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규
심상규
沈象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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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 의정부 영의정 겸 섭정승 | |
임기 | 1834년 11월 13일 ~ 1834년 12월 13일 |
군주 | 헌종 이환 |
이름 | |
별명 | 초명은 상여( 자는 가권( 호는 두실( 시호는 문숙( |
신상정보 | |
출생일 | 1766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838년 (73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국적 | 조선 |
학력 | 1789년 춘당대문과 병과 급제 |
정당 | 노론 시파 후예 세력 |
본관 | 청송 |
부모 | (부) 황해도 관찰사, 증 영의정 심염조 (모) 증 정경부인 안동 권씨·남양 홍씨 |
형제자매 | 심응규(동생, 서흥부사) 심승규(동생, 평강현감) 심위규(동생, 제용감 주부) |
배우자 | 정경부인 연안 이씨 |
자녀 | 심정우 |
친인척 | 심집 (8대조) 심건택 (당질) 심상만 (증손자) |
종교 | 유교(성리학) |
심상규(沈象奎, 1766년 ~ 1838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청송(
순조와 헌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수장 김조순과 절친한 노론 시파(
가계
[편집]인조 때 형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낸 심집(沈諿)의 8대손으로 정조 때 규장각 직제학과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심염조(沈念
생애
[편집]1789년(정조 13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교대교, 부교리, 규장각직각을 지내다가 검교직각을 거쳐 승지가 되고, 이후에 이조참의를 지내다가 승지, 이조참의, 사간원대사간을 거쳐 검교직각에 이어 예조참의를 지내고, 비변사제조를 거쳐 승지에 이어 이조참판이 되고 검교직각과 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다시 이조참판을 하고 검교직각이 된다. 그러다 홍문관부제학과 비변사유사당상을 거쳐 다시 이조참판이 되고 검교직각을 거쳐 예문관제학에 이어 도승지가 되고, 이후 예조판서와 형조판서, 공조판서에 이어 규장각제학으로 있다가 호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내고, 약방제조를 겸한 뒤 다시 호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내고, 상의원제조를 겸하다 홍문관 대제학, 병조판서, 이조판서, 판의금부사에 이어 좌빈객을 지내고, 병조판서, 호조판서, 판의금부사를 지내다가 동지정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후 좌빈객을 거쳐 병조판서가 되고, 원임제학에 이어 판의금부사를 다시 하고, 우빈객과 좌빈객을 두루 한 뒤, 원임제학에 이어 판의금부사를 다시 하고, 지중추부사로 전직되었다가 광주부 유수 겸 남한산성 수어사를 거쳐 예책문제술관으로 순조의 신임을 받아, 대제학,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내고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 민정을 다스렸다. 이후 우빈객을 하다 대제학을 다시 하고 지문제술관에 이어 좌빈객이 되고, 이후 예조판서를 하다 다시 우빈객이 되고 호조판서를 거쳐 장례도감제조에 이어 호조판서와 공조판서를 했다. 이후 좌빈객과 우빈객을 거쳐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다. 1825년 우의정이 되고, 1833년 좌의정을 거쳐, 1834년(순조 34년) 영의정이 되었으며 세손(헌종)의 사부와 호위대장을 겸하였다.[1][2] 그 해에 순조가 승하하고 헌종이 즉위하자, 원상(
평가
[편집]정조의 초계문신(
경화사족(京 華 士族 )의 상징 심상규(沈象奎)
[편집]영의정 두실상공 심상규는 19세기 경화사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경화사족(
고종과 심순택의 일화
[편집]고종이 심순택을 영의정으로 임명하면서, "경의 선대에 정승을 역임한 이가 많다는데, 과연 몇 사람인가?" 하니, "신의 직파(
심상규와 김조순
[편집]심상규와 김조순은 둘도 없는 절친이었고, 천생오태사(
심희순과 추사 김정희
[편집]두실 심상규의 후손으로 두실존고(
광주유수는 한양도성을 지키는 4대 관문으로 그 중요성이 중차대하다. 두실상공은 1년간 재임하면서 집무실인 좌승당(
玉 泉 亭 (옥천정) 조성
[편집]19세기 경화사족들은 풍류를 만끽하였다. 경화사족의 한 가운데 심상규와 청송심씨 가문이 있었다. 남한산성 행궁의 종묘 좌전을 돌아 조금 올라가면 두실상공의 옥천정 시가 새겨진 작은 암벽이 우리를 반긴다.
