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 | |
도쿠가와 이에야스 | |
세 잎의 접시 꽃 고리 | |
제1대 에도 막부 정이대장군 | |
재임 | 1603년 음력 2월 12일 ~ 1605년 음력 4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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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 - |
후임 | 도쿠가와 히데타다 |
무사 정보 | |
시대 | 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
출생 | 덴분 11년 12월 26일 (율리우스력: 1543년 1월 31일, 그레고리력: 1543년 2월 10일) 미카와국 오카자키 |
사망 | 겐나 2년 4월 17일 (그레고리력: 1616년 6월 1일) 스루가국 슨푸 |
개명 | 마쓰다이라 다케치요(아명) 마쓰다이라 모토노부(1556년, 초명) 마쓰다이라 모토야스(1558년) 마쓰다이라 이에야스(156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1566년) |
별명 | 관동의 너구리 |
신호 | 도쇼다이곤겐( |
계명 |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이마가와 요시모토→우지자네→아시카가 요시아키→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요리 |
최종직위 | 정이대장군 |
주요 참전 | 센고쿠 시대 |
씨족 | 마쓰다이라씨→도쿠가와씨(도쿠가와 장군가) |
부모 | 아버지: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어머니: 오다이노가타(미즈노 다다마사의 딸) |
배우자 | 쓰키야마도노 아사히히메[1] 이하 18명의 측실 |
자녀 | 11남 5녀 |
종교 | 정토종 |
도쿠가와 이에야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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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식 한자 | |
가나 표기 | とくがわ いえやす |
국립국어원 표준 | 도쿠가와 이에야스 |
로마자 | Tokugawa Ieyasu |
에도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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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일본어: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이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을 지휘하였으며, 승전 이후 에도 막부를 개창하여 첫 쇼군(재임: 1603년 ~ 1605년)이 되었다. 1605년 3남 히데타다에게 쇼군 직을 물려준 다음에도 오고쇼의 자격으로 슨푸에 머무르며 정치에 참여하였다. 사후에는 닛코 동조궁에 묻혔으며, 도쇼다이곤겐(
생애[편집]
어린 시절[편집]
이에야스는 1543년 1월 31일 (화력(
이에야스는 태어난 지 2년 만에 어머니와 헤어졌다. 1544년 외조부 미즈노 다다마사가 세상을 떠나고 뒤를 이은 외삼촌 미즈노 노부모토(
강경한 태도를 들은 이마가와 씨는 마쓰다이라씨에 지원을 약속하였고[11], 노부히데도 이에야스를 죽이지 않고 아쓰타 신궁에 있던 이에야스를 나고야(
센고쿠 시대[편집]
1556년, 15세가 된 이에야스는 관례를 올림과 동시에 관례의 후견인이었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받은 마쓰다이라 지로사부로 모토노부(
이에야스의 생애 첫 출전은 결혼한 이듬해였던 1558년 2월 5일에 있었다.[20] 그의 임무는 오다 노부나가(
그 후 몇년 간 이에야스는 독립을 선언하지 않고 신중을 기하며, 이마가와 씨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오와리 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다 씨의 관심이 소홀했던 미카와 국 서부의 오다 씨 성채들을 자주 공격하였다.[27] 이처럼 이에야스는 혼다 다다카쓰, 이시카와 가즈마사, 고리키 기요나가, 사카이 다다쓰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등을 앞세워 마쓰다이라 씨의 확장에 몰두하다가, 1561년 이마가와 씨를 배신하였다.[28] 한편 노부나가는 미노국의 사이토 요시다쓰와의 전쟁을 앞두고 미즈노 노부모토에게 이에야스 측과의 교섭을 의뢰했고[27], 미즈노의 중재 하에 이에야스는 1562년 기요스성에서 비밀리에 오다 노부나가와 기요스 동맹을 결성하였다.[29] 기요스 동맹은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을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28] 이에야스가 오다 씨와 비밀 동맹을 결성한 것을 알아챈 이미가와 씨의 계승자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이에야스를 소환하려 했으나, 이에야스가 병을 핑계로 오려 하지 않자 분노하여 미카와 중신들의 처자를 기둥에 세우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책형(
미카와 국을 통일한 이에야스는 내정을 어느 정도 정비한 후 마침내 이마가와 씨의 본거지를 치기로 했다.[36] 이에야스는 사카이 다다쓰구에게 명하여, 미카와 국 동부에 있는 이마가와씨의 최대 거점인 요시다성을 공략하여 점령하도록 했다.[37] 그 직후에는 혼다 히로타카가 다하라 성을 점령하며 미카와 국 동부에서 이마가와 씨를 완전히 몰아내 미카와국을 통일하였다.[37] 이와 동시에 이에야스는 이시카와 이에나리와 사카이 다다쓰구를 가로(
이에야스는 신겐의 뒤를 이은 다케다 가쓰요리가 미노국일대를 점령하자, 1582년 호조 씨를 포섭하여 오다, 도쿠가와, 호조가 동시에 가이 국을 공격하여 4월 다케다 씨를 멸망시켰다.[51] 그리고 같은 해 이에야스는 스루가, 도토미, 미카와 등 세 개의 구니를 장악했다.[5][51][52][53]
6월, 오다 노부나가와 장남 오다 노부타다가 노부나가의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반으로 할복하는 혼노지의 변이 발생하면서[54][55] 같이 초청받았던 이에야스가 서둘러 미카와 국으로 탈출하는 과정에서[55][56] 이가국 닌자 출신인 핫토리 한조와 교토의 대상인인 자야 시로지로의 도움을 받았다.[55][56] 자야 시로지로는 이에야스에게 혼노지의 변을 처음으로 알렸고, 핫토리는 고카(
한편 히데요시는 아케치를 죽인 후 기요스에서 두살의 오다 가문의 적손인 산포시(
히데요시와의 대립[편집]
시즈가타케 전투 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회유할 목적으로 조정을 통해 그에게 정4품 하계 좌근위권중장(
