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데루모토
모리 데루모토 | |
모리 데루모토 | |
일문자삼성(나가토별) | |
무사 정보 | |
시대 | 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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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덴분 22년 1월 22일(1553년 2월 4일) |
사망 | 간에이 2년 4월 27일(1625년 6월 2일) |
개명 | 고쓰루마루( |
별명 | 쇼유타로( |
계명 | |
막부 | 무로마치 막부 상반중 → 에도 막부 |
번 | 조슈번 |
주군 | 도요토미 히데요시 → 히데요리 → 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 이에미쓰 |
관위 | 우위문독, 우마두, 종사위하 시종, 참의, 종삼위 권중납언 |
씨족 | 오에성 모리씨 |
부모 | 아버지: 모리 다카모토, 어머니: 오기키노쓰보네 |
배우자 | 시시도 다카이에의 딸 |
자녀 | 히데나리, 나리타카, 깃카와 히로마사의 아내 |
묘소 | 야마구치현 하기시 |
모리 데루모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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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식 한자 표기 | |
가나 표기 | もうり てるもと |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 | 모리 데루모토 |
로마자 | Mōri Terumoto |
모리 데루모토(일본어:
생애[편집]
가독상속[편집]
덴분 22년 (1553년) 음력 1월 22일 모리 모토나리(
겐나 2년 (1571년) 조부 모토나리가 죽자 모리 료센[1] 체제를 중심으로 중신의 보좌를 받아 친정을 개시하였다. 덴쇼 2년 (1574년) 우마노카미에 임관되었다.
오다 가문과의 싸움[편집]
그 후, 데루모토는 주고쿠 지방의 패자에 올라 각지에 세력을 신장하였다. 조부 모토나리 때부터 적대세력이였던 아마고 가문과 오토모 가문과 전쟁을 벌였고 이들을 제압하여 규슈와 주고쿠 지방에 세력을 확대해 갔다.
하지만 덴쇼 4년 (1576년) 음력 2월 오다 노부나가(
그러나 음력 3월 우에스기 겐신이 죽었고 더욱이 음력 11월에 일어난 제2차 기즈키가와구치 전투에서 철갑선[2]을 전장에 투입한 오다 군에게 패배하였고 모리 수군은 섬멸되었다. 이후 전황은 모리 가문에 불리하게 되어갔다. 덴쇼 7년 (1579년)에는 모리 가문에 종속되어 있던 비젠의 우키다 나오이에가 모리 가문을 배반하고 오다 노부나가와 내통하였다.
덴쇼 8년 (1580년) 음력 1월에는 오다 군의 주고쿠 공략군 지휘관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끄는 군대가 미키 성을 함락하였고 벳쇼 나가하루는 자결하였다. (미키 전투) 다음해인 덴쇼 9년 (1581년) 이나바 돗토리 성도 포위 공격에 따른 병량고갈로 항복하게 되었고 모리 가문의 장수 깃카와 쓰네이에는 자결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데루모토는 숙부들과 함께 출진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내통하고 있던 분고의 오토모 소린이 서쪽으로 공격해 왔으며 산인에서도 난조 모토쓰구가 공격해오는 등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덴쇼 10년 (1582년) 음력 4월 하시바 히데요시는 모리 가문의 충신 시미즈 무네하루가 농성하는 빗추 다카마쓰 성을 공격한다. 공방전중 음력 6월 2일 교토 혼노지에서 오다 가문의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
도요토미 정권[편집]
오다 노부나가 사후, 중앙에서 하시바 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쓰이에(
시즈가타케 전투 후, 패권이 히데요시에게 넘어가자, 자신의 숙부인 모리 히데카네와 사촌인 깃카와 히로이에를 인질로 보냈고, 신하의 예를 표했다. 그 후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덴쇼 13년 (1585년) 시코쿠 정벌, 덴쇼 14년 (1586년) 규슈 정벌에도 선봉으로 출진하였고, 무공을 세워 히데요시의 천하통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결과 히데요시로부터 주고쿠 6국 고쿠다카 120만 5천 석의 소령을 안도받았다.
