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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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크는 1632년 잉글랜드 서머싯 주의 링턴 마을에서 태어나, 유년기의 대부분을 펜스퍼드에서 보냈다. 그곳에는 로크 집안이 가진 꽤 넓은 농지와 도서관 하나가 있었다. 어린 로크는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과 도서관에서의 책 읽기로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지냈다. 이후 웨스트민스터 학교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배웠다. 20살에는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입학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고전어와 형이상학, 논리학 등을 배웠고 토론 수업에 참여했지만 로크는 대학생활이 그다지 즐겁지는 않았다. 그래도 공부는 잘해서 24살이 되었을 때, 런던의 그레이 법률 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로크는 법률보다 철학을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법률가의 길을 포기하고 옥스퍼드에 남아 석사학위를 따기로 결심했다. 석사 학위를 받은 후엔 그 당시 관례에 따라 선임 연구원으로서,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의 교수가 되었다.
이시기 로크는 데카르트 인식론과 피에르 가상디의 원자론을 섭렵하여, 인간의 인식 능력은 불가능하지도 않지만 맹신할 것도 아니라는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34살에는, 샤프츠베리 백작 1세[8]를 만나면서부터 정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로크는 샤프츠베리의 곪아 버린 간종양을 수술하여 그의 목숨을 구하기까지 했는데, 이런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샤프츠베리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런던에서의 정치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왕당파인 토리당이 실세였고, 의회파인 샤프츠베리가 이끄는 휘그당은 감시를 받는 처지였다. 더군다나 로크가 39살이 되는 1681년에 샤프츠베리는 국가반역죄로 체포되었고, 의회파의 이념을 따르는 법원에서 그를 풀어 주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에 신변의 위험을 느낀 샤프츠베리는 168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고,[9] 로크도 따라서 1683년 9월 네덜란드로 넘어갔다.
네델란드는 곧 잉글랜드의 주요 휘그당원들이 결집하는 장소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휘그당은 1688년 윌리엄 오렌지 공을 부추겨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공격했다. 제임스 왕은 싸움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항복을 외친 채 프랑스로 도망갔는데, 이를 명예혁명이라고 부른다. 명예혁명이 성공하자, 1689년 로크는 휘그당원들과 5년 반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그리고 잉글랜드에 도착하자마자 로크는 새로운 정부의 여러 관직을 제의받았다. 그러나 학문에 더 열중하고 싶었던 로크는 큰 자리를 사양했고, 좀 더 한가한 직책인 상무부의 물품세 상소위원회 일원으로 만족했다. 그 후 로크는 학문에만 마음을 쏟게 된다.
당시 매연 공해가 심했던 런던 생활은 로크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기관지는 현저하게 나빠졌고 이것은 그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천식이 심해질 때마다 런던을 떠나 시골의 친구들을 찾아다녔고, 마침내 친구 매섬이 있는 오츠[10]라는 시골에 정착했다. 로크는 오츠로 떠나기 전, 1689년에 『관용에 관한 편지』를 라틴어로 발행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인간 오성론』을 영어로 발행했다. 이 무렵 『통치론』도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오츠에 정착하고 몇 년 후에는 『교육에 관한 몇 가지 생각들』(1693)과 『기독교의 합리성』(1695)을 영어로 출판하였다. 이후로는 건강이 더 악화되어 저술활동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간간히 성경에 주해를 다는 작업을 하다가, 1704년 10월 28일 오츠에서 사망했다. 그는 유언에서 『통치론』이 자신의 저술임을 밝혔다.
이시기 로크는 데카르트 인식론과 피에르 가상디의 원자론을 섭렵하여, 인간의 인식 능력은 불가능하지도 않지만 맹신할 것도 아니라는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34살에는, 샤프츠베리 백작 1세[8]를 만나면서부터 정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로크는 샤프츠베리의 곪아 버린 간종양을 수술하여 그의 목숨을 구하기까지 했는데, 이런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샤프츠베리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런던에서의 정치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왕당파인 토리당이 실세였고, 의회파인 샤프츠베리가 이끄는 휘그당은 감시를 받는 처지였다. 더군다나 로크가 39살이 되는 1681년에 샤프츠베리는 국가반역죄로 체포되었고, 의회파의 이념을 따르는 법원에서 그를 풀어 주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에 신변의 위험을 느낀 샤프츠베리는 168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고,[9] 로크도 따라서 1683년 9월 네덜란드로 넘어갔다.
네델란드는 곧 잉글랜드의 주요 휘그당원들이 결집하는 장소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휘그당은 1688년 윌리엄 오렌지 공을 부추겨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공격했다. 제임스 왕은 싸움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항복을 외친 채 프랑스로 도망갔는데, 이를 명예혁명이라고 부른다. 명예혁명이 성공하자, 1689년 로크는 휘그당원들과 5년 반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그리고 잉글랜드에 도착하자마자 로크는 새로운 정부의 여러 관직을 제의받았다. 그러나 학문에 더 열중하고 싶었던 로크는 큰 자리를 사양했고, 좀 더 한가한 직책인 상무부의 물품세 상소위원회 일원으로 만족했다. 그 후 로크는 학문에만 마음을 쏟게 된다.
당시 매연 공해가 심했던 런던 생활은 로크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기관지는 현저하게 나빠졌고 이것은 그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천식이 심해질 때마다 런던을 떠나 시골의 친구들을 찾아다녔고, 마침내 친구 매섬이 있는 오츠[10]라는 시골에 정착했다. 로크는 오츠로 떠나기 전, 1689년에 『관용에 관한 편지』를 라틴어로 발행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인간 오성론』을 영어로 발행했다. 이 무렵 『통치론』도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오츠에 정착하고 몇 년 후에는 『교육에 관한 몇 가지 생각들』(1693)과 『기독교의 합리성』(1695)을 영어로 출판하였다. 이후로는 건강이 더 악화되어 저술활동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간간히 성경에 주해를 다는 작업을 하다가, 1704년 10월 28일 오츠에서 사망했다. 그는 유언에서 『통치론』이 자신의 저술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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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상태에서는 이 상태를 지배하는 자연법이 존재하는데 이 법은 모든 사람을 구속한다. 그리고 곧 그 법인 이성은 조언을 구하는 모든 인류에게 인간은 평등하고 독립적인 존재이므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 건강, 자유 또는 소유물에 대해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통치론』 6절
자연 상태란 '정치 권력이 아직 존재하기 이전의 자연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홉스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할 것이라 예측했지만, 로크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단지 '정치권력'만 부재할 뿐 서로 이성을 사용하여 생각할 수 있는 존재라고 가정한다. 그리고 인간이 '이성'을 사용한다면, 굳이 서로에게 손해가 되는 싸움은 되도록 삼갈 것이고 그들은 서로가 평등하고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인정되는 규칙을 자연법이라 한다. 이 평등에서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밝혀진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적어도 '자기 보존'에 필요한 생명, 자유, 소유물을 어떤 다른 누구한테도 침해받지 않을 권리를 자연적으로 요구하게 된다. 이 권리를 자연권이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생명, 자유, 소유물을 해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난다. 이때 피해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해치는 사람은 처벌받아야 하고, 피해를 받은 나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자연 상태에서는 정치권력이 부재하므로, 이런 경우에 피해자는 가해자를 처벌해야만 적절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11] 따라서 정치 권력이 부재한 자연 상태에서 자신의 자연권을 침해받은 모든 사람은 피해를 입힌 사람을 처벌할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데, 이 권리를 '처벌권'이라 한다.
