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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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신 화백이 그린 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 초상화 | |
조선의 충청도 신창현감 | |
임기 | 1860년 ~ 1861년 |
군주 | 조선 철종 |
조선의 호조참판 | |
임기 | 1871년 12월 5일 ~ 1873년 12월 30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섭정 | 흥선대원군 이하응 영의정 이유원 |
대한제국의 경기도 관찰사 | |
임기 | 1898년 ~ 1899년 |
군주 | 대한제국 고종 이형 |
이름 | |
별명 | 초명은 최기남, 자는 찬겸, 호는 면암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33년 12월 5일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포천현 내북면 가채 ( |
거주지 | 대한제국 경기도 포천 |
사망일 | 1906년 11월 17일 | (72세)
사망지 | 일본 쓰시마국 이즈하라에서 병사 |
국적 | 대한제국 |
학력 | 1855년 과거 급제 |
경력 | 독립운동가 정치인 항일 의병장 |
정당 | 노론 후예 세력 잔존 위정척사파 |
본관 | 경주( |
부모 | 아버지 최대( |
종교 | 유교(성리학) |
웹사이트 | 최익현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상훈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최익현(
주요 이력[편집]
본관은 경주이고, 초명은 최기남(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동부승지, 참의, 돈녕부의 도정 등을 역임했고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반대, 1863년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1873년 음력 10월과 1874년 음력 11월, 이토록 두 차례씩 흥선대원군을 공격하여 끝내 실각시켰다. 그 뒤 의정부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고종 즉위 직후부터 나온 정도전, 남곤, 정인홍, 한효순, 윤휴, 이현일 등의 복권 여론을 친구 김평묵과 함께 여러 번 결사 반대하여 좌절시켰다.
1876년 강화도 조약 반대에서 가일층 부각되었다.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올린 개항오불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그는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 당일, 대마도주의 일본식 단발 요구에 대한 항의의 단식을 시작하였으나, 대마도주의 사과 및 왕명으로 단식을 중단을 하였다. 하지만, 3개월 뒤의 발병(풍증)[1]과 단식 후유증으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개화파를 반대하면서도,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와 남인, 북인 채용 정책에 적대적이었고, 고종의 황제 칭호 격상을 옳지 않게 여겼다. 사후 1928년 시호 없이 종묘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다.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군 내북면 가범리(
수학과 소년기[편집]
14세 때 경기도 양근군 벽계(蘗溪)에 은퇴한 노론성리학의 거두 이항로의 문하에서 격몽요결, 대학장구(
스승인 이항로로부터 우국애민(
화서는 최익현에게 '면암'(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편집]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편집]
철종 재위 중인 1855년(철종 6)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
그는 언관 벼슬에 주로 있으면서 일찌감치 조선조 사림의 최대 미덕인 강직한 성품을 드러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반대하다가 눈밖에 나는가 하면 1864년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세도 가문 축출에서 벗어나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 북인 등도 등용하자 그에게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게 된다. 왕권 강화를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는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반대하여 관직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 뒤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성균관직강이 되었다가 사헌부장령을 거쳐 공조참의, 돈녕부도정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868년 올린 상소에서 경복궁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비정을 비판, 시정을 건의하였다. 흥선대원군에 대한 상소는 그의 강직성과 그가 표방한 민본주의 성향 우국애민정신의 발로이며 막혔던 언로를 연 계기가 되었다. 1870년(고종 7)에 승전을 지냈다.
대원군 비판[편집]
스승인 이항로의 생존 시에 최익현은 스승 이항로가 대원군을 정치적으로 지지하였으므로 대원군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였다. 그러나 이항로 사후에는 대원군에게 비판적으로 변하게 된다.
1868년(고종 5년) 경복궁 중건의 중지를 촉구하고, 부역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생계 문제와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물가 인상과 재정의 파탄 등을 지적,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실정(
사간원사간 권종록이 이를 너무도 무례하다며 비판하였으나 오히려 고종은 그를 10월 20일을 기하여 돈녕부 도정(
대원군 축출에 협력[편집]
한편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축출하고자 한 명성황후는 사람을 보내 그와 교섭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873년(고종 10년) 10월 돈녕부도정으로 재직 중 계유상소(
동부승지로 기용되면서 그는 이어 조정 대신들이 일처리를 잘못하여 번잡하다는 것을 지적, 상소한다. 이에 의정부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계원, 영돈녕부사 홍순목 등이 사직 상소를 올렸고, 삼사에서는 최익현을 규탄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그의 상소를 높이 사서 일약 호조참판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상소문이 무례하다는 비난이 빗발쳤고 대원군계 인사들은 그를 규탄했다.
