룡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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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소재지 | 룡강읍 | ||
광역행정구역 | |||
하위 행정구역 | |||
면적 | 미상 | ||
인구 | 58,390명[2008년] | ||
인구 밀도 | 미상 | ||
군인민위원회 위원장 | 안용택 | ||
최고인민회의 | 임종실 (룡강선거구 / 2선) | ||
창재룡 (룡호선거구 / 초선) | |||
039 |
평안남도의 군. 광복 당시 13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두음법칙을 무시하는 북한 문법상 룡강군이지만 두음법칙을 적용하면 용강군이다. 진남포(남포)시를 둘러싸고 있으며 북쪽으로 강서군, 동쪽과 남쪽은 대동강에 접한다. 바다에는 간석지가 널리 펼쳐져 있다. 또한 강수량이 적기 때문에 광량만을 중심으로 염전이 해안 곳곳에 발달해 있다.
물이 좋은 고장인지 진로소주가 시작된 곳도 이 곳이었고, 믿거나 말거나지만 맹자가 이 지역에 왔다가 우물맛에 반했다는 맹자우물 전설도 있다.
일제강점기 주요섭이 쓴 단편소설 '진남포행'에서는 평안도 사투리로 "롱강"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물이 좋은 고장인지 진로소주가 시작된 곳도 이 곳이었고, 믿거나 말거나지만 맹자가 이 지역에 왔다가 우물맛에 반했다는 맹자우물 전설도 있다.
일제강점기 주요섭이 쓴 단편소설 '진남포행'에서는 평안도 사투리로 "롱강"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낙랑군(樂浪郡 ) 점제현(秥蟬縣 )이었다.
고려 시대에 용강현, 삼화현이었다. 구한말 삼화군의 진남포가 개항하여 삼화부로 승격되고, 1910년 진남포부로 개칭되었다.
1914년 진남포부 중 개항장 외곽 지역(삼화면 등)을 용강군에 편입하였다.
1952년 북한 행정구역 개편 때 서부 지역을 신설된 온천군에 넘겨줘 면적이 축소되었다. 1978년에는 1개 로동자구와 3개 리 일부를 대안시(현재 대안군)에 넘겨줬다.
1978년 남포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남포시에 소속되었다.
2004년 직할시가 시로 격하되면서 평안남도 소속으로 바뀌었으나, 2010년 남포시가 특별시로 승격되면서 남포시 소속의 군이 되었다.
고려 시대에 용강현, 삼화현이었다. 구한말 삼화군의 진남포가 개항하여 삼화부로 승격되고, 1910년 진남포부로 개칭되었다.
1914년 진남포부 중 개항장 외곽 지역(삼화면 등)을 용강군에 편입하였다.
1952년 북한 행정구역 개편 때 서부 지역을 신설된 온천군에 넘겨줘 면적이 축소되었다. 1978년에는 1개 로동자구와 3개 리 일부를 대안시(현재 대안군)에 넘겨줬다.
1978년 남포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남포시에 소속되었다.
2004년 직할시가 시로 격하되면서 평안남도 소속으로 바뀌었으나, 2010년 남포시가 특별시로 승격되면서 남포시 소속의 군이 되었다.
황룡산성
- 용강면(
龍岡 面 )- 관할 리 : 옥도(
玉 桃 ), 난산(卵 山 ), 반추(盤 楸 ), 방어(芳 漁 ), 서부(西部 ), 오작(烏 鵲 ), 의산(義 山 ), 장암(長 巖 ), 초산(草山 ), 후산(後山 ) - 면소재지 및 군청소재지는 옥도리다. 하지만 위성사진을 보면 북한 치하 군소재지인 지운면에 비해 많이 쇠락했다.
- 다미면(
多美 面 )- 관할 리 : 오화(
五 花 ), 난마(蘭 麻 ), 대안(大安 ), 동전(東 箭 ), 보명(普 明 ), 서적(瑞 赤 ), 소안(小安 ), 오정(梧井), 우안(牛 安 ), 장미(長尾 ), 지사동(芝 沙 洞 ), 치의(幟 衣 ), 한전(閑田) - 홍경래의 출신 지역이다.
- 서화면(
瑞 和 面 )- 관할 리 : 자복(
自 福 ), 동상(同相 ), 석치(石 峙), 설암(雪 巖 ), 신안(新 安 ), 암현(巖 峴), 죽본(竹本 ), 한현(漢 峴) - 서북쪽 해안 지대에 있으며, 연대봉(55m)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20m 이하의 평지이다.
- 양곡면(
陽 谷 面 )- 관할 리 : 마명(
馬 明 ), 갈천(葛川 ), 남동(南 桐 ), 두보(杜 寶 ), 신류(新柳 ), 정화(亭 花 ), 주흥(周 興 ), 회용(洄湧) - 1945년 천교리·문애리·초유리가 진남포부로 편입되었다.
- 오신면(
吾 新 面 )- 관할 리 : 가룡(
佳 龍 ), 가양(葭 陽 ), 구룡(九 龍 ), 내덕(內德), 덕해(德 海 ), 도대(桃 垈 ), 석정(石井 ), 송성(松城 ), 월매(月 梅 ), 유동(楡 洞 ), 인산(麟山), 직매(直 梅 ) - 1945년 한학리·도학리가 진남포부로 편입되었다.
