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보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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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언어별 표기[편집]
3. 역사[편집]
1293년에 스웨덴의 토르길스 크누트손(Torgils Knutsson ?~1306)이 핀란드 십자군을 위해 쌓은 비보리 성(Viipurin linna/Viborgs slott)으로부터 역사가 시작된다. 스웨덴의 대 러시아 방어 거점이자 무역 기지였고, 서방 가톨릭 세계의 최동단이었다. 스웨덴 국왕 망누스 4세가 노브고로드 공작을 역임한 모스크바 공작 유리 3세와 1323년 뇌테보리[1] 조약을 체결하면서 스웨덴의 영토로 확정되었으며, 1404년 칼마르 연합의 국왕 에리크 13세가 도시 헌장을 내주면서 중세 핀란드의 6대 도시[2]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나중에 스웨덴 국왕 칼 8세 크누트손이 되는 칼 크누트손은 이곳 성주로 있으면서 경험을 쌓기도 했다.
대북방전쟁 시기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군이 궤멸당한 후 1710년에 벌어진 표트르 대제[3]의 비보리 포위전때 루스 차르국 군대에게 함락당했다. 1721년 뉘스타드 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고, 이때 비보리의 주교구는 포르보(Porvoo/Borgå)로 이관되었다. 스웨덴은 1741~43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또 졌고, 오보 조약으로 퀴미강 동쪽에서 사이마 호에 인접한 사본린나(Savonlinna/Nyslott)에 이르는 영토를 추가로 할양하면서 1744년에 비보르크 현(Выборгская губерния)이 탄생했다. 1790년 4월, 스웨덴 해군과 러시아 제국 해군의 발트함대가 이 도시 앞바다에서 해전을 치렀다.
1809년, 핀란드 전쟁에서 패한 스웨덴은 러시아에게 완전히 굴복했고 프레드릭스함[4] 조약으로 핀란드 전역을 할양했다. 새로이 핀란드의 지배자가 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러시아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12년 비보르크 현과 고글란트 섬을 핀란드에 되돌려주었다. 핀란드의 새로운 비푸리 주(Viipurin Lääni/Viborgs Län)의 주도가 된 비푸리는 1856년 라펜란타(Lappeenranta/Villmanstrand)와 이어지는 사이마 운하가 개통되면서 경제적인 요충지로 떠올랐다. 19세기 말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비푸리는 핀란드 남동부의 산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1917년, 핀란드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핀란드 내전이 벌어졌다. 비푸리는 적위대에게 점령당했으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장군의 백위대가 비푸리를 탈환했고, 1918년 4~5월 사이에 360~420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독립 이후에도 비푸리의 지위는 굳건했으며, 194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비푸리의 인구는 72,778명으로 수도 헬싱키(252,481명)에 이어 2위였고, 탐페레(69,069명)와 투르쿠(65,475명)가 그 뒤를 이었다.#[5] 이 시기에 지어진 알바 알토의 도서관은 기능주의 건축의 정수로 손꼽혔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복원하려던 스탈린은 핀란드를 완전히 먹어치울 목적으로 겨울전쟁을 일으켰고, 비푸리는 이 시기 벌어진 일련의 전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1940년 모스크바 조약으로 소련에 할양되었으나 1941년 핀란드가 재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944년 모스크바 휴전협정으로 최종적으로는 소련으로 귀속되었고 러시아 제국 시대의 이름인 비보르크로 바뀌었다. 1947년 핀란드는 파리 평화조약으로 비보르크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했다. 민족적 구성도 완전히 뒤바뀌어 2010년 기준으로는 러시아인을 비롯한 동슬라브인이 94%를 차지하게 됐고, 이전에 거주하던 핀인들은 실향민이 되어 대부분 인접한 퀴멘락소 일대 등으로 이주했다.
대북방전쟁 시기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군이 궤멸당한 후 1710년에 벌어진 표트르 대제[3]의 비보리 포위전때 루스 차르국 군대에게 함락당했다. 1721년 뉘스타드 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고, 이때 비보리의 주교구는 포르보(Porvoo/Borgå)로 이관되었다. 스웨덴은 1741~43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또 졌고, 오보 조약으로 퀴미강 동쪽에서 사이마 호에 인접한 사본린나(Savonlinna/Nyslott)에 이르는 영토를 추가로 할양하면서 1744년에 비보르크 현(Выборгская губерния)이 탄생했다. 1790년 4월, 스웨덴 해군과 러시아 제국 해군의 발트함대가 이 도시 앞바다에서 해전을 치렀다.