영의정 이유원 등과 함께 종실 흥선대원군 독점 전횡 체제 비판 작전에 전격 합세를 한 그는 서원을 철폐한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는 등 대원군을 공격하여 결국 실각시켰다. 이후 고종의 신임을 받아 가선대부로 승진, 돈녕부도정을 거쳐 호조참판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와 영상 이유원이 공동 시행한 흥선대원군 하야 운동은 부자이간의 행위라며 대원군 계열 인사로부터 비판받았다. 그는 임금의 아버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돈녕부도정에 전임되었다가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
윤휴, 이현일 복권 반대[편집]
1873년(고종 10) 이현일, 윤휴, 한효순, 목내선, 정인홍, 정도전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신원 상소가 올려졌다. 이에 최익현과 김평묵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정도전, 이현일, 윤휴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상소가 계속되자 최익현과 김평묵은 이를 막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하였다.
1873년(고종 10)부터 1876년까지 최익현과 김평묵 등은 상소 등을 통해 "이현일, 한효순, 목내선 등의 신원을 요구한 사람들을 추율(
개항, 개화 반대 운동[편집]
민씨 정권과의 갈등[편집]
최익현은 곧 외국과의 통상을 논의하기 시작한 민씨 정권과도 곧 마찰을 빚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반대에서 가일층 부각되었다.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개항을 해서는 안되는 다섯가지 이유를 적어 개항오불가(
최익현이 반대한 개항 후의 사태는 개화, 주화파들의 주장과는 달리 근대문물을 앞세운 일제를 비롯한 열강의 침략으로 나타나 그의 예견은 적중한 것이었다. 특히 외국 자본의 침투와 경제적 진출은 농촌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갔고 그에 더하여 정치적, 군사적 침략이 강화되어 경향(
이후로 통상 확대와 여러 외세의 유입이 계속되면서 최익현은 이에 결사 저항하는 위정척사론의 거두로 활동하게 된다.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운동과 그해 친일 정권 성립과 함께 단행된 갑오개혁에 크게 반발했고, 이듬해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을 조직했다가 체포되었다. 이 당시 그가 상소를 올리며 적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라는 말은 강제적 단발령에 목숨을 걸고 반발했던 당시 유학자들의 뜻을 함축한 표현이었다.
갑오경장 반대 운동[편집]
최익현은 계속 서구 문물의 유입을 나라를 타락시키는 원인으로 규정, 척사운동에 앞장서 국민의 자주의식을 고조시키고 외세의존세력을 규탄하여 마지 않았다. 1894년의 갑오경장이 단행되자 외세의 내정 간섭은 부당하다며 성토하였다. 이어 단발령이 시행되자 '청토역복의제소'(請討
1895년 을미사변 때에도 각처에서 의병이 발생, 조정에서는 그에게 선유사의 직책을 내려 의병의 해산을 촉구하게 하였으나 해산 설득을 포기한다.
단발령 반대 운동[편집]
1895년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 단발령이 시행되자 '신체발부는 수지부모요 불감훼상'이라는 이유로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호소하였다. 최익현은 유림 거두들과 연명하여 단발령은 야만적인 행태라며 규탄했다.
그러나 당시 내부대신 유길준 등은 단발령을 단행하였다. 1896년 초, 유생들의 단발 반대 상소가 빗발쳤다. 이에 유길준은 유생들의 시위의 배후로 최익현의 체포를 지시한다. 유길준은 유생들의 단발에 앞서, 유림들과의 몸싸움도 불사하고 최익현 체포를 위한 순검 1개 부대를 보냈다. 그는 단발령 반대 여론을 주도하던 최익현을 경기도 포천군 영평에서 체포하여 투옥시켰다. 이후 유길준은 유생들에 대한 단발을 감행하다. 유길준은 직접 최익현에게 고시문을 보이면서 법령대로 단발을 강행하겠다 하자, 최익현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질타하며 몸부림쳤다. 유길준은 가위를 들고 와서 최익현의 머리카락을 삭발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완강하게 몸부림쳐서 유길준의 삭발 기도는 실패하고 만다.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비판[편집]
그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 대해 정부의 대신들에게 부당한 압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어떤 무리들이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정부 관료에게 압력을 행사하거나 모함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민권당, 민권지당으로 규정하고 비판했다.