로크에게 있어서 '자연 상태'는 현실에서도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예를 들어 절도 행위가 일어날 경우, 설령 공권력이 존재하더라도 그 권력이 이런 위급 상황에 대응할 만큼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면 집주인은 도둑을 처벌할 권리를 가지게 된다.[12] 이 경우 피해자(집주인)와 침입자(도둑)는 일시적으로 공통의 권력이 없는 자연 상태를 이루기 때문이다. 로크는 도둑이 자연권을 해칠 수 있는 위협을 하였을 때, 그 자연 상태에 놓인 도둑을 그 자리에서 죽여도 된다는 주장을 하였는데, 도둑에 의해 한번 자연권이 손상되어 버리면 이후의 정부의 개입은 뒤늦은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 권총을 꺼내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에 근거해서이다. 마찬가지로, 국가 사이에 더 상위의 입법기관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것은 자연 상태다.[13] 즉, 세계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국제 관계에서 한 국가의 생존이 위협받을 때, 모든 국가는 침략해 온 가해 국가에 대해서 '처벌권'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생명, 자유, 소유물을 해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난다. 이때 피해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해치는 사람은 처벌받아야 하고, 피해를 받은 나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자연 상태에서는 정치권력이 부재하므로, 이런 경우에 피해자는 가해자를 처벌해야만 적절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11] 따라서 정치 권력이 부재한 자연 상태에서 자신의 자연권을 침해받은 모든 사람은 피해를 입힌 사람을 처벌할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데, 이 권리를 '처벌권'이라 한다.
로크에게 있어서 '자연 상태'는 현실에서도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예를 들어 절도 행위가 일어날 경우, 설령 공권력이 존재하더라도 그 권력이 이런 위급 상황에 대응할 만큼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면 집주인은 도둑을 처벌할 권리를 가지게 된다.[12] 이 경우 피해자(집주인)와 침입자(도둑)는 일시적으로 공통의 권력이 없는 자연 상태를 이루기 때문이다. 로크는 도둑이 자연권을 해칠 수 있는 위협을 하였을 때, 그 자연 상태에 놓인 도둑을 그 자리에서 죽여도 된다는 주장을 하였는데, 도둑에 의해 한번 자연권이 손상되어 버리면 이후의 정부의 개입은 뒤늦은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 권총을 꺼내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에 근거해서이다. 마찬가지로, 국가 사이에 더 상위의 입법기관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것은 자연 상태다.[13] 즉, 세계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국제 관계에서 한 국가의 생존이 위협받을 때, 모든 국가는 침략해 온 가해 국가에 대해서 '처벌권'을 주장할 수 있다.
각자는 자기 자신의 인신(人身 , person)에 대한 소유권을 지닌다.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이 권리를 지닐 수 없다. 어떤 사람의 신체를 통한 노동과 그의 손을 사용한 작업은 당연히 그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자연이 제공하고 남겨둔 바를 그런 상태에서 꺼내어 여기에 자신의 노동을 섞고 자신의 것인 무언가를 더할 경우 그것은 그의 소유가 된다.『통치론』 27절
자연 상태에서 자기 보존을 위해 '생명과 자유의 권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소유물'까지 자연권에 속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생존을 하기 위해서는 먹을 것이 필요한데, 로크는 이 먹을 것을 '소유물'이라 말함으로써 소유물을 자연권의 하나로 바라본다.
로크에 따르면, 본래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은 인간의 공동 자산이다.[14] 거기에 인간의 노동이 더해지면 그것은 한 개인의 '소유물'이 된다.[15] 예를 들어, 자연에 있는 강물은 공동 자산이다. 하지만 인간이 그 강물을 마시기 위해 직접 물을 펀다면 그것은 그의 노동을 통해 얻은 것이면서도 인간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므로, 그 물은 그 사람의 정당한 '소유물'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소유물은 생존에 필요한 것으로서 자연권에 속한다는 게 로크의 주장이다. 다만 여기에서 로크가 내세우는 전제조건이 있다. 자연에 있는 자원은 충분히 많아야 하며, 개인은 살기 위해서만큼만 소비해야하지 남아돌아 썩힐 정도로 많이 소유하여 자원을 함부로 낭비해선 안 된다는 조건이다.[16] 그러나 이러한 점도 화폐 경제가 발전하면서 '남아돌아 썩힐 정도로 많은 소유'는 썩지 않는 화폐로 축적이 가능해졌고, 화폐의 축적을 통해 산업과 문화가 발전했으며, 이런 발전은 사람들의 생존조건을 더 좋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개인의 돈인 사유 재산은 이러한 의미에서라도 지켜져야 되는 것이라고 로크는 생각한다.[17][18]
다시 말해, 로크는 '노동 덕분에 재산으로서의 가치가 생긴다'는 노동가치설을 주장한 것이다.[19] 여기서 그 유명한 논쟁거리가 생기는데, 로크는 노동의 생산물을 사유 재산으로 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생산물이 만들어지는 장소인 토지까지 개인의 사유 재산이 된다고 주장한다. 즉, 주인이 없는 땅에다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물을 기르고 거기에다 울타리를 치면 그 땅은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이었다. 로크의 이러한 생각은 수많은 반박을 불러일으켰고,[20] 그들 중 일부는 '노동이 있음으로해서 재산으로서의 가치가 생긴다'는 노동가치설만이 논리적으로 정당한 것이기 때문에 '육체 노동이 없는 수입인 토지 임대료는 없어져야 한다'는 사회주의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물론 이는 로크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로크에 따르면, 본래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은 인간의 공동 자산이다.[14] 거기에 인간의 노동이 더해지면 그것은 한 개인의 '소유물'이 된다.[15] 예를 들어, 자연에 있는 강물은 공동 자산이다. 하지만 인간이 그 강물을 마시기 위해 직접 물을 펀다면 그것은 그의 노동을 통해 얻은 것이면서도 인간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므로, 그 물은 그 사람의 정당한 '소유물'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소유물은 생존에 필요한 것으로서 자연권에 속한다는 게 로크의 주장이다. 다만 여기에서 로크가 내세우는 전제조건이 있다. 자연에 있는 자원은 충분히 많아야 하며, 개인은 살기 위해서만큼만 소비해야하지 남아돌아 썩힐 정도로 많이 소유하여 자원을 함부로 낭비해선 안 된다는 조건이다.[16] 그러나 이러한 점도 화폐 경제가 발전하면서 '남아돌아 썩힐 정도로 많은 소유'는 썩지 않는 화폐로 축적이 가능해졌고, 화폐의 축적을 통해 산업과 문화가 발전했으며, 이런 발전은 사람들의 생존조건을 더 좋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개인의 돈인 사유 재산은 이러한 의미에서라도 지켜져야 되는 것이라고 로크는 생각한다.[17][18]
다시 말해, 로크는 '노동 덕분에 재산으로서의 가치가 생긴다'는 노동가치설을 주장한 것이다.[19] 여기서 그 유명한 논쟁거리가 생기는데, 로크는 노동의 생산물을 사유 재산으로 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생산물이 만들어지는 장소인 토지까지 개인의 사유 재산이 된다고 주장한다. 즉, 주인이 없는 땅에다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물을 기르고 거기에다 울타리를 치면 그 땅은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이었다. 로크의 이러한 생각은 수많은 반박을 불러일으켰고,[20] 그들 중 일부는 '노동이 있음으로해서 재산으로서의 가치가 생긴다'는 노동가치설만이 논리적으로 정당한 것이기 때문에 '육체 노동이 없는 수입인 토지 임대료는 없어져야 한다'는 사회주의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물론 이는 로크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의 정부 아래 놓이는 하나의 정치 체제를 결성하는 데 동의함으로써 다수의 결정에 승복하고 이에 따를 의무를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 대해서 지게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하나의 사회를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맺은 최초의 계약은 무의미하며, 아예 계약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통치론』 97절
자연 상태에서 자연권을 침해받은 피해자는 상대를 처벌해야만 피해에 대한 보상을 얻을 수 있지만, 각각은 자신의 입장에서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밖에 없으므로 그들 사이에 죽음의 결투가 벌어진다. 이를 설명할 때 많이 드는 예로, 미국 서부극에서 무법자들의 결투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된다. 하지만 그러한 결투는 양쪽에 상해를 입히므로, 쌍방은 이런 분쟁을 해결할 공정한 재판관을 서로 원하게 되고, 이들은 그런 공정함을 담보할 수 있는 정치 공동체를 점차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정치 공동체는 개인 각자의 '처벌권'을 대신 행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정치권력이 만들어지게 된 과정이다.[21] 즉, 정부는 한 사람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자연 상태의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해 확립한 것이다. 로크는 이런 의미에서 정치권력을 '시민 정부'라고 부른다.
