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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봉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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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봉조(なりたてまつ, 1401년 ~ 1474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창녕(あきらやすし). 자는 효부(孝夫たかお)·유행(攸行)이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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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보(かげ)로 순승부 행수(じゅんうけたまわぎょうくび)가 되고 여러번 옮겨 한성 소윤(かんじょうしょういん)에 이르렀다. 1430년(세종 12) 지풍덕군사(豊德ほうとくぐんごと)로 나갔다가, 1438년 사헌부 장령(つかさけんてのひられい)·지사간원사(諫院ごと)를 지냈다.

1441년에 동부승지(どうふくうけたまわむね)에 발탁되어 우부승지에 올랐다가 형조·호조·공조의 참의(參議さんぎ)를 거쳐 경상도·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1447년에 가선 대부(よしみぜん大夫たいふ) 경상도 도절제사(節制せっせい使)에 올랐고, 1449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ぜんらどう觀察かんさつ使)가 되었다.

1452년(문조 2)에 사헌부 대사헌(つかさけんだいつかさけん)이 되고 1453년(단종 원년)에 가정 대부(よしみやすし大夫たいふ) 형조 참판에 올랐다가, 곧 함길도 도관찰사(咸吉どう觀察かんさつ使)에 임명되었다.

세조가 즉위하자 성봉조의 아내가 세조비의 언니였기 때문에 특별히 자헌 대부(けん大夫たいふ) 지돈녕부사(あつしやすしごと)를 가자()했다. 공조·형조의 판서를 지내고, 1457년(세조 3)에 정헌 대부(正憲まさのり大夫たいふ) 의정부 우참찬(政府せいふみぎさんさん)을 더했다. 1458년 이조 판서에 제배되었다가 1462년(세조 8)에 숭정대부(たかしせい大夫たいふ) 우찬성(みぎ贊成さんせい)에 오르고, 1466년에 숭록대부(たかし祿ろく大夫たいふ)에 올라서, 1468년(세조 14)에 보국숭록대부(輔國たかし祿ろく大夫たいふ) 영중추부사(りょう中樞ちゅうすうごと)를 더하였다.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1471년(성종 2) 좌리공신(功臣こうしん) 3등으로 의정부 우의정(政府せいふみぎせい)에 오르고, 창성부원군(あきら城府じょうふいんくん)에 봉해졌다. 이 때 성봉조가 사양하기를, "삼공(三公みつきみ)은 지위가 백관(百官ひゃっかん)의 우두머리로서 나라의 균축(ひとしじく)을 잡는 것인데, 신과 같은 작은 그릇으로 어찌 물망에 부합하겠습니까? 하물며 이제 쇠하고 늙었으므로 치사(致仕ちし)함이 이치에 마땅하니 빌건대 기무(つとむ)를 해임하여 남은 여생을 보존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1]

시호(諡號しごう)는 양정(じょうやすし)이니, 일로 인하여 공(いさお)이 있음이 ‘양(じょう)’이고 부드럽고 곧으며 편히 죽음이 ‘정(やすし)’이다.

성봉조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후덕하며, 고사(故事こじ)를 잘 알고 숙련하여 가는 데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아들 성율(なり慄)은 벼슬이 참의(參議さんぎ)에 이르렀다.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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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 : 동지중추원사(どう中樞ちゅうすういんごと) 성엄(なり揜)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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