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왕자의 난
제1차 왕자의 난 | |||||||
---|---|---|---|---|---|---|---|
| |||||||
교전국 | |||||||
이방석 지지파 | 이방원 지지파 | ||||||
지휘관 | |||||||
이방석† 정도전† 남은† 심효생† 이제† |
정안대군 민씨 부인 익안대군 회안대군 이화 하륜 이숙번 박포 조영무 조온 조준 | ||||||
병력 | |||||||
불명 | 불명 | ||||||
피해 규모 | |||||||
불명 | 불명 |
제1차 왕자의 난은 1398년 왕위 계승권을 에워싸고 일어난 왕자간의 싸움으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반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방원의 난으로도 불리며, 그밖에 무인정사(
원인
[편집]왕자의 난의 원인은 크게 세자 책봉 문제와 사병 혁파, 요동 정벌 준비 등에서 비롯했다. 더욱이 붙여서 말하자면, 태종 이방원의 관점과 정도전의 관점이 충돌해서 생긴 문제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세자 책봉 문제
[편집]태조에겐 조선을 개국하기 전에 맞이한 두 명의 정처(
하지만 한씨는 조선개국전 1391년에 이미 사망했으므로 태조는 고려조 왕비를 배출하는 최고 명문 가문이자 당대 제일 권문세가의 딸이었던 강씨의 집안 배경 및 강씨의 두터운 인맥과 지모의 도움으로 개국왕(
한씨가 추존 왕비가 된 것은 그로 1년 후의 일로, 비록 한씨가 먼저 태조에게 출가하긴 하였으나 서열상 한씨는 차비(
절비 한씨 소생으로 1남 방우, 2남 방과(정종), 3남 방의, 4남 방간, 5남 방원(태종), 6남 방연이 있었는데, 특히 5남 이방원은 부왕(
군권 분장 정책과 요동 정벌 준비
[편집]태조는 개국 초부터 공신과 종친들을 절제사로 임명하여 군권을 분할했고, 재위 기간 동안 이를 회수하고자 하였다.[2]
뒤이어 태조의 지원 아래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사병(
경과
[편집]한양 신도(
그 뒤 남은의 집을 습격해 정도전과 남은을 살해했다. 같은 시각에 박위, 유만수, 장지화, 이근, 심효생을 살해하였고(10월 6일, 음력 8월 26일)[3] 변란의 책임을 세자와 정도전 일파에게 전가했다. 또한, 세자 이방석은 폐위하여 귀양 보내는 도중 살해하고, 이방석의 동복 형 이방번도 함께 죽여 버렸다. 이 변란으로 세자 이방석이 폐위되니, 다음 세자로 이방원을 만들게 된 것은 정세의 당연한 귀추였다.
결과
[편집]이방원은 장자승계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 난을 일으킨 것으로 쿠데타를 정당화하며 세자 자리를 굳이 사양하고 둘째 형인 이방과에게 넘겨주었는데, 이는 큰형인 진안대군이 이미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에는 야심이 없고 정치적 기반이 약한 형 이방과에게 차기 제왕의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아비를 치고 아우들을 살해한 주동자로써의 책임을 떠맡김과 동시에 훗날을 기약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태조는 왕세자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번, 그리고 사위 흥안군 이제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한달 뒤인 9월에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곧 정종이다. 이로부터 태조는 상왕(
정종 2년(1400년)에는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의의
[편집]제1차 왕자의 난은 정치적으로 보면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당대 실력자였던 정도전의 일파를 왕권에 야심이 있던 왕의 오남(
참고 문헌
[편집]- 춘추관 관원들 (1413). 《태조실록》.
각주
[편집]- ↑ 태조실록 1년(1392 임신 / 명 홍무(
洪 武 ) 25년) 8월 7일(병진) 1번째기사 - ↑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703020_002
- ↑ 태조실록 (1413)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1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