신종 이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시코쿠와 규슈를 정벌하는 동안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거처를 하마마쓰에서 슨푸로 옮겼다.[66] 이에 앞서 1585년 이에야스는 슨푸에 성을 쌓는 공사를 시작했었다.[66] 1590년, 시코쿠와 규슈를 완전히 평정한 히데요시는 천하 통일의 야망을 완수하기 위해, 간핫슈(
통일 이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교토에서 최대한 떨어뜨리기 위해 오다와라성에서 이에야스에게 선약했던 대로 도카이도의 5개 국을 거두어들이는 대신 간핫슈 지역과 이즈(
임진왜란[편집]
1592년 히데요시는 명나라와 인도 정복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완수하기 앞서[78][79],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준비를 갖추며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히젠국에 새로 축조해 놓은 나고야 성(
권력 쟁탈전[편집]
“ | 이슬처럼 떨어져 이슬처럼 사라질 나의 육신이여, 나니와( |
” |
— 도요토미 히데요시[81]
|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는 후시미성에서 이에야스를 비롯한 다섯 다이로들에게 늦게 얻은 유일한 혈육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잘 부탁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81] 히데요시 사망 이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생전에 다이묘들 간의 혼인 관계 맺기를 금지했던 것을 무시하고 여러 다이묘들과 사돈 관계를 맺으며 입지를 넓혀갔다.[81][82] 그러자 같은 다이로였던 마에다 도시이에를 비롯한 나머지 다이로들과 부교들이 이에야스를 비난하면서 도요토미 가의 가신들은 이에야스를 따르는 무리와 마에다 도시이에를 따르는 무리로 나뉘게 되었지만[81] 도시이에가 후시미 성에서 이에야스와 화해함으로써 직접적인 충돌은 피할 수 있었다.[81] 그러나 1599년 이시다 미쓰나리(
한편, 아이즈로 돌아간 우에스기 가케카쓰가 새로운 성을 쌓고 모반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84] 이듬해인 1600년 이에야스는 가케카쓰에게 진상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가케카쓰의 가로인 나오에 가네쓰구는 이에 대해 "각 구니의 풍습에 지나지 않는다"며 반박하였고[84] 이에야스는 즉각 각 다이묘들에게 아이즈 정벌을 명했다.[84] 이에야스가 여러 다이묘들을 이끌고 긴키를 출발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미쓰나리는 반도쿠가와 파를 결집시키기 위해 사이고쿠 다이묘들에게 격문을 돌려 거병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모리 데루모토(
한편 동군이 9월 14일에 진을 구축하자, 서군은 오가키 성을 빠져나와 서쪽의 세키가하라로 이동하였다. 이는 동군을 세키가하라의 비좁은 분지로 유인한 다음, 한꺼번에 포위하여 섬멸하려는 작전의 일환이었다.[87] 서군은 세키가하라에서 반월 형태의 진을 치고 동쪽에서 일렬종대로 진격해오는 동군을 일방적으로 포위해 공격하려 하였으나, 이미 이에야스는 서군쪽의 지휘체계가 이에야스 자신의 명령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동군과는 달리 통합되지 못하고 서군쪽 지휘관들이 모두 따로 움직인다는 것을 간파하고 이러한 다이묘들 중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깃카와 히로이에 등 서군의 주요 다이묘들에게 배반 또는 내통을 약속받았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에야스에게 적극 협조하지는 않았지만 이시다 미쓰나리에게도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군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87] 다음 날인 9월 15일 동군은 배신을 약속한 서군 다이묘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서군을 궤멸시켰으며, 미쓰나리는 이부키야마로 도주하고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던 시마즈 군은 동군의 중앙을 정면 돌파해 이세국으로 탈출하였다.[88] 이렇게 하여 일본 열도의 주도권을 두고 다툰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와 동군이 압승을 거두며 막을 내렸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서군의 중심 역할을 하며 이에야스에게 저항했던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안코쿠지 에케이(
쇼군 재임[편집]
1603년 3월 24일, 이에야스는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었으며, 후시미성에서 고요제이 천황의 선지(
양위 이후[편집]
1605년,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비롯한 도요토미 씨의 위협 세력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도쿠가와 쇼군의 형식적인 지위를 안정적으로 굳히고자 쇼군 직위를 3남 히데타다에게 계승하게 한다.[주 10][94][95] 그리고 히데요시의 정실 고다이인을 보내 히데타다가 교토에 상경하였을 때 히데요리도 인사를 하도록 요구하였다.[95] 하지만 히데요리가 요구를 강하게 거부하자 6남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를 보내 양해를 구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95] 이에야스는 1607년 슨푸 성으로 들어가 명목 상으로는 은거하였지만 곧 스스로를 오고쇼(일본어:
한편 이에야스는 비록 외국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는 하였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강경한 탄압 정책을 전개하였다.[97] 기독교를 금지한 명령 곧 금교령은 이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후반에 히데요시에 의해 발표되었지만, 이에야스 대에 이르러서도 예수회를 비롯한 외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계속 찾아왔다.[97] 처음에 이에야스는 이들을 지배 체제로 편입해 해외 무역의 확대를 도모코자 전교 활동을 묵인하였지만[97][98] 일부다처제의 부인이나 할복에 대한 금지, 야훼 이외의 신들에 대한 숭배를 금지한 기독교의 특성에 따른 다신교인 신토와의 대립 등은 막부를 긴장하게 하였으며[99], 결국 오카모토 다이하치의 뇌물 사건 이후 도요토미 씨의 잔당 쪽에 기독교도가 많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선교사와 신자들을 탄압하는 정책으로 바꾸었다.[97][100] 새 금교령은 1612년 3월 에도, 오사카, 교토에 발표되었고, 이듬해 12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97] 금교령 발표 이후 이에야스는 모든 백성들이 불교의 신도가 되도록 하였으며,[101] 기독교를 믿고 있던 이들에게도 신토나 불교로의 개종을 강요하였는데, 이를 거부한 다카야마 우콘을 비롯한 열네 명의 신자가 마카오와 필리핀 등지로 추방되었다.[97] 이어서 1616년에는 유럽인의 거주·무역 지역을 히라도와 나가사키의 데지마 일대로만 한정하였다.[102] 또, 이에야스의 조정에 대한 압력도 계속되었다.[103]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교토에 쇼시다이(
