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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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하게 혹은 불구대천의 원수관계를 질 정도로 싫어하거나 원망하는 감정.
혐오는 대상이 싫어서 피하거나 치우고 싶은 소극적 개념이라면 증오는 죽여버리거나 파괴하고 싶어하는, 혐오보다는 좀 더 적극적으로 공격적인 감정이다. 두 감정은 서로 상호 작용하며 공존하는 경우가 많다.
철학자들은 증오에 대한 여러 가지 주요 정의를 제시했다. 르네 데카르트는 어떤 나쁜 것 혹은 특정 집단에서 제거되도록 촉구되는 것이라고 정의했으며 바뤼흐 스피노자는 증오란 극도의 요인 때문에 생기는 고통의 일종이라고 보기도 했다. 정신분석학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증오를 어떠한 불행 혹은 불편한 감정을 없애려고 하는 자아 의식에서 발현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더 현대적인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증오를 깊고 참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화나 적대감을 개인, 집단, 사물에 대해 가지는 것이라고 보고 있기도 하다.
분노는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누그러지지만 대개 증오는 별다른 조치가 없을 땐 오히려 시간이 지나갈수록 강력해진다.[3]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일시적인 감정 상태라기보다는 개인의 태도나 성향으로 여겨지고 심할 경우에는 살인까지 일으킬 수 있다. 특히 사랑에서 증오로 변하게 되면 그 정도가 강렬해 지는데, 살인사건 중 치정(
증오는 사람들에게 나쁘게 인식된다. 다만 맹자가 '수오지심'이라고 하여 부끄럽고 올바르지 못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 인간의 본연 중 하나라고 강조한 것과 그리스도교 시편에서 '하느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모든 죄를 미워하시고, 모든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죄인에게 분노하신다.'라는 구절이 등장하는 등, 종교나 여러 가르침에서 '악에 대한 증오'는 정당한 것으로 바라보고 이를 정의로서 권장한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에서는 악에 대한 증오를 인간의 도리로서 전통적으로 중요시하고 있으며, 도덕·윤리의 핵심으로서 강조하고 있다.
'악에 대한 증오'를 정당한 것으로 보아 이를 사회적으로 정의의 한 형태로서 권장하는 것은 종교나 철학만이 아니라 정치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이쪽 분야에서의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의 끝판왕은 역시 정체성 정치와 엄벌주의. 실제로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진보주의, 보수주의, 내셔널리즘, 페미니즘 등 수많은 정치 사상들이 바로 이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라는 코드를 내세워 성공적으로 정치계에 안착한 바 있고, 근대와 현대에 있어서 이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는 시민 혁명과 민주화, 신분제 폐지, 근대적 법치주의 확립, 식민지 해방, 성평등 등을 가능케 한 중요한 원인들 중 하나가 되고 있었다.
인류의 근대사와 현대사는 사실상 이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라는 개념의 이해 없이는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 그렇기에 현대의 주요 정치 사상 중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라는 요소를 가지지 않는 사상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거의 존재하지 않다 시피 하며, 현대의 수많은 정당들과 정치인들 역시 좌우 성향을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이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를 자신들의 사상의 일부로서 깊숙히 내면화하고 있는 경향을 보인다. 즉 현대 사회에서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정치에 관여하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이 악에 대한 증오를 정당한 것으로 보고, 이를 정의구현이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현대의 주요 정치 사상 대부분이 악에 대한 증오를 정당한 것으로 보고 있으니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다만 문제는 "악"에 대해 명확히 정의할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생긴다.[4] 실제로 서로를 적대하는 많은 세력, 국가들이 서로를 악이라 생각하며, 그 악을 증오하는 것을 정의로운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인정을 받는다하여 증오를 발산하는 것은 결국 공동체간의 악순환만을 반복할 뿐이다. 이런 증오들은 진실을 보는 것을 방해하며, 그 증오를 통해 일어나는 행동들은 적대하는 "악"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상황이 바로 전쟁. 역사상 수많은 전쟁들이 정의를 실현하고 악을 징벌하고자 하는 선의를 담아 정의구현을 목표로 하여 '성전'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발생하였음을 생각해봐도 이는 명백하다.
