 | 유교(성리학) |
부모 | 심응(아버지) 증 정경부인 달성 서씨(어머니) |
형제 | 심원(형) 심형(형) 심의(동생) |
배우자 | 정경부인 하양 허씨 |
자녀 | 3남 2녀 심사공(아들) 심사손(아들) 심사순(아들) 서자 1남 심사눌(서자) |
친척 | 서문한(외조부) 허당(장인) 조수성(사돈) 이예장(사돈) 이빈(사돈) 최맹호(사돈) 김억(사위) 한윤종(사위) 심수정(손자) 심수백(서손자) 심수경(손자) 심수약(손자) 심수준(손자) 심수신(손자) 심수의(손자) 심수간(손자) 심수빈(서손자) |
심정(沈貞, 1471년 양력 11월 7일(음력 윤 9월 25일) ~ 1531년 12월 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공신으로, 자는 정지(
1502년(연산군 8년)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병충분의 정국공신(秉忠
1527년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이 되어 화천부원군에 진봉되었으며 남곤의 사후 조정을 장악하였으나 김안로의 탄핵으로 강서(
생애
[편집]생애 초기
[편집]출생과 가계
[편집]심정은 1471년 11월 7일(음력 윤 9월 25일) 심응과 정경부인 서씨(
아버지 심응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적개공신(
심정은 4형제 중 삼남으로, 큰형 심원(沈元)은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둘째형 심형(沈亨) 또한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 3등에 책록되어, 풍창군(
수학과 과거 급제
[편집]어려서 저명한 성리학자에게서 학문을 수학하였으나 후일 그가 몰락하여 단죄되면서 그의 스승에 대한 기록은 실전되었다. 그는 경서 해석과 중국어 번역에 능하였고, 고전과 역사 지식 역시 해박하였다.
1495년(연산군 1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곧 성균관에 들어가 성균관유생이 되었다. 성균관유생으로 있을 때 불경한 발언에 연루되어 의금부의 탄핵을 받았다. 이목이 노사신이 세조를 우롱하였다는 말을 발설하였고, 정희량이 먼저 세조께서 불교를 숭상하고 믿었으며 역신이 난(
성균관유생으로 1502년(연산군 8년) 문묘에서 특별히 열린 알성시 문과에 을과 2위(전체 3위)로 급제하였다. 급제 직후 연산군의 명으로 '춘하추동'이라는 주제로 율시를 지어 바쳤다. 바로 승문원 검교에 보임되었다가 사헌부 감찰로 옮겼다.
관력
[편집]관료 생활 초기
[편집]1503년(연산군 9년) 홍문관 부수찬과 수찬이 되었다. 그해 10월 서산으로 사냥나간 연산군을 수행하였으며, 연산군의 명으로 새 두 마리를 두 대비전에 올렸다. 이후 경연검토관(
민나라 임금이 도가(
道家 )의 술법을 숭상하고 믿어, 진수원으로 천사를 삼고 모든 정령(政令 )과 형벌을 반드시 자문하여 의논한 뒤에야 결정하다가 끝내는 망하게 되었습니다. 송(宋 )나라 때에는 옥청 소응궁(玉 淸昭 應 宮 )이 있었고, 우리 나라에는 소격서(昭 格 署 )가 있는데, 모두 이단(異端 )으로서 국고의 소비도 적지 않습니다. 성종께서 폐지하려 하는데 대신이 조종 때부터 설치하여 이미 오래되었으니 갑자기 폐지할 수 없다 하므로 중지한 것이니, 혁파(革 罷 )하시기 바랍니다.
이후 경연검토관으로 경연에서 고서적의 고사를 왕에게 강의하다가 11월 시독관(
도둑을 법으로 없앨 수는 없습니다. 수(
隋 )나라 고조(高祖 ) 때는 오이 한 개를 도둑질한 자도 모두 죽였지만 도둑들이 천하에 가득 찼었으며, 당(唐 )나라 태종(太 宗 ) 때는 금하는 법이 허술하였지만 산길이나 물가에 사는 사람도 바깥 문을 닫지 않았으니, 인군이 그 풍속을 바로잡기에 달린 것입니다.
관직생활 초기에 경연에 입시하며 사서육경의 구절을 해석하여 왕에게 강독하였다. 그 뒤 수찬, 부교리, 교리, 부응교를 지냈다.
갑자사화 전후
[편집]1504년(연산군 10년) 3월 갑자사화가 발생하여 부교리로 재직 중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으며, 4월 연산군이 폐비 윤씨 사사 사건 관련자의 처리를 문의할 때 참석하였다. 4월 교리(
1504년 4월 24일 홍문관 교리로 정창손, 한명회의 위패를 종묘에서 내칠 때, 죄가 있다는 말이 불경하다는 이유로 연산군의 명을 받아 종묘에 고하는 제문을 고쳐서 지었다. 그러나 축문의 본문에 '죄있는 신하'라는 구절이 문제가 되어 다음날 문책당하였다.
