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요시타카
구로다 요시타카 | |
조스이 거사 초상화(소후쿠지 소장) | |
구로다 등나무 | |
무사 정보 | |
시대 | 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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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덴분 15년 음력 11월 29일(1546년 12월 22일) (그레고리력 1547년 1월 1일) |
사망 | 게이초 9년 음력 3월 20일(1604년 4월 19일) |
개명 | 고데라 만키치( |
별명 | 간베에( |
계명 | |
세례명 | 시메온(シメオン) |
주군 | 고데라 마사모토 → 오다 노부나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 |
관위 | 종5위하 가게유 차관, 증 종3위 |
씨족 | 본성: 우다 겐지 고데라씨, 구로다씨 |
부모 | 구로다 모토타카, 아카시 마사카제의 딸 |
형제자매 | 도시타카 등 |
배우자 | 데루(구시하시 고레사다의 딸) |
자녀 | 나가마사, 구마노스케 |
구로다 요시타카(일본어:
생애[편집]
젊은 시절[편집]
덴분 15년 음력 11월 29일, 구로다 모토타카의 장남으로 히메지(
에이로쿠 10년(1567년)에 요시타카는 가문을 물려받고 결혼하여 히메지 성주 대리가 되었다. 성주 대리 당시 이웃한 아카마쓰 가문이 3천여 병력을 거느리고 구로다 가문의 본성인 히메지 성을 침공하자 단 300여명으로 이를 격파해 이름을 떨친다.
덴쇼(
덴쇼 3년(1575년) 노부나가는 중신 하시바 히데요시(
1년 후 아리오카 성이 함락되고 요시타카의 가신 구리야마 도시야스(
덴쇼 8년(1580년)에는 "히메지성은 하리마를 통치하기엔 최고의 땅"이라며 자신의 거성을 히데요시에게 제공하고 자신은 시키토 군(
덴쇼 10년(1582년) 모리씨의 명장 시미즈 무네하루(
도요토미 정권 아래에서[편집]
덴쇼 11년(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賤ケ
덴쇼 14년(1586년)에 종5위하 가게유 차관(
그리고 규슈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던 국인세력인 기이 시게후사(
그런데 덴쇼 15년(1587년) 7월에 히데요시에 의해 바테렌 추방령이 발표되자, 다카야마 우콘은 이에 반항하다 추방되었지만 요시타카는 솔선하여 명령을 수행했다. 히데요시의 측근인 요시타카의 행동은 선교사와 기독교를 신앙으로 믿는 제후(
덴쇼 17년(1589년) 가문을 장남 구로다 나가마사(
분로쿠(
게이초 3년(1598) 8월 히데요시가 죽었다. 조스이는 히데요시의 사후 12월에 수도로 올라와 후시미(
かようの
時 は仕合 わせになり申 し候 。はやく乱 申 すまじく候 。そのお心得 にて然 るべき候 。
하양(賀陽 )[1] 이 가까워오면 마음이 행복해집니다. 조만간 난리가 있을 듯 하오이다. 이를 염두에 두시고 향후를 생각하시오.
이것은 조스이가 가까운 시일내 반드시 천하의 패권을 둘러싼 대란이 일어날 것임을 예측했다는 것을 나타낸것이기도 했다.
세키가하라 전투[편집]
게이초 5년(1600년) 5대로(
그에 상응하여 조스이도 규슈에서 동군으로써 거병했다. 그런데 병력의 대부분은 나가마사가 이끌고 상경해 버렸기에 병력이 부족했다. 때문에 조스이는 영내의 백성들에게 돈을 주고 병사로 고용하였다. 그 결과 1만 명 정도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속성 군단이 결성되게 되었다. 조스이는 이 병력을 이끌고 9월 9일(10월 15일) 분고에 침공했다.
그런데 같은 날 가문 재흥을 목표로 서군에 참가한 오토모 요시무네(
조스이는 원군 요청에 응하여 9월 13일(10월 19일) 이시가키바루(
그후도 조스이는 서군에 속하던 구마가이 나오모리(
세키가하라 전후 나가마사는 이에야스로부터 공적 제 1위로써 지쿠젠 후쿠오카(
인물평[편집]
- 일반에게 전해지는 요시타카의 활약에 대해서는 군사의 활약을 멋지게 묘사했던 에도시대의 군기물(
軍記 物 ) 등에서 과장된 부분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 다케나카 한베에(
竹中 半兵衛 )와 함께 히데요시의 쌍벽이라 일컬어지며 '양쪽의 베에(両 兵衛 )', '두 명의 베에(二 兵衛 )'라 칭해졌다. - 도쿠가와 히데타다(
徳川 秀忠 )는 요시타카를 '이 시대의 장량과 같은 인물'이라 평했다.(명장언행록) - 요시타카는 매독에 걸려, 머리에 흉칙한 부스럼이 있었다고 한다.
