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형
윤원형(
개요[편집]
1533년(중종 28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외조카인 경원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노력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친족인 윤임[2], 처당숙 김안로(
그 뒤 예조참의를 거쳐 1546년 이기(
중종의 처남이자 사돈이었으며, 정적인 김안로는 처당숙이고, 대윤(
생애[편집]
초기 활동[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윤원형은 1503년에 경기도 파주군에서 파산부원군 윤지임과 전성부대부인 전의이씨(
중종의 왕비인 문정왕후의 동생으로 누나인 문정왕후가 중종의 계비로 들어간 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사관을 거쳐 1538년 교리로 시독관을 겸직하고 사헌부지평, 홍문관응교 등을 지냈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후의 명종)을 낳자 당시의 권세가인 김안로를 제거하였다. 또한 인종의 외삼촌 윤임이 경원대군을 해하고자 한다고 모함하여 서로 다투었는데, 이때 윤임 일파를 대윤이라 하고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했다. 윤원형과 윤임은 친척이었는데, 윤원형의 5대조 윤번의 딸이 세조비 정희왕후로, 정희왕후의 남동생 윤사흔의 4대손이었다. 윤임은 윤번의 차남 윤사윤의 후손으로 윤원형의 아버지 윤지임과는 8촌간이었다. 윤원형은 윤번의 셋째 아들 윤사흔의 고손자였다.
청소년기[편집]
그의 누이 문정왕후는 중종의 계비로 입궐한 후 문정왕후가 경원대군(
1528년(중종 23)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3년(중종 28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
관료 생활[편집]
문정왕후의 책비 직후[편집]
한편 장경왕후가 병으로 죽자 윤임 등이 자신의 친족이기도 한 그의 누이인 문정왕후를 지지하여 왕비로 간택된다. 장경왕후와 윤임은 모두 그의 아버지 윤지임과는 8촌 삼종형제간으로, 조선시대 기준으로 8촌은 사망했을 때 유복친에 해당되는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러나 이후 윤원형이 자신의 외조카 경원대군을 왕위에 앉히려는 시도를 하면서 윤임 일가와의 관계는 악화된다. 이후 홍문관수찬·교리·지평·응교 등을 지냈다.
1537년 인종의 사돈인 김안로(
1543년(중종 38년)에는 중국 명나라에 성절사(
1544년 승정원좌부승지로 승진, 좌승지를 거쳐 공조참판이 되었는데, 인종이 즉위하자 정권을 장악하게 된 대윤의 송인수(
윤임과의 갈등[편집]
인종은 병약하였는데, 그는 일찍부터 경원대군을 차기 왕으로 추대하려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인종의 외숙인 윤임과 공공연히 갈등했다. 그해 대윤의 송인수(
그러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즉위한다. 윤원형은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정적인 윤임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윤임이 희빈 홍씨의 소생인 중종의 여덟째 아들 봉성군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누명을 씌웠던 것이다.[5] 이후 그는 형 윤원로, 조카 윤춘년 등과 짜고 윤임을 축출할 계획을 세운다. 인종이 8개월 만에 죽고 11세의 어린 나이로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자 석방되고 다시 복직되었다. 그해 예조참의가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인종이 죽고 명종 즉위 직후, 국왕의 장례는 5월장이 원칙이었으나 윤원로, 문정왕후, 이기(
권력 장악[편집]
을사사화와 집권[편집]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은 크게 세력을 얻어, 1545년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일파와 많은 선비들을 죽였다. 이 공로로 보익공신, 위사공신 등에 책봉되었다. 이때 윤원형 일파는 윤임이 자신의 외조카인 계림군을 추대한다는 설을 퍼뜨렸고, 정난정은 윤원형의 사주를 받고 이를 문정왕후에게 전했다. 윤임은 귀양가던 길에 충청북도 충주에서 사사당했다.
윤원형은 이때 윤임과 같은 외척 세력과 봉성군, 계림군 등과 같은 종친 세력 뿐만 아니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림들도 대거 같은 세력으로 몰아 처형했다.[5] 자신에게 역모의 누명이 돌아오자 두려웠던 계림군은 도망치던 중 붙잡혀서 살해되었다. 이어 이기 등과 함께 사림파를 제거할 계획을 세워 사림파 역시 윤임에게 동조했다는 이유로 체포, 투옥, 사형에 처한다.