최익현은 1898년 12월 10일의 국내 현안에 대한 상소문 중 7번째 조항에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혁파를 건의했고, 이들을 변란을 조장하는 발판으로 규정했다.[3] 최익현에 의하면 ''민당'을 혁파하여 변란의 발판을 막으소서. 신은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는 비방하는 것을 써놓는 나무와 진언(
그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모임에 대해서도 '이른바 '민당'이라는 것은 시정(
그는 또 '더욱 심한 자 몇 사람을 다스리고 나머지는 법사(
최익현은 1898년 12월 10일의 현안 상소의 7번째 조항에서, 고종에게 다른 이들을 시켜서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해산할 것을 같이 진언한다. '지금 듣건대, 성상께서 분발하시고 큰 결단을 내리시어 모두 제거하신다고 하니, 진실로 더할 나위 없는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 뒤를 잘 처리하지 못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지 못할까 두렵다'며 고종이 직접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해산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악역으로 내세워 이들을 해산시킬 것을 강조했다.
백정 박성춘의 연설을 그는 못마땅히 여겨 패거리들의 작당으로 규정, 비판하였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편집]
1898년(광무 1년) 궁내부특진관(
그는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을 통해 위정척사론의 전파를 추진했다. 세상이 혼란한 것은 인륜과 도덕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라 굳게 확신하고 정론과 정학의 수호를 위해서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 뒤 러일전쟁의 발발과 일제의 군사적 국권침탈을 보고서는 '궐외대명소'(闕外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
을사늑약 반대 운동[편집]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그는 이를 늑약으로 간주,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최익현은 을사늑약의 늑결을 나라의 멸망으로 간주, 조약 체결 당사자 5명의 처단을 주장, '청토오적소'(請討
그러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충남 홍주의 유학자 민종식(閔宗
1906년 2월, 자신의 문하생이자 이미 독립하여 전북 태인의 종석산(鍾
의병 활동과 최후[편집]
의병 봉기[편집]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그는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된다. 1906년 6월 4일 아침 최익현은 최제학(
“ | 왜적이 국권을 빼앗고, 적신이 죄약을 빚어냈다. 구신( |
” |
1906년 6월 4일 최익현의 호남의병진이 무성서원에서 거의한 당일에 태인 본읍으로 진군한 뒤 향교에서 잠시 유진할 때에 발표된 최익현의 <기일본정부서(
“ | 나라에 충성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성( |
” |
이어 그는 강화도 조약이 불법임을 선언하고, 강화도조약 체결 이래 조선에 대해 '기의배신'(棄義
그의 거병에 제자 문인들과 이날 모인 모든 회중(
의병 전쟁[편집]
1906년 6월 중순 최익현 의병진이 태인 본읍으로 진군해 오자, 군수 손병호(
이튿날 아침 내장사 뜰에서 좌, 우익을 갈라 잠시 군사를 조련한 다음 30여 리를 행군, 지세가 험해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던 구암사(
최익현은 여기서 의병진을 재정비하고 부서를 정해 임병찬을 참모장으로 하고 김기술(
순창군수 이건용이, 의병진이 곡성으로 진출한 틈을 타 전라북도 관찰사 한진창(
6월 11일 아침, 광주관찰사 이도재(
최익현은 처음에 이들이 일본군인줄 알고 즉시 전투태세에 돌입했었다. 그러나 얼마뒤 척후병의 보고로 이들이 일군이 아니라 동족인 진위대 군사임을 알고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 진위대측에 다음과 같은 간곡한 통첩을 보냈다.