또한 정치 분야에서의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의 끝판왕 중 하나가 정체성 정치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라는 코드는 현실정치의 세계에서도 수많은 병폐를 불러오고 있기도 하다.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라는 코드에 깊숙히 빠진 이들은 자신과 적대하는 모든 것들을 악으로 간주하고 그 모두를 증오하는 등 정의라는 이름의 독선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고, 이것이 한층 더 극단화될 경우 위선의 레벨에까지 치닫기도 한다. 악에 대한 증오를 정당한 것으로 보는 시점에서 사실상 현대의 거의 모든 정치 사상은 이러한 독선이나 위선으로 흑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는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제국주의나 파시즘, 독재 등을 타파하고 자유와 평등을 이룩하며 정의를 바로 세우는 핵심적인 원동력으로 기능했지만, 동시에 바로 그러한 부정적 요소들이 탄생하는 원동력으로도 작용한 바 있다. 특히 파시즘은 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데, 파시즘은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를 명목으로 탄생했으며 그와 동시에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를 구현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그 자체가 대표적인 절대악으로 간주되어 폐기되는 수순을 밟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파시즘은 악에 대한 증오로부터 태어나, 이윽고 악에 대한 증오에 의해 멸망한 것이다. 실로 아이러니한 사실이지만, 파시즘을 지지한 이들과 파시즘에 반대한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악에 대한 증오를 정당화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고 각자가 서로 믿고 있었던 정의를 충돌시키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악에 대한 증오'를 정당한 것으로 보아 이를 사회적으로 정의의 한 형태로서 권장하는 것은 종교나 철학만이 아니라 정치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이쪽 분야에서의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의 끝판왕은 역시 정체성 정치와 엄벌주의. 실제로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진보주의, 보수주의, 내셔널리즘, 페미니즘 등 수많은 정치 사상들이 바로 이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라는 코드를 내세워 성공적으로 정치계에 안착한 바 있고, 근대와 현대에 있어서 이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는 시민 혁명과 민주화, 신분제 폐지, 근대적 법치주의 확립, 식민지 해방, 성평등 등을 가능케 한 중요한 원인들 중 하나가 되고 있었다.
인류의 근대사와 현대사는 사실상 이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라는 개념의 이해 없이는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 그렇기에 현대의 주요 정치 사상 중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라는 요소를 가지지 않는 사상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거의 존재하지 않다 시피 하며, 현대의 수많은 정당들과 정치인들 역시 좌우 성향을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이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를 자신들의 사상의 일부로서 깊숙히 내면화하고 있는 경향을 보인다. 즉 현대 사회에서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정치에 관여하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이 악에 대한 증오를 정당한 것으로 보고, 이를 정의구현이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현대의 주요 정치 사상 대부분이 악에 대한 증오를 정당한 것으로 보고 있으니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다만 문제는 "악"에 대해 명확히 정의할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생긴다.[4] 실제로 서로를 적대하는 많은 세력, 국가들이 서로를 악이라 생각하며, 그 악을 증오하는 것을 정의로운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인정을 받는다하여 증오를 발산하는 것은 결국 공동체간의 악순환만을 반복할 뿐이다. 이런 증오들은 진실을 보는 것을 방해하며, 그 증오를 통해 일어나는 행동들은 적대하는 "악"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상황이 바로 전쟁. 역사상 수많은 전쟁들이 정의를 실현하고 악을 징벌하고자 하는 선의를 담아 정의구현을 목표로 하여 '성전'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발생하였음을 생각해봐도 이는 명백하다.
또한 정치 분야에서의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의 끝판왕 중 하나가 정체성 정치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라는 코드는 현실정치의 세계에서도 수많은 병폐를 불러오고 있기도 하다.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라는 코드에 깊숙히 빠진 이들은 자신과 적대하는 모든 것들을 악으로 간주하고 그 모두를 증오하는 등 정의라는 이름의 독선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고, 이것이 한층 더 극단화될 경우 위선의 레벨에까지 치닫기도 한다. 악에 대한 증오를 정당한 것으로 보는 시점에서 사실상 현대의 거의 모든 정치 사상은 이러한 독선이나 위선으로 흑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는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제국주의나 파시즘, 독재 등을 타파하고 자유와 평등을 이룩하며 정의를 바로 세우는 핵심적인 원동력으로 기능했지만, 동시에 바로 그러한 부정적 요소들이 탄생하는 원동력으로도 작용한 바 있다. 특히 파시즘은 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데, 파시즘은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를 명목으로 탄생했으며 그와 동시에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를 구현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그 자체가 대표적인 절대악으로 간주되어 폐기되는 수순을 밟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파시즘은 악에 대한 증오로부터 태어나, 이윽고 악에 대한 증오에 의해 멸망한 것이다. 실로 아이러니한 사실이지만, 파시즘을 지지한 이들과 파시즘에 반대한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악에 대한 증오를 정당화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고 각자가 서로 믿고 있었던 정의를 충돌시키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더할 수 없는 미움으로 그들을 미워합니다. 그들은 저에게 원수가 되었습니다. (I hate them with perfect hatred[5]: I count them mine enemies.)