따라서 정치권력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한 사람의 뛰어난 무력이나 지혜가 아니라 개인 간의 분쟁이 생겼을 때 자신이 속한 정치 공동체의 판단에 따르겠다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동의이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개인은 답도 없는 분쟁 상황 속에서 죽음을 담보해야 되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라면 정치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끼는 그 누구든지 만장일치로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정부 체계의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만장일치의 동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 사람들이 정치 체제를 어떻게 구성할지, 행정부를 구성하는 관리들을 어떻게 임명할지, 입법부의 구성과 회기 등을 어떻게 정할지 등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보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이런 문제들에 있어서 하나의 올바른 대답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의 구성과 법에 관한 논의는 부득불 다수의 의지에 호소해서 해결할 수밖에 없으므로, 공동체 구성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다수결에 따르자는 동의를 하게 된다. 그 다수결의 결과가 비록 자신이 원하지 않는 쪽으로 흘러가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만약 새로 유입된 사회구성원들이 위의 내용에 '동의' 자체를 거부한다면 어쩔 것인가? 로크도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의에 '명시적 동의'와 '묵시적 동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명시적 동의는 약속이나 계약 같은 확실한 동의를 가리킨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런 계약서를 작성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로크는 여기서 "어떤 정부의 영토를 일부 소유하거나 그 땅에 잠시라도 있다면 그 정부의 법률에 복종하기로 묵시적 동의를 한 셈"이라고 주장한다.[22] 이 지점에서 로크의 논리에 많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동의라는 행위는 '자유'를 전제하는데, 묵시적 동의는 일종의 강제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23] 그럼에도 이런 지적에 대해 너그러운 해석을 하자면, 묵시적 동의에 대한 로크의 설명이 적용되는 범위를 토지나 자본의 소유권 같은, 법적으로 인정된 경우들로 한정짓는 것이다. 이럴 경우 로크의 묵시적 동의는 명시적 동의와 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24]
동의를 통해 구성된 정부는 입법권, 집행권, 연합권을 가진다. 입법권은 법률를 제정하는 권력이고, 집행권은 법률의 준수를 강제하는 권력이다. 집행권에는 사법권과 정부의 재량권인 대권이 포함된다. 연합권은 조약을 체결하거나 동맹이나 연합에 가입하고 전쟁을 선포할 권력이다. 이 중, 입법권과 집행권은 서로를 견제함으로써 균형을 이룬다.[25] 로크는 정부의 가장 중요한 권력을 입법권으로 본다.[26]
따라서 정치권력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한 사람의 뛰어난 무력이나 지혜가 아니라 개인 간의 분쟁이 생겼을 때 자신이 속한 정치 공동체의 판단에 따르겠다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동의이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개인은 답도 없는 분쟁 상황 속에서 죽음을 담보해야 되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라면 정치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끼는 그 누구든지 만장일치로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정부 체계의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만장일치의 동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 사람들이 정치 체제를 어떻게 구성할지, 행정부를 구성하는 관리들을 어떻게 임명할지, 입법부의 구성과 회기 등을 어떻게 정할지 등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보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이런 문제들에 있어서 하나의 올바른 대답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의 구성과 법에 관한 논의는 부득불 다수의 의지에 호소해서 해결할 수밖에 없으므로, 공동체 구성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다수결에 따르자는 동의를 하게 된다. 그 다수결의 결과가 비록 자신이 원하지 않는 쪽으로 흘러가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만약 새로 유입된 사회구성원들이 위의 내용에 '동의' 자체를 거부한다면 어쩔 것인가? 로크도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의에 '명시적 동의'와 '묵시적 동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명시적 동의는 약속이나 계약 같은 확실한 동의를 가리킨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런 계약서를 작성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로크는 여기서 "어떤 정부의 영토를 일부 소유하거나 그 땅에 잠시라도 있다면 그 정부의 법률에 복종하기로 묵시적 동의를 한 셈"이라고 주장한다.[22] 이 지점에서 로크의 논리에 많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동의라는 행위는 '자유'를 전제하는데, 묵시적 동의는 일종의 강제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23] 그럼에도 이런 지적에 대해 너그러운 해석을 하자면, 묵시적 동의에 대한 로크의 설명이 적용되는 범위를 토지나 자본의 소유권 같은, 법적으로 인정된 경우들로 한정짓는 것이다. 이럴 경우 로크의 묵시적 동의는 명시적 동의와 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24]
동의를 통해 구성된 정부는 입법권, 집행권, 연합권을 가진다. 입법권은 법률를 제정하는 권력이고, 집행권은 법률의 준수를 강제하는 권력이다. 집행권에는 사법권과 정부의 재량권인 대권이 포함된다. 연합권은 조약을 체결하거나 동맹이나 연합에 가입하고 전쟁을 선포할 권력이다. 이 중, 입법권과 집행권은 서로를 견제함으로써 균형을 이룬다.[25] 로크는 정부의 가장 중요한 권력을 입법권으로 본다.[26]
상대방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 가격을 막는 방패만을 사용하는 자나 공격자의 오만함과 위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손에 칼을 들지 않은 채 공손한 자세로 대처하는 자는 즉각적으로 저항의 밑천이 떨어짐은 물론 그러한 방어가 그 자신에게 오히려 악화된 사태만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중략...) 따라서 저항을 해도 좋은 사람은 반드시 가격(strike)을 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통치론』 235절
로크에 따르면 정부와 법은 시민들의 동의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소수의 권력자가 그 법을 넘어서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모든 시민의 동의를 무시하는 행위가 되고, 이에 따라 시민들은 그런 부당한 정치권력을 무력 저항으로 쫓아낼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즉, 부당한 정치권력에 대한 '무력 저항'은 사회구성원들의 정당한 권리라고 로크는 주장한다.# 이런 권리 주장은 로크 이전에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로크는 '정당한 권리를 넘어서서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나 권력자를 폭정(Tyranny)이라고 부른다. 폭정은 정치권력이 개인의 자연권을 지켜주지 않거나, 공공선을 보호하지 못하거나, 대중의 신뢰를 잃거나, 실정법을 벗어난 행위를 하려고 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그런 폭정에 저항할 권리는 단지 벌어진 폭정에 대해서 '벗어나려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예방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폭정을 저지르는 권력자는 개인에 대해 "먼저 사슬로 묶은 후에 자유인처럼 행동하라"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은 실제로 피해를 받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자연권을 무력화시키려는 그 위협만으로도 그것에 대해 저항할 권리가 생기게 된다.[27]
그렇다면 언제 반란과 저항을 시도해야 하며, 이를 누가 결정하는가? 만일 국가의 권리 침해가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명백히 위협할 정도에 이른다면 개인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당연히 자신을 방어해야 하며, 설령 방어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개인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하지만 한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전쟁에 돌입하는 것은 미친 짓이기 때문에, 정부의 이런 행위가 지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널리 알려지지 않는다면 개인은 자신의 처지를 충분히 고려해 신중히 대처해야 한다.[28]
반면 정부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확산되어 다수의 사람들이 이를 일반적으로 느낄 정도에 이르면 이는 공적인 신뢰를 무너뜨릴 잠재적 위험성을 지니므로 정부에 저항할 공적인 근거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언제 정부가 해체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가장 간단한 대답은, 애매하지만 다수의 판단에 따라 상황이 만들어졌을 때라고 할 수 있다.[29]
로크는 '정당한 권리를 넘어서서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나 권력자를 폭정(Tyranny)이라고 부른다. 폭정은 정치권력이 개인의 자연권을 지켜주지 않거나, 공공선을 보호하지 못하거나, 대중의 신뢰를 잃거나, 실정법을 벗어난 행위를 하려고 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그런 폭정에 저항할 권리는 단지 벌어진 폭정에 대해서 '벗어나려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예방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폭정을 저지르는 권력자는 개인에 대해 "먼저 사슬로 묶은 후에 자유인처럼 행동하라"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은 실제로 피해를 받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자연권을 무력화시키려는 그 위협만으로도 그것에 대해 저항할 권리가 생기게 된다.[27]
그렇다면 언제 반란과 저항을 시도해야 하며, 이를 누가 결정하는가? 만일 국가의 권리 침해가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명백히 위협할 정도에 이른다면 개인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당연히 자신을 방어해야 하며, 설령 방어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개인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하지만 한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전쟁에 돌입하는 것은 미친 짓이기 때문에, 정부의 이런 행위가 지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널리 알려지지 않는다면 개인은 자신의 처지를 충분히 고려해 신중히 대처해야 한다.[28]
반면 정부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확산되어 다수의 사람들이 이를 일반적으로 느낄 정도에 이르면 이는 공적인 신뢰를 무너뜨릴 잠재적 위험성을 지니므로 정부에 저항할 공적인 근거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언제 정부가 해체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가장 간단한 대답은, 애매하지만 다수의 판단에 따라 상황이 만들어졌을 때라고 할 수 있다.[29]
마음은 글자가 전혀 적히지 않은 백지로서, 관념이 전혀 없는 백지라고 가정된다. 이 백지는 어떻게 관념을 갖추게 되는가. 인간의 부지런한 그리고 무한한 상상력이 그려내는 방대한 지식은 어떻게 축척되는가? 마음은 어디에서 이성과 지식의 모든 재료를 얻게 되는가? 이에 대해서 나는 한마디로 경험으로부터라고 대답하겠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 그 바탕을 두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외부의 감각적 대상과 우리 마음 내부의 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 반성이, 우리의 오성에게 사고의 모든 재료를 공급한다. 이 두 가지가 지식의 원천으로, 우리가 갖는 관념 또는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는 모든 관념의 원천이 된다.『인간오성론』 2권 1장 2
근대철학의 핵심분야였던 인식론에서 로크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한 명의 철학자이다. 데카르트 등의 합리론자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본유관념(생득관념)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했지만, 로크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그런 본유관념은 없으며 인간은 경험을 통해 관념(지식)을 형성해나가는 것이라 주장했다는 점에서, 경험론의 창시자라 불린다.