이에야스는 슨푸에 머무르면서 무장 이외에도 여러 가신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으며, 일본에 들어온 외국인들을 외교 및 무역의 고문으로서 적극 활용하였다.[104][105] 1600년 네덜란드의 '데 리프데'(De Liefde)호가 규슈의 분고에 표류하였을 때, 이에야스는 데 리프데 호의 선원이었던 얀 요스틴, 윌리엄 애덤스 등을 에도로 초청하여, 외교·무역 고문으로 삼고[105][106] 네덜란드, 영국과의 무역을 추진하였다.[105]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은 1609년과 1613년에 차례대로 일본에 내항하여, 이에야스의 허가를 받은 후 히라도에 상관을 설치하였다.[105][106] 또한 스페인과의 교역에도 열의를 보여 1609년 가즈사국에 표류한 루손의 전 총독 돈 로드리고를 교토의 상인 다나카 쇼스케에게 소개하여 무역 교섭을 시도하기도 하였다.[106]
한편으로 주변국과의 외교 정책도 중시하여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이래 단절되었던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1607년까지 조선과 포로를 교환하였으며 같은 해 조선 통신사가 처음으로 파견되었다.[107] 1609년에는 기유약조이 체결되어 삼포왜란 이래 폐지되었던 왜관이 동래에 다시 설치되어 무역이 정상화되었다.[107] 명나라와는 정식적인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히라도와 나가사키에서의 사무역 정도만이 성행하였으며[107] 타이완, 필리핀, 시암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도 사무역이 종종 이루어졌다.[107] 다만 같은 해, 사쓰마국의 시마즈 이에히사가 류큐 왕국 (오키나와)을 침략하여 류큐 왕국을 막부의 속국으로 만들었다.[107]
오고쇼 시절의 가신들[편집]
- 오쿠보 나가야스 - 악사(일본어:
猿楽 師 사루가쿠시[*]) 출신으로 횡혈식 채굴법과 수은 방류를 통한 제련법 등을 알림. 금은 부교로 음명되어 이와미 은광, 사도 금광, 이즈 금광의 채굴을 맡기도 하였다.[104] - 곤치인 스덴 - 승려.
- 덴카이 쇼닌 - 승려.
- 하야시 라잔 - 유학자.
- 자야 시로지로 - 혼노지의 변 당시 이에야스를 도움.
- 고토 쇼자부로 -대상인.
- 윌리엄 애덤스(일본어:
三浦 安 針 미우라 안진[*]) - 영국인. - 얀 요스텐 반 로덴스타인(네덜란드어: Jan Joosten van Lodensteyn, 일본어: 耶
楊子 야요스[*])-네덜란드인.[104]
오사카 전투와 도요토미씨 멸문[편집]
오고쇼로 있던 이에야스는 여전히 도쿠가와씨에 위협적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요토미 측의 잔당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생전에 오사카성에 남겨둔 막대한 도요토미 씨의 재산을 최대한 소모시키려는 계략을 세웠다.[108] 우선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도요토미 씨의 부흥을 기원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긴키 지역의 신사, 사찰의 수리와 새로운 신사, 사찰의 조영을 건의하였다.[108] 히데요리는 이를 수락하여 긴키 일원의 신사와 사찰의 수리 복구와 신축 공사에 착수하였는데, 그 결과 상당한 자금이 소모되었다.[108] 특히 교토 히가시야마의 호코 사(
“ | 국가는 편안하고, 군주와 신하는 풍요롭고 즐거우며, 자손은 번창하길 기원합니다. ( |
” |
이에야스는 하야시 라잔과 곤치인 스덴의 말을 바탕으로 이 명문의 내용이 도요토미씨의 번영을 기원하는 것이며, 이에야스 (
1614년 10월 후다이 다이묘, 도자마 다이묘들에게 출진 명령을 하달함과 동시에 자신은 총지휘관이 되어 오사카 성 부근의 덴노지에 진을 치고 히데요리를 포위하였다.[111] 같이 출전한 히데타다는 오사카 성을 총공격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지구전을 통해 히데요리를 굴복시키려 했던 이에야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11] 그 때문에 11월 19일 이에야스 측의 하치스카 요시시게(
최후[편집]
1616년 정월, 슨푸 근교로 매 사냥을 나갔던 이에야스는 측근으로부터 돈카쓰, 덴푸라를 먹은 후 그날 밤 복통을 일으키며 중태에 빠졌는데[114], 시의 (
그의 유훈은 《동조궁신군어유훈》(일본어:
“ |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를 필요 없다. 자유롭지 못함을 항상 곁에 있는 친구로 삼는다면 부족할 것은 없다. 마음에 욕심이 생기면 궁핍했을 때를 걱정하라. 인내는 무사장구 ( |
” |
이외에 이에야스는 죽음을 앞두고 혼다 마사즈미, 곤치인 스덴, 덴카이 쇼닌을 불러, 사체를 스루가 국 구노잔(
인물과 평가[편집]
이에야스는 마쓰라의 센류에 제시된 시에서 묘사된 것처럼 "인내의 귀재"로 평가받는다.[123][124] 이에야스는 어린 시절에 부를 여의고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겪었으며, 계속 복종을 강요당해왔다.[123] 하지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히데요시에게 철저히 복종하며, 임진왜란 도중에도 영지만 지키며 신중히 대처하였다고 평가받는다.[124] 때문에 이에야스의 삶은 일본에서 여러 소설과 책, 드라마, 영화, 연극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123] 나아가 일본 사람들은 그를 늘 ‘일본의 10걸’로 선정하면서 존경하고 있다.[123] 반면 에도 시대 서민들 사이에서는 천하 통일의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며 '살쾡이 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여[125] 상반되는 평가를 가지고 있다.[126]
개인 능력으로는 문무를 겸비했으며 두뇌는 어지간한 학자 이상으로 학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이는 데다가 의술에도 꽤 능해서 본인 스스로의 주치의를 자처해 온갖 종류의 처방을 했으며 무예로는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을 싸움으로 이길 정도로 싸움을 잘했다.
