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지 천황
텐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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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대왕 | |
제38대 일본 천황 | |
재위 | 668년 2월 20일-672년 1월 7일 |
전임 | 사이메이 천황 |
후임 | 고분 천황 |
재상 | 황친태정대신 오토모 황자 (671년-672년) |
이름 | |
휘 | 카츠라기 ( |
시호 | 한풍: 텐지 ( 화풍: 아메미코토 히라카스와케노 미코토 ( |
능호 | 야마시나 능 ( |
신상정보 | |
출생일 | 626년 |
사망일 | 672년 1월 7일 |
왕조 | 야마토 왕조 |
부친 | 조메이 천황 |
모친 | 사이메이 천황 |
배우자 | 야마토히메노 오오키미 |
덴지 천황(일본어:
생애[편집]
아버지는 조메이 천황(
고교쿠 천황 4년(645년) 음력 6월 12일(양력 7월 10일)에, 나카노오에는 나카토미노 가마타리(
660년에 백제가 나(
백강구 전투에서 패한 뒤, 나카노오에는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방비를 견고히 하기 위해 북큐슈의 쓰시마(
덴지 7년(668년)과 9년(670년), 두 번에 걸쳐 신라에 사신을 보냈으며(견신라사), 일본 최고(
덴지 9년 음력 11월 16일(671년 1월 2일)에 제1황자 오오토모노 미코(
이후 쇼토쿠 천황(
오오아마로부터 그 아내 누카타노 오오키미(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 일본 제34대 죠메이 천황(舒明
天皇 , 593~641) - 어머니 : 일본 고교쿠 천황 타카라노황녀(
皇 極 天皇 宝 皇女 , 594~661)- 황후 : 야마토히메노오오키미(
倭 姬王 ) - 후루히토노오에노황자(古人 大兄 皇子 , 612?~645)의 딸 - 빈 : 소가노 오치노이라츠메(
蘇我 遠 智 娘 ) - 소가노 쿠라야마다노이시카와마로(蘇我倉山田石川麻呂 , ?~649)의 딸 - 빈 : 소가노 메이노이라츠메(
蘇我 姪 娘 ) - 소가노 쿠라야마다노이시카와마로(蘇我倉山田石川麻呂 , ?~649)의 딸 - 빈 : 소가노 히타치노이라츠메(
蘇我 常陸 娘 ) - 소가노 아카에(蘇我赤兄 )의 딸- 5녀 : 야마노베노 황녀(
山邊 皇女 , 663?~686)
- 5녀 : 야마노베노 황녀(
- 빈 : 아베노 타치바나노이라츠메(
阿倍 橘 娘 , ?~681) - 아베노 우치마로(阿倍倉梯麻呂 , ?~649)의 딸 - 부인 : 코시노미치노키미노이라츠메(
越 道 君 伊 羅 都 賣 娘 ) - 채녀(
采女 : 우네메) : 야카코노이라츠메(宅 子 娘 ) - 이가노 구니노미야쓰코(伊賀 國造 )의 딸 - 궁인 : 시코부코노이라츠메(
忍海 造 色 夫 古 娘 )- 3남 : 카와시마노 황자(
川島 皇子 , 657~691) - 딸 : 오오에노 황녀(
大江 皇女 , ?~699) - 덴무 천황(天武天皇 , 631?~686)의 비 - 딸 : 이즈미내친왕 이즈미노 황녀(
泉 内親王 泉 皇女 , ?~734)
- 3남 : 카와시마노 황자(
- 궁인 : 쿠로히메노이라츠메(
栗 隈 首 黑 媛 娘 )- 딸 : 미누시내친왕 미누시노 황녀(
水主 内親王 水主 皇女 , ?~737) - 후에 나이신노(內親王 )로 추봉.
- 딸 : 미누시내친왕 미누시노 황녀(
- 황후 : 야마토히메노오오키미(
덴지 천왕이 등장한 작품[편집]
약력[편집]
- 스이코 34년(626) - 태어남
- 고교쿠 4년 6월 14일(서기 645년 7월 12일) - 태자로 봉해짐
- 사이메이 7년 7월 24일(서기 661년 8월 24일) - 칭제
- 덴지 7년 1월 3일(서기 668년 2월 20일) - 즉위
- 덴지 10년 12월 3일(서기 672년 1월 7일) - 붕어(46세)[12]
덴지 천황의 무덤은 오늘날 교토 시 야마시나(
칭제 기간의 의문점[편집]
나카노오에가 무려 7년 동안이나 즉위하지 않고 칭제를 맡은 것은 7세기 일본 정치사의 중요한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이다. 보통 한국 사학계에서는 이것을 두고 백제 부흥운동을 지원하느라 즉위식까지 미룬, 그만큼 왜가 백제 부흥을 중대한 국책사업으로 여기고 있었던 증거의 하나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대부분이지만, 일본에서는 이에 대해서 다른 설명을 해왔다. 그 설명은 대체로 이러하다.
