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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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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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민족이었던 선비족이 받아들이고 선비족 출신 왕조인 수나라, 당나라에서 관복 시스템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여 동아시아 각국으로 퍼지게 되었다.
'단령'이란 말은 원래 '목 부분 둥근 깃'을 뜻했지만 점차 단령포, 즉 '둥근 깃 외투'를 단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후기부터 단령을 도입한 뒤 신라, 발해, 고려, 조선 내내 관복으로 입었다. 특히 조선시대 관리들이 집무를 볼 때 시복(평상복)으로 입었으며 옷의 색깔, 가슴과 등에 달린 흉배, 허리에 매는 띠로 품계를 구별하였다. 성균관의 유생들도 청금복 이후 영정조 때부터 교복으로 입기 시작했다. 현대에는 전통 혼례에서 신랑이 입는 옷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본이나 베트남 등지에서도 귀족들과 관료들의 복식으로 애용했고 북방 유목민족들도 입었다고 하니 동아시아에서는 국제적인 의상이었다.
고대~전근대 동아시아 정장이라고 볼 수 있다는 시각도 있지만, 단령은 주로 관복과 공복 용도로 입었기 때문에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비유가 아니다. 정장은 반드시 관료가 정무를 볼 때만 입는 옷이 아니고, 동아시아의 관복 개념과 정확히 대응하는 서양식 개념은 없다.[1]
옷깃 단추를 풀어 입기도 했는데 아래 번령(飜領) 문단 참고.
'단령'이란 말은 원래 '목 부분 둥근 깃'을 뜻했지만 점차 단령포, 즉 '둥근 깃 외투'를 단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후기부터 단령을 도입한 뒤 신라, 발해, 고려, 조선 내내 관복으로 입었다. 특히 조선시대 관리들이 집무를 볼 때 시복(평상복)으로 입었으며 옷의 색깔, 가슴과 등에 달린 흉배, 허리에 매는 띠로 품계를 구별하였다. 성균관의 유생들도 청금복 이후 영정조 때부터 교복으로 입기 시작했다. 현대에는 전통 혼례에서 신랑이 입는 옷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본이나 베트남 등지에서도 귀족들과 관료들의 복식으로 애용했고 북방 유목민족들도 입었다고 하니 동아시아에서는 국제적인 의상이었다.
고대~전근대 동아시아 정장이라고 볼 수 있다는 시각도 있지만, 단령은 주로 관복과 공복 용도로 입었기 때문에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비유가 아니다. 정장은 반드시 관료가 정무를 볼 때만 입는 옷이 아니고, 동아시아의 관복 개념과 정확히 대응하는 서양식 개념은 없다.[1]
옷깃 단추를 풀어 입기도 했는데 아래 번령(飜領) 문단 참고.
단령을 중원의 한족 왕조들이 고안한 순수 한푸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단령의 기원은 서역[2] 및 북방민족이 입던 의복인 호복에서 비롯한 옷으로, 중원에서는 위진남북조시대 때 처음 등장한다.
이후 선술했듯이 튀르크 계열 또는 동호 계열의 북방 이민족인 선비족 출신의 호한 혼혈인 무천진의 관롱집단이 세운 국가인 수나라와 당나라가 단령을 관복으로 채택하여 동아시아 각국으로 퍼진 것이다.
중국의 손기(孫 機 )는 『中國 古 輿 服 論叢 』 「南北 朝 時期 我國 服 制 的 變化 」에서 단령포를 '남북조시대에 서역의 호복과 선비족의 복식이 융합하여 탄생한 산물'이라고 이야기했다. 중앙아시아의 합임포인 칸디스(kandys)에서 단령의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기원전 4세기 알타이 지방 유적에서 단령으로 진화하는 중간 단계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 선비족은 원래 직령 형태의 포를 입었으나 4세기 들어 서역의 영향으로 단령을 입게 되었고 그것이 수나라와 당나라의 관복이 된 것이다. 다만 본래 북방민족들이 즐겨 입던 평상복이었기에 북방민족들의 혈통이 짙게 섞여 있던 수나라와 당나라의 한정으로 관복뿐만 아니라 일상복의 한 종류로 즐겨 입었다.