로크에 따르면 인간은 백지상태(Tabula rasa)로 태어나, 이후의 경험을 통해 관념(지식)을 형성해 나가는 존재다. 경험은 외적인 경험인 '감각(Sensation)'과 감각을 내적으로 정리하는 마음의 작용인 '반성(Reflection)'으로 이루어져 있다. 감각은 외부 대상을 감각기관을 통해서 감지하여 받아들이는 능력이고, 반성은 감각에 의해 받아들인 표상들을 비교, 제한, 결합하는 능력이다.[30] 인간은 이러한 감각과 반성이라는 경험의 과정을 통해서 관념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크의 인식론의 구조는 감각→반성→관념으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외부로부터 오는 감각을 반성의 과정을 거쳐 관념으로 만드는 것이 인식이다. 여기서 로크는 관념을 단순관념과 복합관념으로 나눈다. 단순관념은 우리가 사물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여 얻는 관념이다. 이러한 단순관념은 일차성질과 이차성질로 나누어지는데, 일차성질은 연장, 형태, 운동, 길이, 수와 같은 객관적인 성질이고 이차성질은 색, 맛, 향기와 같은 주관적인 성질이다. 복합관념은 우리의 오성(Understanding)이 단순관념을 서로 비교, 제한, 결합하여 이 단순관념들을 재구성하여 만들어지는 복합적인 관념을 말한다. 복합관념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실체에 의존하는 복합관념으로 시간, 자유, 거리등의 단위등과 같은 '양태'의 관념이다. 둘째, 인과성, 동일성, 무한성, 공간, 시간, 도덕,등 관념들 간에 이루어지는 '관계'의 관념이다. 셋째, 여러가지 실체의 성질들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실체'의 관념이다.
로크의 논리에 충실하면, 인간의 모든 지식은 우선 감각을 통해 시작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의 감각은 확실한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사물의 존재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생긴다. 이를테면 우리가 물컵에 담긴 막대의 굴절된 모습을 본다고 해서, 굴절된 그 모양이 막대 자체의 속성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즉, 감각경험의 내용이 사물의 실재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로크는 인간의 감각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실재(Reality)'를 단정할 수 없었다.[31]
로크에 따르면 인간은 백지상태(Tabula rasa)로 태어나, 이후의 경험을 통해 관념(지식)을 형성해 나가는 존재다. 경험은 외적인 경험인 '감각(Sensation)'과 감각을 내적으로 정리하는 마음의 작용인 '반성(Reflection)'으로 이루어져 있다. 감각은 외부 대상을 감각기관을 통해서 감지하여 받아들이는 능력이고, 반성은 감각에 의해 받아들인 표상들을 비교, 제한, 결합하는 능력이다.[30] 인간은 이러한 감각과 반성이라는 경험의 과정을 통해서 관념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크의 인식론의 구조는 감각→반성→관념으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외부로부터 오는 감각을 반성의 과정을 거쳐 관념으로 만드는 것이 인식이다. 여기서 로크는 관념을 단순관념과 복합관념으로 나눈다. 단순관념은 우리가 사물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여 얻는 관념이다. 이러한 단순관념은 일차성질과 이차성질로 나누어지는데, 일차성질은 연장, 형태, 운동, 길이, 수와 같은 객관적인 성질이고 이차성질은 색, 맛, 향기와 같은 주관적인 성질이다. 복합관념은 우리의 오성(Understanding)이 단순관념을 서로 비교, 제한, 결합하여 이 단순관념들을 재구성하여 만들어지는 복합적인 관념을 말한다. 복합관념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실체에 의존하는 복합관념으로 시간, 자유, 거리등의 단위등과 같은 '양태'의 관념이다. 둘째, 인과성, 동일성, 무한성, 공간, 시간, 도덕,등 관념들 간에 이루어지는 '관계'의 관념이다. 셋째, 여러가지 실체의 성질들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실체'의 관념이다.
로크의 논리에 충실하면, 인간의 모든 지식은 우선 감각을 통해 시작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의 감각은 확실한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사물의 존재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생긴다. 이를테면 우리가 물컵에 담긴 막대의 굴절된 모습을 본다고 해서, 굴절된 그 모양이 막대 자체의 속성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즉, 감각경험의 내용이 사물의 실재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로크는 인간의 감각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실재(Reality)'를 단정할 수 없었다.[31]
정치 권력이 부재한 자연 상태를 가정하고 이를 통해 자연 상태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는 점에서 로크의 주장은 홉스가 일찍이 말했던 바와 동일하다. 물론 자연 상태의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조금 다르긴 하다. 홉스는 자연 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보았던 반면에 로크는 자연 상태에서 투쟁은 예외적인 것이고 대체로 서로 간섭하지 않는 평화로운 상태가 이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자연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공통의 재판관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정부의 구성 요소가 된다는 것'도 홉스가 이미 말했던 바이다.[32]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홉스는 서로가 죽고 죽이는 자연 상태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통의 재판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로크는 서로의 다른 입장이 중재되지 못하는 '불편함'을 벗어나기 위해 공통의 재판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홉스는 로크에 앞서서 '사회구성원들의 동의'를 말한 바 있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홉스와 로크 둘 다 동의를 말하지만, 홉스의 동의는 한번 계약이 성립되면 국가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깨지지 않는 동의이기 때문에 진정한 '계약-동의' 개념이라고 보기 힘든 부분이 있으며, 로크의 동의는 계약을 맺은 당사자들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규칙을 세우고 그 규칙을 지금 지키고 있느냐에 대한 동의로서, 실제로 계약의 당사자가 그 규칙을 어기게 되면 그 즉시 그 계약이 깨지게 되는 '동의'이다.
