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천황
천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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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erial | |
호칭 | 폐하 |
관저 | 황거 |
초대 | 진무 천황(전승) |
설립 | 기원전 660년 2월 11일 (전승) |
웹사이트 | (일본어) 궁내청 홈페이지 |
천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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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식 한자 표기 | |
현대 가나 표기 | てんのう |
역사적 가나 표기 | てんわう |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 | 덴노 |
통용식 표기 | 텐노 |
한국어 한자 발음 | 천황 |
헵번식 로마자 표기 | tennō |
일본의 정치 |
일본 포털 |
천황(일본어:
지위로서 천황의 기능에 대해서는 일본국 헌법 제1조부터 제7조에 명시되어 있다.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제1조)으로 규정되어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의해, 법률이나 조약의 공포, 국회가 지명한 내각총리대신의 임명, 국회의 소집 등의 국사행위로 제한된 권한(제7조)을 가진다.
일본에는 비리법권천(
호칭
[편집]일본에서의 호칭
[편집]'천황'이라는 칭호가 생기기 이전에 고대 야마토에서 수장이라는 뜻의 칭호를 국내에서는 「오키미(
'천황'이라는 칭호가 성립된 것은 7세기 후반의 일로 다이호 율령에서 「천황(
일본 고대의 한자음 차자표기에서는 「덴와(てんわう)」로 표기된다. 「덴와」는 중세를 지나며 「덴노(てんのう)」로 변화되었다.
「천황」이라는 칭호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 고대 중국에서 북극성을 신격화하여 가리키던 도교의 용어 「천황대제(
天皇 大帝 )」 또는 「부상대제동황부(扶桑 大帝 東 皇 父 )」에서 따왔다는 설. - 당 고종이 도교적 용어인 「천황」을 칭한 것을 일본에서도 수입해서 썼다는 설.
- 5세기경에 대외적으로 「가외천왕(
可 畏 天王 )」, 「귀국천왕(貴國 天王 )」 등 단순히 「천왕(天王 )」 등으로 불리던 것이 스이코조(또는 덴무조)에 「천황」이 되었다는 설.
문서 ・ 금석문 | 연대 | 발췌 | 출전 | 현대의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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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당사의 국서 | 607년 | 《수서》(636년 성립) | ||
호류지 금당 약사여래상 광배명 ( |
607년 | 실제로는 607년보다는 조금 뒤인 하쿠호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 ||
쇼토쿠 태자가 수에 보낸 국서 | 608년 | 《일본서기》(720년 성립) | 《일본서기》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 |
호코지 장륙석가상 광배명 ( |
609년 | 겐코지 가람연기( |
현재 유물 자체는 남아있지 않다. | |
천황기( |
620년 | (제목 자체에 「천황」이 포함되어 있음) | 《일본서기》 |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일본서기》 외에는 기록이 없다. |
천수국수장( |
7세기 | 斯帰斯麻 |
《상궁성덕법왕제설》( |
천수국수장은 파손된 부분이 많고 발췌된 부분도 「 나머지 전문은 《법왕제설》에서 전하는 것이다. 성립연대를 두고 논쟁이 있다. |
목간( |
677년 | 아스카노이케( |
「천황」이라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자 기록 |
천황이라는 칭호는 율령(「의제령
나라 시대인 덴표호지(
헤이안 시대부터 도쿠가와 시대까지는 ‘미카도’(
일본제국 헌법에서 처음으로 천황의 호칭이 ‘천황’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외교 문서 등에서는 ‘일본국 황제’가 많이 이용되었으며, 국내의 공문서에서도 종종 사용되었다. 표기는 통일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는 ‘천자님’(
일반적으로는 일본 내의 각종 보도 등에서 천황의 경칭은 황실전범에 규정된 ‘폐하’를 채용하여 ‘천황폐하’로 칭한다. 궁내청 등의 공문서에서는 다른 천황과의 혼동을 막기 위해 ‘금상폐하’로 칭하기도 한다. 3인칭으로 경칭없이 ‘지금 천황’(
영어권에서의 호칭
[편집]Emperor 즉 ‘황제’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 즉위 중인 세계의 군주 중에서 유일하게 Emperor로 불리는 군주이다.[4]
한반도에서의 호칭
[편집]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는 에도 막부까지 천황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그러나 정이대장군은 자신을 ‘일본 국왕’이 아니라 ‘일본국 상국’(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에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의 부사였던 학봉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알현 형식에 대한 논의에서 ‘관백’(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조선 중기 이후에는 ‘천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종교적·의례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자리만 있을 뿐 정사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함께 쇼군에 대한 호칭도 관백으로 변화하였다.[5]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명시한 호칭은 '천황'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천황'을 공식 용어로 인정하고 이를 공문서 등에 명확히 사용하고 있다. 다만 대한민국의 뉴스, 신문 등 주요 언론 매체에서는 대체로‘천황’ 대신 ‘일왕’(
역사
[편집]천황의 유래는 나라 시대(710년~794년)에 편찬한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따르면, 초대 진무 천황(
고대에는 오오키미(
9세기부터 귀족층이 정치권력을 장악했고, 10세기에는 천황가와 혼인관계를 맺은 후지와라 북가가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섭관정치를 시작했다. 11세기 말에는 상황이 군림하고 실무자가 통치하는 원정을 시작했다. 이 시기 섭가인 후지와라씨 지위는 약해졌다.