이 공로로 보익공신(
양재역 벽서 사건[편집]
양재역 벽서 사건이란 경기도 양재역의 벽면에 이런 내용의 벽서가 나붙었던 사건을 말한다. "위로는 여왕(문정왕후), 아래로는 간신이 날뛰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5]"
윤원형은 이 벽서 사건이 윤임 잔당의 소행이라고 주장해 조정에 남은 윤임의 잔존 세력을 모두 숙청했다. 윤원형이 윤임의 잔존 세력에 사림을 포함시킴으로써 갓 조정에 진출했던 사림은 또다시 커다란 시련을 겪어야 했다.[7] 양재역 벽서 사건을 계기로 을사사화를 피한 사림이 대다수 끌려와 형문을 당하고 유배, 파면당했다.(정미사화) 이 과정에서 사림파의 희생을 막으려는 이언적 등과 갈등, 이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언적을 정계에서 축출한다.
이어 윤원형은 1546년(명종 1년) 1월 자헌대부로 승진한 뒤 서원군(
“ | 신은 척리(戚里)의 한사람으로서 외람되게 공신의 대열에 참여하여 벼슬이 이미 종2품에 이르렀는데, 이제 대신이 신을 공이 있다고 아뢰어 다시 정2품에 올랐습니다. 벼슬을 이렇게 헤프게 준다면 조정의 명기( |
” |
승진과 진봉을 사양하였으나 명종은 듣지 않았고, 곧 예조판서로 승진했고, 경연특진관을 거쳐 1547년 정헌대부 예조판서, 1548년에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후 친형인 윤원로와 권력을 다투다가 문정왕후가 그의 손을 들어주면서 이듬해 형을 유배시키고 그 뒤 윤춘년(
몰락과 죽음[편집]
생살(
1565년 윤원형과 정난정을 사형에 처하라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탄핵이 빗발쳤고, 윤원형은 그해 11월 18일에 경기도 강음현(
사후[편집]
그가 죽고 곧 명종도 바로 사망했으므로 복권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후손들은 연좌되지 않았다 한다. 묘는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당하리 산 4-20번지(현 경기도 파주시 당하동 산4-20번지) 선산 근처에 안장되었다.[8] 정난정 역시 그의 묘소 뒤편에 안장되었는데 묘비는 조선의 멸망 이후에나 세워지게 되었다.
정치적 몰락으로 그의 작품과 저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가계[편집]
정적이었던 김안로는 그의 장인 김안수의 사촌 형제였고, 명종의 외삼촌이며 인종과는 10촌간이면서 조카사위가 되는 이중 인척관계였다. 세조비 정희왕후는 고조부 윤사흔의 누나였다.
- 증조부 : 윤계겸(
尹 繼 謙 )- 할아버지 : 윤욱(
尹 頊) 내자시판관 지냄- 아버지 : 윤지임(
尹 之 任 , 1475년 - 1534년) - 어머니 : 전성부대부인 전의 이씨(
全 城府 夫人 全 義 李 氏 , 1475년 - 1511년)- 형 : 윤원개(
尹 元 凱, ? - ?)- 조카 : 윤기(
尹 紀 ) - 조카 : 윤강(
尹 綱 ) - 조카 : 윤씨, 구윤(
具 潤 )의 처
- 조카 : 윤기(
- 형 : 윤원량(
尹 元 亮 , 1495년 ~ 1569년) - 형 : 윤원필(
尹 元 弼, 1496년 ~ 1547년)- 조카 : 윤윤(
尹 綸) - 조카 : 윤위(
尹 緯 ) - 조카 : 윤회(
尹 繪 ) - 조카 : 윤집(
尹 緝)
- 조카 : 윤윤(
- 형 : 윤원로(
尹 元老 , ? ~ 1547년)- 조카 : 윤백원(
尹 百 源 , 1528 - 1589) - 조카 : 윤천원(
尹 千 源 ) - 조카 : 윤만원(
尹 萬 源 )
- 조카 : 윤백원(
- 누님 : 문정왕후
- 자형 : 중종, 자형이자 사돈
- 외조카 : 명종
- 본처 : 연안 김씨, 현감 김안수(
金安 遂 )의 딸, 김안로(金安 老 )의 당질녀 - 첩 : 정난정(
鄭 蘭 貞 , ? - 1565년 부총관 정윤겸의 서녀- 장남 : 윤설(
尹 紲 ) - 차남 : 윤효원(
尹 孝 源 )- 손자 : 윤혜(
尹 憓)
- 손자 : 윤혜(
- 삼남 : 윤충원(
尹 忠 源 )- 손자 : 윤면(
尹 𢗔)
- 손자 : 윤면(
- 사남 : 윤담연(
尹 覃淵) - 사위 : 이조민(
李 肇 敏 ) - 사위 : 이귀남(
李 貴 南 )
- 장남 : 윤설(
- 형 : 윤원개(
- 아버지 : 윤지임(
- 할아버지 : 윤욱(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 《교동 마님》 (MBC, 1981년 · 오지명)
- 《풍란》 (MBC, 1985년 · 한인수)
- 《조광조》 (KBS, 1996년 · 이영호)
- 《임꺽정》 (SBS, 1996년~1997년 · 박근형)
- 《여인천하》 (SBS, 2001년~2002년 · 이덕화)
- 《불멸의 이순신》 (KBS, 2004년~2005년 · 최병학)
- 《천명》 (KBS, 2013년 · 김정균)
- 《옥중화》 (MBC, 2016년 · 정준호)
- 《조선생존기》 (TV조선, 2019년 · 한재석)
복권[편집]
이후 그에 대한 복권 여론은 고종때 가서야 나오기 시작했다.
