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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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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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한복의 형태는 상유하고(上 襦下袴 )이다.
- 저고리 - 한자로 유(襦)라고 한다. 엉덩이를 덮는 길이부터 무릎 아래로 긴 것까지 다양했으나 조선 시대가 되면서 선이 동정이 되고, 허리띠가 고름으로 옮겨갔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길이가 짧아졌다. 좌임, 우임, 합임 모두 상관 없이 그저 자기 편한대로 여미면 그만이었다. 여자는 속옷을 많이 껴입는 반면 남자는 겉옷을 많이 껴입었기 때문에 남자 저고리는 속옷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원래 속적삼-속저고리-저고리가 기본 세트로 셋을 묶어 '저고리 한 작'이라고 한다. 이 속적삼과 속저고리, 저고리를 항상 같이 입었기 때문, 특히 법도가 엄격한 사대부가나 궁중에서는 삼복 더위라 할지라도 모든 저고리를 갖추어 입었으며, 당의나 다른 겉옷을 입을 때에는 한 작을 완벽히 갖춰입은 위에 입었다. 현대에는 삼작저고리라고 잘못 부르는 경우가 많다.
- 덧저고리 - 저고리 위에 겹쳐 입는 저고리.
- 치마 - 한자로 상(
裳 )과 군(裙)으로 구분한다. 상은 풍성하고 길이가 길어 화려하였으며, 군은 상에 비해 풍성하지 않고 땅에 끌릴 정도로 길지 않아 일상용에 적합하여 서민들이 많이 입었다. 치마허리 부분을 말기라 하며, 원래는 허리에 둘러서 입는게 정석이다. 주름이 자잘하든 큼지막하든 그것 역시 상관 없다. 고대 한복을 보면 전체적으로 주름이 잡힌 치마도 있다. 전통 방식 재단은 직사각형으로 자른 원단을 이어 만들기 때문에 H라인으로 나온다. A라인을 만들려면 주름 잡는 양과 형태를 잘 계산해서 A라인으로 만들던가, 사다리꼴로 재단해야 한다. 사다리꼴로 재단하는 방식이 흔하다. 현대의 조끼허리나 어깨허리로 인해 치마가 가슴 위로 올라오며 20세기 이후의 한복 치마는 포대자루가 따로 없게 되었으나[1], 전통식 띠허리는 가슴가리개를 착용하고 허리에서 두르기 때문에 허리선이 강조된다.- 접음단치마 - 밑단을 일정량 접어올려 이중단으로 만든 치마.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유물
- 치마
치마가 트여있으므로 뒷 자락을 앞으로 가지고 와서 띠로 묶기도 한다.
- 바지 - 한자로 고(
袴 )라고 한다. 폭이 넓은 관고와 좁은 세고를 비롯해 여러 종류가 있었다. 대님이 필수 요소는 아니었다. 오늘날 한복 바지 하면 떠오르는 패턴은 조선 중기 때 만들어진 것으로 16세기 이전의 바지하고는 세부적인 모양이 다르다. 임진왜란 전에는 전통적인 여자 속바지류와 비슷한 형태에 종류도 다양했으나, 옷감이 너무 많이 소비되며[2] 바지통이 너무 넓다는 이유로 지금의 사폭바지로 변했다. 즉, 16세기 이전을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에 현대에 흔히 아는 남자 한복 바지(사폭바지)가 나오는 것은 고증 오류이며 전통 여자 속바지류와 유사해야 한다.
- 행전 -넓은 바짓자락을 묶는 것. 무릎 정도에서 발목까지 오거나 그보다 짧은 길이이다.
- 완대 -활을 쏠 때 거추장스러운 도포자락을 고정시키는 장구. 우리말로는 팔찌라고 하나, 현대에는 장신구인 그 팔찌와 혼동될 가능성이 높다. '활팔찌'라고도 했다. 사극에서 넓은 소맷부리를 모아 묶는 그것. 습(
拾 )과 구(構)로 나뉘는데, 습(拾 )은 부드러운 가죽이나 천으로 만들어 고급스러운 그림을 그리거나 수를 놓았고, 고리 부분은 상아나 대모같은 고급스러운 재료를 사용하여 줄을 엇십자로 잡아매어 거추장스럽거나 활을 쏠 때 시위가 줌손의 팔목을 치지 않게 했다. 구(構)는 가죽이나 천 혹은 광다회처럼 만드는데, 폭과 길이는 팔목에 세 번 정도 두를 수 있어야 하며 끼우는 부분은 대모 등의 단단한 재질로 만들었다. 사극에 나오는 것은 습을 변형시킨 것이라 보면 된다. 구 형태의 완대 습 형태의 완대
- 버선 - 발에 시는 의류로 족의(
足 衣 )라고도 하며 한자어로는 말(襪)이라고 한다. 현대의 양말과 같은 기능으로 한자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양말(洋 襪)' 자체가 '서양의 버선'이란 의미이다. 발을 따뜻하게 하고 모양을 맵시 있게 하기 위해서 천으로 만들어 신는 물건이다. 한국 특유의 것이며 남녀 모두 신었다고 한다.