이러한 자연 상태나 동의의 대략적인 과정에 있어서는 홉스가 일찍이 말해왔던 것을 로크가 따라 한 것이라서 새로울 것이 없다. 진정으로 홉스와 구별되면서 로크의 의도가 드러나는 로크만의 주장은 바로 사유재산권과 저항권에 있다. 홉스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적인 대상, 예컨대 음식, 물, 집 등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을 넘어서서 각 개인이 사유재산을 축적할 권리는 없다고 주장한다. 홉스에 따르면,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생존을 위협받을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면 일부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재산을 축적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33] 따라서 군주는 이를 근거로 개인의 사유재산에 관여할 수 있는 것이다.[34]
또한 자연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공통의 재판관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정부의 구성 요소가 된다는 것'도 홉스가 이미 말했던 바이다.[32]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홉스는 서로가 죽고 죽이는 자연 상태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통의 재판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로크는 서로의 다른 입장이 중재되지 못하는 '불편함'을 벗어나기 위해 공통의 재판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홉스는 로크에 앞서서 '사회구성원들의 동의'를 말한 바 있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홉스와 로크 둘 다 동의를 말하지만, 홉스의 동의는 한번 계약이 성립되면 국가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깨지지 않는 동의이기 때문에 진정한 '계약-동의' 개념이라고 보기 힘든 부분이 있으며, 로크의 동의는 계약을 맺은 당사자들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규칙을 세우고 그 규칙을 지금 지키고 있느냐에 대한 동의로서, 실제로 계약의 당사자가 그 규칙을 어기게 되면 그 즉시 그 계약이 깨지게 되는 '동의'이다.
이러한 자연 상태나 동의의 대략적인 과정에 있어서는 홉스가 일찍이 말해왔던 것을 로크가 따라 한 것이라서 새로울 것이 없다. 진정으로 홉스와 구별되면서 로크의 의도가 드러나는 로크만의 주장은 바로 사유재산권과 저항권에 있다. 홉스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적인 대상, 예컨대 음식, 물, 집 등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을 넘어서서 각 개인이 사유재산을 축적할 권리는 없다고 주장한다. 홉스에 따르면,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생존을 위협받을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면 일부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재산을 축적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33] 따라서 군주는 이를 근거로 개인의 사유재산에 관여할 수 있는 것이다.[34]
생활에 필수적인 것들을 얻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지워진 의무여야만 하는데, 단지 권리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자연적 필요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위해 다툰다면 그는 전쟁을 일으키는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전혀 싸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연법의 근본적인 원리를 어기게 된다.토머스 홉스 『시민론』 3장 9절. (『리바이어던』 1, 15장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음)
로크도 일부 사람들이 자원을 함부로 낭비해선 안 된다는 것까지는 인정한다. 하지만 바로 이어서 로크는 재산의 축적, 즉 사유재산을 옹호하는 논리를 펼친다. '남아돌아 썩힐 정도로 많은 소유'는 화폐 경제가 발전하면서 '썩지 않는 화폐'로 축적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자연의 자원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게 되었다는 논리다. 화폐는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의 과잉 소유가 썩어 없어지는 것, 즉 '자원의 낭비'를 막아준다. 이러한 축적이 가능해지면서 사회와 산업, 문화와 예술의 발전에 필요한 사회적 여유도 생겨난다. 화폐를 통해 노동력도 당장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급급하는 수준에서 벗어나고, 노동자들은 생산한 것들을 판매하여 얻은 화폐로써 훨씬 더 나은 생존 조건에 처하는 결과를 낳는다.[35] 따라서 로크에 따르면 통치자는 개인의 사유재산이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축적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또한 홉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인 자연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백성들은 군주에게 생명을 제외한 모든 권리를 넘겨주고 저항을 포기한 채 '일방적'인 복종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로크는 그 계약은 시민들간의 '상호적'인 계약이기 때문에 시민들의 합의(동의)로 정한 법을 통치자가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시민들은 이에 대해 무력으로 저항해도 된다고 주장한다.[36]
또한 홉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인 자연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백성들은 군주에게 생명을 제외한 모든 권리를 넘겨주고 저항을 포기한 채 '일방적'인 복종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로크는 그 계약은 시민들간의 '상호적'인 계약이기 때문에 시민들의 합의(동의)로 정한 법을 통치자가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시민들은 이에 대해 무력으로 저항해도 된다고 주장한다.[36]
로크가 후대의 자유주의에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고 이를 통해 개인의 자유가 그만큼 증진되어 왔다는 것도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긴 하나, 정체성이 현실정치가에 가까웠던 까닭에 그의 사상은 보편적이다가도 서구 유럽 중심적인 사고를 보여준다거나, 인류의 권리나 능력의 평등함을 주장하다가도 다른 곳에서는 신분제에 대한 긍정을 전제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펼치는 등 이론 그 자체의 정교함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하는 면도 많이 있어 논란이 되어 왔다. 사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통치론』 자체가 왕당파와 휘그파 사이의 팸플릿 전쟁에서 휘그파의 대표적 이데올로그로서의 로크가 왕당파 로버트 필머의 『가부장권론』을 반박하기 위해 쓴 것이며, 이렇기에 급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야당 정치가라는 정체성을 빼놓고는 그의 이론을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학자들이 지적하는 부분은, 사유재산에 관련된 로크의 논리가 제국주의 침략의 합리화에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주 거론되는 예시로, 아메리칸 원주민들의 동의 없이 그들의 땅을 갈취한 역사적 사건을 들 수 있다. 원주민들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갔기 때문에 '사유재산권'에 대한 동의의 필요성 자체를 알지 못했고, '사유재산권'을 지키고자 한 '백인 이주민'들의 동의만 합법화되어, 원주민들의 공용재산이었던 토지는 이주민들의 사유재산으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37]
또한 후대의 서구 열강들은 로크의 논리를 악용한 경우도 꽤 많았는데, 예를 들자면 근대 서구 외교의 상징인 포함외교가 대표적이다. 서구 열강들은 국력차이가 너무 나서 통상을 거부하는 저개발국가가 자연법에 기초한 제대로된 법 개념이 없으므로 '자연 상태'라 간주하고 그들에게 반강제적인 개방을 강요했던 것. 또한 그들 저개발국가와 불공정 조약을 진행하고, 그 불공정 조약에 '상호 동의'했으니 문제 없는 거다? 는 식으로 저개발국가를 착취한 점도 지적된다. 그런 와중에 저개발국가가 조약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서구 열강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면, '니네가 감히 우리 상인, 선교사의 권리를 침해해? 죽기 싫으면 다시 문 열지?'라는 제국주의 국가이기주의적 방식으로 로크의 논리가 악용되기 일쑤였다. 대표적으로 아편 전쟁이 그런 논리로 진행됐던 사건.[38]
로크 주장의 문제점은 결국 경험론 철학자로서의 로크와, 당파에 속해 당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정치가로서의 로크라는 이중 자아가 시도 때도 없이 부딪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기 위한 논리를 펼치다가, 자기 자신의 논리의 정합성을 깨뜨리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 이중 자아의 충돌에서 로크의 악명 높은 혼돈, 모순, 비일관성이 생겨나며 동시에 이렇게 붙여도 저렇게 붙여도 쓸만해지는 특성도 생긴다. (이런 애매함은 그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악용할 여지를 남겨 놓는다.) 예를 들자면, '암묵적 동의' 개념이 그렇다. 동의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되는 것인데, '암묵적'이라는 단서는 강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모순이 생긴다. 그래서 암묵적 동의라는 말은 절대적으로 공동체 구성원의 동의나 권리를 존중하는 이론은 아니고 이론적으로 보면 그냥 구색을 맞춰주는 정도라는 것. 로크 본인조차도 동의하고 태어나는 어린이는 없다는 서술로 이 암묵적 동의 개념의 미묘함을 인정했다.