실제로는 일본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이었으나 메이지 유신에 가담한 인물들이 조선 침략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온갖 음해와 왜곡질로 폄훼시켜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인물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 당시 전쟁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 병력을 단 한 명도 파병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을 침략하려는 인물들에게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다. 실제로도 201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 일본에서조차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훌륭한 국가지도자임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는 NHK 대하드라마 군사 간베에에도 잘 드러나 있다.
굉장한 천재로 특히 권모술수에 극단적으로 능했다. 이시다 미츠나리가 자신을 불구대천으로 여기고 심지어 호소카와 가라샤를 죽게 만드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되려 그런 이시다 미츠나리를 보호했다. 이는 죄가 너무 커서 언젠가 처형 시킬 이시다 미츠나리를 미끼로 던져 넣고 이를 믿고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다이묘들을 색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통해 이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한 모든 이들을 자신의 적으로 간주하여 이시다 미츠나리 본인을 포함한 3명의 악질 다이묘를 참수하고 나머지 다이묘 대부분의 영지를 깎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차피 일본의 주인이 되는 상황에서 처음부터 누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 것인지 미리 파악한 후 에도 막부를 창업했다.
또한 어떠한 일이 있든 본인이 직접 싸우지 않는 매우 교묘한 술수를 부려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로서도 독보적으로 부하 병력의 피해가 적은 다이묘였다. 임진왜란에서는 풍토병과 잇키 등 온갖 변명을 늘어놓고 그것도 히데요시 본인이 이에야스를 그 곳으로 전봉 시켜서 일어난 일이라는 매우 확실한 명분까지 있어서 임진왜란에 불참하는 데에 성공해 병력을 온전히 보존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역시 동군 포진은 선봉으로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을 세우고 정작 본인의 주력 부대는 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전투 보다는 작전 지휘에 집중한 데다가 적을 무찔러서 이긴 게 아니라 적을 배신 시켜서 이기는 등 어떤 상황에서든 아군 병력의 피해를 최소화했으며 다른 병력으로 적을 제압하는 일이 잦았다. 이렇듯 이에야스는 은근히 군재가 뛰어났으며 특히 아군의 피해를 줄이는 것에서 최고 수준의 능력을 발휘했다.
족보[편집]
고조부 마쓰다이라 나가치카 | ||||||||||||||||
증조부 마쓰다이라 노부타다 | ||||||||||||||||
고조모 마쓰다이라씨 | ||||||||||||||||
조부 마쓰다이라 기요야스 | ||||||||||||||||
고외조부 오코치 미쓰나리 | ||||||||||||||||
증조모 오코치씨 | ||||||||||||||||
부친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 ||||||||||||||||
조모 아오키씨 | ||||||||||||||||
도쿠가와 이에야스 | ||||||||||||||||
외증조부 미즈노 기요타다 | ||||||||||||||||
외조부 미즈노 다다마사 | ||||||||||||||||
모친 오다이노가타 | ||||||||||||||||
외조모 게요인 | ||||||||||||||||
가족 관계[편집]
이에야스는 62세에 11남인 도쿠가와 요리후사 (미토 도쿠가와 가의 시조)를 낳았고 70세에 임질에 걸렸을 정도로 많은 자식을 남겼는데[127] 이후 이에야스의 다른 자식들이 고산케를 창가하면서 이에야스의 직계 자손이 끊어진 이후에도 고산케에서 번갈아 쇼군직을 계승하여 대가 끊기지 않았다.[127] 이에야스는 11남 5녀를 슬하에 두었다. 아래는 이에야스의 자식들이다.