5월 밤에 숙직근무하던 중 연산군의 명을 받아 홍문관 응교(
1504년 8월 활쏘기 대회에서 우승하여 상으로 한자급 특진하였고, 9월에 홍문관 부응교에 임명되었다. 그해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사퇴, 갑자사화의 여파로 발생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중종 반정과 공신 책록
[편집]1506년(중종 1년) 박원종, 유순정 등의 반정 거사에 동조, 중종반정에 참여하였다. 중종 즉위 후 응교에 임명되었고, 그해에 중종을 추대한 공로로 당상의 품계에 올랐으며 병충분의 정국공신(秉忠
그는 남곤과 출신배경과 학통이 달랐지만 중종 즉위 초의 박정, 김공저의 음모사건 적발 때에 손을 잡았고, 1507년 유자광을 정계에서 축출할 때에도 함께 힘을 합쳐 유자광을 공격했다.
1507년 부호군(
관료 생활
[편집]이후 외직을 전전하다 1509년(중종 4) '문무를 겸하여 참으로 쓸만한 인재'라는 성희안의 추천을 받고 성천부사(
1509년 5월 한성부 우윤(
1510년 3월 17일 경연특진관으로 있을 때 《시경》 소아의 육아편에 있는 육아시(
지금 육아시(
蓼 莪詩)를 진강(進講 )하는데, 마땅히 성찰하시어야 하겠습니다. 효도는 모든 행실의 근본입니다. 무릇 사람으로서 양친이 구존(俱存)함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편모(偏 母 )를 봉양할 수 있는 것도 어렵습니다. 문종은 앵두나무를 배양하며 손수 뿌리에 물을 주고, 그 열매를 세종께 드렸습니다. 어찌 진어(進 御 )할 다른 물건이 없겠습니까마는, 효도를 위해서는 하지 않는 일이 없으므로 그런 것입니다. 성종이 정희 왕후(貞 熹王后 )3173)를 봉양하는데 하지 않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최경(崔 瓊)이 덕종(德 宗 )의 어용(御 容 )을 그렸는데, 성종이 특별히 경에게 높은 관품을 제수하였습니다. 대간이 그 부당함을 다투니, 성종이 이르시기를 '최경이 아니면 어찌 부왕을 뵈올 수 있을 것인가?' 하였습니다. 원컨대 이 시의 뜻을 잘 생각하여 덕화의 근원으로 삼으소서.
경연관으로 활동
[편집]8월 황해도 관찰사 겸 해주 목사(
1512년 5월 한성부 우윤이 되었고, 충신·효자·의부·절부를 찾아내 포상하고 관직에 임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해 경연에 입시하였으며, 이후 경연관으로 활동하며 현안 해결에 주력하였다. 10월 18일에는 경연장에서, 변방 5진의 수령들이 체직하여 돌아올 때 현지의 말을 가져오는 것의 폐단을 논하였고, 당일 무과와 파방의 절차를 의논하였다. 10월 다른 경연관들과 함께 간통한 여성을 사형에 처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유순정, 송일(
1513년 1월 한성부 좌윤(
사림과의 갈등
[편집]1515년 7월 인사행정 잘못에 책임을 지고 이조판서 안당과 함께 사직을 청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515년 이조판서로 승진했으나 삼사(
그해 우참찬(
그러나 1518년 형조판서가 되었고, 그 뒤 안당을 공격한다. 그해 10월 화천군이 되고, 이후 형조판서, 의정부 우참찬, 한성부 판윤, 지의금부사에 올랐으나, 신진 세력인 조광조의 탄핵으로 파직당하고, 정국공신 책록도 삭탈당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은거하던 중 관직에 복귀하였다. 12월 9일 한성부 판윤이 되었으나 12월 13일 사간원으로부터 간사한 사람으로 몰려 탄핵당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곧 경연특진관이 되었으나, 12월 15일 경연특진관에 부적합하다는 사간원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 1518년(중종 13년) 12월부터 1519년(중종 14년) 1월까지 사간원의 간관들로부터 계속 탄핵을 당했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1519년 1월 23일 한성부 판윤에서 체직당하였다. 그러나 사간원에서는 그가 공론에 용납되지 않았다며 경연특진관에서도 해임할 것을 여러번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4월 겸 지의금부사(
기묘사화와 사림파 숙청
[편집]훈구파 대신으로서, 1519년(중종 14년) 여름 남곤, 홍경주와 모의하여,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와 그의 신진 사류들을 모조리 숙청시키거나 실각시켰다. 이때 한 궁녀가 나뭇잎에 꿀을 발라 쓴 '주초위왕'(
조광조 일파를 숙청한 일로 1519년 이조판서가 된 뒤 남곤, 홍경주 등과 함께 조정을 장악하였다. 의정부 우참찬, 이조판서, 한성부 판윤, 의정부 좌참찬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거쳐 1519년 12월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조판서가 되자 1520년 1월 상소를 올려 6조의 낭관들 중에 음서 제도로 임명된 낭관들이 많으므로 인사이동시킬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그 뒤에도 조광조와 친한 김식을 비롯한 조광조 일파에 대한 탄핵을 계속하였으며, 그와 친한 인물들도 수시로 규탄, 비판하였다.