- 야장의(
夜長 衣 ) - 궁중에서 잠옷을 일컫는 말. 이름대로 밤에 입는 긴 옷이다.
- 등거리 적삼: 서민층에서 입은 소매가 짧은 상의. 소매가 짧고 진동밑 옆선을 터 활동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솜을 두어 방한복으로 입기도 했으며, 적삼 밑에 받쳐입기도 했다. 농민들은 노동복으로 많이 입었다.
- 등거리: 등나무의 가는 가지를 엮어 조끼 형태로 만들어 성글게 엮어 조끼형으로 만든 것. 상류층에서 여름에 적삼 밑에 받쳐입었다.
- 잠방이: 가랑이가 무릎까지 내려오게 만든 짧은 홑고의. 고려시대의 기록에도 나타나며, 여름에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많이 입었다. 속고의 밑에 받쳐입거나 농민들의 노동복이었다.
- 목도리: 정확히는 목도리보다는 거의 숄에 가까운 물건으로, 한자어로 표(裱)라고 한다. 도입될 당시(통일신라)에는 방한보다는 멋내기용에 가까웠다.
- 포
袍 계열: 고대 한복은 겉에 걸치는 소매가 있는 겉옷을 모조리 포袍 라고 한다. - 창의: 도포와 두루마기의 중간적 성격을 띈다. 뒷중심선 혹은 겨드랑이가 트여있다.
- 중치막: 명나라 중단이 유입되어 변형된 옷으로, 조복이나 겉옷에 받쳐 입었다. 많은 유물이 남아있다. 소매가 넓고 양 겨드랑이가 길게 트여있으나, 무는 없다. 소창의보다 컸다. 소매가 넓다는 점은 대창의와 비슷하지만 뒷중심선이 트여있지 않고 무가 없으며, 양 겨드랑이만 트여있어 옷이 세 자락이라는 점은 소창의와 같지만 소매가 넓고 옷이 더 컸다.
- 동달이:
- 반수포: 이중깃에 겨드랑이선이 트여있는 포. 해인사 소장 반수포
- 백저포:
허리띠 - 한자로 대帶 . 대구帶 鉤 (띠고리, 교구. 일종의 버클)가 달린 것도 있었다. 교구는 버클과 마찬가지로 허리띠를 잇는 역할을 하는데, 종류에 따라 화려한 교구와 밋밋한 교구가 같이 있는 허리띠도 있다. 이 경우는 화려한 교구를 앞에 둔다. 신분에 따라 옷감과 색이 정해지기도 하였으며, 폭이 넓거나 금속으로 만들고 화려한 장식을 드리운 장식성 허리띠가 있는가 하면 폭이 좁아 가느다란 허리띠도 있었고, 실을 엮어서 만든 사대絲 帶 (실띠)도 있었다. 고분벽화를 보면 묶는 위치가 앞이든 옆이든 뒤든, 어떻게 묶든 그런 건 상관 없었다. 당연하지만 고름이 생기기 전에는 상의 속옷을 허리띠로 여몄다. 행여나 허리띠로 속옷을 여미는 것을 보고 왜색으로 치부하지는 말자. 조선시대 이전의 한복도 한복이다.
- 세조대 - 허리띠의 일종. 가느다란 끈에 술이 달려있다. 도포나 쾌자의 매력포인트.
- 광대 - 철릭이나 구군복 위에 착용한 폭 넓은 허리띠. 가느다란 고름이 달려있다.
- 대대 - 폭이 넓은 허리띠. 복식에 따라 묶는 법이 다른데, 쌍고름으로 묶기도 했다.[4] 궁중 예복이나 조복에 입는 대대도 있는데, 그건 허리띠에 천이 늘어져 있다.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유물(조복에 착용)
- 금제 허리띠 - 삼국시대에 상류층이 사용했던 금제 장식 허리띠.
해당 문서 참조
고려시대에는 관복제도가 제복, 조복, 공복으로 나뉘게 되었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더욱 세분화되어 제복, 조복, 공복, 상복, 시복, 융복 등으로 구별되었다.
