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천황
시조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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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대 일본 천황 | |
재위 | 1232년 11월 17일-1242년 2월 10일 |
전임 | 고호리카와 천황 |
후임 | 고사가 천황 |
섭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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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 | |
이름 | |
휘 | 미츠히토 / 히데히토 ( |
시호 | 시조 ( |
능호 | 쓰키나와 능 ( |
연호 | 조에이 ( 덴푸쿠 ( 분랴쿠 ( 가테이 ( 랴쿠닌 ( 엔오 ( 닌지 ( |
신상정보 | |
출생일 | 1231년 3월 17일 |
사망일 | 1242년 2월 10일 |
왕조 | 야마토 왕조 |
부친 | 고호리카와 천황 |
모친 | 후지와라노 숀시 |
시조 천황(일본어:
고호리카와 천황의 첫째 황자이며, 어머니는 구조 미치이에의 딸 구조 손시이다. 뇨고는 구조 겐시이며, 자녀는 없다.
약력
[편집]간키(
천황은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초기에는 아버지 고호리카와 상황이 인세이를 행했으나, 2년 뒤 상황의 붕어로 외할아버지인 구조 미치이에와 국구(
붕어에 대해서는, 어린 천황이 궁중 사람이나 궁녀들을 넘어뜨리는 장난을 치려고 궁궐 복도에 활석을 깔았는데, 잘못하여 자신이 넘어지는 바람에 그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2] 갑작스런 붕어를 불가사의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듯 항간에서는 고토바 상황의 원령 혹은 지엔(
사후 지금의 교토부 히가시야마구에 위치한 쓰키노와 능(
원래 이 계통은 죠큐 3년(1221년)에 있었던 조큐의 난에서 막부에 패한 고토바 상황의 혈통 이외의 사람에게 황위를 잇게 한다는 가마쿠라 막부의 방침 아래 당시 10세에 불과했던 고호리카와 천황의 즉위에서 시작되었지만, 친아버지 모리사다 친왕이나 천황의 두 친형도 이미 승려로 출가한 뒤였던 데다 즉위 2년 뒤에는 모리사다 친왕마저 죽으면서 나이 어린 천황만이 남겨진 '황통 단절'의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이 상태는 고호리카와 천황이 시조 천황이 될 황자를 얻으면서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듯 보였지만, 황자를 더 두지 못한 채 고호리카와 상황이 23세에 붕어하고 또다시 당시 4세이었던 시조 천황만이 남겨지는 상황이 되었다. 때문에, 구게 사회에는 '황통 단절'의 위구심이 늘 따라다녔고, 구게들 가운데는 시조 천황 생전보다 그 붕어의 꿈을 꾸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시조 천황이 붕어하면서, 가마쿠라 막부는 새로운 천황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구조 미치이에 등의 구교들이 추천하는 준토쿠 천황의 황자 다다나리왕(
같이 보기
[편집]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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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고호리카와 천황 |
제87대 일본 천황 1232년 ~ 124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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