그렇게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쳐 4~5세기경 고대 한국으로 전해졌다. 신라는 법흥왕 때 관등의 높이에 따라 자색, 비색, 청색, 황색 순으로 공복을 규정했다가 진덕여왕 2년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단령을 들여온 것이 처음이며, 고려 때에도 신라의 관복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다가 왕권 강화에 큰 힘을 쏟은 광종 11년 3월에(960년) 고려식 4색 공복 제도를 시행하였다. 고려시대의 4색은 자색, 단색, 비색, 녹색이었다. 원 간섭기 시기에는 원나라식 관복인 질손을 입었고 이후 고려 우왕 13년(1387)에 설장수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홍무제로부터 사모와 함께 다시 들여왔고, 정몽주 등의 주장으로 관복화 되었다.
우용곡 작가가 그린 조선 관복 변천사 참조.
조선시대의 단령은 처음에는 잡색단령을 착용했다가 세종 28년부터는 아청색빛의 흑단령으로 통일되었다. 이후 상복의 띠 만으로는 상하 구별이 잘되지 않는다고 하여 조선 단종 2년(1454년) 때부터 가슴과 등에 흉배가 달리고[3] 소매가 점차 늘어졌고 품 또한 넓어졌다. 인조 이후의 조선후기로 들어서는 쑥색빛 현록색의 흑단령이 상복이 되었고 이는 고종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1900년에 관복이 양복으로 바뀌면서 단령은 사라지게 되었다.
백관 상복의 흉배는 사각형으로, 1897년(고종 34년) 기록을 보면 왕족은 기린(麒麟 ), 문관 당상관(정3품 이상)은 쌍학, 당하관은 단학, 무관 당상관은 쌍호, 당하관은 단호이며, 이를 보여주는 실물도 상당수 남아 있다. 초기 흉배의 크기는 상복의 가슴을 모두 덮을 정도로 컸지만, 말기에는 작아졌다.
왕실과 사대부 여성들도 임진왜란 전까지는 단삼이라는 이름으로 단령을 입었는데, 사대부 여성들이 대례복으로 입을 시에는 단삼에도 남편의 품계와 같은 흉배를 수놓거나 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외형적으로도 서로 차이점이 별로 없어 단삼을 남자의 관복으로 고쳐입었다는 기록도 전한다. 이후 단삼은 원삼이라는 이름으로 리폼, 변형되었는데 원삼 역시 초기에는 이전의 단삼 및 단령과 같이 옆으로 여며입는 형태였다.
조선 시대 영조, 정조 시대 때에는 정삼품 이상 당상관들만이 분홍색(담홍색 시복) 단령을 입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 분홍색 단령을 착용한 것이 초상화를 통해서도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21세기 분홍색이 여자의 전유물로 쓰이는 것을 감안하면 확연하게 격세지감이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단령은 구조적인 면에서도 한복의 영향을 받아 로컬라이징이 되어 다른 나라들의 단령과 일부 차이를 보이는데, 초기에는 당나라에서 들여온 형태 그대로 매듭으로 된 맺은단추로만 옷깃을 고정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맺은단추는 깃 쪽에서만 남고 다른 부분은 한복식 옷고름으로 여미게 되며 도포처럼 넓은 소매가 생기는 등 기존 한복의 구조를 띄게 변형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예복의 역할을 하는 상복이 흑색으로 고정된 이후 아청색(검정+파랑)에서 현록색(검정+초록)으로 단령의 색이 바뀐다. 사극에서는 관리의 높낮이에 따라 높은 관리가 홍색 단령을, 낮은 관리는 청색 단령을 입는 것처럼 나오는데 품계에 따라 색이 달랐던 것은 흉배가 없는 시복이었고, 흉배가 있는 상복은 임진왜란 후 시대에서는 산계가 어떻든 모두 상복으로 흑단령을 착용했으므로 이는 오류에 해당한다.
한편 단령은 혼례식에서 신랑 예복으로도 사용했는데, 이는 벼슬있는 자의 관복을 착용함으로써 결혼예식을 일생을 통한 최고의 경사스러운 의식으로 여겼음을 나타낸다. 혼례복으로 단령을 착용할 시 자색이나 남색의 관복을 입고 각띠를 띠고 흉배를 달았는데 신랑예복의 흉배는 당상관과 같은 쌍학을 달았다.