- 제복(
祭服 ) - 종묘와 사직을 모시는 나라의 제사에 입는 복식 - 조복(
朝 服 ) - 나라의 대사(大 祀 )·경축일, 원단, 동지 및 조칙을 반포할 때나 진표할 때에 입었던 복식으로 '조근(朝 覲)의 복'이라고 하여 왕이나 신하가 천자에게 나아갈 때 입는 옷이라는 뜻에서 나왔다. - 공복(
公 服 ) - 관원이 조정에 나갈 때 입는 예복. - 상복(
常 服 ) - 왕이나 백관이 평상시 집무 중에 입던 옷. 1610년 이후에는 바로 아래의 시복으로 명칭이 바뀐다. - 시복(
時服 ) - 문무백관이 입시할 때나 공무를 볼 때 입던 옷. 위의 상복에서 명칭이 바뀐 것으로 1610년 5월 경부터 시복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관복과는 달리 흉배가 없다. 원래 다양한 색상의 시복이 있었으나 흑색과 홍색을 거쳐 담홍색으로 통일되었다.[5] - 융복(
戎 服 ) - 임금이나 관료 행차할 때 입던 외근복의 일종으로 기본적의 철릭+전립으로 구성되어져 있어 무관들이 근무할 때 입기도 하는 군복이었다. - 대례복(
大 禮服 ) - 국가제례, 왕실의 연회와 가례, 즉 성혼이나 책봉, 즉위 및 혼례와도 같은 큰 행사때 입었던 옷으로, 소례복보다 더 격식을 갖춰 입었다.
관복은 색깔별로 서열이 정해졌는데 노란색>빨간색/파란색>검은색>녹색>흰색 순서였다. 단, 노란색은 조선 초기 ~ 후기까지는 조선 사람은 입을 수 없었으며 명나라 또는 청나라의 천자만 입는 색깔이었다. 하지만 조선 말기 대한 제국 선포 이후에는 고종 부터 순종 때 까지 노란 옷을 입었다.
색 | 조정 | 군대 |
노란색 | 고종 이후 임금 | |
빨간색 | 임금[6], 임진왜란 이전 당상관 집무복 | 당상관 장군 |
파란색 | 성종 초 ~ 임진왜란 이전 당상/하관 대신 | 당하관 장군 |
검은색 | 임진왜란 이후 당상/하관 대신 | |
녹색 | 내시[7], 임진왜란 이후 당하관 집무복 | 포교 등 오늘날의 부사관급 군인 |
흰색 | 포졸, 병졸 |
- 곤복 - 임금이 있었던 최고의 대례복으로 면류관(冕旒
冠 )과 한 세트로 면복(冕服)이라고도 했다. - 강사포(絳紗
袍 ) - 임금의 붉은색 조복으로 원류관(황제는 통천관)함께 착용했다. - 조복 - 주로 왕실의 생일이나 새 임금의 즉위 등 경축일 외에도 정월 초하루와 동지 그리고 조칙 등을 반포할 때 입던 행사용 관복. 조선시대 관련 사극에서 가끔 보이기도. 금관이라는 모자와 세트로 착용하기 때문에 "금관조복"이라는 관용구로 흔히 불린다. 단, 금관조복은 신하들만 쓰며 임금은 금관이 아니라 면류관을 착용했으며 조복이 아니라 곤복을 입었다. 삼국지같은 중국 창작물을 보면 문관들이 이와 비슷한 디자인의 관복을 입고 있다.
왕이 입는 곤복과 강사포, 관료가 입는 제복과 조복은 옷의 구조에서는 비슷했지만 언제, 누가 입느냐에 따라 예장의 색상과 관모의 종류, 의복의 수와 문양이나 장신구의 형식 등에 세세히 구별이되었다.
- 난삼(幱衫)
- 앵삼: 과거시험에서 생원시나 진사시에 급제했을 때에 입었던 초록색 예복. 석주선기념박물관 유물
- 원삼 - 병자호란 이후에 단삼이 리폼/변형되어 대체된 내외명부 여성들의 예복. 초반에는 단삼, 단령과 같이 깃이 둥글고 옆으로 여며입는 형태였다가 깃 모양이 마주보는 대금형으로 변하고, 색동과 한삼, 동정을 달았다. 왕비, 세자빈, 세손빈은 소례복으로, 부부인(대군의 부인) 이하 외명부와 궁녀 및 관료들의 처 등 후궁을 포함한 왕족 이하 신분은 대례복으로 입었는데, 평민층은 일생에 한 번 혼례 때 입을 수 있었다.[10] 황후의 황원삼, 왕비와 황태자비의 홍원삼, 공주와 옹주, 세자빈, 세손빈, 궁녀, 반가 부녀자의 녹원삼, 비빈(후궁)[11]의 자적원삼출처이 있다. 궁중 왕녀의 녹원삼과 그 이하 신분의 녹원삼은 당연히 차이가 있었다. 상궁의 녹원삼 사극에서 자적원삼이 연보라색이나 일반 보라색으로 많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이런 색이다. 대한제국 이후에는 호칭과 함께 예복도 격상하여 황태자비가 홍원삼을 입게 되고, 그 위에 오조룡보를 부착하게 된다.