또 재산의 정의에 대해서도 오락가락하는데, 어떤 때는 재산에 천부인권적인 생명과 자유를 포함하다가도 정부와 권리 등의 실질적인 문제가 들어가면 슬그머니 생명과 자유를 제외하는 개념을 사용해 '유산 계급'만이 정부에 의미가 있는 듯 서술한다. 즉, 재산을 가지지 않는 국민들에 대해서는 정부에 대해 정당한 권리가 없는 것처럼 얘기한다. 자유에 대해서도 홉스처럼 누구에게든 적용되는 일관된 법칙을 말하지 못하고, 로크는 자연권에서 양도불가능한 절대적인 자유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동의를 통해 만들어진 법으로 그러한 자유가 (국가에) 양도될 수 있다고도 말하며, 자연권보다 동의가 더 상위의 법칙인 것처럼 얘기하기도 한다. 그래서 역사가 존 액튼은 로크를 일컬어 항상 온당하고 분별 있지만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현실정치적인 면이, 로크의 사상이 널리 퍼질 수 있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특히 학자들이 지적하는 부분은, 사유재산에 관련된 로크의 논리가 제국주의 침략의 합리화에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주 거론되는 예시로, 아메리칸 원주민들의 동의 없이 그들의 땅을 갈취한 역사적 사건을 들 수 있다. 원주민들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갔기 때문에 '사유재산권'에 대한 동의의 필요성 자체를 알지 못했고, '사유재산권'을 지키고자 한 '백인 이주민'들의 동의만 합법화되어, 원주민들의 공용재산이었던 토지는 이주민들의 사유재산으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37]
또한 후대의 서구 열강들은 로크의 논리를 악용한 경우도 꽤 많았는데, 예를 들자면 근대 서구 외교의 상징인 포함외교가 대표적이다. 서구 열강들은 국력차이가 너무 나서 통상을 거부하는 저개발국가가 자연법에 기초한 제대로된 법 개념이 없으므로 '자연 상태'라 간주하고 그들에게 반강제적인 개방을 강요했던 것. 또한 그들 저개발국가와 불공정 조약을 진행하고, 그 불공정 조약에 '상호 동의'했으니 문제 없는 거다? 는 식으로 저개발국가를 착취한 점도 지적된다. 그런 와중에 저개발국가가 조약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서구 열강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면, '니네가 감히 우리 상인, 선교사의 권리를 침해해? 죽기 싫으면 다시 문 열지?'라는 제국주의 국가이기주의적 방식으로 로크의 논리가 악용되기 일쑤였다. 대표적으로 아편 전쟁이 그런 논리로 진행됐던 사건.[38]
로크 주장의 문제점은 결국 경험론 철학자로서의 로크와, 당파에 속해 당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정치가로서의 로크라는 이중 자아가 시도 때도 없이 부딪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기 위한 논리를 펼치다가, 자기 자신의 논리의 정합성을 깨뜨리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 이중 자아의 충돌에서 로크의 악명 높은 혼돈, 모순, 비일관성이 생겨나며 동시에 이렇게 붙여도 저렇게 붙여도 쓸만해지는 특성도 생긴다. (이런 애매함은 그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악용할 여지를 남겨 놓는다.) 예를 들자면, '암묵적 동의' 개념이 그렇다. 동의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되는 것인데, '암묵적'이라는 단서는 강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모순이 생긴다. 그래서 암묵적 동의라는 말은 절대적으로 공동체 구성원의 동의나 권리를 존중하는 이론은 아니고 이론적으로 보면 그냥 구색을 맞춰주는 정도라는 것. 로크 본인조차도 동의하고 태어나는 어린이는 없다는 서술로 이 암묵적 동의 개념의 미묘함을 인정했다.
또 재산의 정의에 대해서도 오락가락하는데, 어떤 때는 재산에 천부인권적인 생명과 자유를 포함하다가도 정부와 권리 등의 실질적인 문제가 들어가면 슬그머니 생명과 자유를 제외하는 개념을 사용해 '유산 계급'만이 정부에 의미가 있는 듯 서술한다. 즉, 재산을 가지지 않는 국민들에 대해서는 정부에 대해 정당한 권리가 없는 것처럼 얘기한다. 자유에 대해서도 홉스처럼 누구에게든 적용되는 일관된 법칙을 말하지 못하고, 로크는 자연권에서 양도불가능한 절대적인 자유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동의를 통해 만들어진 법으로 그러한 자유가 (국가에) 양도될 수 있다고도 말하며, 자연권보다 동의가 더 상위의 법칙인 것처럼 얘기하기도 한다. 그래서 역사가 존 액튼은 로크를 일컬어 항상 온당하고 분별 있지만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현실정치적인 면이, 로크의 사상이 널리 퍼질 수 있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제목 | 발간 연도 |
관용에 관한 편지 A Letter Concerning Toleration | |
통치론 [39] Two Treatises of Government | |
인간 오성론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 |
이자와 화폐에 대한 논문 Some Considerations of the Interest and Money [40] | |
교육론 Some Thoughts Concerning Education | |
기독교의 합리성 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 [41] |
로크의 책 중 『통치론』과 『인간 오성론』이 가장 중요하다. 『통치론』은 한국에서 『정부론』 또는 『시민 정부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어떻게 불러도 의미는 대략 틀리지 않기 때문에 번역이 잘 된 것을 찾아서 읽으면 될 듯하다. 한편 『인간 오성론』은 『인간 지성론』으로도 불린다. 이것 역시 한국어 번역이 되어 있는 상태인데, 동서문화사에서 출판한 『인간지성론』은 번역가가 일본어 책을 주로 번역해 온 경력으로 볼 때 일본어 중역으로 의심된다. 영문 직역은 철학 교수들이 공동 번역하여 한길사에서 출판한 『인간지성론』이 있다. 다만 철학 원서에 대한 직역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탓인지 인지도가 많이 떨어져서, 절판된 이후로는 인터넷으로도 살 수 없으며 도서관에서도 보기 힘들다.
나머지 로크의 책들도 한국에 거의 다 번역되어 있다. 『관용에 관한 편지』에서는 종교에 대한 관용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으며, 볼테르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교육론』에서도 교육을 해야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잘 구분하여 지금에서 봐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얘기들을 하고 있어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한번쯤은 볼만하다. 그리고 종교철학책인 『기독교의 합리성』 역시 다른 여러 이름으로 출판되어 있다.
궤변은 스스로의 무지에 대해 더 자만하게 만드는 데 적합할 뿐이다.
Sophistry is only fit to make men more conceited in their ignorance.
선동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폭동을 만들게 하는 유일한 것, 그것은 바로 압제다.
But there is only one thing which gathers people into seditious commotion, and that is oppression.
새로운 의견은 항상 의심을 받고, 대개는 반대를 받는다. 반대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만 단지 이전부터 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New opinions are always suspected, and usually opposed, without any other reason but because they are not already common.
나는 항상 사람의 행동들이 그들의 생각을 가장 잘 해석한다고 생각해 왔다.
I have always thought the actions of men the best interpreters of their thoughts.
여기에 있는 어떤 사람의 지식도 자신의 경험을 넘어설 수 없다.
No man's knowledge here can go beyond his experience.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마음이 깃든다는 것은, 이 세상의 행복 상태에 대한 짧지만 완벽한 설명이다.
A sound mind in a sound body, is a short but full description of a happy state in this world.