청나라 때는 조선 사람들이 사신으로 오거나 중국 유학자들이 조선에 갔을 때 조선 사람들의 옷과 상투를 보고 '이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명나라의 옷이다!'라면서 통곡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의 단령은 이미 로컬라이징 되었기 때문에 상당부분 착각이며 상투도 중국과는 엄밀히 세세한 면에서 차이가 크다.) 반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청나라에 가서 변발, 치파오 오랑캐들이 가득한 것을 보고 통곡했다고 한다. 청나라가 한족들에게 자기네 유목민 풍속이었던 변발과 치파오를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선술했듯이 튀르크 계열 또는 동호 계열의 북방 이민족인 선비족 출신의 호한 혼혈인 무천진의 관롱집단이 세운 국가인 수나라와 당나라가 단령을 관복으로 채택하여 동아시아 각국으로 퍼진 것이다.
중국의 손기(
그렇게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쳐 4~5세기경 고대 한국으로 전해졌다. 신라는 법흥왕 때 관등의 높이에 따라 자색, 비색, 청색, 황색 순으로 공복을 규정했다가 진덕여왕 2년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단령을 들여온 것이 처음이며, 고려 때에도 신라의 관복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다가 왕권 강화에 큰 힘을 쏟은 광종 11년 3월에(960년) 고려식 4색 공복 제도를 시행하였다. 고려시대의 4색은 자색, 단색, 비색, 녹색이었다. 원 간섭기 시기에는 원나라식 관복인 질손을 입었고 이후 고려 우왕 13년(1387)에 설장수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홍무제로부터 사모와 함께 다시 들여왔고, 정몽주 등의 주장으로 관복화 되었다.
우용곡 작가가 그린 조선 관복 변천사 참조.
조선시대의 단령은 처음에는 잡색단령을 착용했다가 세종 28년부터는 아청색빛의 흑단령으로 통일되었다. 이후 상복의 띠 만으로는 상하 구별이 잘되지 않는다고 하여 조선 단종 2년(1454년) 때부터 가슴과 등에 흉배가 달리고[3] 소매가 점차 늘어졌고 품 또한 넓어졌다. 인조 이후의 조선후기로 들어서는 쑥색빛 현록색의 흑단령이 상복이 되었고 이는 고종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1900년에 관복이 양복으로 바뀌면서 단령은 사라지게 되었다.
백관 상복의 흉배는 사각형으로, 1897년(고종 34년) 기록을 보면 왕족은 기린(
왕실과 사대부 여성들도 임진왜란 전까지는 단삼이라는 이름으로 단령을 입었는데, 사대부 여성들이 대례복으로 입을 시에는 단삼에도 남편의 품계와 같은 흉배를 수놓거나 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외형적으로도 서로 차이점이 별로 없어 단삼을 남자의 관복으로 고쳐입었다는 기록도 전한다. 이후 단삼은 원삼이라는 이름으로 리폼, 변형되었는데 원삼 역시 초기에는 이전의 단삼 및 단령과 같이 옆으로 여며입는 형태였다.
조선 시대 영조, 정조 시대 때에는 정삼품 이상 당상관들만이 분홍색(담홍색 시복) 단령을 입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 분홍색 단령을 착용한 것이 초상화를 통해서도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21세기 분홍색이 여자의 전유물로 쓰이는 것을 감안하면 확연하게 격세지감이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단령은 구조적인 면에서도 한복의 영향을 받아 로컬라이징이 되어 다른 나라들의 단령과 일부 차이를 보이는데, 초기에는 당나라에서 들여온 형태 그대로 매듭으로 된 맺은단추로만 옷깃을 고정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맺은단추는 깃 쪽에서만 남고 다른 부분은 한복식 옷고름으로 여미게 되며 도포처럼 넓은 소매가 생기는 등 기존 한복의 구조를 띄게 변형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예복의 역할을 하는 상복이 흑색으로 고정된 이후 아청색(검정+파랑)에서 현록색(검정+초록)으로 단령의 색이 바뀐다. 사극에서는 관리의 높낮이에 따라 높은 관리가 홍색 단령을, 낮은 관리는 청색 단령을 입는 것처럼 나오는데 품계에 따라 색이 달랐던 것은 흉배가 없는 시복이었고, 흉배가 있는 상복은 임진왜란 후 시대에서는 산계가 어떻든 모두 상복으로 흑단령을 착용했으므로 이는 오류에 해당한다.