- 당의 - 평복을 모두 착장한 위에 입었다. 소례복이자 궁중의 일상복. 일상복으로 입었던 기존의 장저고리를 임진왜란 이후에 광해군 때 예복으로 리폼한것이 이것으로, 단삼을 대체했다. 시대에 따라 형태가 다르며, 홑으로 지어 입기도 했다. 폐비 유씨(광해군비) 당의 해평윤씨묘 출토 당의 해평윤씨묘 출토 당의 청연군주(사도세자 딸) 아동 당의 1800년대 나인 당의(덕온공주 혼례 때) 덕온공주 당의 덕온공주 홑당의 철종 국상 때 왕실 당의 깎은당한삼
- 국의 - 조선 초기 왕비가 친잠례를 행할 때 입었던 옷으로 폐비 윤씨부터 입기 시작한 예복이다. 뽕나무의 색을 본떠 황색계열의 색인 상색을 사용했으며 그 외의 내외명부 일원들은 아청색의 국의를 입고 흉배를 달았다. 이때 왕비의 흉배는 한 쌍의 봉황을 새겼다. 광해군 대에는 왕비의 국의만 유청색으로 바꿨으나 다시 영조 대에 들어서서는 성종 때의 관례대로 행하였다가 이후엔 원삼이나 당의로 간소화되어 사라졌다.
- 폐슬 - 무릎가리개.
- 소의(염의) - 조선 초기 여성들의 예복으로 겉은 검은색이나 안감은 흰색이고 외곽선이 붉은 커다란 검은 띠인 조대를 리본으로 묶고 오방색을 꼬아 만든 조대와 매듭노리개를 단 옷이다. 아는 사람이 굉장히 드물지만 다소 이색적이면서도 검은색과 붉은색이 주는 우아함 때문에 소의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여성용 속옷.
[13]
남자는 속고의와 속적삼이 전부라[14] 여자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간소한데, 대신 겉옷을 많이 껴입으니 피장파장. 조선 전기에는 남자 역시 개당고, 합당고, 세가닥바지 등을 겹겹이 껴입은 위에 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껴입는 겉옷이 많기에 저고리와 바지도 사실상 속옷 취급을 받았다. 석고대죄를 할 때 저고리와 바지 차림인 게 괜한 것이 아니다.
[13]
남자는 속고의와 속적삼이 전부라[14] 여자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간소한데, 대신 겉옷을 많이 껴입으니 피장파장. 조선 전기에는 남자 역시 개당고, 합당고, 세가닥바지 등을 겹겹이 껴입은 위에 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껴입는 겉옷이 많기에 저고리와 바지도 사실상 속옷 취급을 받았다. 석고대죄를 할 때 저고리와 바지 차림인 게 괜한 것이 아니다.
- 가슴가리개 - 가슴부터 허리 부분을 가리는 여성 속옷. 한자로는 대자
帶 子 라고 한다. 기능은 초기의 브래지어와 유사하다 볼 수도 있다. 조선시대가 되면서 저고리가 짧아지자 탄생한 상의 속옷. 원래 치마를 비롯한 하의류는 허리에 입는데, 저고리가 짧아지자 이로 인한 노출을 방지하고 가슴선을 정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어 저고리가 극단적으로 짧아지면서 팔을 들면 아예 겨드랑이가 노출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생들이 여기에 자수를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수를 놓은 가슴가리개는 발견되는 유물이 없고, 이영희 디자이너의 자서전에 따르면 스승 석주선 복식학자가 세운 박물관에서 전시되어 있던 기녀 복식을 보고 허전함을 느껴 고안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가슴이 큰 여자를 영 좋지 않게 인식했기 때문에 [15]가슴가리개로 꽉꽉 조였다. 한복은 가슴이 작아야 입었을 때 더 멋나기 때문에 현대에도 가슴이 큰 여자들이 한복을 입을 때 가슴을 조이기 위해 입는 경우가 있다. 치마말기와 자주 혼동되는데, 치마말기는 치마를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치맛허리 부분을 말한다. 치마는 원래 허리에 둘렀다. 그러니 말기는 당연히 허리에 위치하며, 폭 역시 가슴가리개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좁다. 가슴가리개는 실제로 보면 가슴뿐 아니라 배허리까지 가릴 정도로 넓다.[16]출처 영친왕비의 가슴가리개 현대에는 가슴둘레를 감안하여 조이지 않게 만들거나, 두를 때 안조이게 입는 경우가 많다. 가슴가리개는 영친왕비 유물만 봐도 길이 110cm, 너비 30cm에 이를 정도로 길고 넓다. - 적삼 - 속적삼이라고도 한다. 매듭단추로 여민다. 남자와 여자 공통적으로 입는 상의 속옷이다. 모시 속적삼(여자)
- 속고의 - 남자의 하의 속옷.
- 선군(旋裙): 고려 시대의 속치마로, 치마폭을 넓게 하기 위해 착용했다. 길이가 다른 치마를 겹겹이 이은 것으로, 이것이 발전하여 무지기치마가 된다. 선군 위에 입는 겉치마는 8폭인데다 길이도 길어서 걸을 때 겨드랑이에 끼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의 상류층은 7~8필 가량의 옷감을 들여서 지어 입었다.
