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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젠몬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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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젠몬의 난(일본어: ひら禅門ぜんもんらん, へいぜんもんのらん[1])은 일본 가마쿠라 시대(鎌倉かまくら時代じだい) 후기인 조오(せいおう) 6년 4월 22일(1293년 5월 29일)에 가마쿠라(鎌倉かまくら)에서 일어난 정변이다. 가마쿠라 막부(鎌倉かまくら幕府ばくふ)를 지배하던 호조씨 도쿠소케(北条ほうじょうとく宗家そうけ)의 나이간레이(うち管領かんりょう)로써 절대적 권세를 떨치고 있던 다이라노 요리쓰나(平頼綱たいらのよりつな)가 주군인 9대 싯켄(執権しっけん) 호조 사다토키(北条ほうじょう貞時さだとき)에게 멸망당한 사건이기도 하다.

개요[편집]

호조 도쿠소케(とく宗家そうけ)의 집사(執事しつじ)였던 다이라노 요리쓰나는 8대 싯켄 호조 도키무네(北条ほうじょう時宗じしゅう)가 사망하고 그 아들 사다토키(貞時さだとき)가 9대 싯켄이 된 이듬해 고안(弘安ひろやす) 8년(1285년)에 정치 노선으로 대립하고 있던 유력 고케닌(御家人ごけにん) 아다치 야스모리(安達あだち泰盛やすもり)나 야스모리파 고케닌들을 시모쓰키 소동(霜月しもつき騒動そうどう)으로 토벌하였다. 그 뒤 한동안 요리쓰나는 추가법(追加ついかほう)을 빈번하게 내는 등 절차를 중시하는 정치 경영을 행하였으나, 고안 10년(1287년)에 7대 쇼군(将軍しょうぐん) 미나모토노 고레야스(みなもとおもんみやすし)가 친왕이 되어 고레야스 친왕이 된 시기에 정치 자세를 일변해 공포정치에 매진하였다.

사다토키는 자신의 유모부(乳母うばちち)이기도 했던 요리쓰나의 지지를 얻어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도쿠소 전제 체제를 구축하였으나, 요리쓰나의 권세에 불안을 품고 있기도 했다. 조오(せいおう) 6년(1293년) 가마쿠라 대지진의 혼란을 틈타 사다토키는 가마쿠라(鎌倉かまくら)의 교지가타니(けいだに)에 있던 요리쓰나의 저택을 습격할 것을 명했고, 요리쓰나는 자결, 그 아들인 이이누마 스케무네(飯沼いいぬまむね)도 잡혀 죽고, 화마 속에서 요리쓰나의 일족 93명은 모두 죽었다. 혼란 속에서도 사다토키의 딸 두 명도 사망하였다. 시모쓰키 소동의 영향이 일본 전체에 걸쳐 거대했던 것에 비하면, 헤이젠몬의 난은 별다른 반향 없이 끝났다.

에도 시대의 『보력간기』(れきあいだ)에 따르면, 요리쓰나의 적남(嫡男ちゃくなん)으로 아버지와 불화하고 있던 다이라노 무네쓰나(ひらそうつな)가 「요리쓰나가 둘째 아들 스케무네(むね)를 쇼군으로 세우려 하고 있다」고 사다토키에게 참소하였다고 한다. 전조였는지는 모르지만 요리쓰나는 앞서 야스모리 조복(調伏ちょうぶく) 기도를 의뢰했던 산문(山門さんもん)의 호지승(護持ごじそう)에게 「세상이 두려워 떨고 있다」(世上せじょうこわかしこ)며 자신의 신변 안전을 기원하게 하였다고 한다.

『신겐 승정 일기』(おやげん僧正そうじょう日記にっき)에 따르면 에이닌(えいひとし) 2년 4월 21일[2], 사다토키가 막부의 호지승이자 구가 미치타다(久我くがとおるただし)의 아들이기도 했던 신겐(おやげん)에게 「추선(追善ついぜん) 목적이 아니다」라고 딱 잘라 말하면서도 요리쓰나 일문을 위한 기원을 올렸다고 한다.[3]

이 정변과 그 전에 일어났던 가마쿠라 대지진을 계기로 연호는 조오에서 에이닌으로 바뀌었다.

이후 요리쓰나 일족 등 미우치비토(御内おんうちじん)의 세력은 잠시 후퇴하였고 사다토키의 전제정치가 시작되었다. 가나자와 아키토키(金沢かなざわあらわ)나 아다치 씨 등 과거 시모쓰키 소동으로 몰락했던 세력들도 차츰 막부의 중추로 복귀하는 한편으로 야노 도모카게(矢野やのりんけい) 등 사다토키와 가까웠던 법조 관료들이 중용되었다. 또한 요리쓰나 일족으로써 요리쓰나의 동생(또는 종형제)으로 알려진 나가사키 미쓰쓰나(長崎ながさきこうつな)도 불려가 사다토키에게 중용되었다.

무로마치 시대(室町むろまち時代じだい)의 선승(禅僧ぜんそう) 기도 슈신(どうしゅうしん)은 가마쿠라에서 호조 씨의 영지였던 아타미(熱海あたみ)의 온천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현지 승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일기에 기록하였다. 「옛날, 헤이 사에몬 요리쓰나(平左衛門へいざえもん頼綱よりつな)가 셀 수도 없을 정도의 학살을 행하였다. 이곳에 그의 저택이 있어, 그가 살해되던 날 건물이 땅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사람들은 모두, 산채로 지옥에 떨어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헤이 사에몬 지옥(平左衛門へいざえもん地獄じごく)이라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다이라노 요리쓰나 사후 80년 뒤에까지 전해지고 있을 정도로, 그의 공포정치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각주[편집]

  1. 오늘날의 일본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 ・ 자료집에는 다이라노 요리쓰나의 난(平頼綱たいらのよりつならん)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2. 이듬해 22일이 헤이젠몬의 난 1주기였다.
  3. 高橋たかはしまき一朗いちろう「『おやげん僧正そうじょう日記にっき』とそう被官ひかん」(初出しょしゅつ:五味ごみ文彦ふみひこ へん日記にっき中世ちゅうせいむ』(吉川弘文館よしかわこうぶんかん、1998ねん)/所収しょしゅう:高橋たかはし日本にっぽん中世ちゅうせい権力けんりょく寺院じいん』(吉川弘文館よしかわこうぶんかん、2016ねんISBN 978-4-642-029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