1. 오오아마 즉 덴무 천황을 밀고 있던 세력에 대한 배려
이는 기존의 설과는 달리 덴무 천황이 덴지 천황의 아우가 아니라 덴지 천황의 어머니 고교쿠 천황이 조메이 천황과 혼인하기 전에 낳은 아야(
2. 다이카 개신의 실제 주도 세력으로부터의 견제
'을사의 변' 즉 소가노 이루카 참살은 실제로는 나카노오에가 아니라 훗날 고토쿠 천황이 되는 가루 황자(
3. 덴지 천황의 난잡한 여성 편력 문제
다음은 덴지 천황의 여자 관계에 대한 반발 때문에 즉위가 늦었다는 설이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고토쿠 천황이 아내 하시히토노 히메미코(
4. 숨겨진 또 한 명의 천황의 존재
혹자는 사이메이 천황과 덴지 천황 사이에 또 한 명의 천황이 즉위해 다스렸던 것이 어떠한 사정으로 인해 기록에서 말살되었다고 한다. 사이메이 천황 사후 덴지 천황이 7년이나 즉위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덴지 천황의 친여동생인 하시히토노 히메미코가 선대 고토쿠 천황의 황후 자격으로 황위를 이었다는 설의 근거는 《만요슈》(
5. 나카노오에 자신의 입지 강화를 위한 포석
원래 덴지 천황은 유력한 황위 계승자는 아니었다. 조메이 천황의 황후로는 선대 비다쓰 천황(
6. 나카노오에의 자충수ㅡ쿠데타의 진정한 목적
소가노 이루카가 대극전에서, 천황이 뻔히 지켜보는 앞에서 나카노오에의 칼에 맞아 쓰러진 뒤, 소가씨 본종가의 몰락과 더불어 고교쿠 천황은 재위 4년만에 퇴위하여 물러났다. 나카노오에가 일으킨 이 '을사의 변'의 여파가 당시의 권신 가문이었던 소가씨 본종가뿐 아니라, 소가씨 본종가의 권력에 의지하고 있던 고교쿠 천황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나카노오에의 본래 목적이 소가씨 본종가뿐 아니라 그에 의지하는 모든 체제, 심지어 생모인 고교쿠 천황까지도 타도하는 데에 있었다고 하는 새로운 시각이 제기되었다. 고교쿠 천황은 소가씨에 의해 추대된 천황이기도 했다. 그리고 생모인 고교쿠 천황까지 퇴위시켜가며 소가씨 중심의 체제를 타도하려던 나카노오에에 의해 고토쿠 천황이 즉위했지만, 결국 그와도 대립하게 되었고 고토쿠 천황이 죽은 뒤 나카노오에는 자신의 황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다시 자신이 앞서 행했던 역사를 스스로 부정해야 했다. 고교쿠 천황을 다시 사이메이 천황으로 복위시킨 것은 그러한 을사의 변이라는 자신의 과거에 행했던 역사를 부정한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군신들이 나카노오에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나카노오에는 신뢰 회복을 위해 상당한 기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일단 지금 남아있는 자료들이 모두 정치에 관련된 것밖에 없다는 제약도 있다보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고학적 성과와의 제휴 등을 포함한 향후 연구의 진전을 기다릴 뿐이다.
부록[편집]
주해[편집]
- ↑ 아마츠미코토사키와케노미코토(あまつみことさきわけのみこと)로 읽기도 한다.
- ↑ '오에(
大兄 )'란 같은 어머니를 둔 형제 가운데 맏아들에 상당하는 황위계승자격을 가리키며, '나카노오에'란 '서열 2위 계승자'라는 의미가 된다. - ↑ 군주가 사망한 뒤 차기 군주가 될 사람이나 선대 군주의 왕비가 즉위하지 않은 상태로 정무를 맡아보는 것. 섭정과 다른 점은 섭정의 경우는 군주로 불리는 존재가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칭제의 경우는 그 군주가 없는, 칭제를 맡고 있는 본인이 사실상의 군주나 그에 준하는 존재로서 다만 군주로서의 즉위만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 ↑ 덧붙여 사이메이 천황이 사망한(661년) 뒤에 나카노오에는 일단은 즉위하지 않고 칭제의 형식으로 국정을 맡았으므로 달력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일본서기》에서는 유년칭원법에 따라 천황의 기년을 표기하고 있기에, 일단은 사이메이 천황의 사망 이듬해(662년)가 덴지 천황의 '원년'에 상당한다.
- ↑ 산성은 이전 일본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방어시설물로서 백제 망명세력의 지도하에 축조되는데 이를 조선식산성이라 부른다.