"나는 모든 편견으로부터 자유롭다. 나는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증오한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선전의 가장 큰 적은 '지식인 주의' 이다."
"원한은 원한으로 (갚는다고) 풀어지지 않으리니 원한을 버릴 때에만 풀리리라."석가모니(법구경 1장)
"나의 증오는 너의 모든 선의보다 천 배는 강력하다"
"하늘에는 사랑이 증오로 변한 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고, 경멸 받는 여자만큼 사나운 것도 없다."윌리엄 콩그리브
"증오하지 마십시오. 오직 사랑받지 못한 자들만이 증오를 합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자들이."
"다른 인간을 증오하는 대가는, 자신을 더 적게 사랑하는 것이다."엘드리지 클리버
"증오는 생산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랑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영리하다."
"가장 강하고 가장 폭력적인 증오는 언제나 문화 수준이 가장 낮은 곳에서 보게 될 것이다."
"증오는 적극적인 불만이요, 질투는 소극적인 불만이다. 따라서 질투가 바로 증오로 바뀌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은 그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증오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알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품고 있는 증오는 가슴 속의 죽지 않은 석탄 덩어리라서 다른 누구보다 당신 스스로에게 더 치명적이에요."라와나 블랙웰
"증오에 대처하려면 자신과 똑같아지라는 증오의 유혹을 뿌리치는 수밖에 없다. 증오로써 증오에 맞서는 사람은 이미 자기도 따라 변하도록 허용한 셈이며, 증오하는 자가 원하는 모습에 가까워진 것이다. 증오에는 증오하는 자에게 부족한 것, 그러니까 정확한 관찰과 엄밀한 구별과 자기회의로써 대응해야 한다."
"미움 받는 존재는 모호하다. 정확한 것은 온전히 미워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혐오사회》 , 카롤린 엠케[8]
"증오는 싫어하는 이에게 허비하기엔 너무 아까운 감정이다."
"슬픈 자는 기쁜 자를 미워하고, 기쁜 자는 슬픈 자를 미워한다. 빠른 자는 느린 자를 미워하고, 게으른 자는 민첩한 자를 미워한다."호라티우스(로마의 시인)
"증오는 협박을 당한 데 대한 겁쟁이의 복수심이다."
"증오는 가슴에서 나오고, 경멸은 머리에서 나온다. 어느 감정도 완전히 우리의 통제하에 있지 않다."
유빈(柳玭; 중국의 학자)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지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알렉산드르 - 안나 카레니나
"국민적인 증오심은 문화가 낮으면 낮을수록 강하다."
"증오는 사람을 장님으로 만든다."
"사랑의 증오만큼 격한 것은 없다."프로펠로티우스(로마의 시인)
"스스로 즐길 수 없는 사람들은 종종 타인을 원망한다."
보통 강해지는 요소로 등장하지만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파멸하고 마는 결말을 보여준다. 또한 본인이 증오 때문에 스스로를 망칠 것을 알면서도 증오에 더더욱 빠지는 것도 클리셰.[10]
- 니어:오토마타에 등장하는 적성 NPC의 행동원리. 작품을 진행해나가면서 이 증오의 연쇄가 중요한 키포인트가 된다.
- 닥터후의 달렉이 가진 유일한 감정이다. 닥터후/뉴 시즌 8 EP.8 오리엔트 특급 열차의 미라(Mummy on the Orient Express)에서 바로 전 에피소드에서 보여준 닥터의 무책임함과 여행에 지쳐 마지막 이별여행으로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 탄 클라라는 자신이 간 콘서트의 뮤지션의 말을 빌려 '증오란 당신이 좋아하지 않은 사람에게 낭비하기에는 너무 강렬한 감정이라고' 표현하였다.