1521년(중종 16년) 2월, 스스로 자질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다.
"전조(銓曹)의 직임(
그러나 왕이 듣지 않았고,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그해 3월 면직되었다.
신사무옥
[편집]조광조 일파가 제거된 이후 일부 사림파 도학자들은 기묘사화의 원흉으로 지목된 몇몇 대신과 협력자들에 대한 제거 계획을 시도했다. 성균관 학유였던 안처겸(
그러나 안처겸 형제의 남곤, 심정 제거 모의는 송사련[6]의 밀고로 탄로났다. 송사련에게서 안처겸 형제와 사림파 도학자들의 조정 대신 암살 계획을 접하게 된 그는 바로 조정에 이를 보고하였다. 신사무옥은 1521년(중종 16년) 송사련으로부터 안처겸 형제의 모의를 접한 남곤 등은 안처겸 등의 역모를 주장하여 안당 등의 일파를 숙청하였다.
관료 생활 후반
[편집]1521년 3월 지중추부사, 5월 의정부 좌참찬을 거쳐 안당 등의 추국에 참여한 공로로 1계급 특진되자 스스로 사양하였으나 왕은 그에게 1자급을 특진시켰다. 그해 10월 다시 좌참찬에 임명되고, 1522년 4월 왜구가 조선에 침략하자 대책을 논의하였으며, 김전, 남곤 등과 함께 일본에 끌려간 백성들의 쇄환을 건의하였다. 6월에 순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해 비변사당상을 거쳐 1522년 11월 숭정대부에 올라 의정부 우찬성이 되었다. 바로 스스로 직임을 감당할 수 없음을 들어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해에 전라도 순변사, 비변사 제조, 의정부 우찬성, 1523년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쳤다. 1525년(중종 20년) 관직에 복귀하여 화천군(
그해 7월 사헌부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1526년 3월 다시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9월 예조판서가 되었다.
생애 후반
[편집]김안로와의 갈등
[편집]1527년(중종 21년) 1월 대광보국숭록대부(
이후 대간에서 이항을 계속 탄핵하자 그는 이항을 적극 두둔하였다. 한편 김안로는 신진이라 그는 김안로 등을 쉽게 귀양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1528년(중종 22년) 만포첨사로 변방을 지키던 아들 심사손이 여진족에게 살해당했다는 비보를 접하였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접했으나, 그는 슬픈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한다.
의정부 우의정에 이어 1527년 10월 좌의정이 되었다. 1529년 영부사, 전함사 제조(
1530년 김안로는 은밀히 복직을 도모하였다. 당시에, 심정은 의정부 좌의정에 있었고 아들인 심사순(
유배와 죽음
[편집]김안로의 사주를 받은 채무택이 자기 가신을 시켜 당시의 정치를 비방하는 익명서를 종로에 내걸고 대간에 은밀히 밀고하여, 익명서를 심사순의 소행이라 하여 국문을 청했다. 그 뒤 경빈 박씨와 관련되었다는 소문을 입수한 것처럼 조작한 김안로로부터 거듭 탄핵을 받았다. 이후 양사의 탄핵을 받다가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경빈 박씨의 동궁 저주의 관련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이후 김안로의 사주를 받은 사헌부 대사헌 김근사(
이후 양사에서 여러 번 그를 사사, 처형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중종이 이를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1531년(중종 26년) 이항·김극핍 등과 함께 신묘삼간(
사후
[편집]이후 병을 얻은 정경부인 하양 허씨(
그러나 훈구파가 몰락한 후, 다시 추탈되었다. 그만은 사림의 미움을 받아 신원되지 못하고 남곤과 함께 '곤정(袞貞)'으로 일컬어져 소인의 대표적 인물로 길이 매도되었으며, 곤쟁이 젓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손자 심수경은 연좌되지 않고 명종과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다. 1910년(융희 3년) 조선이 멸망하고 난 뒤에야 그의 저서와 작품이 간행되었다.
