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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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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1910년 경 뤼순감옥에 수감 중이던 안중근
신상정보
다른 이름청계(せいけい)
아명(めい): 안응칠(やすおうなな)
일명(いちめい): 안다묵(やすだま)
출생1879년 9월 2일(1879-09-02)
조선 황해도 해주부
사망1910년 3월 26일(1910-03-26)(30세)
일본 제국 만저우 지방 관동주 펑톈 성
료준 뤼순 감옥
성별남성
본관순흥(じゅんきょう)
직업독립운동가, 항일 의병장, 사상가, 저술가, 시인, 작가, 서예가
종교천주교 (세례명: 토마스)
부모부: 안태훈(安泰あんたいくん)
모: 조마리아(ちょう瑪利)
배우자김아려
자녀안현생(장녀), 안분도(장남), 안준생(차남)
친척안정근(남동생)
안공근(남동생)
안명근(사촌 남동생)
안경근(사촌 남동생)
안우생(친조카)
안미생(친조카)
김인(친조카사위)
안진생(친조카)
안봉생(5촌 조카)
안춘생(5촌 조카)
김구(사돈)
안창호(친족척)
활동 정보
관련 활동독립운동
주요 활동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활동 이념민족주의, 범아시아주의
경력대한의군(1907년~1909년)
대한의군 참모중장
의병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
아령지구사령관
상훈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안중근
한글 표기: 안중근
한자 표기: やす重根しこね
개정 로마자 표기: An Junggeun
매큔-라이샤워 표기: An Chungkŭn
예일 표기: An Cwungkun
국제 음성 기호: [ɐndʑuŋɡɯn]

안중근(やす重根しこね,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독립운동가, 항일 의병장(대한독립군 '대한의군(大韓たいかん義軍ぎぐん)' 참모중장), 정치 사상가이다. 태명은 안응칠(やすおうなな)이었으며 세례명토마스(음역어 도마, 사도 토마에서 따옴), 일명은 다묵(だま)이다. 본관순흥(じゅんきょう)이고 고려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26대손이다.[1][2]

동학 농민 운동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あんたいくん)이 몇몇 본래의 목적을 가지지 않은 동학군 부대들을 정벌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고, 대한제국 말기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いろどりひょう會社かいしゃ)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09년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하얼빈역 근처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암살을 준비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였다. 이후 러시아제국군 헌병에게 붙잡혀 일본 총영사관으로 옮겨졌고, 재판관할권이 일본에 넘겨졌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관동주 뤼순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사망했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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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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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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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안태훈(安泰あんたいくん)과 어머니 조마리아(ちょう瑪利)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1] 아버지 안태훈(安泰あんたいくん)과 어머니 조마리아(ちょう瑪利)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진해 명예현감을 지낸 할아버지 안인수(あんひとしことぶき)는 해주 일대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3] 1911년 한국을 방문하여 안태훈 일가의 활동지를 답사한 베네딕토 수도원의 노베르트 베버 신부가 작성한 여행기에 따르면 안인수와 그의 아들 6형제와 가족 36인이 해주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을 당시에 안인수는 4백석의 토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3] 할아버지가 대지주에 미곡상으로 재산을 많이 축적하여 안중근은 어렵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

뒤에 일본은 안인수가 "항상 미곡 매입 대금을 지불하지 않는 등 각종 간악한 수단을 부려 재물을 모아 거부를 이루었다"거나, "성품이 탐욕하고 배부름을 모르고 일상 간계를 써서 타인의 재산을 수중에 넣으려고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안억핍(やすおくとぼし)이라고 다르게 불렀다"고 말한 반면, 안중근은 "조부가 자산가로서 도내에 이름이 높았다."고 회고했다.[4]

그러나 안중근의 가계는 그의 5대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다소 불확실하다. 순흥 안씨 족보에 의하면 17대조 안려(やすいおり)는 사마시에 합격한 생원으로서 건원릉 참봉을 지냈다. 14대조 안효신은 어린 나이에 문단에서 명성을 날릴 정도로 문장에 능했으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황해남도 해주로 내려가 은거 생활을 했다. 이로써 안효신은 순흥 안씨 참판공파의 해주 입향시조가 되었다. 이후 안중근의 선조들은 안중근의 14대조 안숙관과 13대조 안류가 통정대부(정3품)의 품계를 받았을 뿐이며, 안중근의 5대조 안기옥(やすおこりだま)에 이를 때까지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불확실한 내용이 여기에서 나타난다. 1845년에 순흥안씨 족보소가 간행한 순흥안씨 족보에는 안중근의 17대조 안려에게 진사, 후사 없음(進士しんしきさき)이라고 되어 있으나, 1864년 안최량(やす最良さいりょう)이 편찬한 순흥안씨 족보에는 안려에 대해 후사가 나와 있지 않고, 진사라고만 되어 있다. 이에 반해 1910년대 이후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려의 장조카로 강진현령을 지낸 안효충(安孝やすたかただし)의 둘째 동생인 안순복(やすじゅんぶく)이 안려의 양자로 들어가서 안효신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5] 따라서 안중근의 15대조이자 해주 입향시조인 안효신의 존재는 1918년에 신문관에서 간행된 순흥안씨족보와 1936년 간행된 순흥안씨 족보 이후부터 나타나고 있다. 또한 1800년대 중반과 후반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려의 형인 안의(あんあつし)의 후손으로 안효충만 나와 있다. 그런데 1910년대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의의 후손으로 안효충 외에도 안현복, 안순복, 안경복, 안창복, 안성복, 안준복 등이 새로이 나오고 있다. 이로 미루어 해주에 정착한 순흥안씨 참판공파 인사들의 낙향 직전의 세계와 해주 입향 이후부터 한말까지의 신분 문제는 불명확한 사실이 많음을 알 수 있다.[5]