- 내의(內衣): 삼국시대의 속저고리. 삼국사기 색복조(
色 服 條 )에 흥덕왕 대의 복식금제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여기에 ‘표의(表 衣 )’·‘단의(短 衣 )’·‘내의(內衣)’라는 명칭이 언급된다. 표의가 겉에 입는 겉옷인 포를, 단의는 저고리를 뜻한다고 해석되기 때문에 자연히 내의는 속저고리 종류를 의미하게 된다. - 내상(內裳): 삼국시대의 속치마. 내의와 마친가지로 삼국사기 색복조 흥덕왕 대의 복식금제에 대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표상(
表 裳 )’이 겉치마를 의미하기 때문에 자연히 내상은 속치마가 된다. - 문릉관고(
文 綾 寬 袴 ): 고려시대의 속바지. 생초(生 綃)로 안을 받쳐서 넉넉하게 만든 것으로, 조선시대의 너른바지같은 역할을 한다.
- 등거리적삼: 소매가 짧고 진동밑 옆선을 터놓은 적삼. 겨울에는 솜을 두어 방한복으로 입기도 했다. 적삼 밑에 속옷으로 입기도 했다.
- 잠방이: 길이가 짧은 홑고의. 속고의 밑에 입는 속옷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여성용 속옷의 경우 상의는 가슴가리개→ 속적삼→ 속저고리. 하의는 다리속곳→ 속속곳→ 속바지→ 단속곳→ 너른바지→ 무지기치마→ 대슘치마[23] 순으로,[24] 치마의 볼륨을 위해 바지형 속옷을 여러 벌 겹쳐 입은 것이 특징적이다.[25] 위는 기본적인 순서로, 속바지 대신 고쟁이를 입기도 하는 등 약간의 변화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껴입는 것은 여전하다. 하의 속옷은 밑이 뚫려있는 바지인 개당고와 막혀있는 바지인 합당고로 나뉜다. 우측의 다리속곳처럼 굉장히 앞서간 형태도 보인다. [26] 당연한 얘기지만 평민이나 천민들이 저 많은 속옷을 일일이 챙겨입기는 힘들었다. 속옷 역시 값비쌌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평민층은 속바지나 단속곳까지, 양반들은 너른바지나 무지기치마까지 입었으며, 대슘치마는 위에 서술했듯 궁중에서만 입었다. 속바지들의 경우 형편에 따라 간혹 치마 아래로 보여지는 아랫단만 좋은 옷감으로 만들기도 했다.
남자의 경우 바지와 저고리도 사실상 속옷 취급을 받는다. 남자 한복도 여자 못지않게 상당히 많이 껴입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
고분벽화 속 한복의 모양새와 발달 과정상 삼국시대에도 속옷을 여러 겹으로 입었을 거라 추측되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당연히 여러 겹으로 입었다. 한복 특유의 풍성한 모양새를 내려면 많이 껴입어야 한다.
조선시대 속바지류의 유물을 보면 간혹 어깨끈이 가운데에 하나만 덜렁 달린 것이 있는데,예시출처 전통적인 한복 속바지는 뒤가 완전히 트여 벌어지는 구조가 아닌 것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쪽이 맞다. 끈이 양쪽에 달리면 입다가 골반에 걸려 불편하게 된다. 만일 현대인들이 전통 속옷을 자주 입었다면 금방 이유를 알 수 있었을 부분.
한복에서 남성용 뿐 아니라 여성용으로도 바지 형태의 속옷이 일찍 발달한 것은 한반도 특유의 한랭건조한 기후 때문이라 볼 수 있다.
- 사규삼: 남자 어린이가 관례 전에 입던 평상복이다. 땋은 머리에 복건을 쓰고 사규삼을 입으며 조대를 띤다.
기녀복: 기생만 입는 옷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다. 흔히 말하는 작고 좁은 저고리와 풍성한 치마 역시 한 시대의 유행이었을 뿐 기생만의 복식은 아니었다. 기생이란 일종의 트랜드세터이기도 했던지라 그들이 입는 양식의 옷과 장신구, 화장은 곧 유행이 되었다. 그러나 온갖 사소한 것까지 사치스럽다며 [27] 법으로 규정할 정도로 사치를 엄격하게 규제했던 조선에서[28] 몇 안되는 특별 예외대상이 바로 기생었다는 점으로 인해 민간에 그대로 퍼지지는 못했다. 조선시대의 복식금제를 보면 기생에 대한 특별대우가 굉장히 파격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옷의 재질이나 장신구 관련 규정은 종친과 양반조차 예외가 아님에도 기생[29]은 예외 대상이었다. 가체조차 자신의 재력에 따라 마음대로 올렸다고 하니.
- 탈: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 주술적, 종교적인 물건으로 쓰거나 혹은 창작예술 행위에서도 널리 사용한다.