1908년(융희 2년) 4월 30일에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다.[4] 1908년(융희 2년) 1월 이완용 등의 건의로 작위와 시호가 회복되었다.[10]
1908년 4월 죄적에서 삭제되고 명예회복되었다.[4] 그러나 그의 저서와 작품들은 대부분 멸실되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거치면서 숨겨진 것들 조차 멸실되었다.
가족 살해 논란[편집]
장경왕후의 오빠로 족숙인 윤임을 모함하여 죽이고, 다시 사촌 윤춘년을 시켜서 자신의 친형 윤원로를 죽였다.[11] 또한 윤원형은 애첩 정난정을 끌여들여 정경부인 자리에 올리고 조강지처 김씨를 독살한 인물이기도 하다.[11]
평가[편집]
사림의 입장에서 본다면 윤원형은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사림에게 윤원형은 불구대천의 원수일 수밖에 없었다. 윤원형은 사림으로서는 반드시 타도해야 할 척신(戚臣) 정치 세력의 전형이었다.[12]
기타[편집]
- 뒤에 나타난 전설에는 그와 정난정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정난정이 체포되어 노비가 된 뒤에 죽었다는 전설이 나타났다. 이는 사실은 아니나 정난정 및 윤원형에 대한 사림의 원한이 표출된 것으로 해석된다.
- 뒷날 선조 때의 동인(
東 人 )의 영수 김효원(金 孝 元 )이 한때 그의 집에도 출입했다. 김효원은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의 친구였는데, 뒷날 심의겸이 이를 문제삼아 공론화하면서 사림이 동서 분당하는 계기가 된다.
- 일찍이 권력을 손에 쥐기를 바라다가 인종이 즉위하자 은밀히 불공을 드려 임금의 수명이 길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남산에서 한밤중에 손수 등불을 켜 놓고 향을 피우며 신좌에 경례하며 인종이 빨리 죽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또한 궁중에 나무로 만든 사람을 묻어 저주를 하였다고 한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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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편집]
각주[편집]
- ↑ 『기년편고』
- ↑ 윤임은 아버지 윤지임과 8촌 종형제간으로 그에게는 9촌 삼종숙이 된다.
- ↑ 명종실록 24권, 명종 13년 5월 29일 병자 2번째기사
- ↑ 가 나 다 순종실록 2권, 순종 1년(1908 무신 / 대한 융희(
隆 熙) 2년) 4월 30일(양력) 3번째기사 "죽은 좌의정 한효순 외 77명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에 관하여 보고하다" - ↑ 가 나 다 라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7) 50페이지
- ↑ 윤원로 - Daum 백과사전
-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7) 51페이지
- ↑ http://media.daum.net/culture/art/view.html?cateid=1021&newsid=20061103140413945&p=segye
- ↑ 2002년 11월 파평윤씨 선산에서 발견된 윤씨 미이라의 친정아버지이다. 윤씨 미이라는 문정왕후의 친정 종손녀이며, 인종후궁 숙빈윤씨, 조선명종 등의 조카딸이었다.
- ↑ 순종실록 2권, 순종 1년(1908 무신 / 대한 융희(
隆 熙) 2년) 1월 30일(양력) 4번째기사 "한효순, 정인홍 등에게 죄명을 벗겨주고 작위와 시호를 회복시켜 주다" - ↑ 가 나 김재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78페이지
-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7) 51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