1809년, 핀란드 전쟁에서 패한 스웨덴은 러시아에게 완전히 굴복했고 프레드릭스함[4] 조약으로 핀란드 전역을 할양했다. 새로이 핀란드의 지배자가 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러시아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12년 비보르크 현과 고글란트 섬을 핀란드에 되돌려주었다. 핀란드의 새로운 비푸리 주(Viipurin Lääni/Viborgs Län)의 주도가 된 비푸리는 1856년 라펜란타(Lappeenranta/Villmanstrand)와 이어지는 사이마 운하가 개통되면서 경제적인 요충지로 떠올랐다. 19세기 말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비푸리는 핀란드 남동부의 산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1917년, 핀란드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핀란드 내전이 벌어졌다. 비푸리는 적위대에게 점령당했으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장군의 백위대가 비푸리를 탈환했고, 1918년 4~5월 사이에 360~420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독립 이후에도 비푸리의 지위는 굳건했으며, 194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비푸리의 인구는 72,778명으로 수도 헬싱키(252,481명)에 이어 2위였고, 탐페레(69,069명)와 투르쿠(65,475명)가 그 뒤를 이었다.#[5] 이 시기에 지어진 알바 알토의 도서관은 기능주의 건축의 정수로 손꼽혔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복원하려던 스탈린은 핀란드를 완전히 먹어치울 목적으로 겨울전쟁을 일으켰고, 비푸리는 이 시기 벌어진 일련의 전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1940년 모스크바 조약으로 소련에 할양되었으나 1941년 핀란드가 재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944년 모스크바 휴전협정으로 최종적으로는 소련으로 귀속되었고 러시아 제국 시대의 이름인 비보르크로 바뀌었다. 1947년 핀란드는 파리 평화조약으로 비보르크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했다. 민족적 구성도 완전히 뒤바뀌어 2010년 기준으로는 러시아인을 비롯한 동슬라브인이 94%를 차지하게 됐고, 이전에 거주하던 핀인들은 실향민이 되어 대부분 인접한 퀴멘락소 일대 등으로 이주했다.
4. 볼거리[편집]
5. 경제와 산업[편집]
사실상 이웃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밀려 찬밥 신세나 다름없다. 핀란드령 시절에는 제2의 도시였으나 현재는 레닌그라드주 인구 4위 도시다.[6] 그나마 종이 생산이 이 몰락한 소도시의 주력 산업이다.
독일은 이곳에서 노르트스트림-1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공급받는다. 2021년 우크라이나 위기에서 논란이 되었던 노르트스트림-2는 발트해를 관통하여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의 루프민(Lubmin)으로 이어지는건 똑같으나 출발점이 우스티루가(Усть-Луга)로 달라진다.
독일은 이곳에서 노르트스트림-1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공급받는다. 2021년 우크라이나 위기에서 논란이 되었던 노르트스트림-2는 발트해를 관통하여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의 루프민(Lubmin)으로 이어지는건 똑같으나 출발점이 우스티루가(Усть-Луга)로 달라진다.
6. 기타[편집]
[1] 현 러시아 실리셀부르크(Шлиссельбург). 스웨덴어로 뇌테보리(Nöteborg)라고 부른다. 1617~1702년 사이에 스웨덴의 영토였다.[2] 나머지 5곳은 투르쿠, 난탈리, 라우마, 울빌라, 포르보[3] 실제 지휘는 표도르 아프락신(Фёдор Матве́евич Апра́ксин 1661~1728)이 했고 표트르 대제는 얼굴마담이었다. 그래서 성 뒤편에는 아프락신의 동상이 세워져있다.[4] 현 핀란드 하미나.[5] 다만 등록된 인구를 기준으로 하면 탐페레와 투르쿠의 인구가 비푸리보다 약간 많았다.[6] 가치나, 무리노, 프세볼로시스크 다음이다. 핀란드령 시절이나 지금이나 절대 인구는 비슷하지만, 5백만 국가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1억 5천만 국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다를 수밖에 없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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