1192년 이후는 가마쿠라 막부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정이대장군에 임명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잃었다. 근대 이전에는 연호가 국가적인 경조사 또는 재해에 의한 피해가 있을 때마다 바뀌어, 지금의 일세일원(
조큐의 난에서는 막부측이 승리했다.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자 고다이고 천황이 겐무 신정으로 천황 친정을 부활시켰다.
무로마치 막부 성립 이후 천황가는 분열되어 난보쿠초 시대가 된다. 1392년 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의해 남북조가 통일되었다. 요시미츠는 일본국왕의 자격으로 명나라 황제에게 조공하는 명일무역을 시작했다. 1394년 요시미츠가 죽자 조정은 그에게 태상법황
아시카가 요시마사 시절 오닌의 난이 일어나며 센고쿠 시대가 시작된다. 막부도 조정도 쇠퇴했으나 천황가는 문화 · 전통의 계승자라는 역할을 하고있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천황을 부정하기보단 이용했다. 에도 막부기에 천황의 권위는 유지되었지만 금중병공가제법도로 통제되었다. 자의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 권력은 거의 없었다.
유교가 점차 관학화되면서 패자인 도쿠가와보다 「みかど」가 정당한 통치자라는 존황론이 미토번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막말이 되면서 존왕양이론으로 확대되었고 천황을 도막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존황양이론은 천황을 중심으로 외세를 배격하려는 정치사상이었다. 요시다 쇼인의 일군만민은 평등사상처럼 받아들여졌고 막부의 권위를 흔들었다. 하지만 존황양이 지사 일부는 천황을 옥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무너지고 나라 시대 이후 처음으로 태정관제로 돌아가는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신정부는 천황을 전국에 순행시켜 권위를 확립해나갔다.[6] 메이지 정부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였고 사족 반란과 자유 민권 운동은 진압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의회를 열어 일본을 유럽의 입헌군주제처럼 만들려고 했다. 제국 시대 (1868년 ~ 1945년)에는 일본제국 헌법에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라고 규정되었다.
1947년에 제정된 일본국 헌법부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한다”라고 규정되었다.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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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의 지위는 메이지 유신과 일본제국 헌법의 제정으로 일본에서 헌법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일본제국 헌법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 제정된 일본국 헌법에서 언급되어 있는 천황의 지위와 권한을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를 가진다. 전자의 경우에는 천황이 통치권자이자 신성한 존재로 규정되었음에 비하여, 후자의 경우에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한다”고 규정된 것이다.
일본제국 헌법 체제에서 천황의 지위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의사에 기초한 만세일계의 지위이다. 따라서 천황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였으며, 천황의 존엄을 침해하는 행위는 불경죄로 의율하여 중하게 처벌한다. 또한 천황은 천황대권으로 불리는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모든 통치권을 총람하는 존재였다. 즉 국가의 모든 작용을 통괄하는 권한을 가진다.
그에 비하여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일본국 헌법의 천황의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한” 것으로, 국민주권의 원리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천황제는 절대적인 것이라거나 불가변의 것이라고 할 수 없고, 국민의 총의에 기하여 가변될 수 있는 것이다. 니시다 쇼지는 이것이 이상하다면서 반대하기도 했다.[7] 권한의 면에서도 천황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국사에 관한 행위”, 이른바 국사행위만을 행할 수 있다.[8]
천황의 국가원수 여부
[편집]일본국 헌법 제4조에서는 천황이 “헌법이 정한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권능은 갖지 않는다”라고 규정되어 있고, 국사 행위로 규정된 내용도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의 외교 문서를 인증하고, 외국의 대사 및 공사를 접수하는 등의 의례적인 행위에 해당해, 천황이 일반적인 ‘국가원수’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린다.
천황을 국가원수로 보는 견해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의 통합의 상징”(헌법 제1조)이라고 규정되어 있으며, 각각 국회와 내각의 지명에 근거하여 행정부(내각)의 수장인 내각총리대신과 사법권을 행사하는 최고재판소장관을 임명한다(제6조)는 내용에 근거한다. 또한 “국권의 최고 기관이며, 국가의 유일한 입법기관”인 국회를 소집(제7조 2호)·해산(제7조 3호)하는 등, 국정의 중요한 행위를 ‘국사행위’로 수행한다고 규정되어 있다(제7조, 다만 국사행위에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의함). 또한 “전권위임장 및 대사, 공사의 신임장을 인증”(제7조 5호)하고,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 외교 문서를 인증”(제7조 8호)하며, “외국의 대사 및 공사를 접수”(제7조 9호)하는 등, 일반적으로 국가원수가 수행하는 외교상의 주요 행위를 천황이 실시하다고 정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천황이 국가원수라고 본다.[주 3]
일본국 정부의 공식 견해로는, ‘천황은 국가원수’라고 한 1990년 5월 14일 참의원의 내각법제국 장관 답변이 있었다. 또한 천황을 ‘나라의 상징이며, 또 일정 부분의 외교 관계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지위’에 있는, 한정된 의미의 국가원수로 표현했다. 천황 플래카드 사건에서 도쿄 지방재판소는 ‘국가원수인 천황’이라고 표현하여 천황을 국가원수로 표현했다.