가족 관계
[편집]- 증조 할아버지 : 심귀령(沈龜
齡 ) - 좌명공신 풍천군(豐川 君 ), 의흥삼군부 도총제, 지의흥부사 - 할아버지 : 심치(沈寘) - 남원부사, 증호조판서
- 아버지 : 심응(沈應, 1433년 ~ 1504년) - 적개공신 봉조하 증영의정 풍산부원군(
豊山 府 院 君 ) - 어머니 : 증 정경부인 달성 서씨(
達 城 徐 氏 , ? ~ 1523년) - 광흥창부승 서문한(徐 文 翰)의 딸
- 부인 : 정경부인 하양 허씨(
河陽 許 氏 , 1468년 ~ 1534년 4월 19일) - 허당(許 塘)의 딸- 아들 : 심사공(
沈思 恭 ) - 며느리 : 조씨 - 조수성(
趙 守 誠 )의 딸- 손자 : 심수정(沈守
精 ) - 손녀 : 풍산 심씨
- 손녀 사위 : 찰방 성효관(
成 效 寬 )
- 손자 : 심수정(沈守
- 첩며느리 : 이름 미상, 아들 심사공의 첩
- 서손자 : 심수백(沈守
白 )
- 서손자 : 심수백(沈守
- 아들 : 심사공(
- 첩 : 이름 미상
- 서자 : 심사눌(
沈思 訥) - 서며느리 : 최씨 - 판관 최맹호(
崔 孟 豪 )의 딸- 서손자 : 심수빈(沈守贇)
- 서손녀 : 풍산 심씨
- 서손녀 사위 : 남응년(
南 應 年 )
- 서자 : 심사눌(
- 장인 : 허당(
許 塘) - 외할아버지 : 서문한(
徐 文 翰)
평가
[편집]조광조, 안당 등에게 사적인 원한과 반감을 가졌으나, 정치적으로는 청렴하였다. 형제간에 우의는 지극하여 곤경에 처한 동생 심의(沈義)를 끝까지 보살펴주었다고 하며, 교묘한 꾀를 잘 내어 지혜주머니(
아들 심사손 등을 변방에 보내 국경을 지키게 하는 등, 자제들의 변방 근무를 기피하던 당시 양반관료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그의 손자 심수경은 청백리로 인정되었다.
기타
[편집]심정의 장남은 중종 때, 문음(
학문
[편집]글재주가 뛰어나 여러 작품이 있었으나 조광조, 김식 등의 처형에 가담한 인물이라 그의 저서와 작품, 글씨들은 소각되고 인멸되어 실전되었다. 사서 육경과 고문 해석에 재능이 있었으며, 정호와 주자 등에 대한 지식도 뛰어났다.
학문상 그는 유학자로 김안로와 함께 역성혁명파로부터 이어지는 관학파(
심정을 연기한 배우
[편집]텔레비전 드라마
[편집]유적
[편집]-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이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되어 있다.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은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에 위치하고 있다.
- 《소요정》: 1517년(중종 12년) 심정이 조광조의 사림 세력들에 의하여 파직되고, 위훈 삭제까지 당하자,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탑산 남쪽 기슭에, '소요정(
逍遙 亭 )'이라는 정자를 짓고 울분을 달랬다고 한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각주
[편집]- ↑ 태종을 도와 1차, 2차 왕자의 난에 출정하였으며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
佐 命 功臣 )으로 풍산군(豊山 君 )에 봉해졌다. 벼슬은 정헌대부(正憲 大夫 ) 판의흥삼군부군자감사(判 義興 三軍 府 軍資 監事 )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양(靖 襄 )이다. - ↑ 《조선왕조실록》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
正德 ) 2년) 윤1월 30일(갑술) 6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 중종 3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
正德 ) 2년) 8월 28일(기해) 1번째기사 - ↑ 그러나 당일 성희안은 그가 인망이 없다고 다시 고하였다.
- ↑ 1513년 9월 대사간 홍경림(
洪 景 霖)이 유진을 사형에 처할 것을 상소했다. - ↑ 안돈후의 서녀의 아들로 외가를 고발한 공로로 서자에서 면천하여 양반이 되고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 ↑ 왕족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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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편집]- 성종실록
- 연산군일기
- 중종실록
- 조야집요
- 대동야승
- 연려실기술
- 국조보감
- 국조방목
- 사마방목
외부 링크
[편집]전임 한형윤 |
제181대 판한성부사 1518년 음력 12월 9일 ~ 1519년 음력 1월 23일 |
후임 신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