해방 전후에 안중근의 전기와 비문을 집필한 이들은 안중근 가문의 신분을 한결같이 향리로 보고 있다. 김택영과 이건승은 안중근 의거 이후[6]에 지은 간략한 전기에서 각각 "그 선조는 본래 순흥 사람으로 해주에 살면서 대대로 주리(しゅう吏)를 지내다 안태훈 대에 이르러 글을 읽어 진사가 되었다"거나 "그의 선조는 순흥인데 중도에 해주로 이사하여 주리를 지냈다"고 하였다.[7] 또한 심산 김창숙은 1961년에 지은 '안중근의사 숭모비문'에서 "그 선조의 세가는 서한의 해주에서 주리가 되었는데, 부친 안태훈의 대에 이르러 독서하여 국자생(國子くにこせい)이 되었다."고 하였다.[6]

안중근의 5대조 안기옥의 대에 이르러 무과에 급제, 관직 진출을 꾀하였다. 이는 향리직을 장기간 세습하면서 사회경제적 능력을 갖추어 나간 이서(吏胥)층이 과거를 통해 양반층으로 편입되려는 신분상승운동을 벌였음을 의미한다. 안기옥은 안영풍(安永やすながゆたか), 안지풍(あんともゆたか, 안중근의 고조부), 안유풍(あんゆうゆたか), 안순풍(やすじゅんゆたか) 등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도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처럼 향리 가문의 4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한 것은 가문의 위상을 높인 쾌거였다.

또한 안지풍의 장남 안정록(安定あんていろく, 안중근의 증조부), 안유풍의 아들 안두형(やすとおる), 안유풍의 손자 안인환(あんひとし煥), 안순풍의 아들 안신형(安信やすのぶとおる) 등이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고 안유풍의 손자 안인권(あんひとしけん)이 절충장군의 품계를 받았다. 안인필(あんひとし弼)은 중앙 군사 조직인 오위의 정6품 군직인 사과가 되었고,[6] 안정록의 아들이자 안중근의 할아버지인 안인수는 통훈대부와 진해현감을 지냈다. 기록에는 안인수의 아들 안태건(安泰あんたいけん)은 고종(こうはじめ) 28년(1891) 신묘(からし)년에 24세의 나이로 증광시(ぞうこうためし) 진사 3등(さんとう)으로 등과됨을 알리고 있다.[8]

초기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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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おうなな)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안중근은 어렸을 때부터 사냥을 좋아했다. 또한, 서당 공부를 빼먹고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이렇게 차분히 앉아있는 날이 드물자 할아버지는 원래 이름인 응칠 대신 '무거울 중'에 '뿌리 근'자를 써서 중근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 정객의 식객으로 있었던 아버지 안태훈이 척신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할아버지 안인수는 영특한 셋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일가를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안중근도 가솔을 따라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배웠다고 한다. 안중근 자신은 《안응칠역사》에서 "내 나이 예닐곱 때 조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서당에 들어가 8~9년 동안 한문을 익혔으며, 조부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사냥으로 학문에 힘쓰지 않았다"고 술회하였다.[9]

소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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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군 진압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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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정평이 났다. 아버지 안태훈은 산채에 개인적으로 사병들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고 그와 함께 백성을 괴롭히는 동학 농민군이 각지에서 동학도들과 농민들이 봉기를 하자 안태훈은 자발적으로 창의를 하고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여[출처 필요] 승리를 거뒀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さんぽうぐん)을 조직해 농민군 진압작전을 펼치자 소년 안에 안중근 역시 동학군 토벌에 참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하는 데 참여했다.

김구가 동학군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안태훈이 김구를 보호한 적이 있으며 그 시기에 안중근도 그와 안면이 있었으나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 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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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신앙심이 독실하였고[10],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배웠다.