정실 및 측실과 소생 자녀[편집]
- 정실 : 쓰키야마도노(
築山殿 )- 장남 : 마쓰다이라 노부야스
- 장녀 : 가메히메(
亀 姫 ) -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정실
- 계실 : 아사히히메(
朝日 姫 )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복여동생 - 측실 : 니시코오리노츠보네(
西郡 局 ) - 우도노 나가모치의 딸 - 측실 : 오코챠(於古
茶 , 쵸쇼인) - 나가미 요시히데의 딸- 차남 : 유키 히데야스 - 유키 하루토모의 양자. 에치젠 마츠다이라가
- 측실 : 오아이(お
愛 , 류센인) - 사이고 키요카즈의 양녀. 토즈카 타다하루의 딸- 3남 : 도쿠가와 히데타다 - 에도 막부 2대 세이타이쇼군
- 4남 : 마쓰다이라 다다요시 - 마츠다이라 이에타다의 양자
- 측실 : 오타케(お
竹 , 료운인) - 이치카와 마사나가의 딸 - 측실 : 오츠마(於都
摩 , 묘신인) - 아나야마 노부타다의 양녀. 아키야마 토라야스의 딸- 5남 : 마쓰다이라 노부요시 - 아나야마 카츠치요의 양자
- 측실 : 오챠아(於茶
阿 , 쵸카쿠인)- 6남 :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 마츠다이라 야스타다의 양자
- 7남 : 마쓰다이라 마쓰치요
- 측실 : 오카메(於亀, 소오인) - 시미즈 무네키요의 딸
- 측실 : 오히사(於久, 후쇼인) - 마미야 야스토시의 딸
- 4녀 : 마츠히메(
松 姫 )
- 4녀 : 마츠히메(
- 측실 : 오만(お
万 , 요쥬인) - 카게야마 우지히로의 양녀. 마사키 요리타다의 딸 - 측실 : 오카지(於梶, 에이쇼인) - 오오타 야스스케의 딸
- 5녀 : 이치히메(
市姫 )
- 5녀 : 이치히메(
- 측실 : 오토미(於富, 신쥬인)
- 측실 : 오나츠(於夏, 세이운인) - 하세가와 후지나오의 딸
- 측실 : 오로쿠(於六, 요겐인) - 쿠로다 나오노부의 딸
- 측실 : 오센(於仙, 타이에이인) - 미야자키 야스케이의 딸
- 측실 : 오우메(於梅, 렌게인) - 아오키 카즈노리의 딸
- 측실 : 아챠노츠보네(
阿茶局 , 운코인) - 이이다 나오마사의 딸 - 측실 : 오무스(於牟須, 세이에이인) - 미츠이 요시마사의 딸
- 측실 : 오마츠 (於松, 호코인)
- 측실 : 산죠씨
- 측실 : 마츠다이라 시게요시의 딸
유자 및 양자녀[편집]
- 유자(
猶子 )- 하치노미야 료준 법친왕 - 고요제이 천황의 8황자
- 양자
- 마츠다이라 이에하루 -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차남
- 마츠다이라 타다마사 -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3남
- 마츠다이라 타다아키라 -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4남. 오쿠다이라 마츠다이라가 가조
- 양녀
- 코마츠히메(
小松 姫 , 다이렌인) - 혼다 타다카츠의 딸. 사나다 노부유키의 정실 - 마테히메(
満天 姫 , 요쥬인) - 마츠다이라 야스모토의 딸. 후쿠시마 마사유키의 아내 → 츠가루 노부히라의 정실 - 에이히메(
栄 姫 , 다이료인) - 호시나 마사나오의 딸. 쿠로다 나가마사의 계실 - 쿠마히메(
阿 姫 , 코쇼인光照 院 ) - 마츠다이라 사다카츠의 딸. 야마우치 타다요시의 정실 - 렌히메(
蓮 姫 , 쵸쥬인) - 마츠다이라 야스나오의 딸. 아리마 토요우지의 아내 - 쿠니히메(
国 姫 , 에이쥬인) - 혼다 타다마사의 딸. 호리 타다토시의 아내 → 아리마 나오즈미의 계실 - 카메히메(
亀 姫 , 엔쇼인) - 혼다 타다마사의 딸. 오가사와라 타다나가의 아내 → 오가사와라 타다자네의 아내 - 만히메(
万 姫 , 쿄다이인) - 오가사와라 히데마사의 딸. 하치스카 요시시게의 아내 - 후리히메(
振 姫 , 코쇼인孝 勝 院 ) - 이케다 테루마사의 딸. 후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양녀. 다테 타다무네의 정실 - 큐쇼인(
松 院 ) - 마츠다이라 야스모토의 딸. 타나카 타다마사의 아내 → 마츠다이라 나리시게의 계실 ) - 죠묘인(
浄 明 院 ) - 마츠다이라 야스모토의 딸. 나카무라 카즈타다의 아내 → 모리 히데모토의 계실 - 류코인(
流 光 院 ) - 마츠다이라 야스모토의 딸. 스가누마 사다요리의 정실 - 토바이인(
唐 梅 院 ) - 마츠다이라 야스치카의 딸. 이이 나오마사의 정실 - 키쿠히메(
菊 姫 , 코겐인) - 오카베 나가모리의 딸. 나베시마 카츠시게의 계실 - 세이죠인/쇼죠인(
清浄 院 ) - 미즈노 타다시게의 딸. 카토 키요마사의 계실 - 테이쇼인(
貞 松 院 ) - 호시나 마사나오의 딸. 코이데 요시히데의 아내 - 세이겐인(
清元 院 ) - 호시나 마사나오의 딸. 안베 노부모리의 아내 - 쇼센인(
昌 泉 院 ) - 마키노 야스나리의 딸.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계실 - 이름 미상 - 마츠다이라 이에키요의 딸. 아사노 나가시게의 아내
- 이름 미상 - 마츠다이라 이에모토의 딸. 마츠다이라 타다마사 (오오스카 타다마사)의 아내 → 스가누마 사다요시의 정실
- 이름 미상 - 마츠다이라 이에모토의 딸. 오카베 나가모리의 계실
- 키이기미(
紀 為 君 ) - 마츠다이라 사다카츠의 딸. 나카가와 히사모리의 정실
- 코마츠히메(
이에야스의 사생아라는 설[편집]
- 스즈키 이치조 - 어머니 미츠케슈쿠의 여관의 처녀
- 나가미 사다치카 - 어머니 코고노츠보네
- 마츠다이라 민부 - 어머니 호코인
- 오가사와라 곤노죠 - 어머니 산죠씨
- 이이 나오타카 - 어머니 미상
- 도이 토시카츠 - 어머니 미상
- 2대 고토 쇼자부로 - 어머니 오오하시노츠보네
- 도쿠가와 이에미츠 - 카스가노츠보네
일화[편집]
- 슬픈 인질 생활 시절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가신이었던 하라미이시 몬도는 자신의 저택 정원에서 매로 사냥하는 이에야스를 못마땅하게 여겨 "미카와의 꼬마 녀석"이라며 모욕을 주었다. 나중에 하라미이시가 다케다 신겐의 수하로 들어가, 다케다씨의 성병(
城 兵 )으로 복무할 때 이에야스에게 포로로 잡히자 이에야스는 그에게 "그대는 두 번 다시 내 얼굴을 보기 싫을 것이다"라며 할복하도록 하였다. 반면, 슨푸 시절에 이에야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가신 출신의 다른 포로는 풀어주고 큰 상을 내렸다.[128] - 이에야스가 이끌던 미카와 국의 무사들은 결집력과 충성심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129]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센고쿠 시대를 종식시킨 후 각지의 다이묘들을 불러 주연을 열면서 자신의 진귀한 골동품들을 자랑하였을 때 다른 영주들에게 어떤 보물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 때 이에야스는 "미카와의 벽지에서 자라 아무 골동품도 가진 게 없지만, 저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용감한 5백명의 가신들이 저의 보배입니다" 하고 말하였다.[129]
- 이에야스가 재건시킨 에도 성은 에도 막부 시기에 도쿠가와 장군가에서 정이대장군 전용 궁으로 사용하다가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자 일본 천황의 궁으로 헌납된 이래 현재까지 일본 천황의 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이에야스가 축성술의 달인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너무 잘 만들어진 탓에 일본 천황의 궁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직후부터 계속 에도에 기술자들을 불러들여 각종 공사를 지시했다. 하지만 기술자들은 에도가 살기 좋았는지 공사가 다 끝나고도 원래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았으며 계속 에도에 정착했다. 그리고 먼 훗날 에도에 반다이, 타미야 등 많은 프라모델 회사가 설립되었으며 이 영향을 받아 이에야스를 모시는 신사에는 특이하게 프라모델이 헌물되고 있다.
