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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 (14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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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きむあきら, 1475년 ∼ 1528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영지(英之ひでゆき), 호는 삼당(さん塘) 또는 락재(らくとき)이며 본관은 (신)안동이다. 사헌부감찰 영천군수 사헌부장령을 지낸 김영수(きむひさし銖)와 숙부인(淑夫としおじん) 강릉김씨(こうりょうきん)사이에서 3남6녀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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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살때부터 종조부인 보백당 김계행(かねがかりぎょう)에게 글을 배웠는데 “이 아이는 장차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내리라”고 칭찬을 받았다. 1495년(연산군1년) 21세에 사마양시(司馬しばりょうためし) 증광(ぞうひろ) 2등 18위로 합격(合格ごうかく: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합격)하고, 1506년(연산군12년) 32세에 별시문과(べつためし文科ぶんか)에서 정과(ひのと) 7위로 급제(及第きゅうだい)하여 예문관 검열(藝文げいぶんかん けん閱)에 임명되었고 영예롭게 사가독서(賜暇しか讀書どくしょ)를 하였다. 이듬해(1507)에는 예문관(藝文げいぶんかん) 대교(まちきょう)에 올라 예문관 봉교(藝文げいぶんかんたてまつきょう) 김흠조(きむ欽祖)·정충량(ていただし樑), 예문관 대교(藝文げいぶんかん まちきょう) 이희증(のぞみ曾), 예문관 검열(藝文げいぶんかん けん閱) 권벌(けん橃)·이영(およげ정웅(ていくま윤인경(いんひとしきょう윤지형(いんとめ衡) 등과 더불어 사신(ふみしん)의 정도를 내세우며 사초문제(ふみくさ問題もんだい)로 빚어졌던 무오사화(つちのえうま) 피화인(わざわいじん)의 신원(しん寃)을 상소하였다.

1508년(중종3년) 11월 7일 홍문관 박사(弘文こうぶんかん 博士はかせ), 같은해 12월 26일 홍문관(弘文こうぶんかん) 수찬(おさむせん), 1512년(중종7년) 3월 6일 홍문관(弘文こうぶんかん) 교리(こう), 같은해 6월 1일 평안도어사(平安へいあんどう使つかい)를 역임(歷任れきにん)하였다. 1515년(중종10년) 5월 27일 사헌부(つかさけん) 장령(てのひられい), 같은해 12월 26일 의정부(政府せいふ) 사인(舍人とねり)에 じょ授(제수) 되었고, 1517년(중종12년) 7월 16일 경상도 재상경차관(わざわいきずけいかん)으로 임명되어 영남지방(みねみなみ地方ちほう)을 순찰(巡察じゅんさつ) 하였다.

그 후 김제군수(きむつつみぐんもり), 1519년(중종14년) 12월 17일 응교(おうきょう)에 제수(じょ授)되고, 1520년(중종15년) 2월 4일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에 제수되었다. 1522년(중종17년) 8월 24일 사헌부장령(つかさけんてのひられい)을 거쳐, 1524년(중종19년) 10월 27일 동부승지(どうふくうけたまわむね)을 역임하였으며, 1525년(중종20년) 3월 6일 우부승지(みぎふくうけたまわむね), 1526년(중종21년) 형조참의(けい參議さんぎ), 1527년(중종22년) 6월 16일 강원도관찰사(江原えばらみち觀察かんさつ使)로 제수 되었으나 대간(たい諫)의 탄핵(彈劾だんがい)으로 체직(遞職)되었다. 또한 이조참의(吏曹參議さんぎ)을 역임 하였는데, 문장이 섬려(纖麗:섬세하고 아름다움)하여 홍문관(弘文こうぶんかん) 수찬(おさむせん)에서 이조참의(吏曹參議さんぎ)에 이르기까지 20년동안 계속 왕이 내리는 교서의 글을 짓는 일을 맡아보던 관직인 지제교(せいきょう)를 겸하였다

김영은 정암(せい菴) 조광조(ちょうひかり) 등 중종때의 사림파(りん)와는 언로(げん)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이는 등 정치적 성격을 달리하였으며 학조대사(がく大師だいし)의 조카라는 이유로 한때 기롱(そしろう)을 받기도 하였다. 1528년(중종23년) 7월19일 54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저서로는 삼당집(さん塘集)이 전한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낙하리 이동 자좌(すわ)에 쌍분(そうふん)으로 있다. 묘갈은 형조판서 대제학 퇴휴당(退すさきゅうどう) 소세양(ゆずる)이 찬(せん)하고 신분(さる濆)이 썼다. 손자 거창현감 김기보(きむほう)가 퇴계(退すさけい) 이황(ひろし)이 수필(ひつ)하고 개각(あらためこく)한 것을 소장해 두고 있었는데, 그후 그것을 바탕으로 방손 영의정 문곡 김수항(きむひさしつね)이 전(篆)하고 음기(かげ)하여 역시 문곡(文谷ふみや)이 찬(せん)하고 썼다. 그후 세월이 많이흘러 비문이 마모되어 알아 볼 수 없어 방손 비서승(秘書ひしょすすむ) 동강 김영한(きむ甯漢)이 추기(追記ついき)하고 동지돈녕원사(どうあつしやすしいんごと) 김용진(きむひろし鎭)이 썼다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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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조부 : 봉화현감 비안현감 김삼근(かねさんこん)
  • 조부 : 한성부판관 김계권(かねがかりけん)... 예천 권씨 이조판서 대제학 제평공 권맹손의 사위
  • 종조부 : 사간원대사간 성균관대사성 도승지 증이조판서 보백당 김계행(かねがかりぎょう)
    • 아버지 : 사헌부감찰 영천군수 사헌부장령 김영수(きむひさし銖)
    • 어머니 : 강릉 김씨, 현령 김박(きむひろし)의 딸
    • 큰삼촌 : 세조~연산군까지 국사(國師こくし), みちごう는 등곡또는황악산인, 법명은학조(がく), 본명 김영형(きむひさし衡) 학조대사
    • 둘째삼촌 : 사헌부감찰 합천군수 김영전(きむひさし銓)
    • 세째삼촌 : 진사 봉사 김영균(きむえいひとし)
    • 네째삼촌 : 합천군수 수원부사 김영추(きむひさしおもり)
      • 동생 : 세자시강원문학 평양서윤 김번(きむ璠)
      • 동생 : 예조정랑 경상우도수군절도사 김순(きむ珣)
        • 아들 : 사포별좌 증사복시정 김생락(金生きんせいらく)
        • 아들 : 김생한(金生きんせいかん)
        • 조카 : 신천군수 증좌찬성 김생해(金生きんせいかい)...전주 이씨 성종의 아들 경명군 이침의 사위
          • 손자 : 거창현감 회인현감 김기보(きむほう)
          • 손자 : 원주목사 김성보(金星きんせいほう)
          • 종손자 : 삼가현감 증영의정 김대효(きむだいこう)
          • 종손자 : 군기시정 증이조판서 김원효(金元かねもとこう)
          • 종손자 : 돈녕부도정 증영의정 김극효(きむかつこう)...동래 정씨 좌의정 임당 정유길의 사위, 김상용 김상헌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