- 특이하게도 1670년에 출판된 하멜 표류기 프랑스 번역판인 "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andois, Sur la Coste de l'Isle de Quelpaerts: Avec la Description du Royaume de Corée: Traduit du Flamand; Par Monsieur Minutoli"라는 책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 존 로크의 서명을 해당 책의 앞부분에 확인 할 수 있다. 1670년대에 출판된 하멜 표류기 프랑스 번역판을 존 로크가 읽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인문사회철학 교육 단체인 “존 로크 학회”[44]가 존재한다. 매년 6-7월 즈음해서 경제, 정치, 철학, 법학, 사학, 신학을 주제로 국제 에세이 경연 대회를 주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 Fellow of the Royal Society, 왕립학회 회원[2] Locke의 용인발음은 /lɒk/이다. 철자만 보고 이중모음인 /əʊ/로 오해하여 '로크'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주로 -oke 형태에 한정된다. 로크의 성씨는 의도적으로 ck가 사용됐기 때문에 단모음인 /ɒ/를 나타내며 외래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원칙적으로는 '록'으로 표기해야 한다. 다만 관용적으로 '로크'라는 표기가 사용돼 왔기 때문에 국립국어원의 규정용례는 '*로크, 존'이다.(규정용례에 쓰인 별표는 해당 표기가 관용 표기임을 뜻한다.)[3] 수 많은 자유주의 분파에 영향을 미쳤다.[4] 미국 독립선언서와 미국 헌법에 로크의 사상이 오롯이 담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보다 로크의 정신을 더 계승한 국가는 미국이다.[5] 로크의 사상은 볼테르와 루소를 통해서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6] 범 자유주의 사상의 공통 시조.[7] 더 나아가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파생된 이념인 자유지상주의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다.[8] 본명은 앤서니 애슐리 쿠퍼(Anthony Ashley Cooper, 1st Earl of Shaftesbury PC FRS , 1621~1683). 제임스 2세 때 재무장관과 재상(Lord Chancellor)을 역임하였다. 휘그당의 기원으로 여겨진다.[9] 샤프츠베리 백작 1세는 1683년 1월 암스테르담에서 사망한다.[10] 에식스 주 하이레이버에 있는 오츠.[11] 단, 로크는 여기서 '가해자를 처벌할 권리'가 그 피해당사자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가해자를 처벌할 권리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자연)법을 위반한 사람을 처벌할 권리를 지니며 자연법의 집행자가 된다." (8절) 로크의 주장에 따르면, 처벌권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에 가깝게 보인다. 따라서 왜 자연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이 가해자를 처벌할 '(의무에 가까운) 권리'가 생기는지, 개인에게 합당한 이유를 내놓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 부분이다. 아직 공통의 규칙에 대한 '동의'를 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모든 사람'이 가해자를 처벌할 권리가 생긴다면, 굳이 우리는 '동의'를 할 필요가 있는가? 정부의 설립도 개개인에게 동의를 구할 것이 아니라, 그런 '의무에 가까운 권리'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면 되지 않느냐는 지적이 뒤따른다.[12] 존 로크 『통치론』 18절[13] 존 로크 『통치론』 14절[14] "로크는 세계가 인류에게 공동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이 세계에 대한 공동의 소유권이 아니라 세계가 우리들 각각이 자기보존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바를 자유롭게 얻을 수 있는 공동의 자원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세계는 공동의 재료이며, 우리는 자유롭게 세계로부터 자기보존을 위한 수단을 취할 수 있다." (폴 켈리 『로크의 통치론 입문』 서광사 2018. p.116)[15] 노동은 인신(신체)의 손을 사용한 작업이다. 우리가 노동을 투입한 모든 것은 우리의 인신과 연결되며 따라서 궁극적이고 배타적으로 우리의 소유가 된다.[16] "로크는 재산의 정의로운 최초 취득이 갖추어야 할 두 가지 필요조건을 도입한다. 이들은 공유 자산을 '충분히 남겨 두어야 한다는' 조건(27절)과 '남아돌아 썩힐 정도로 많이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31절)이다." (폴 켈리 『로크의 통치론 입문』 서광사 2018. p.123)[17] "화폐의 주요 장점은 우선 화폐가 없다면 남아돌아 썩힐 정도로 많이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과 충돌하게 될 재산의 축적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축적이 가능해지면 사회와 산업, 문화와 예술의 발전에 필요한 사회적 여유도 생겨난다. 화폐를 통해 노동력도 당장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급급하는 수준에서 벗어나게 된다. 노동자들이 생산한 것들을 판매하여 화폐를 소유함으로써 훨씬 더 나은 생존 조건에 처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폴 켈리 『로크의 통치론 입문』 서광사 2018. p.130)[18] 다만 로크의 논의는 여기에서 그치며, '자본 불평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현대의 철학자들은 '자본 불평등'이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를 야기시켜 생존조건을 도리어 낮추게 되었으므로, 로크의 주장에서 이 부분이 더 고려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19] Scholars have also pointed to Sir William Petty's Treatise of Taxes of 1662 and to John Locke's labor theory of property, set out in the Second Treatise on Government (1689), which sees labor as the ultimate source of economic value.[20] "로크는 정치 이전에 성립하는 사유 재산권에 기초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설명하려 했지만 이 경우 노동의 결과물에 대한 사유 재산권을 주장할 수 있을 뿐, 노동의 투입에 근거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그리 쉽게 확보할 수는 없다." (폴 켈리 『로크의 통치론 입문』 서광사 2018. p.119)[21] "자연 상태에서 각 개인은 자연법의 준수를 강요하고 위반을 처벌할 집행력을 지닌다. 하지만 앞서 13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집행력을 행사할 평등한 권리는 사람들의 불공정함과 감정 개입 때문에 수많은 불편함을 낳게 된다. 만일 모든 사람이 자연법을 효과적으로 공정하게 적용하는 재판관, 배심원 또는 집행관이라면 법의 적용이나 위반 시 적절한 처벌 수위를 둘러싼 논쟁에서 제멋대로 불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일은 없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정치사회 또는 시민사회의 기원은 사람들의 권리를 둘러싼 논쟁에서 유일한 공정한 판단을 내리려는 이성적 욕구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국가의 임무는 이런 일을 정당하게 수행하는 것, 곧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률을 정함으로써 개인들의 권리가 명확하고 엄밀하게 행사되도록 이끌고, 개인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이런 법률을 적용하고 집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크가 생각한 최초 계약의 핵심은 자연 상태의 불편함을 극복할 수 있는 정부를 확립하는 것이다." (폴 켈리 『로크의 통치론 입문』 서광사 2018. p.159)[22] "이 문제에 대해 나는 어떤 정부의 영토 중 일부라도 소유하거나 향유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함으로써 묵시적 동의를 한 셈이며, 적어도 그렇게 향유하는 동안에는 그 정부에 속한 다른 사람들과 같은 정도로 정부의 법률에 복종할 의무를 진다고 말하려 한다. 이런 향유가 그 사람과 그의 상속인이 누리는 영구적인 토지 소유이든, 단지 일주일 동안 머무르는 것이든 아니면 그저 대로를 따라 자유롭게 여행하는 것이든 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존 로크 『통치론』 119절)[23] "무언가에 동의하려면 우리는 자유롭게 동의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동의가 성립하려면 우리는 얼마든지 동의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며, 동의하지 않는 행위 때문에 생기는 부담이 이런 행위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크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강간범이 흉기로 위협해 어쩔 수 없이 성행위에 동의한 여성이나 노상강도가 권총을 들이대 지갑을 건네주는 데 동의한 사람의 경우를 놓고 이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성행위나 지갑을 넘기는 데 동의했다고 말해서는 결코 안 된다." (폴 켈리 『로크의 통치론 입문』 서광사 2018. p.172)[24] "결국 묵시적 동의의 개념은 일관성이 없으며, 동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로크의 주장 대부분과 대립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런 여러 비판에 대한 너그러운 대응 중 하나는 묵시적 동의에 대한 로크의 설명이 적용되는 범위를 토지나 자본의 소유권 같은, 법적으로 인정된 이익을 산출하는 핵심적인 경우들로 크게 좁히는 것이다. 이들과 관련해서 로크의 주장은 명시적 동의에 더욱 가까운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폴 켈리 『로크의 통치론 입문』 서광사 2018. p.178)[25] 따라서 로크는 이권분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몽테스키외는 로크의 논의에서 더 나아간다. 집행권에서 사법권을 따로 떼어내어 "입법권, 집행권, 사법권"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삼권분립을 주장한다.[26] "사람들 각각의 주장을 규제하고 이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공통의 권력을 지닌 특정한 정치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사람들의 동의를 통해서, 따라서 사람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 바로 이 입법권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정치권력은 오직 피통치자들의 동의에 기초해서만 성립하는데 이런 동의는 국가의 입법권을 통해 표현되므로 정의상 입법권보다 상위의 정치권력은 존재할 수 없다." (폴 켈리 『로크의 통치론 입문』 서광사 2018. p.187)[27] "정부에 대한 신뢰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진 경우에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데, 이런 상태에 이르는 과정은 권리나 법을 위반한 어떤 특정한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서서히 이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크는 저항권의 행사 요건을 오직 권리 침해가 실제로 발생한 경우로만 제한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인다. 