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조선귀족)
김윤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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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보 | |
출생 | 1835년 10월 3일[1][2] (양력 10월 29일) 조선 경기도 광주부 |
사망 | 1922년 1월 21일[3] 일제 강점기 경성부 | (86세)
국적 | 조선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
직업 | 문신 학자 시인 서예가 정치가 문장가 |
학력 | 한학 수학(1874년 증광시 병과 급제) |
종교 | 유교(성리학) → 대종교 |
활동기간 | 1874년 ~ 1922년 |
장르 | 한시, 서예 |
부모 | 김익태(부), 전주 이씨 부인(모) |
배우자 | 윤씨 부인 |
친지 | 김기건(증조부) 김용선(할아버지) 이인성(외조부) 윤로(장인) 김익정(작은아버지) |
김윤식(
구한말 개화파 정치인의 한 사람이며 1919년 일본 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탄원하는 탄원서를 올리기도 했다. 중추원 간부를 지냈고 한때 조선귀족 신분이었으나 이용직과 함께 3·1 운동에 동조하여 작위가 박탈되었다.
생애
[편집]김윤식은 1835년 음력 10월 3일, 경기도 광주부 한강변 두호(
1850년 16세 무렵 유신환과 박규수의 문하에 들어가 남정철, 한장석, 민태호, 민규호 등과 수학했다. 박규수로부터 개화 사상을 배웠다.[6]
1865년 5월 20일 31세의 나이에 진사시에서 3등으로 생원이 되고, 12월에 건릉참봉을 제수한다.[7] 1868년 3월 14일에는 고종 건릉에 제사를 지내러 왔을 때 능사(
1874년 5월 40세의 나이로 1874년 증광시(
1881년, 46세의 나이로 영선사에 임명된다. 처음 영선사로 임명된 조용호가 병사한 탓에 급히 그 자리를 메운 것이다. 조선 정부는 당시 근대식 병기의 제조 및 사용법을 배우기 위하여 개화운동인 양무운동이 진행되던 청나라 톈진에 유학생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을 인솔하는 사신으로 김윤식을 임명한 것이다.
김윤식에게는 유학생 인솔 뿐 아니라, 미국과 관계를 맺기 위한 목적으로 청나라와 교섭하는 역할도 주어졌다. 김윤식은 유학생들을 톈진으로 보내고 본인은 11월 17일에 북경 보정부에 도착한다. 11월 28일 어윤중과 함께 이홍장을 만나 미국과의 관계를 위한 연미사(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톈진에 머무르고 있던 김윤수와 어윤중은 청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고, 향도관이 되어 오장경과 마경충이 이끄는 군대를 데리고 귀국해 임오군란을 진압한다. 이 때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간다.[6]
임오군란이 종료된 후 청나라의 유학생들을 철수시키고 돌아와 이조참판, 강화부유수, 공조판서, 병조판서 겸 외무아문독판 등을 겸직한다.[15] 강화부유수로 있을 때 위안스카이의 도움으로 약 500여명 규모의 신식 병영인 진무영을 설치한다.[12]
1896년에는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 참여하고 독립신문의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김홍집 내각에서 갑오개혁에 관여하였으나, 1895년 을미사변과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남과 동시에 김홍집 일파 역시 실패하면서 이들의 뒤를 봐주었다는 이유로 위정척사 계열의 공세에 시달리고, 제주목으로 종신 유배된다.[12] 1898년 12월 최익현은 유길준과 서재필, 김윤식의 무리를 사형에 처할 것을 상주하기도 했다.
1901년에 신축민란으로 제주목의 정세가 혼란해짐에 따라 지도(
1908년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을 역임했고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당시 불가불가(
사후 평가
[편집]김윤식 사망 후에 사회장 문제를 둘러싸고 민족운동 진영이 분열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결코 그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를 지냈고 한때 조선귀족 신분이었으나 이용직과 함께 3·1 운동에 동조하여 작위가 박탈되었기 때문에 각종 친일파 목록에서는 제외되었다.
초상
[편집]1915년 이후에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조선 엔 지폐에 새겨진 수노인이 김윤식이라는 가설이 있다. 그러나 1919년 3·1 운동을 지지하여 자작의 직위가 박탈된 후에도 이 노인의 초상이 계속 화폐에 새겨졌다는 점, 일본에서 생존중인 인물을 지폐의 인물로 선정한 적이 없다는 점이 지적된다. 고대 일본의 무장이자 대신인 타케우치노 스쿠네라는 설도 있다. 이 화폐는 일제강점기가 종료된 후에도 계속 발행되었다.[17]
가족 관계
[편집]- 9세조: 김육
- 증조부 : 김기건(
金 基 建 )
저서
[편집]- 《운양집(
雲 養 集 )》 - 《천진담초(
天津 談 草 )》 - 《속음청사(
續 陰晴 史 )》 - 《음청사(
陰晴 史 )》 - 《병합사(倂合
史 )》
각주
[편집]- ↑ 가 나
續 陰晴 史 (속음청사)高 宗 24年 丁 亥 10月 3日 :初 三 日 ,風雪 初 寒 栗 烈 如大冬 天氣 ,今日 余生 朝 也。 - ↑ 가 나
續 陰晴 史 (속음청사)高 宗 32年 乙 未 10月 3日 :初 三 日 庚午 ,晴 ,今日 余 回 甲 生 朝 也。 - ↑ 가 나 동아일보 1922년 1월 22일 3면:
雲 養老 人 金 允 植 씨는 팔십여세의 로령으로鳳 翼 洞 자택에서 한가로히 일월을 보내더니 달포이래 쇠증으로 병석에 누어 작이십일일 정오에 고요히 세상을 떠낫는대 향년이 팔십칠세이라. -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기
- ↑ 동아일보 1922년 1월 23일 1면
- ↑ 가 나 다 라 “우리역사넷”. 2022년 5월 26일에 확인함.
- ↑ 승정원일기 2697책 (탈초본 127책) 고종 2년 12월 22일 계축 28/33 기사
- ↑ 고종 9년 임신(1872) 10월 4일(을묘)
- ↑ 고종 9년 임신(1872) 11월 1일(임오)
- ↑ 고종 10년 계유(1873) 5월 24일
- ↑ 황현, 《매천야록》
- ↑ 가 나 다 라 마 “김윤식(
金 允 植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2년 5월 26일에 확인함.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22년 5월 26일에 확인함.
- ↑ “영선사(
領 選 使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2년 5월 26일에 확인함.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22년 5월 26일에 확인함.
- ↑ “
嗚呼 金 允 植 先生 ”. 동아일보. 1922년 1월 22일. - ↑ “우리역사넷”. 2022년 5월 29일에 확인함.
참고 자료
[편집]-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2월 1일). 〈김윤식 : 죽어서도 민족운동의 분열에 ‘기여’한 노회한 정객 (배항섭)〉.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개화정책과 그 반향〉
- 고종실록
- 순종실록
- 승정원일기
- 일성록
외부 링크
[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김윤식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