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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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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행(일본어: 奉行ぶぎょう 고부교우[*])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도요토미 정권 말기에 주로 정권의 실무를 담당한 봉행 5인을 칭하는 말이다. 당시에는 오봉행이라는 호칭은 존재하지 않았고, 도시요리(年寄としより) 등으로 불렸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각 부의 장관에 해당되며 실제로도 담당 분야가 거의 비슷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とよとみ秀吉ひでよし)의 관백(関白かんぱく) 취임 뒤 1585년, 또는 1593년 히데요시의 와병 중에 오대로(大老たいろう) 제도와 함께 설치된 것으로 생각된다. 도요토미 정권에서는 오타니 요시쓰구(大谷おおやよしつぎ)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こにし行長ゆきなが)를 시작으로 많은 봉행이 행정을 담당하고 있어, 그 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활약을 한 5명이 오봉행이라고 불렸다. 5명이라는 수는 정해진 것은 아니고, 히데쓰구 사건(秀次しゅうじ事件じけん)의 영향으로 아사노 나가마사(浅野あさの長政ながまさ)가 일시 실각했던 때에는 나가마사를 대신하여 미야베 게이준(宮部みやべつぎじゅん), 도미타 잇파쿠(富田とみた一白いっぱく)를 더하여 6명이 봉행직을 맡았다고도 한다.

1600년에 오봉행 중 한 명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いしだ三成みつなり)가 오대로 중 한 명인 모리 데루모토(毛利もうり輝元てるもと)를 총대장으로 옹립한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せきがはらたたかい) 때에는, 서군에는 미쓰나리 외에 나쓰카 마사이에도 종군했으며, 아사노 나가마사는 동군의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군세에 속해 있었다. 마에다 겐이마시타 나가모리오사카성에 머물고 있었다.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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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로 사법 담당[1] - 아사노 나가마사(浅野あさの長政ながまさ)(필두·가이 고후(甲斐かい甲府こうふ) 22만 석)
  • 주로 행정 담당[2] - 이시다 미쓰나리(石田いしだ三成みつなり)(오미 사와야마(近江おうみ佐和山さわやま) 19만 석)
  • 주로 토목 담당[3] - 마시타 나가모리(増田ますだちょうもり)(야마토 고리야마(大和郡山やまとこおりやま) 22만 석)
  • 주로 재정 담당[4] - 나쓰카 마사이에(長束ながつかただし)(오미 미나쿠치(近江おうみ水口みずぐち) 5만 석)
  • 주로 종교 담당[5] - 마에다 겐이(前田まえだ玄以げんい)(단바 가메야마(丹波たんば亀山かめやま) 5만 석)

마에다가 고쇼(御所ごしょ)・조정(朝廷ちょうてい)・구게(公家くげ)・사찰신사(寺社じしゃ), 나쓰카가 재무라는 특별 부문을 담당하고, 아사노, 마시타, 이시다 3인이 일반 정무의 처리를 맡은 형태이다.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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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외에도「마에다 겐이는 교토 쇼시다이(京都きょうと所司代しょしだい;교토 치안 담당관)로 별도로 다루어졌고, 오봉행 중에는 오타니 요시쓰구가 들어간다」라는 등、인사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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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늘날의 법무부장관
  2. 오늘날의 행정안전부 장관
  3. 오늘날의 건설교통부 장관
  4. 오늘날의 재무부장관
  5. 오늘날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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