천황을 국가원수로 인정하지 않는 견해는 일반적으로 일본국 헌법 제4조에서는 천황이 “헌법이 정한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권능은 갖지 않는다”라고 규정되어 있고, 국사행위로 규정된 내용도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의 외교 문서를 인증"하고, “외국의 대사 및 공사를 접수"하는 등의 의례적인 행위에 해당되어, 실질적인 ‘국가원수’로 인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황위 계승
[편집]일본 천황과 황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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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전범에 따르면 황위는 황통에 속하는 남계의 남자가 다음 순서에 따라 계승한다. 그러나 역대 일본 천황계보를 살펴보면 여자가 천황이 된 경우도 여러번 있었다. 특히 고교쿠 천황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천황에 즉위했다. 황위 계승 조건은 다음과 같다.
- 황장자
- 황장손
- 그 밖의 황장자의 자손
- 황차자와 그 자손
- 그 밖의 황자손
- 황형제와 그 자손
- 황백숙부와 그 자손
- 최근친 계통인 황족
다만 황사에게 정신이나 신체상 불치의 중환이 있거나 중대한 사고가 있을 때에는 황실회의의 협의를 거쳐 위의 순서에 따라 황위계승의 순서를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역대 일본 천황 계보에 의하면 태어나자마자 즉위하여 8살에 사망하거나 3살에 즉위하여 19살에 선양하고 59살까지 살거나(고토바 천황) 즉위하자마자 제위에서 쫓겨나거나(고분 천황) 천황의 권좌에서 물러난 이후 '
현재 일본 황실에는 여자 후손이 많고 남자 후손이 매우 적어서, 국민들 사이에서도 여자 황족도 제위를 계승할 수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 따라, 현재 황위 계승 서열 1위는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이다. 다음은 황위 계승 서열 1위부터 3위까지의 명단이다.
왕위계승서열 | 이름 | 사진 | 탄생 | 배우자 | 계승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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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 후미히토 |
1965년 11월 30일 고쿄 궁내청 병원 아키히토와 상황후 미치코의 아들 |
후미히토 친왕비 기코 고쿄 1990년 6월 29일 1남 2녀 |
나루히토의 동생 | |
2위 | 아키시노노미야 히사히토 친왕 히사히토 |
2006년 9월 6일 아이쿠 병원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와 후미히토 친왕비 기코의 아들 |
나루히토의 조카 | ||
3위 |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 마사히토 |
1935년 11월 28일 고쿄 쇼와 천황과 고준 황후의 아들 |
마사히토 친왕비 하나코 고쿄 1964년 9월 30일 |
나루히토의 숙부 |
역대 천황 목록
[편집]기타
[편집]같이 보기
[편집]
|
각주
[편집]참고 문헌
[편집]- ↑ “보관된 사본”. 2020년 10월 1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1년 5월 30일에 확인함.
- ↑
衆議院 憲法 調査 会 事務 局 編 (참의원 헌법조사회 사무국, 편저) (2003년 2월). “象徴 天皇 制 に関 する基礎 的 資料 (상징천황제에 관한 기초적 자료)” (PDF) (일본어). 2007년 3월 31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8월 3일에 확인함. - ↑ 당 고종의 시호가 「천황대성대홍효황제(
天皇 大聖 大 弘孝 皇帝 )」였던 것 외에도 남한(南 漢 )의 초대 황제 유습(劉 龑)이 붕어한 뒤 「천황대제(天皇 大帝 )」라는 시호로 기록된 것을 중국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일본에서는 덴무 천황이 천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최초의 인물로 다이호 율령에서 천황의 칭호가 법제화되고 덴무 천황이 붕어한 뒤에도 그러한 칭호가 세습되었다. - ↑ Uyama, Takuei (2019년 10월 23일). “
天皇 はなぜ「王 (キング)」ではなく「皇帝 (エンペラー)」なのか” [The Title of the Monarch of Japan: not the "King" but the "Emperor"] (일본어). 2019년 10월 23일에 확인함. - ↑ 〈조선시대
日本 天皇 觀 의 유형적 고찰〉, 손승철, 《사학연구》 제50호, 한국사학회, 1995. 12, pp. 217 ~ 250 - ↑
中奥 宏 『皇室 報道 と敬語 』三 一 新書 - ↑ https://www.youtube.com/watch?v=enk9hKYo5VE, https://www.youtube.com/watch?v=ptkX1sm0G_k
- ↑ 이상 비교 아시베 노부요시(다카하시 가즈유키 보정), 《헌법(
憲法 ) 제4판》, 이와나미 쇼텐, 2007년, 47~48쪽.
외부 링크
[편집]- (일본어/영어) 일본 궁내청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