갓(모자) 문서 참조. 엄밀히 말하면, 갓 종류는 관이면서도 평상적인 복식에 들어간다. 초립, 패랭이도 마찬가지. 즉 갓은 관(冠 ):예식모자과 건(巾 ):두건 사이에서 생겨난 한국전통의 고유한 형태의 복식인 것이다. 실제로 한국 전통 의상에서 남성전용 모자라고 하면 대부분이 갓을 연상하거나, 여기에서 파생된 모자들이 많다. 한국에서 자생한 대표적인 전통모자는 대부분 갓(립)에 속한다!
이런 형성사유에 걸맞게, 흔히 갓 종류로 분류하는 이런 고려중기-조선시대에 들어서, 몽고의 영향으로 목장이 늘어나고 말들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대부분의 모자들의 재료가 말총으로 만들어진다. 이전에는 대나무와 종이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너울.
이런 형성사유에 걸맞게, 흔히 갓 종류로 분류하는 이런 고려중기-조선시대에 들어서, 몽고의 영향으로 목장이 늘어나고 말들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대부분의 모자들의 재료가 말총으로 만들어진다. 이전에는 대나무와 종이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너울.
- 탕건 - 사대부 계층에서 주로 쓰던 관. 지금도 무형문화재로써 제작되어지고 있다. 왠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나올때 초시들이 자주쓰는 모자로 나온다.
- 사방관 - 정자관의 일종. 네모난 원통모양. 정약용 초상화의 모자가 이것.
- 동파관
- 정자관 - 흔히 훈장님모자라고 알고있는 모자. 이것 자체만 쓰는것이 아니고 망건위에 탕건을 쓰고 이것을 덧쓰는 방식이다. 5000원 지폐의 주인공이신 율곡 이이 선생이 쓰고 있는 것이 정자관이다.
신목의 유무에 따라 화靴 와 이履 로 나뉜다. 화는 북방계에서 유래되었고 이는 남방계에서 유래되었다.
참조
화(靴 )를 만드는 장인은 화장(靴 匠 ), 혜(鞋)를 만드는 장인은 혜장(鞋匠)이라 하며, 화와 혜를 모두 만드는 장인을 화혜장(靴 鞋匠)이라 한다. 주피장, 갖바치라고도 일컫는다.
참조
화(
- 단총박이 - 짚의 속대로 꼰 총을 박아 삼은 짚신.
- 왕얽이짚신 - 볼품없이 마구 삼은 짚신.
- 꽃짚신 - 신총이나 신 바닥을 여러 빛깔로 꾸미어 만든 짚신.
- 세코짚신 - 발을 편하게 하기 위해 앞의 양편에 약간씩 총을 터서 코를 낸 짚신.
- 석새짚신 - 총이 매우 성글고 굵은 짚신.
- 피초혜(
皮 草鞋 ) - 가죽을 대어 삼은 짚신.
- 미투리 - 날을 여섯 개로 하여 삼, 왕골, 면사 등을 이용하여 짚신처럼 삼은 신.
- 지혜(
紙 鞋) - 종이를 꼬아 삼은 미투리.
- 피결신 - 피나무 껍질로 삼은 신.
- 갖신 -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뜻한다. 장화처럼 목이 긴 신발과 짧은 신발이 있다.
- 꽃신 - 여성들이 주로 신었다. 이름대로 아름답고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다.
- 운혜(
雲 鞋) - 건혜(
乾 鞋) - 우리말로 마른신이다. 기름으로 겯지 않은 가죽신을 뜻한다. 마른 땅에서만 신는 신도 이렇게 칭한다. - 진신: 바닥에 징을 박았기 때문에 징신이라고도 한다. 유혜(
油 鞋)라고도 한다. 진날에 신었으며, 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기름에 결고 바닥에는 둥글납작한 징을 박았다. - 유혜(鍮鞋) - 놋쇠로 만든 신으로, 놋신이라고도 한다.
- 기혜(
妓 鞋) - 기생이 주로 신던, 검은 가죽이나 비단으로 만든 외줄무늬 코의 외코신. 급이 높은 기생은 당연히 화려한 당혜나 운혜를 신었다. - 계혜 - 볼이 넓은 어염집 여인용 신발.
- 조락신 - 조라기(삼 껍질 부스러기)로 만든 신.
- 다로기 - 가죽의 털이 안으로 가게 하여 만든 방한용 긴 버선. 신발 대용으로도 신었다.
- 노파리 - 융단으로 만든 방한용 신. 일반인은 천 사이에 솜을 넣었다.
- 목화(
木靴 ) - 나무나 가죽으로 바닥을 만들고 까맣거나 흰 사슴 가죽으로 목을 만들어 장화와 비슷한 형태를 띄었다. 관복이나 혼례시 신었다. 흔히 관리들이 신는 신발이 바로 흑목화. 물론 백목화도 있다. - 흑혜(
黑 鞋) - 흑피혜라도고 한다. 모양은 태사혜와 같지만 태사문이 없다. 검은 가죽으로 신울을 대고 신코 중앙에 붉거나 흰 선을 대었다. 남자용은 신코가 넓고 뒷축이 높은데 반해 여자용은 신코가 뾰족하고 높다. - 투혜(套鞋) - 방한, 방습을 위한 덧신.