덴쇼 17년 (1589년) 당시 교통의 요충지였던 오타강 삼각주에 히데요시의 주라쿠 다이를 본따 히로시마성을 축성한다. 덴쇼 19년 (1591년) 오랜기간 모리 가문의 거성이였던 요시다 고리야마 산성을 버리고, 아직도 공사중인 히로시마 성으로 거처를 옮긴다.
분로쿠 원년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 때에는 자신의 주력부대를 파견했다. 이런 공적으로 게이초 2년 (1597년) 히데요시로부터 숙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세키가하라 전투[편집]
게이초 5년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데루모토는 음력 7월 17일 오사카성 니시노마루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음력 9월 15일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에 친히 군을 이끌고 출진하지는 않았고, 대신 친지인 모리 히데모토와 깃카와 히로이에를 보내는 선에서 끝냈다. 전후 서군은 패배하였고, 음력 9월 24일 다치바나 무네시게(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과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간에 전투에서 서군의 패배를 예상한 깃카와 히로이에는 구로다 나가마사(
에도 시대[편집]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후 음력 10월, 모리 데루모토는 출가해 게안 소즈이라 불렀으며 가독은 적자인 모리 히데나리에게 형식상으로 나마 양도하였다. 하지만 가문의 실권은 데루모토에게 있었다. 게이초 8년 (1603년) 데루모토는 에도로 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사죄하고, 다음해인 게이초 9년 (1604년) 나가토 국에 하기 성을 축성하여 거성으로 삼았다.
게이초 19년 (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은밀히 중신 나이토 모토모리를 오사카 성에 보내 도요토미 가문을 지원하는 한편, 이에야스의 동군에도 참전하였다. 하지만, 모리 가문은 이 전투에서 소극적인 움직임만 보였다. 이후,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은 화의를 맺었고, 군을 철수 시켰다. 하지만, 도쿠가와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절에 기신한 종의 명문을 문제 삼아 다시금 군사를 일으켜 도요토미 가문의 오사카 성을 공격하였다. 이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모리 히데모토의 부대가 본대보다 선봉에서 도요토미 군을 상대했었다. 이를 계기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리 가문을 상찬(
이 오사카 전투의 군역과 에도 성 건축에 참여, 에도에 번저를 짓는 등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빚어진 가문의 분열을 막고자 애를 썼다.
겐나 9년 (1623년) 모리 히데나리에게 정식으로 가독을 양도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간에이 2년 (1625년) 음력 4월 27일 하기의 시혼마쓰 저택에서 임종을 맞이하였다. 향년 73세였다. 이때 가신 나가이 모토후사가 순사하였다.
인물[편집]
- 할아버지, 아버지, 형이 모두 술로 인해 일찍 죽은 모리 모토나리는 주량이 많은 젊은 데루모토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여 데루모토의 부인을 통해 쓴소리를 했다.
- 기량과 패기가 없고, 성격도 우유부단한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하며 시대극 등에서도 대부분 평범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현재 "기밀을 곧잘 누설한다" 등 조부 모토나리의 불평이 적힌 문서가 남아 있고, 교육을 담당했던 작은 아버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도 엄히 예의범절을 가르쳤다고 한다.
- 반면,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잡혀갔던 강항(
姜 沆)은 《간양록(看 羊 錄 )》에서 “조심성이 많고 느긋하여 우리 나라 사람과 비슷하다.”고 평가하고, 조선에 쳐들어간 일본군이 전과 보고를 위해 베어 보낸 조선인의 코를 바치면서도 항상 "가엾은 일이다", "이걸 차마 어떻게 손을 댄단 말인가?" 하고 조선인들에 대한 동정을 보냈다는 우호적인 기사를 담고 있다. - 덴쇼 17년 (1589년) 가신 스기 모토노부를 살해하고 그의 부인을 취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 주고쿠 지방의 태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깃카와 모토하루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두 작은 아버지가 있었던 덕택이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는 두 사람 모두 죽고 없어 데루모토를 보좌할만한 인물이 없던 것이 불운이라 하겠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총대장이 되었고, 시코쿠, 규슈에도 군사를 움직였으나, 본인은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았으며, 세키가하라에서 가신단은 분열되어 모리가문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영지가 대폭 삭감당하고 말았다.