“ | 우리 의병은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목적으로 싸울 뿐 동족간의 살상은 원치 않는다. 진위대도 다같은 우리 동포일진대, 우리에게 겨눈 총구를 왜적에게로 돌려 우리와 함께 왜적을 토멸하도록 하자. 그리함으로써 후세에 조국을 배반했다는 오명을 씻을 수 있으리라. | ” |
그러나 전주진위대와 남원진위대는 최익현의 이와 같은 호소를 묵살한 채 오히려 의병진의 피전(避戰)자세를 역이용해 일제히 공격을 가해 왔다. 의병측은 이미 '동포끼리는 싸워서는 안된다'고 사생취의(捨生
단식과 최후[편집]
1906년 6월 13일 조정으로부터 궁내부특진관에서 해임되었다. 6월 14일 끝까지 남아 있던 최익현 이하 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
6월 말 최익현은 이들과 함께 다시 경성부로 압송되어 경성 주재 일본군사령부에 감금당하였다. 최익현 이하 13인의 의병장들은 여기서 그들의 심문과 회유를 받는 동안에도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음모의 죄상을 성토하였다. 2개월간 일본군사령부에 감금된 끝에 최익현과 임병찬은 그해 8월 하순 일본의 쓰시마섬 엄원(
최익현은 일본 정부 측의 갖은 협박과 회유를 뿌리치고 단식에 돌입하였다. 최익현은 죽음이 임박해지자 임병찬에게《유소(
“ | 신의 나이 75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4천년 화하정도가 더럽혀져도 부지하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 선왕의 적자가 어육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고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 ” |
일본인들은 강제로 그의 입에 음식을 넣었으나 모두 뱉거나 입을 열지 않고 저항하였다. 1906년 10월경 그는 풍증이 발병하였다. 1907년 1월 1일 쓰시마섬 감옥에서 풍증과 단식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시신의 운구와 장례식[편집]
최익현의 유해는 1월 5일 쓰시마에서 배편으로 경상남도 동래부 초량(
사후[편집]
- 묘소 《최익현선생묘》는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있다. 1982년 8월 3일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 최익현의 춘추대의비(
春秋 大義 碑 )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땅에 묻혔다가 해방 후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소재 묘소에 다시 세워졌다.[4] - 시호 없이 1928년 이왕직에 의해 종묘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시호가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논란이 있었다.[5] 그러나 종묘에서 출향되지는 않았다.
-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저서[편집]
- 《면암집》
- 《면암속집》
사상과 신념[편집]
최익현의 위정척사론은 어디까지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중화사상의 테두리 속에 머물러 있어 중국으로부터의 완전 이탈이나 성리학적 윤리질서의 개조란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개화된 일본도, 금수시(
고종 즉위 직후부터 나온 정도전, 남곤, 정인홍, 한효순, 윤휴, 이현일 등의 복권 여론이 나오면, 동문이자 친구 김평묵과 함께 번번히 결사 반대하여 좌절시켰다. 이들은 그가 죽은 직후인 1907년(융희 1) 순종 즉위 후 복권되었다.
또한 그는 대한제국의 수립을 반대하였다. 조선의 국왕이 대한제국(
평등사회를 반대한 이유[편집]
최익현은 평등 사상에 대해 반대하였다. 그가 평등사회를 반대한 이유는 부와 권력, 사회적 지위를 위해 서로 적나라하게 경쟁하는 천박한 평등사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최익현은 보통 사람들이 모든 것을 차지하고 또 한국이 점차적으로 부, 권력, 사회적 지위를 위해 서로 적나라하게 경쟁하는 천박한 평등사회로 향해가고 있다는데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다.[6]
의회 설치와 민권당 반대 이유[편집]
그는 독립협회를 민권당으로 보았다. 그가 민권당을 반대하는 이유로는 국회나 의회에서 민권당, 민권운동을 하는 무리들이 정부 고위층, 관료에게 압력을 주어, 자신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챙길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가 국회, 의회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런 특정한 무리들이 정부 관료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것을 그 이유로 들었다. 최익현은 '본인은 외국에는 소위 자유의원(
최익현은 특정 세력이나 개인이 정부의 고위층에게 압력을 행사하거나 이권을 요구하거나 할 것을 내다보았다. 최익현은 '더군다나 그들은 아무렇게나 모여든 새들의 무리와 같고, 기율(
독립협회에 대해서는 상소문에 시정(
대원군 월권행위 비판[편집]
그는 흥선대원군을 월권행위자로 보았다. 그가 흥선대원군을 부정적으로 본 이유는 서원철폐보다는 남인과 북인 당원을 채용하는 것이었다.