[1] 붕어배래와 양장식 저고리가 추가되며 전체적으로 포대자루가 된다.[2] 조선인 바지 한 벌 만들 옷감으로 명나라 바지 두 벌을 만든다는 비판이 있었다.[3] 활동적인 활동을 할 때 속에 입은 옷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길(섶과 무 사이에 있는 넓고 긴 폭.) 아래에 덧댄 천.[4] 쌍고름을 기모노에서 오비를 묶는 방식 중 하나인 '분코무스비(文庫 結 び/서고매듭)'나 '쵸우무스비(蝶結 び/나비매듭)'와 혼동하나, 한복 고름과는 분명히 다르다. 오비는 묶는 방법이 어려워 관련 직업과 자격증이 따로 있는데 반해 한복 고름은 묶는 법이 오비에 비하면 훨씬 간단하다. 더군다나 대대의 경우, 실물을 보면 묶기 편하게 가느다란 끈이 같이 있다. 이 얇은 끈으로 먼저 묶은 뒤 대대를 보기좋게 묶어 늘어뜨리는 등의 장식성을 더하는 것. 대대는 의복에 따라 허리에서 한 번 묶은 뒤 아래쪽에서 느슨하게 한 번 묶거나 쌍고름을 매는 등의 차이가 있으며, 특별히 매듭법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쌍고름은 기본적인 외고름에서 그냥 빼내는 고름도 고를 만들면 된다. 리본 묶을 때에도 많이 애용되는 방식이다. 대대를 묶는 법은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 이는 다른 허리띠도 마찬가지다. 조선 이전의 벽화 등을 보면, 매듭짓는 위치도, 방식도 모두 자유롭게 나타난다. 자국 전통 문화에 대한 무지를 왜색으로 치부해서는 안되는 노릇이니 알아두자. 애초에 오비는 굉장히 폭이 넓고 길었다. 일상적으로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어 유카타에 어울린다는 나고야오비가 폭 34cm, 길이 356cm 이상이었으며, 한하바오비는 폭 15cm에 길이가 450cm에 육박했다.(묶는 법이 간편해 여행할 때에도 큰 불편함이 없었던 '츠쿠리오비'도 있긴 하지만, 말 그대로 활동성이 필요할 때에 사용했다.) 오비 위에 '오비다메, 오비지메, 오비아게'라는 장식끈을 매고 이를 고정하는 장신구인 오비도메를 착용하기도 했다. 이런 마당에 오비와 고름의 매듭법이 같을 수가 없다. 기모노의 오비를 매는 법은 여기에 잘 설명되어 있다.[5] 조선 초에는 다양한 색의 단령을 입었다. 그러다 녹색과 홍색으로 좁혀졌고, 조선 중기에 이르면 홍색으로 굳어졌다. 임진왜란 때 들어온 명나라 관리들이 관료와 왕의 옷이 같다고 지적하면서 흑색 단령을 입었으나 흑단령이 지나치게 사치스럽다 하여 다시 홍단령으로 바뀌었는데, 왕의 복장과 색이 같다는 지적이 마음에 걸렸던지 짙은 홍색을 입지 않기로 하면서 담홍색으로 통일된다.[6] 빨간색이라고 완전히 똑같은 색깔이 아니다. 임금용 집무복의 색은 다홍색이며 당상관용 집무복의 색은 노란색이 0.0000000001%도 들어가있지 않은 순적색이다.[7] 다만 이미지와는 다르게, 현존하는 내시 초상화인 김새신과 임우의 초상화를 보면 내시들 역시 당상관 문관들이 입는 것과 같은 색과 흉배를 단 단령을 입었다. 즉, 사극에서의 고증 오류라고 볼 수 있다. 참고[8] 당상관은 홍색 계열을 입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 말기인 고종 때 들어 간소화를 위해 예복/직무용 구분 없이 검은색으로 통일되었다.[9] 사대부 부인들이 예복으로 입었을 경우에는 남편의 것과 같은 흉배를 수놓거나 달았을것으로 추정된다.[10] 평민층의 원삼은 왕족이나 사대부의 것들 보다 길이가 짧았고, 색동길이의 면적이 컸다.[11] 비빈(妃 嬪)은 후궁을 뜻한다. 명칭은 같은 빈이라 해도 무품이며, 왕의 며느리이자 세자의 정실로서 차기 왕비인 세자빈은 가장 높아봤자 정1품인 왕의 후궁보다도 높다.[12] 공주, 옹주[13] 위의 사진은 속치마와 개량바지, 허리띠(가슴가리개) 등 전통속옷과 거리가 먼 부분이 있으니 유념해서 봐야 한다. [14] 등거리적삼이랑 잠방이를 추가로 입기도 했다.[15] 가슴이 크면 무식하다고 여겼다. 