-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군을 압박하기 위해서 거북선을 일본 식으로 만든 메구라부네를 사용했다.
주해[편집]
- ↑ 히로타다는 정실 부인인 오다이 외에 도다 가문 출신의 마키(
牧 )라는 후실을 두고 있었다. - ↑ 간몬(
貫 文 , 관문)은 원래 중국에서 사용하던 동전의 단위로, 에도 막부 이후 금화, 은화, 동전이 사용되면서 동전을 세는 단위로 통용되게 되었다. 동전 1개를 1문(일본어:匁 몬메[*])이라고 하였으며, 1000문을 1간몬이라고 하였다. 1간몬은 쌀 한 섬에 해당하는 가치였다. 한편 이에야스를 납치하는 대가로 도다가 받은 돈은 5백 간몬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길진, 27쪽) - ↑ 오다 노부히데의 장남이며, 오다 노부나가의 형이다.
- ↑ 무사시(
武蔵 )·사가미(相模 )·고즈케(上野 )·시모쓰케(下野 )·히타치(常陸 )·가즈사(上総 )·시모우사(下総 )·아와(安房 )의 여덟 구니를 말한다. 지금의 슈토켄을 형성하는 간토 평야 일대와 거의 일치한다. - ↑ 무쓰(
陸奥 )·데와(出羽 )의 두 구니를 말한다. 지금의 도호쿠 지방에 위치한 후쿠시마현·미야기현·이와테현·아오모리현·야마가타현·아키타현과 니가타현의 북동부 일부에 해당한다. -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이후 통용화 된 영지 측량의 단위로, 고쿠다카(
石高 )를 그대로 번역한 '고쿠'(石 )라고 쓰기도 한다. - ↑ 주종 관계를 끊게 하거나 영지를 몰수하여 가신으로서의 신분을 빼앗는 것을 말한다.
- ↑ 쇼군을 임명할 때 천황이 형식적으로 쇼군이 된 사람에게 쇼군임을 인정하는 문서를 하사하는데 이를 선지라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임금의 명령을 널리 공포할 때도 선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 ↑ 예를 들면 가가국의 100만석을 가지고 있던 마에다 씨의 경우에는 1,000명의 인부를 제공하였다.
- ↑ 장남 노부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와의 문제로 자결하였고, 차남 히데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후 히데요시의 실자가 태어난 후 유키 씨(
結城 氏 )에 양자로 들어갔다. (요시다 외, 120 ~ 121쪽.) - ↑ 도쿠가와의 해석은 이렇다. '국가안강'에서 가(
家 ) 자와 강(康 ) 자 사이에 안 자를 집어넣은 것은 이에야스(家康 )를 토막내겠다는 뜻이며, 군신풍락에서 신(臣 ) 자와 풍(豊 ) 자의 위치를 바꾸면 도요토미(豊臣 )가 되니 이는 히데요 리가 자신을 배반하겠다는 뜻이라고 해석하였다. - ↑ 원문은 아래와 같다.
人 の一生 は重荷 を負 うて遠 き道 を行 くが如 し,急 ぐべからず。不自由 を常 と思 えば不足 なし。心 に望 み起 らば困窮 したるときを思 い出 すべし。堪忍 は無事 長久 の基 ,怒 りは敵 と思 え,勝 つことばかり知 りて,負 けることを知 らざれば,害 その身 に至 る。己 を責 めて人 を責 めるな,及 ばざるは過 ぎたるより勝 れり。
각주[편집]
-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복여동생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사히히메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정략결혼을 시키기 위해 소에다 요시나리와 강제로 이혼시켰다.