- 용월면(
龍 月面 )- 관할 리 : 갈현(
葛 峴), 계명(桂 明 ), 광덕(廣德 ), 국안(國安 ), 대영(大 永 ), 마동(麻 洞 ), 송석(松石 ), 주달(周 達 ) - 면 동남부, 용강면과의 경계에 군내 최고봉인 오석산(565m)이 있다. 용강선 용월역, 종점인 마영역이 있다.
- 지운면(
池 雲 面 )- 관할 리 : 진지(
眞 池 ), 대성(大城 ), 두륵(頭 勒), 만하(晩 荷 ), 문성(文 城 ), 신촌(新村 ), 안성(安 性 ), 양원(兩院 ), 양화(陽 和 ), 유보(柳 保 ), 인포(仁 浦 ), 입성(立 城 ), 현암(絃巖)
- 해운면(
海雲 面 )- 관할 리 : 온정(
溫井 ), 갈성(葛城 ), 궁산(弓 山 ), 성현(城 峴), 연봉(延 鳳 ), 용반(龍 磻), 용정(龍 井 ), 월지(月 池 ), 이현(里 峴), 일병(日 屛)
- 귀성면(
貴 城 面 )- 관할 리 : 노상(
路上 ), 감박(甘 朴 ), 금정(金井 ), 노하(路 下 ), 대령(大嶺 ), 석성(石城 ), 석찬(石 贊 ), 용도(龍島 ), 원읍(元 邑), 증악(甑岳 ), 최광(最 廣 ), 향곶(香 串 ) - 연안에는 화도(禾島)·초도(
草島 )·대매도(大梅 島 )·소매도(小梅 島 )·덕도(德島 )·상취라도(上 吹螺 島 )·하취라도(下 吹螺 島 )[8]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있으나, 현재는 육지와 가까운 화도(禾島)·초도(草島 ) 등은 간척되어 육지와 연결됐다.
- 금곡면(
金谷 面 )- 관할 리 : 우등(
牛 登 ), 경전(耕田 ), 금수(金 水 ), 남상(南上 ), 남하(南下 ), 내성(內城), 담부(擔釜), 석포(石浦 ), 유동(乳 洞 ), 화도(華 島 )
- 대대면(
大代 面 )- 관할 리 : 덕동(
德 洞 ), 매산(梅山 ), 사천(沙川 ), 산동(山洞 ), 오산(梧山), 월곡(月谷 ), 화도(花島 )
- 삼화면(
三和 面 )- 관할 리 : 옥정(
玉井 ), 내교(內校), 마점(馬 岾), 서정(西 亭 ), 용문(龍 門 ), 율상(栗 上 ), 율하(栗下 ), 주림(舟 林 ), 충흥(忠興 ), 학당(學堂 ) - 진남포 개항 전까지 옛 삼화군의 중심지였다. 대부분의 지역이 구릉성 산지로, 사동천(
砂 洞川 )이 면내를 북서에서 남동으로 남포시 방향으로 흘러 북쪽에는 충흥리저수지, 남쪽에는 주림저수지(삼화저수지)를 형성했다. 우산 북쪽 기슭에는 주림저수지를 내다보며 휴양지로 이름 높았던 우산장(牛 山莊 )이 있다.
- 신녕면(
新 寧 面 )- 관할 리 : 신덕(
新 德 ), 광암(廣 巖 ), 마염(馬 鹽 ), 소강(蘇 江 ), 송산(松山 ), 수일(水 日 ), 신암(新 巖 ), 연송(延 松 ), 오학(梧鶴) - 서쪽에 광량만이 있다. 임우산(霖雨
山 )~연대산(燃 臺山 )을 잇는 산줄기 사이에 학령이 있고, 산줄기 북쪽을 영북(嶺北)지방, 남쪽을 영남(嶺南)지방이라 한다. 광암·마염·수일·오학 4개리가 영남, 신덕·소강·송산·신암·연송 5개리가 영북이다.
[2008년] [2] 1944년 인구총조사[3] 위 지도는 광복 당시가 아닌 1937년 당시의 지도로, 그 이후 이루어진 진남포부 확장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1938년 대대면 마사·유사·대두리가, 1945년 대대면 어호·해산·고정·영곡리, 양곡면 문애·천교·초유리, 오신면 한학·도학리, 다미면 지울리가 진남포부로 편입되었다. # 덤으로 광복 이후 간척으로 해안선이 많이 바뀐다.[4] 일명 태성호(台 星湖 )[5] 독립운동가 김경서(金敬瑞 )가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장군이다.[6] 좌표 북위 38º50'15", 동경 125º21'00". 믿거나 말거나지만 전설에 따르면 정려문 앞에 일본인이 가면 피를 토하고 즉사한다고 전해진다. 2005년 보도에 따르면 16대 후손인 김광철(당시 30세)이 관리인으로 있다.#[7] 진로의 '진'이 바로 공장이 있던 진지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6.25 전쟁 때 창업주 일가가 월남하여 다시 소주 사업을 시작하면서 현재의 진로소주가 만들어졌고 북한은 여기 남겨진 공장에서 진지리소주를 생산한다고 한다.[8] 육지에서 먼 덕도 및 상하취라도는 1951~53년 국군 부대가 주둔 내지 활동하였다.[9] 김정일은 신덕샘물을 그것도 전용 취수구에서 따로 받아낸 것만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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