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이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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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이 천황
십육변팔중표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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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일본제111대 천황菊の御紋
재위 1655년 1월 5일 ~ 1663년 3월 5일
전임 고코묘 천황
후임 레이겐 천황
이름
나가히토(良仁よしひと)
묘호 쓰키노와 능 (月輪げつりんりょう)
신상정보
출생일 1638년 1월 1일
사망일 1685년 3월 26일 (47세)
부친 고미즈노오 천황
모친 덴지 후지와라노 다카코

고사이 천황(일본어: こう西にし天皇てんのう, 1638년 4월 20일 ~ 1685년 3월 22일)은 제111대 일본 천황(재위: 1654년 ~ 1663년)이다. 휘는 나가히토 (良仁よしひと (ながひと)), 아명은 히데노미야 (しゅうみや ()), 별명은 하나마치노미야 (はなまちみや (はなまちのみや)), 하나마치도노(はなまち殿どの ())이다.

생애[편집]

처음에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たかまつのみや) 초대 당주인 요시히토 친왕(こうひと親王しんのう)의 딸 아키코 여왕(明子あきこ女王じょおう)과 혼인하고 2대 다카마쓰노미야를 이어받아 하나마치노미야(はなまちみや)로 불렸다.

즉위 1년 전에는 형인 고코묘 천황(後光ごこう明天めいてんすめらぎ)의 묘다이(名代なだい)로써 에도(江戸えど)에 가 있었다. 조오(うけたまわおう) 3년(1654년) 고코묘 천황이 붕어했을 때 앞서 천황이 양자로 들였던 친동생 사토히토 친왕(識仁親王しんのう, 훗날의 레이겐 천황)은 젖도 못 뗀 갓난아이였고, 다른 형제들은 모두 출가한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마치노미야가 형왕의 뒤를 이어 11월 28일에 즉위하게 되었고, 그의 즉위는 사토히토 친왕이 장성해 즉위할 때까지의 대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천황은 학문을 좋아하여 《수일집》(みずしゅう) 등의 각종 문집을 만들었고, 와카에도 재능을 보였으며 고전의 이해에도 뛰어났다. 간분(寬文ひろふみ) 3년(1663년) 1월 26일에 천황은 10세가 된 사토히토 친왕에게 양위하였다.

천황의 재위 중에 이세 신궁(伊勢神宮いせじんぐう)・오사카성(大坂おおさかじょう)・교토 다이리(内裏だいり) 등의 화재나 메이레키 에도 대화재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지진, 물난리 등의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났으며, 당시 사람들은 천황의 부덕을 탓했고 천황 자신도 이를 괴로워하다 양위하였다고도 전한다.[1] 또한 당시 교토 조정의 구게(公家くげ) 나카미카도 노부스미(中御門なかみかどせんじゅん)의 일기 《선순경기》(せんじゅんきょう)나 미부 다다토시(壬生みぶ忠利ただとし)의 《충리숙례기》(忠利ただとし宿禰すくね) 간분 2년(1662년) 9월 23일조에도 도쿠가와 이에쓰나(徳川とくがわ家綱いえつな)의 사자인 기라 와카사노카미(吉良きら若狭わかさもり)[2])가 뇨인(女院にょいん)[3]에게 천황의 양위를 아뢰었다고 들었다고 적혀 있다. 이들 기사를 전제로 천황에게 양위를 독촉했던 배후 세력으로써 고미즈노오 법황(水尾みずお法皇ほうおう)[4] 막부[5]가 거론되고 있으며, 아울러 유력 도자마 다이묘센다이번다테 쓰나무네가 고사이 천황 자신과는 종형제지간이라는 점을 막부가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고도 한다.[6] 그러나 이에 대해 양위는 어디까지나 천황 자신의 자발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설도 존재한다.[7]

조쿄(貞享ていきょう) 2년(1685년) 붕어하였다. 향년 47세.

인물[편집]

오로지 학문에 몰두하여 『수일집 (みずしゅう ())』, 『겐지문서(源氏げんじ聞書ききがき ())』, 『백인일수문서(百人一首ひゃくにんいっしゅ聞書ききがき ())』 등의 저서를 다수 남겼다. 와카의 재능도 있고, 고전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또한 다도, 화도, 향도에도 능통하였다.

또한, 「고사이인(こう西院さいいん ())」의 호는 준나 천황과 처지가 비슷하여 그의 별칭인 사이인노미카도(西院さいいんみかど (), 서원제)에 를 붙인 것이라고 한다.

가족관계[편집]

고미즈노오 천황의 8황자. 어머니는 텐지 호슌몬인(逢春もんいん ()) 후지와라노 타카코 (좌중장 쿠시게 타카치카의 딸). 사촌동생으로 센다이번주 3대 다테 츠나무네가 있다.

재임 중의 연호[편집]

능・영묘[편집]

츠키노와능 (교토부 교토시)

능 (일본어: りょう みささぎ[*])은 일본 궁내청에 의해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이마구마노센잔초 센뉴지 내에 있는 츠키노와능 (일본어: 月輪げつりんりょう つきのわのみささぎ[*])로 치정되어있다. 궁내청 상의 형식은 석조 9층탑이다.

또한 고쿄에서는 코레이덴 (궁중3전 중 하나)에서 다른 역대 천황, 황족과 함께 천황의 혼이 모셔져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옹초》(翁草おきなぐさ)권19「새 주상의 즉위」(新帝しんてい践祚せんそこと).
  2. 고케(高家こうか) 기라 요시후유(吉良きらよしふゆ).
  3. 에도 막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로써 고미즈노오 천황의 중궁이 되어 메이쇼 천황을 낳은 도후쿠몬인(東福門院とうふくもんいん) 도쿠가와 마사코.
  4. 쓰지 타쓰야(つじ達也たつや) 저 《일본의 근세》(日本にっぽん近世きんせい) 제2권 <천황과 쇼군>(天皇てんのう将軍しょうぐん) ちゅう 「공무융화」(公武こうぶ融和ゆうわ) 항목(주오공론사中央公論社ちゅうおうこうろんしゃ, 1991년) 등에서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
  5. 미카미 산지(三上みかみさん) 저 《존황론 발달사》(尊皇そんのうろん発達はったつ, 부산방冨山とやまぼう, 1941년) 등에서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
  6. 다키자와 다케오(滝沢たきざわ武雄たけお) 저 「다테 소동의 새로운 고찰」(伊達だて騒動そうどうしんこう) 《사관》(史観しかん)제75책(1967년)에 실림・구보 기코(久保くぼ貴子たかこ) 저 《근세의 조정 운영 - 조막(あさまく) 관계의 전개 -》(近世きんせい朝廷ちょうてい運営うんえいあさまく関係かんけい展開てんかい-, 이와다 서원岩田いわた書院しょいん ・ 1998년) 등에서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
  7. 노무라는 고사이 천황의 양위와 재해의 관계에 대해, 만지(万治まんじ) 4년 1월 15일에 있었던 다이리 화재 이후 의식 대부분이 축소되거나 중지되어 기존의 「천자어작법」(天子てんし作法さほう)을 도저히 준수할 수 없는 지경에 몰린 고사이 천황이 간문 3년의 새 대궐 완성 직전의 시점에 와서 스스로 양위를 선택한 것으로 천황의 나이 어림에 의한 「천자어작법」의 합법적인 중단 상태로 만들고 새 천황(레이겐 천황)이 성인이 될 때까지의 기간 동안 새 천황이 「천자어작법」을 실현할 수 있을 만한 환경을 조성하고자 했던 것으로 해석하였다(野村のむら, 2006ねん, P282-288).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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