<
옥천정 일대는 남한산성 행궁 내에 존재했던 관설(
坐 勝堂 (좌승당) 건축
[편집]좌승당은 심상규가 지은 집무용 건물이다. 좌승(
以威亭 (이위정) 조성
[편집]이위정은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해 만든 정자이다. 이위(以威)란 '활로써 천하를 위압할 만하지만, 활과 화살이 아닌 인의와 충용으로써도 능히 천하를 위압할 수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현재 '이위정기'가 탁본과 함께 「중정남한지(
남한산성 심상규 거사비
[편집]![](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5/59/%EB%82%A8%ED%95%9C%EC%82%B0%EC%84%B1_%EC%8B%AC%EC%83%81%EA%B7%9C_%EA%B1%B0%EC%82%AC%EB%B9%84.jpg/220px-%EB%82%A8%ED%95%9C%EC%82%B0%EC%84%B1_%EC%8B%AC%EC%83%81%EA%B7%9C_%EA%B1%B0%EC%82%AC%EB%B9%84.jpg)
두실 심상규는 51세 때 남한산성 광주유수 겸 수어사가 되어 1년 간 재임하였다. 그 기간 동안의 선정이 있었기에 거사비(
천생오태사(天生 五 太 史 ) 심상규의 업적
[편집]김조순, 남공철, 심상규, 이만수, 서영보 이 다섯 명은 순조 시대에 정계를 움직인 핵심 인물들이다. 감히 견제하기 어려운 그들의 권력에 빗대어 천생오태사(
국민 교과서 「오륜행실도(五倫 行實 圖 )」를 만들다
[편집]1797년(정조 21년)에 심상규, 이병모 등이 왕명에 의하여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하여 수정, 편찬한 책이다. 조선 전기의 통치제도나 문화 전반에 관한 재정비가 활발했던 정조 대에는『오륜행실도』가 새롭게 편찬 간행되었다.
정조가 동궁 시절부터 국왕 재위기간 동안 지은 시문·윤음·교지 및 편저 등을 모아 편집한 문집이다. 1차 편찬은 1799년(정조 23년)에 이루어졌고, 2차 편찬은 1800년 정조가 승하할 때까지 약 반년 간의 저술을 덧붙인 것으로, 1801년 12월에 심상규가 주관하여 184편을 편찬하였다.
<건릉지장속편(健 陵 誌 狀 續編 )> 편찬
[편집]정조 국장 때의 지장을 원편(
가계
[편집]- 할아버지 : 심공헌 - 증 좌찬성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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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편집]- ↑ 순조실록 34권, 순조 34년 7월 9일 임신 1번째기사
- ↑ 순조실록 34권, 순조 34년 8월 10일 임인 2번째기사
- ↑ 순조실록 34권, 순조 34년 11월 13일 갑술 21번째기사
- ↑ 헌종실록 2권, 헌종 1년 6월 10일 무술 2번째기사
- ↑ 헌종실록 4권, 헌종 3년 11월 25일 기해 1번째기사
- ↑ 「승정원일기」고종 21년 9월 3일
- ↑ <
次 韻 楓 皐 太 史 >「斗 室 存 稿 」卷 1 - ↑ 노재현 외, 「한국전통조경학회지」 75쪽
전임 남공철 |
조선의 섭정 1834년 11월 13일 ~ 1834년 12월 13일 |
후임 조인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