국왕의 생부로 집권해온 대원군의 강력정치와 월권행위를 비판, 대원군이 남인과 북인을 등용하는 것 역시 정사를 어지럽히는 행위라 보고 대원군 집권 명분의 정당성이 없음을 들어 탄핵, 실각시켰다. 이때 '봉명조양'(
단발령 반대[편집]
그는 갑오개혁과 단발령 당시 나라가 망하는 것이라며 저항하였다. '5백년 종사가 드디어 망하니 어찌 한번 싸우지 않겠는가' 또한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찌 충의(
농민군 출신에 대한 반감과 의심[편집]
의병활동을 하면서 최익현을 포함한 유생들은, 유생들과 농민들 사이의 협력에 대한 요구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에게 가졌던 적개심과 공포가 뒤섞인 업신여겨 보는 태도를 전혀 극복할 수 없었다.[7] 최익현은 농민 출신들의 잔인함과 호전성, 살인, 도둑질, 무례함을 극도로 혐오하였다. 정재식은 이를 두고 '최익현은 '살인적이고 도둑질을 자행하는 농민 무리들 을 반대하며'라는 격렬한 글에서 보인, 16세기 독일의 "위험하고, 해로우며, 극악무도한 농민반란자들을" 남모르게 혹은 공공연하게 치고, 죽이고, 찌르라" 주장한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보였던 감정적인 반응과 비슷한 반응[7]'이라 평하기도 했다.
기타[편집]
가계[편집]
- 장남 : 최영조(
崔 永 朝 ) - 차남 : 최영학(
崔 永 學 ) - 삼남 : 최영복(
崔 永福 )- 현손 : 최창규(1937~
前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 현손 : 최창규(1937~
관련 문화재[편집]
- 최익현 초상 - 대한민국의 보물 제1510호, 국립제주박물관 소장
- 화순 춘산영당 최익현 초상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13호
- 최익현선생묘 - 충청남도 기념물 제29호
- 예산 최익현선생재실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5호
- 청양 모덕사 최익현 초상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31호
- 하동 운암리 최익현 영정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13호
- 곡성 오강사 최익현 초상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81호
- 채산사 - 경기도 기념물 제30호
사진[편집]
-
청양 칠갑광장에 있는 최익현의 동상
같이 보기[편집]
최익현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 1982년, 이신재 - 《풍운》 , 드라마
- 1990년, 정승현 - 《대원군》 , 드라마
- 1995년, 박영목 - 《찬란한 여명》, 드라마
- 2001년, 이대로 - 《명성황후》, 드라마
- 2002년, 이순재 -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 창사특집 4부작 드라마
- 2010년, 오현경 -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 연극
- 2016년, 장희웅 - 《한설에 핀 매화》, 뮤지컬
- 2018년, 이호재 - 《미스터 션샤인》, 드라마 (모티브 고사홍)
각주[편집]
- ↑ 《대마도일기》
- ↑ 《동아일보》 새로 쓰는 선비론 (21) - 면암 최익현 Archived 2007년 2월 17일 - 웨이백 머신 (1998.3.5)
- ↑ 가 나 다 라 고종실록 38권, 1898년(고종 35년, 대한 광무(
光武 ) 2년) 12월 10일 양력 2번째기사, 최익현이 시행해야 할 사항을 갖추어 상소를 올리다 - ↑ 예산군청, 최익현 선생 묘 Archived 2007년 9월 27일 - 웨이백 머신
- ↑ 동아일보 1928년 5월 11일자 2면, 사회면
- ↑ 가 나 다 정재식, 《
意識 과歷史 :韓國 의文化 傳統 과社會 變動 》, (一 潮 閣 , 1991) 266페이지 - ↑ 가 나 정재식, 《
意識 과歷史 :韓國 의文化 傳統 과社會 變動 》, (一 潮 閣 , 1991) 264페이지 - ↑ 정재식, 《
意識 과歷史 :韓國 의文化 傳統 과社會 變動 》, (一 潮 閣 , 1991) 258페이지
참고 서적[편집]
- 최익현, 《면암집》(민족문화추진회,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