추가로 주걱턱은 심성이 착하고 입술을 적시면 욕구불만이며, 양 미간이 좁으면 색녀일 수 있고, 목이 두꺼우면 처녀가 아니며 입술이 자색이면 건강하지 못해 자식을 낳는 데에 부적합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말도 안되는 조건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왕비나 세자빈 간택할 때 뿐만 아니라 민간에도 퍼져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키가 크지 않고 머리선(이마와 머리카락 사이의 선)이 둥근 모양이며, 쌍꺼풀이 없고 눈꼬리가 처진 눈에 끝이 뾰족하지 않은 둥근 코와 얇은 입술, 길지 않은 목, 작은 손과 발, 큰 엉덩이, 희고 고운 피부라는 조건까지 붙었다. 앵무새 피를 떨어뜨려 처녀성을 판별하기도 했다.[16] 해당 사진은 속옷 순서를 바꾸어 가슴가리개를 맨 위에 입은 것으로, 원래 가슴가리개는 다리속곳과 마찬가지로 맨 아래에 입는 속옷이다.[17] 현대의 A라인은 사다리꼴로 재단한다.[18] 전통 심지[19] 대나무에 창호지를 감싸서 덧댄 유물도 있다.[20] 《寓 圃笔记》:"发裙之 制 ,以马尾 编成,系 于衬衣 之 内 。体 肥 者 一 裙,瘦削者 或 二三 ,使 外 衣 之 张,俨若一 伞。"
《菽 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 入京 师……于是无贵无贱,服 者 日 盛 。至 成 化 末 年 ,朝臣 多 服 之 者 矣。阁老万 公安 冬 夏 不 脱 ……。大臣 不服 者 惟 黎 吏侍淳 一 人 而已。此服妖也,弘治 初 始 有 禁 例 。”[21] 국어사전에는 말총으로 만든 바지라고 서술되지만 사료에는 말총을 넣어 만든 속치마라 나온다. 애초에 裙은 치마 군이다.[22] 고구려도 이러했다는 기록이 있다[23] 국립고궁박물관의 자료나 '한복만들기-속옷편(안애영, 심해진 공저/미진사)', 여러 복식사 서적을 보면 무지기 위에 대슘치마를 입는다고 서술되어 있다.[24]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편찬한 '왕실문화도감-조선왕실복식'을 보면 삽화와 함께 예복을 갖춰입는 순서를 알 수 있다.(다리속곳부터 나타나지는 않고, 가슴가리개와 속곳을 착용한 단계부터 나온다.) 온라인 pdf로는 왕의 복식 일부만 볼 수 있다.박물관 # [25] 변소에 갈 때 상당히 불편했을 것 같지만, 폭이 넓기 때문에 옷을 입은 채로 옷자락만 걷어서 볼일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개당고인 경우 가랑이가 트여있어 큰 문제가 없다.[26] 물론 반쯤은 농담. 겹쳐입은 속옷 수만 보더라도...[27] 서민은 스무 명 이상 모여 술을 마시지 못했으며, 요와 이불은 면포만을 사용하고 능금단자를 쓸 수 없었다. 결혼식조차 옷과 장식은 집에 있는 것을 사용하고 사리능단을 절대 쓸 수 없게 되어 있었다.(그래서 대대로 물려주거나 마을 단위로 한두 벌 장만해놓고 빌려서 사용했다.) 의복 관련해서는 형태, 재료, 종류 뿐만 아니라 허리띠, 머리 장식, 선, 단, 직물의 승수까지도 규제 대상이었다. 태조 3년에는 양부의 관원 외에는 사라능기로 된 의복을 입을 수 없고, 서인, 공상천례는 직품이 있더라도 은과 명주, 사피를 사용할 수 없는데 혼인할 때에도 직품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세종 11년에는 은 허리띠를 할 수 없는 사람은 혼인할 때에도 시관(時 散 )의 직품에 따라 각대와 실띠를 한다는 규정이 추가되었으며, 대소 부녀를 수종하는 여종은 말군을 입지 못하고 입모도 모시만 허용되며, 모첨의 길이도 주부의 것보다 절반이 되도록 했다. 이외에도 수많은 금제가 있다. 규제가 정말 많다. 참조 [28] 이전 시대에도 사치 금지법이 존재했다.[29] 의녀 포함인 규정도 있지만 그 의녀들이 기생 노릇을 하기도 했던 것을 생각하면….[30] 충청도 무속에서 쓰는 무구. 종이를 오려 무속신이나 부적, 진법 등을 나타낸 것으로 설경(設 經 )이라고도 한다.[31] 어린 아이의 작은 이불. 덮고 깔거나 업을 때 썼다. 한자로 강보(襁褓 )라 한다. 흔히들 말하는 '강보에 싸인 아기'에서 아기를 감싸는 강보가 바로 포대기다.[32] 굽이 있는 것[33] 굽이 없는 것[34]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절대로 하켄크로이츠(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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