- ↑ 율리우스력: 1543년 1월 31일, 그레고리력: 1543년 2월 10일
- ↑ 그레고리력: 1616년 6월 1일
- ↑ “도쿠가와 이에야스”. 2009년 9월 1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5월 29일에 확인함.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고미, 226쪽
- ↑ 가 나 다 라 마 이길진, 25쪽
- ↑ 가 나 다 라 요시다 외, 24쪽
- ↑ 가 나 요시다 외, 26쪽
- ↑ 가 나 다 라 이길진, 26쪽
- ↑ 가 나 다 요시다 외, 28쪽
- ↑ 가 나 다 요시다 외, 29쪽
- ↑ 가 나 이길진, 27쪽
- ↑ 가 나 다 라 요시다 외, 30쪽
- ↑ 가 나 다 라 마 이길진, 28쪽
- ↑ 이길진, 29쪽
- ↑ 요시다 외, 31쪽
- ↑ 가 나 다 요시다 외, 32쪽
- ↑ 가 나 다 이길진, 33쪽
- ↑ 가 나 이길진, 34쪽
- ↑ 가 나 다 라 마 요시다 외, 33쪽
- ↑ 가 나 이길진, 38쪽
- ↑ 가 나 이길진, 39쪽
- ↑ 가 나 요시다 외, 35쪽
- ↑ 이길진, 40쪽
- ↑ 이길진, 41 ~ 44쪽
- ↑ 가 나 다 이길진, 47쪽
- ↑ 가 나 이길진, 48 ~ 49쪽
- ↑ 가 나 요시다 외, 41쪽
- ↑ 가 나 다 이길진, 50 ~ 51쪽
- ↑ 가 나 다 요시다 외, 42쪽
- ↑ 이길진, 52쪽
- ↑ 가 나 다 이길진, 55 ~ 57쪽
- ↑ 이길진, 58 ~ 59쪽
- ↑ 가 나 요시다 외, 43쪽
- ↑ 가 나 이길진, 60 ~ 61쪽
- ↑ 가 나 요시다 외, 46쪽
- ↑ 가 나 다 라 이길진, 62쪽
- ↑ 가 나 다 라 이길진, 63 ~ 64쪽
- ↑ 요시다 외, 45쪽
- ↑ 요시다 외, 47쪽
- ↑ 가 나 이길진, 66쪽
- ↑ 이길진, 65쪽
- ↑ 요시다 외, 48쪽
- ↑ 요시다 외, 49쪽
- ↑ 요시다 외, 52 ~ 53쪽
- ↑ 요시다 외, 54 ~ 55쪽
- ↑ 이길진, 66 ~ 72쪽
- ↑ 요시다 외, 56 ~ 57쪽
- ↑ 이길진, 98 ~ 105쪽
- ↑ 요시다 외, 58쪽
- ↑ 가 나 요시다 외, 60 ~ 61쪽
- ↑ 가 나 다 라 요시다 외, 66쪽
- ↑ 이길진, 105쪽 ~ 108쪽
- ↑ 요시다 외, 62 ~ 63쪽
- ↑ 가 나 다 라 이길진, 108 ~ 112쪽
- ↑ 가 나 다 요시다 외, 64 ~ 65쪽
- ↑ 이길진, 121쪽
- ↑ 가 나 다 라 마 바 이길진, 122 ~ 123쪽
- ↑ 가 나 다 라 마 요시다 외, 68쪽
- ↑ 가 나 다 라 이길진, 126쪽 ~ 127
- ↑ 가 나 다 라 마 바 고미, 227쪽
- ↑ 가 나 요시다 외, 69쪽
- ↑ 요시다 외, 70 ~ 71쪽
- ↑ 히데요시는 이미 소에다 요시나리에게 시집간 아사히히메를 이에야스에게 시집보내기 위해 소에다 요시나리와 아사히히메를 강제로 이혼시켰다.
- ↑ 요시다 외, 72 ~ 74쪽
- ↑ 가 나 이길진, 140 ~ 142쪽
- ↑ 가 나 다 요시다 외, 76쪽
- ↑ 가 나 이길진, 143 ~ 145쪽
- ↑ 가 나 다 이길진, 146 ~ 148쪽
- ↑ (일본어) 오다와라 평정 고토뱅크
- ↑ 요시다 외, 77쪽
- ↑ 가 나 요시다 외, 78 ~ 79쪽
- ↑ 가 나 다 라 이길진, 151 ~ 152쪽
- ↑ 가 나 요시다 외, 80 ~ 81쪽
- ↑ 가 나 다 이길진, 152 ~ 155쪽
- ↑ Sadler, A.L. (1937). The Maker of Modern Japan, p. 164.
- ↑ 가 나 다 이길진, 156 ~ 158쪽"
- ↑ 조선 침략 도요토미 히데요시 매일신문, 2009년 9월 18일
- ↑ 가 나 다 이길진, 161 ~ 167쪽
- ↑ 가 나 다 라 요시다 외, 86 ~ 87쪽
- ↑ 가 나 다 라 마 요시다 외, 88쪽
- ↑ 문제는 이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기 멋대로 제정한 법률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이대장군 직에 오르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신분이 천하다는 이유만으로 아예 정이대장군 관직을 1588년 부로 폐지해버렸다. 만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이대장군 직에 오를 수 있는 신분이었더라면 다이묘들 간에 혼인을 하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런 규정을 제정한 것이다.[출처 필요]
- ↑ 요시다 외, 89쪽
- ↑ 가 나 다 요시다 외, 90쪽
- ↑ 가 나 다 요시다 외, 91쪽
- ↑ 요시다 외, 118쪽
- ↑ 가 나 요시다 외, 92쪽
- ↑ 요시다 외, 93쪽
- ↑ 가 나 다 라 요시다 외, 96 ~ 97쪽
- ↑ 아이작 티칭, 409쪽
- ↑ 가 나 요시다 외, 98 ~ 99쪽
- ↑ 가 나 다 요시다 외, 100쪽
- ↑ 요시다 외, 101쪽
- ↑ 가 나 다 라 요시다 외, 104쪽
- ↑ 가 나 다 라 마 바 이길진, 212 ~ 217쪽
- ↑ 요시다 외, 105쪽
- ↑ 가 나 다 라 마 바 요시다 외, 132쪽
- ↑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156쪽. ISBN 89-86142-81-3.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이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취했지만, 무역은 보호 · 장려했기 때문에 그 포교를 묵인해 왔다.
- ↑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156쪽. ISBN 89-86142-81-3.
그러나 신 앞에서 평등을 설파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일본의 봉건적 신분제를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기독교의 일신교(
一神敎 )적인 성격은 기성종교와 대립하였고, 일부다체제의 금지 · 셋푸쿠(切 復 )의 금지 등은 봉건도덕과 모순하였다. - ↑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156쪽. ISBN 89-86142-81-3.
더욱이 막부는 큐슈의 다이묘들이 무역의 이익으로 경제적 · 군사적으로 강대해지는 것은 두려워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막부는 점차 기독교의 금압과 무역의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 ↑ 가 나 다 박석순 외, 208 ~ 209쪽
- ↑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156쪽. ISBN 89-86142-81-3.