이렇게 제한한다면 이는 마치 '... 먼저 노예가 되라고 명령하고 그 다음에 자유를 지키라고 말하거나 먼저 사슬로 묶은 후에 자유인처럼 행동하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220절) 따라서 저항의 권리는 단지 부당한 침략에서 '... 벗어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예방하는 것을 포함한다. 정부와 사람들 사이의 신뢰라는 개념이 포착하려는 바는 바로 이 점이다." (폴 켈리 『로크의 통치론 입문』 서광사 2018. p.210)[28] 폴 켈리 『로크의 통치론 입문』 서광사 2018. p.213[29] 폴 켈리 『로크의 통치론 입문』 서광사 2018. p.213[30] 엄밀하게 말하면 로크에게 있어선 반성도 일종의 감각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식 재료는 모두 감각으로부터 얻는다는 것이 로크의 주장인 셈이다.[31] 다만 로크는 우리의 감각들이 일정한 다발들로 묶여있으며 항상 일정한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으로 미루어 외부의 실체가 있을 거라 짐작하였다. 예를 들어 마당의 장미는 우리에게 항상 특정한 향기인 후각과 빨간색이라는 특정한 시각감각, 만질 때의 특정한 촉각 등의 여러 감각의 다발로써 경험된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의 다발은 우리가 밤에 장미를 경험할때 시각이 경험되지 않더라도 후각과 촉각으로 미루어 빨간색이라는 감각이 다발로 묶여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선뜻 독립적으로 보이는 감각들이 항상 다발로 묶여 경험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감각의 다발을 지탱하는 어떠한 실체(substance)가 알려지지 않지만 있을거라 추정된다고 보았다.(supposed but unknown support)[32] 자연 상태에 대한 홉스의 설명에 따르면, 무엇이 위험한지에 대한 판단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사람들이 다르게 판단한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는 사건들에 있어서 본질적인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 관점은 홉스가 다른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법의 기초』에서 제시한 태도와 비슷하다. "오류 없이 정확하게 가르친다는 것의 명백한 표시는 바로 아무도 그 반대를 가르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런 경우가 있다면 아무리 적은 경우일지라도 없는 것은 아니다." (1부 13장 3절) 이처럼 불확실한 경우에서 사태에 대한 진실 같은 것은 없고, 따라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을 선호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판단과 그 밖의 사람들의 판단이 일치하길 원하는 강력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단순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즉, 사람들은 모두 단일한 의견의 원천을 찾아야 하고, 불확실하거나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경우 그들 각각의 위험에 대해 그 원천의 견해를 받아들일 것이다. 이 단일한 원천이 지닌 힘은 시민들을 보호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원천은 동일한 위험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을 조율할 수 있을 것이고, 시민들에 의해 새롭게 수립된 '코먼웰스'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는 범죄자나 타국에 대해 공동의 행동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공동의 판관은 그 정의상 코먼웰스를 지배하는 주권자(sovereign)라고 할 수 있다. 주권자는 반드시 한 사람일 필요가 없지만, 어떤 유형의 회의체적 결정이라고 하더라도 단 하나의 의지만이 필요하다. 홉스는 정치에 관한 저작 세 권 모두에서 다른 종류의 정부 형태보다 군주정을 선호하는 낮은 차원의 이유들을 제시하긴 했지만, 그의 정치 이론은 공화정을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정부 형태에 차별 없이 적용된다. 홉스의 이론은 『리바이어던』 37장에 가장 깔끔하게 요약되어 있는데, 거기서 그는 주권자를 "불확실한 모든 경우에서 우리의 사적 판단을 일임한 신의 대리인" (2권)으로 묘사했다. (리처드 턱 『홉스』 조무원 옮김, 파주, 교유서가, p.134~135)[33] 자연의 근본적인 권리에 대한 홉스의 설명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질적인 대상, 예컨대 음식, 물, 집 등을 가질 권리가 있다. 따라서 자연 상태에서는 최소한의 사유재산, 혹은 적어도 그와 같은 유형이 존재한다. 홉스는 더 나아가 자연 상태의 인간은 자신의 보존을 위해 필요한 것 이상을 축적할 권리는 없다고까지 주장했다. 만약 그러한 재산 축적이 다른 사람이 생존하는 데 필수적인 것들을 빼앗는 것이라면 말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생존을 위협받을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면 일부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재산을 축적하는 것은 (홉스에 따르면)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 (리처드 턱 『홉스』 조무원 옮김, 파주, 교유서가, p.144~145)[34]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위태로워지거나 코먼웰스의 구성원들이 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에 접근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재산의 분배가 이루어진다면, 그때는 주권자가 개입해서 재산을 재분배해야만 한다. 주권자는 모든 사람들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가질 수 있도록 항상 보장해야만 한다. 『리바이어던』 30장에서 홉스는 코먼웰스가 극빈자들이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식량을 공급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사적인 인간들의 자선에 내버려져서는 안 되며, (자연의 필요가 요구하는 만큼) 코먼웰스의 법률에 의해서 제공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주장은, 주권자가 판단하기에 코먼웰스를 보호하기 위해 충분할 만큼 과세할 권리가 주권자에게 있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선박세 논쟁 가운데 제기된 주장에서처럼 '사유재산권'은 주권자의 행동에 대한 어떠한 항변도 될 수 없다. (리처드 턱 『홉스』 조무원 옮김, 파주, 교유서가, p.146)[35] 폴 켈리 『로크의 통치론 입문』 서광사 2018. p.130[36] 물론 홉스도 자기의 직접적인 생존에 걸린 문제(자기 보존의 권리)에 있어서는 저항을 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생존 본능에 기반한 개인적인 반항에 가까운 것이었다. 홉스는 통치자가 법을 마음대로 정한다고 백성들이 그것 때문에 저항하는 것은 용인하지 않았다. 홉스에게 있어서 군주가 자의적으로 정한 법(명령)이 백성들의 생존을 위협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백성의 '자기 보존의 권리'를 해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백성들은 군주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로크는 반대로 통치자가 시민들의 합의로 정한 '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무력 저항을 마다하지 않아야 된다고 주장했다.[37] 사유재산권의 대상을 유럽이 아닌 전 세계에 적용하고, 자본주의도 무조건 이득만 쫒지 않고 그 나름의 룰을 가지게 된 계기는 양차 대전이란 비극과 공산주의의 도전을 겪으면서다. 이런 정신은 대서양헌장으로 명문화 되었다.[38] 더 정확하게 말하면, 포함외교는 단순히 저 논리로만 진행됐다기 보다는 일종의 계몽주의의 폭주와 연관이 깊다. 과거 트럼프 이전까지 네오콘들이 현대 미국 보수주의의 주류로 군림했을 시절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을 전파한다는 명목으로 말그대로 전세계를 들쑤시고 다니며 각지에서 반미감정을 촉발시켰는데,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적 개입주의의 논리에 따라 우리가 저 미개한 놈들을 강제로라도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그리고 문명을 전파해주어야 한다는, 좋게 말하면 정의감이 넘치고 신랄하게 말하면 오지랖이 넘치는 논리에 따라 자행된 것이 포함외교이다. 포함외교를 가장 적극적인 수단으로 활용한 영국의 파머스턴 자작 헨리 존 템플(방금 나온 아편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이런 부류였다, [39] 당시 정치학자 토마스 홀리스가 출판사 사장 앤드류 밀러에게 의뢰해, 로크의 『통치론』을 익명으로 출판했다. 로크의 통치론은 원래 두 개의 논문이었다. 첫 번째 논문은 왕당파의 로버트 필머의 『가부장권론』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두 번째 논문은 소위 『통치론』이라는 책으로 잘 알려져 있는 논문이다. 첫 번째 논문은 두 번째 논문을 대략적으로 요약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유럽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두 번째 논문만 따로 편집된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따라서 보통 통치론을 말할 때는 두 번째 논문만을 지칭한다.[40] 원제: Some Considerations on the consequences of the Lowering of Interest and the Raising of the Value of Money[41] 원제: 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 as Delivered in the Scriptures[42] 굳이 순서를 정한다면 홉스, 로크, 루소로 나열할 수 있다.[43] 로크는 18세기 영국 이신론자들에게 이신론의 철학적 근거인 인식론적 토대를 제공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이신론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정통 기독교 신자였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삼위일체를 부정한 아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으며, 심지어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기까지 하였다. 그런 점에서 그는 분명 정통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정통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계시와 기적, 종교적 의례를 모두 받아들였으며 이신론에 정초한 자연종교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기성종교와 자연종교의 양극단 사이에서 중용을 모색했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태하 『근대 영국철학에서 종교의 문제』 북코리아, 2018, p.140~141)[44] John Locke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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