- 나가토로 이봉된후, 조슈 번의 지배체제 강화를 명목으로 가신단을 정리 숙청하였다. 혈연 관계인 구마가이 모토나오 일족과 요시미 히로나가를 숙청하고,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는 마스다 모토나가를 발탁하였다. 내정에 힘써 황무지 개간, 특산품을 장려하여 조슈번의 토대를 닦았다. 번의 정치는 대부분 모리 히데모토와 마스다 모토나가에게 위임하였다.
- 세키가하라 전투 후, 모리 히데모토의 조후번은 조슈 번의 지번(
支 藩 )이 된 것에 반해 깃카와 히로이에의 이와쿠니번은 지번이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깃카와 가문이 세키가하라 전투 후 소홀하게 대접받았다는 견해가 있지만, 이 조치는 양자로 맞이했다 폐적시킨 모리 히데모토와의 관계 유지를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직접적인 관계는 그다지 없다. 데루모토 자신은 히데모토를 모리 료센 체제에서 다카카게를 대신하는 위치로 보았고, 깃카와 히로이에의 장남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는 등, 집안 단속에 힘썼다. - 나가이 모토후사의 순사에 관계해서는, 모토후사가 잠시 동안 가신단에서 축출되었을 때, 모리 데루모토는 은밀히 자금을 지원하였고, 다시금 가신단에 복귀하였을 때, 이전과 같은 대우를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 현재에도 우둔한 무장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노 미치요시 사건[3]으로 볼 때, 세키가하라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한 의중으로 보인다. 당시 가신에게 명하여 규슈의 여러 성의 지도를 작성하는 등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증오를 엿볼 수 있다.
숙청[편집]
데루모토는 숙청과 암살을 많이 한 인물이다.
- 구마가이 모토나오: 로마 가톨릭 신앙을 문제삼아 살해하였다.
- 아마노 모토노부: 역시 가톨릭 신앙을 문제삼아 살해하였다.
- 스기 모토노부: 그의 부인을 취하기 위해 살해하였다.
- 요시미 히로나가: 모반을 꾀한다는 이유로 토벌하였다.
- 나이토 모토요시: 사노 미치요시 사건에 연좌되어 자결하였다. 나이토 모토모리의 장남.
- 아와야 모토토요: 사노 미치요시 사건에 연좌되어 자결하였다. 나이토 모토모리의 차남.
- 우가이 모토타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가신이였지만, 숙부가 죽은 후, 살해하였다.
가계[편집]
- 아버지: 모리 다카모토
- 어머니: 오자키노 쓰보네 (나이토 오키모리의 딸로 오우치 요시타카의 양녀)
- 정실: 미나미노가타 (시시도 다카이에의 딸)
- 측실: 고다마 모토요시의 딸
- 양자
- 모리 히데모토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준손의 정실
- 깃카와 히로마사의 정실
각주[편집]
참고 문헌[편집]
- 『
天下分 け目 の行動 学 関ヶ原 合戦 「武将 」たちのい分 』(岳 真 也、PHP文庫 ) - 『
秀吉 の接待 -毛利 輝元 上洛 日記 を読 み解 く』(ニ木 謙一 、学習研究社 )
같이 보기[편집]
전임 모리 다카모토 |
제14대 아키 모리가 당주 1563년 ~ 1600년 |
후임 모리 히데나리 |
조슈번 번조 1600년 ~ 1623년 |
후임 모리 히데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