막부는 1616년(
元和 2) 유럽인의 거주 · 무역의 지역을 히라도(平戶 ) · 나가사키(長崎 )의 2항으로 제한하였다. - ↑ 가 나 다 요시다 외, 134 ~ 135쪽
- ↑ 가 나 다 요시다 외, 106 ~ 107쪽
- ↑ 가 나 다 라 연민수, 155쪽
- ↑ 가 나 다 박석순 외, 214 ~ 216쪽
- ↑ 가 나 다 라 마 연민수, 153 ~ 154쪽
- ↑ 가 나 다 라 마 요시다 외, 138쪽
- ↑ 가 나 요시다 외, 139쪽
- ↑ 가 나 끝까지 참는 자가 이긴다 신동아 매거진, 2005년 4월 22일
- ↑ 가 나 다 요시다 외, 140 ~ 141쪽
- ↑ 가 나 요시다 외, 142 ~ 143쪽
- ↑ 가 나 다 라 요시다 외, 144 ~ 145쪽
- ↑ 가 나 다 요시다 외, 108 ~ 109쪽
- ↑ 티몬 스크리치, 85쪽
-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각기병으로 죽었다? 노컷뉴스, 2009년 6월 27일
- ↑ '덴푸라 과식'으로 숨져 노컷뉴스, 2007년 7월 2일
- ↑ 가 나 요시다 외, 110쪽
- ↑ 가 나 다 요시다 외, 112쪽
- ↑ 곤겐즈쿠리
- ↑ 임운규 칼럼 -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디지털 타임스, 2007년 10월 29일
- ↑
鳴 かぬなら・・・ホトトギス[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슈미토쿠라부, 2009년 8월 5일 - ↑ 가 나 다 라 도쿠가와 이에야스 - ‘인내’를 무기로 천하를 얻다 한겨레21, 2004년 4월 1일
- ↑ 가 나 고운기, 134쪽
- ↑ 고미, 225쪽
- ↑ 고미, 225 ~ 226쪽
- ↑ 가 나 고미, 228쪽
- ↑ 이길진, 30쪽
- ↑ 가 나 이길진, 37쪽
참고 자료[편집]
- 요시다 시게루 외 4명, 오와다 데쓰오 감수, 이언숙 옮김, 《사건과 에피소드로 보는 도쿠가와 3대》 (2003년), 청어람미디어, ISBN 89-89722-21-7
- 연민수, 《일본역사》 (1998년), 보고사, ISBN 89-86142-81-3
- 고미 후미히코, 한은미 옮김, 《2천년 일본사를 만든 일본인 이야기》 (2003년), 이손, ISBN 89-87095-48-7
- 고운기,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 (2009년), 현암사, ISBN 978-78-323-1536-2 {{isbn}}의 변수 오류: 유효하지 않은 ISBN.
- 박석순 외 3명, 《일본사》 (2005년), 대한교과서, ISBN 89-378-3082-5
- 이길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과 리더십》 (2004년), 동아일보사, ISBN 89-7090-356-9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일본[편집]
- 《태합기》(1965년, 배우: 오노에 키쿠조)
- 《하늘과 땅과》(1969년, 배우: 마츠야마 세이지)
- 《봄의 언덕길》(1971년, 배우: 야마무라 소)
- 《나라 훔친 이야기》(1973년, 배우: 테라오 아키라)
- 《황금의 나날》(1978년, 배우: 코다마 키요시)
- 《여자 태합기》(1981년, 배우: 프랭키 사카이)
- 《도쿠가와 이에야스》(1983년, 배우: 타키타 사카에)
- 《독안룡 마사무네》(1987년, 배우: 츠가와 마사히코)
- 《다케다 신겐》(1988년, 배우: 나카무라 하시노스케)
- 《카스카노 츠보네》(1989년, 배우: 단바 테츠로)
- 《노부나가 KING OF ZIPANGU》(1992년, 배우: 고 히로미)
- 《류큐의 바람》(1993년, 배우: 코바야시 아키라)
- 《히데요시》(1996년, 배우: 니시무라 마사히코)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2000년, 배우: 츠가와 마사히코)
- 《토시이에와 마츠~카가 백만석 이야기~》(2002년, 배우: 타카시마 마사히로)
- 《무사시 MUSASHI》(2003년, 배우: 키타무라 카즈오)
- 《공명의 갈림길》(2006년, 배우: 니시다 토시유키)
- 《천지인》(2009년, 배우: 마츠카타 히로키)
- 《고우~공주들의 전국~》(2011년, 배우: 키타오오지 킨야)
- 《군사 칸베에》(2014년, 배우: 테라오 아키라)
- 《사나다마루》(2016년, 배우: 우치노 세이요)
- 《여자 성주 나오토라》(2017년, 배우: 아베 사다오)
- 《어떡할래 이에야스》(2023년, 배우: 마츠모토 준)
한국[편집]
- 《임진왜란》(MBC, 1985년~1986년, 배우: 김현직)
- 《불멸의 이순신》(KBS1, 2004년~2005년, 배우: 전일범)
- 《임진왜란 1592》(KBS1, 2016년), 배우: 이종신)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 (일본어)
徳川 一族 について (도쿠가와 일가에 대하여) - (일본어)
徳川 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
전임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
제9대 마쓰다이라 종가 당주 1549년 ~ 1566년 |
후임 도쿠가와씨로 개성 |
전임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
제1대 도쿠가와 종가 당주 1566년 ~ 1605년 |
후임 도쿠가와 히데타다 |
전임 나이토 노부나리 |
슨푸번 번주 (도쿠가와 종가 직할령) 1606년 ~ 1609년 |
후임 도쿠가와 요리노부 |
전임 도요토미 히데요시 |
태정대신 1587년 ~ 1598년 |
후임 도쿠가와 히데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