한편 단령은 혼례식에서 신랑 예복으로도 사용했는데, 이는 벼슬있는 자의 관복을 착용함으로써 결혼예식을 일생을 통한 최고의 경사스러운 의식으로 여겼음을 나타낸다. 혼례복으로 단령을 착용할 시 자색이나 남색의 관복을 입고 각띠를 띠고 흉배를 달았는데 신랑예복의 흉배는 당상관과 같은 쌍학을 달았다.
청나라 때는 조선 사람들이 사신으로 오거나 중국 유학자들이 조선에 갔을 때 조선 사람들의 옷과 상투를 보고 '이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명나라의 옷이다!'라면서 통곡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의 단령은 이미 로컬라이징 되었기 때문에 상당부분 착각이며 상투도 중국과는 엄밀히 세세한 면에서 차이가 크다.) 반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청나라에 가서 변발, 치파오 오랑캐들이 가득한 것을 보고 통곡했다고 한다. 청나라가 한족들에게 자기네 유목민 풍속이었던 변발과 치파오를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16세기 말~17세기 초 류큐 국왕 쇼네이 왕의 어진
류큐 쇼쿄(
명종실록 3권, 명종 1년 2월 1일 무자 첫 번째 기록에서 언급한 류큐 왕국의 풍속에 대한 기록을 보면 궁에서는 명나라의 제도를 따라 사모와 단령 일습을 갖추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명나라를 통해 단령을 들여와 입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에도로 가는 사신단인 에도노보리(
[1] 굳이 따지자면 서양에서 19세기~2차대전기까지 존재했던 궁정복(Court Dress)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대한제국이나 일본 제국에서도 궁중에서 Court Dress를 입었다. 현재는 거의 일부 유럽 국가들의 외교 복장(Diplomatic uniform) 형태로만 남아있다.[2] 후한에서 진나라(晉 ) 시기 사막지대의 바람을 피하기 위한 피풍의 곡령(曲 領 ).[3] 처음에는 당상관만 흉배를 달았다. 삼정승과 좌우 찬성은 공작, 좌우 참찬과 이조, 호조, 예조, 형조의 판서, 한성판윤, 대제학, 제학, 이조, 호조, 예조, 형조의 참판, 한성 좌우윤, 관찰사 등은 운안, 육방승지, 이조, 호조, 예조, 형조의 참의, 대사간, 부제학, 대사성, 목사, 대도호부사 등은 백한을, 병조, 공조의 판서, 도총관, 병조, 공조의 참판, 부총관, 병마절도사 등은 호표를, 수군절도사, 오위장, 병조, 공조의 참의, 병조참지, 병마절제사 등은 웅비를 달았다. 도통사는 해치 흉배를 달았다. 연산군 때는 모두 흉배를 달았으며, 이 때 기러기, 돼지, 사슴, 거위 등의 흉배를 달았다. 그 뒤 명종과 선조 시기에 흉배가 약간 변형되었으며, 광해군 때는 도통사의 흉배인 사자와 대사헌의 흉배인 해치가 없어지고, 도통사는 호표 흉배로, 대사헌과 대사간은 운안 흉배로 통일했다. 인조 이후에는 문관 당상관은 운안, 무관 당상관은 호표, 그 외에는 백한, 웅비를 다는 것으로 통일되었다. 영조 이후에는 문관 당상관은 운학, 무관 당상관은 호표, 그 외에는 백한, 웅비를 달았으며, 색깔도 흑갈색과 흑남색으로 바뀌었다. 고종 때는 서양화의 영향으로 쌍학, 단학, 쌍호, 단호로 통일되었다가 1900년에 군신의 복식을 서양화하면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 뒤로도 한동안은 혼용되었다.[4] 참고로 이 사진 속 신부가 쓴 봉관(鳳 冠 )은 청나라 때 양식으로, 정확히는 경극과 같은 연극에서 쓰는 의상소품을 그대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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