- 라이브 어 라이브에서 각 편 최종보스들의 이름은 라틴어권에서 증오를 뜻하는 '오디오'라는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 블레이드 앤 소울 스토리 만악의 근원. 작중 굵직한 대다수의 일이 이걸로 시작된다.
- 블루 아카이브 - 에덴조약 편의 주요 키워드이다.
- 소닉 더 헤지혹 시리즈에 등장하는 카오스 에메랄드는 어떻게 힘을 이끌어내냐에 따라 결과물이 다르게 묘사된다. 선한 정신으로 이끌어내면 슈퍼화 같이 비약적인 능력 상승을 얻을 수 있지만 반대로 에메랄드를 증오와 슬픔으로 이끌어내면 다크 소닉, 퍼펙트 카오스 같이 파워업 하지만 대신 이성을 잃어버려 통제가 불가능해진다.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일곱 샤 중 하나인 증오의 샤
- 피안도의 미야모토 아키라는 미야비에 대한 증오심으로 무쌍난무를 찍을 수준의 검술과 정신력을 수련하였다.
- Glitchtale에서는 작중 현존하는 물질로 나오며 사용자를 강하게 해주는 대신 정신이 침식된다. 차라는 몰살루트에 의한 반작용으로 증오를 갖게 되었고, 베티같은 경우는 아가테 시절부터 있던 카퍼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이 작용된 듯 하다.
[1] Hate는 동사이나 명사로도 종종 쓰인다.[2] 성은 남성이다. 독일어에서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는 대부분 남성형이기 때문.[3] 증오는 해소될만한 상황이 오거나, 스스로 증오를 해소시킬만한 상황을 만드는 것에 성공하지 않는 한 더 강화된다. 증오로 인해 발생하는 공격성은 증오가 완전히 해소되기 전까진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키는 악순환을 낳는다.[4] 그래서 성경에서도 가끔씩 인간 멋대로 선악을 구분지을 수는 없다는 식의 묘사가 기술되어있다.[5] 둠 1편 에피소드 제목에 이 구절이 인용되었다.[6] 가톨릭 기준. 개신교의 개역한글판으로는 "내가 저희를 심히 미워하니 저희는 나의 원수니이다"로 되어있다.[7] 미국의 코미디언, 배우, 작가 등 다양한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염세적인 사고방식으로 유명하다.[8] 독일 여성 성 소수자 작가. 현대에 지나치게 만연한 혐오와 증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다루기 위해《혐오사회》를 썼다.[9] 실제로 ‘카인 콤플렉스’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종교적 경험에 관심이 많았다고 알려진 헝가리 정신과 의사인 레오폴드 손디가 1969년에 ‘카인, 악의 형태’를 출간하며 처음으로 체계화시킨 개념으로, ‘자신과 가장 비슷하고 가까운 혈육을 미워하는 심리’이다. 즉 아버지의 인정을 갈망한 나머지,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 하는듯한 형제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콤플렉스이다.[10] 이 부분은 어느 정도 현실고증도 되는 부분이다. 심리적인 증오는 별다른 터치를 하지 않아도 오히려 더욱 깊어지며, 증오심을 자극할만한 요소가 있으면 더더욱 깊어진다. 또한 증오심을 해소시키는데 실패할수록 더욱 더 깊어진다. 그래서 분노와 많이 유사하면서 다르다. 시간이 지나면서 약해지거나 희석되는 분노와 달리, 증오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사라지지 않고 계속 강해지거나 해소해도 평생 응어리로 남아 트리거가 된다.[스포일러] 그러나 결말부까지 가면 증오의 연쇄 묘사까지는 몰라도 증오의 연쇄에 대한 제대로 된 해결은 실패했다는 평이 주류다.[12] 자신의 연인이자 엘프인 로잘리를 괴롭혔기 때문. 하지만 로잘리는 피사로가 인간들을 멸망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13] 에피소드 1에서 요다가 증오가 고통으로 고통은 다크사이드로 인도한다는 말이 나온다[14] Hate는 동사이나 명사로도 종종 쓰인다.[15] 성은 남성이다. 독일어에서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는 대부분 남성형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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