각주[편집]
- ↑ 메이지 시대의 학자 모리 오가이(
森 鷗外, 1862년 ∼ 1922년)에 따르면, 나라 시대의 학자 오우미노 미후네(淡海三船 )에 의해 찬진된 덴지 천황의 중국식 시호는 고대 중국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의 애용품이었다는 천지옥(天智 玉 )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 ↑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二 十 年 …六月 … 於是王 及太子 孝 與 諸 城 皆 降 (20년(660) 6월… 이에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 ↑ 일본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에 있던 군사제도
- ↑ 〈
卷 第 廿 七 天智天皇 〉. 《일본서기》. 720.三 年 …十二月 …是 歳 。於對馬嶋 。壹岐 嶋 。筑紫 國 等 置 防 與 烽。又 於筑紫 築 大堤 貯水 。名 曰水城 。 - ↑ 〈
卷 第 廿 七 天智天皇 〉. 《일본서기》. 720.四 年 …十二月 …秋 八 月 。遣 達 率 答 ■春 初 築城 於長門 國 。 - ↑ 〈
卷 第 廿 七 天智天皇 〉. 《일본서기》. 720.四 年 …十二月 …秋 八 月 。…遣 達 率 憶禮福留 。達 率 四比福夫於筑紫國築大野及椽二城。 - ↑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46쪽. ISBN 89-86142-81-3.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쓰시마(
対馬 ) · 이키(壱岐 )와 북큐슈의 각지에 사키모리(防人 , 변경수비대)와 봉수를 설치하고, 북규슈에 평지성인 미즈키(水城 )을 축조하였다. 또 쓰시마로부터 북큐슈, 기나이의 왕도에 이르는 국방상의 요새에 조선식산성6 )이라 불리는 산성을 축조하고 북큐슈에는 군정기관으로서 다자이후(大宰府 )를 설치하였다. … 6) 산성은 이전 일본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방어시설물로서 백제 망명세력의 지도하에 축조되는데 이를 조선식산성이라 부른다. - ↑ 조선 시대에 신숙주(
申 叔舟)가 지은 《해동제국기(海 東 諸國 記 )》에는 덴지 7년 무진(668년)에 처음으로 다자이노소치(太宰 師 )를 임용하였다고 했다. - ↑ 〈
卷 第 廿 七 天智天皇 〉. 《일본서기》. 720.六 年 …十一月 …是 月 。築 倭國 高 安城 。讃 吉國 山田 郡 屋 嶋 城 。對馬 國 金田 城 。 - ↑ 이것은 일본에서 황자로서 태정대신으로 임명된 최초의 사례이다. 또한 《해동제국기》에는 이때에 대납언(
大納言 ) 3인을 두었다고 했다. - ↑ 아베노 미코와 아가노 히메미코는 《니혼쇼키》에 나오지 않는다. 실존 여부에 의문이 있다.
- ↑ 《부상략기(
扶桑 略記 )》에는 병사설의 뒤에 '일설'로서 "혹 말하기를, 천황의 가마가 야마시나노사토(山階 鄕)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영영 산림에 숨어 붕어한 곳을 알지 못하였다. 다만 신발이 떨어진 자리에 그 산릉을 만들었다. 여러 황제가 갔으나 이유 없이 살해되곤 하였다[一 云 ,天皇 駕 馬 ,幸 山階 鄕,更 無 還御 .永 交山林 ,不知 崩 所 .只 以履沓 落處爲 其山陵 .以往 諸 皇 不知 因果 ,恒 事 殺害 ]."라 적고 있는데, 산중에서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에서 덴무 덴노 측에 의해 암살되었을지 모른다는 설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부상략기》는 《일본서기》보다 훨씬 후대에 편찬된 서적으로 그 신빙성은 낮다고 여겨진다. - ↑ 덴지 천황의 능묘나 덴무·지토 합장릉은 모두 정팔각형으로 만들어진 팔각분(
八角 墳 )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고분 시대 말기에 해당하는 7세기 중엽이 되면 팔각분은 거의 오키미(大王 )라고도 불렸던 왜왕가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게 된다. - ↑ 무로마치 시대인 오에이(
應 永 ) 33년(1426년), 고코마쓰 상황(後 小松 上皇 )의 명으로 내대신 도우인 미치스에(洞 院 満 季 ) 등이 중국 남송의 《역대제왕소운도(歷代 皇 胤 紹運圖 )》의 범례를 모방해 편찬한 황실 족보. 신화 시대를 시작으로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御神 ) 이하의 5대와 진무 천황(神武 天皇 ) 이하 역대 일본 천황의 계보를 부자·형제 관계를 중심으로 엮고 거기에 여러 황족들의 생모와 약력 · 극위 · 극관 · 사망연월일 등의 정보를 기록했다. 일본의 여러 황실 계도 가운데 권위있는 계도로 여겨지지만, 고대 부분에 있어서는 검토가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참고 문헌[편집]
- 서적
- * 연민수, 『일본역사』 보고사, 1998년
- * 양은경, 『일본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 2012년
- 사료
- * 《일본서기》
- * 《삼국사기》
- * 《해동제국기》
같이 보기[편집]
전임 공백(우마야도 황자) |
제1대 섭정 (황친섭정, 하쿠호 시대) 655년 ~ 661년 |
후임 공백(구사카베 황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