- 일반에게는 호시탐탐 천하을 노린 야심가로써 책에 설명된 부분이 많았으나, 주군을 배신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의외의 일면도 있었다. 고데라 마사모토의 경우에도 "배신이다"라고 하지 않고 "배신당했다"라고 말해지는 경우가 많고, 세키가하라 전투 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계에서도 두 사람의 입장은 같은 도요토미 가문의 가신일 뿐 주종 관계가 아니었다. 소설가 사카구치 안고(
坂口 安吾 )는 "천재였지만 다만 전쟁매니아로써 야심은 2류"라고 평하였다.
일화[편집]
- 명장언행록(
名将 言行 録 )에 따르면 혼노지의 변(本能寺 の変 )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했을 때 요시타카는 히데요시에게 "주군의 운이 열릴 기회가 찾아왔군요"(御 運 が開 かれる機会 が参 りましたな)라고 발언했다. 이것을 계기로 히데요시는 요시타카의 지모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요시타카를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부젠 나카츠 12만 석을 하사한 것도 이것을 나타낸 것이다. - 같은 책에는 히데요시가 가신들에게 「나를 대신해 천하를 얻을 자는 누구일 것 같으냐」(わしに
代 わって、次 に天下 を治 めるのは誰 だ)라고 묻자 가신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나 마에다 도시이에(前田 利家 )의 이름을 들었지만, 히데요시는 구로다 간베(요시타카)를 들며 「간베 그 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내게서 천하를 빼앗아버릴 것이야」(官兵衛 がその気 になれば、わしが生 きている間 にも天下 を取 るであろう)라고 말했다. 측근들은 「간베 님은 10만 석 다이묘일 뿐이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했는데, 히데요시는 「너희들은 그놈의 진짜 역량을 몰라. 그놈에게 100만 석을 주었다면 단숨에 천하를 빼앗아버렸을 것이야」(お前 達 は奴 の真 の力量 を分 かっていない。奴 に100万 石 を与 えたならば途端 に天下 を奪 ってしまう)라고 말했다. 이를 전해들은 간베는 「집안의 화가 되겠다」며 곧장 머리를 깎고 조스이(如水 )라는 호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 또한 명장언행록에는 「히데요시는 평소 세상에 두려워한 것은 도쿠가와와 구로다였다. 아무래도 도쿠가와는 온화한 사람이었다. 구로다는 두창을 앓고 아무리 해도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秀吉 、常 に世 に怖 しきものは徳川 と黒田 なり。然 れども、徳川 は温和 なる人 なり。黒田 の瘡 天窓 は何 にとも心 を許 し難 きものなりと言 はれしとぞ)라고 기록하기도 하였다. - 요시타카가 나가마사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은거한 것은 44세 때였는데, 왕성하게 활동할 연령에 은거를 하게 된 이유는 히데요시에게 주살당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 때쯤 이시다 미쓰나리 등과 같은 젊은 인재들의 대두 등도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 만년에 가신에게 차갑게 대했다고 한다. 이것은 순사자(
殉死 者 )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또한 자신의 장남 나가마사가 당주로써 가신단의 단결을 얻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고 전해진다. - 아라키 무라시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노부나가는 요시타카가 귀환하지 않자 무라시게에게 넘어간 것으로 판단하고 당시 인질로 맡겨졌던 나가마사를 살해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다케나카 한베에는 기지를 발휘하여 나가마사를 구했다. 그 때문에 다케나카 시게하루(다케나카 한베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구로다 가문의 문장에 다케나카 가문의 문장을 함께 사용하였다.[2]
- 세키가하라 전투 후 돌아온 나가마사가 "이에야스 님이 제 손을 잡고 공로를 치하하셨다"고 자신만만해 하자 요시타카는 "그때 너의 왼손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왼손으로 이에야스를 죽였어야 한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
- 위키미디어 공용에 구로다 요시타카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전임 구로다 모토타카 |
제4대 구로다가 당주 1567년 ~ 1589년 |
후임 구로다 나가마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