1897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프랑스 출신의 천주교 신부였던 조제프 빌렐렘(Joseph Wilhelem, 한국명 홍석구(ひろしすずきゅう))으로부터 토마스(도마, 다묵(だま))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안중근이 홍석구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는 설명도 있지만, 안중근은 홍석구 신부와 함께 뮈텔 주교와 만나 이야기를 한 후 프랑스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안중근》(조정래 지음, 문학동네)에 의하면, 뮈텔 주교(한국이름 민주교)가 조선사람들이 학문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문을 하면 머리가 깨일 것이고, 머리가 깨이면 천주교 교리와 신앙에 대해 나름대로의 논리와 비판으로써 의문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면서 실망한 안중근은 프랑스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그 뒤 잠시 교회의 총대(總代そうだい)를 맡았고 뒤에 만인계(まんにんちぎり:1,000명 이상의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 주는 모임)의 채표회사(いろどりひょう會社かいしゃ: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청인 난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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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아버지 안태훈청나라 의사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 휘말렸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아버지 안태훈은 1904년 4월 20일 안악읍에 사는 청나라 의사 서원훈(舒元勛)과 시비가 있었다.[11] 아버지 안태훈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친우 이용일(龍一りゅういち)을 데리고 서원훈을 찾아갔다. 양측이 필담을 나누는 사이에 안태훈측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서원훈이 갑자기 일어나 안태훈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이에 안태훈은 서원훈에게 화해를 청하고 물러나왔다.[11]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이 4월 29일 이용일 등 10여 명과 함께 무기를 들고 야밤에 서원훈을 잡아다가 길가에서 무수히 난타하여 거동이 어렵게 만들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1904년 5월 2일 청국인 7~8명이 이용일의 집에 난입하여 그를 마구 구타하고 잡아가려고 했다.[11]

한청 양국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삼화항의 청나라 영사가 한국 정부에 공식 문제제기를 했다. 이에 따라 삼화항 재판소 감리가 순검을 보내 안중근과 이용일을 체포하여 압송토록 했다.[11] 그런데 중도에 나타난 괴한들이 순검들을 난타하고 안중근과 이용일을 구하여 사라졌다. 이때 순검 한 명은 안면에 총을 맞아 중태에 빠졌다.[11]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7월 10일 전후에 안중근과 이창순은 각기 외부에 청원서를 올려 자신들의 부친이 억울하게 청국인에게 당했다고 호소했다.[11] 그러나 대한제국 외무부는 다시 자체 조사를 거친 끝에 안중근과 이용일의 죄상이 중하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지방 정부는 안중근 등의 체포를 명하였고, 7월 22일 황해도관찰사 이용필(ひろし弼)은 안중근과 이용일이 기미를 알고 미리 도주하여 체포하지 못했다는 보고서를 외무부대신에게 올렸다.

重根しこね明治めいじさんじゅうななねん(いちきゅうよん) 봄 黃海こうかいどう やすし에서 淸國きよくにじん爭鬪そうとう한 끝에 그가 携帶けいたい短銃たんじゅう으로 淸國きよくにじん射殺しゃさつ하였으므로 淸國きよくに領事りょうじ로부터 外部がいぶ交涉こうしょう하는 바가 되어 事件じけん重大じゅうだい하게 되려고 하였으므로 重根しこね은 上海しゃんはい逃走とうそう하고 ちち たいくん은 그 사이에서 當時とうじ外部がいぶ大臣だいじん なつさかえ에게 哀願あいがん하여 간신히 無事ぶじ할 수 있었다고 한다.[12]

한편 안중근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는 조금 다르게 사건이 소개되어 있다. 안중근이 경성에 가서 외무부에 청원서를 올렸고, 재판이 진남포 재판소에 회부되어서 서씨와 같이 재판을 받게 됐다고 나와있다. 그리고 이 재판에서는 서씨의 만행이 드러나고 안중근이 옳다는 판결이 났다. 이후 안중근은 어떤 청나라 사람의 소개로 서씨와 만나 서로 사과하고 평화를 유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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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 운동과 국채보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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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만주에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여비를 마련하고 상하이(上海しゃんはい)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여 실망하고 되돌아왔다. 이 무렵 부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3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1906년 3월에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했다. 이사한 곳에서 생계를 위해 한때 석탄상회를 경영하였으나 사업이 되지 않았으며, 교육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석탄회사를 정리하고 자기 집안의 전 재산을 털어서 삼흥학교(さんきょう學校がっこう)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그 뒤 황해남도천주교 계열의 학교인 남포 돈의학교(あつし學校がっこう)를 인수하였으며 안중근 자신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7년에는 대구의 독립운동가 서상돈 등의 주도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됐고, 열심히 활동하여 인정을 받으면서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 역시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다.

독립운동 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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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이를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했다.

의병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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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1907년(융희 1년) 황제 고종헤이그 특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강제 퇴위를 당한 뒤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노선을 바꾸어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데 가담하였다.[13] 매국노 척결을 주장하던 그는 의병대를 찾아다녔다. 그 뒤 황해도 의병대의 한사람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자신이 직접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계동청년회(けいひがし靑年せいねんかい)에 가입하고, 곧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臨時りんじ査察ささつ[13])에 선출되었다.

1907년 연해주(沿海州えんかいしゅう)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1908년 7월 전제덕(ちょんひとしとく)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たいかん義軍ぎぐん參謀さんぼう中將ちゅうじょう) 겸 특파독립대장(特派とくは獨立どくりつ大將たいしょう) 및 아령지구(にわかりょう地區ちく)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いむひとし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 뒤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군과 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의병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혼자의 뜻으로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4]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은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1909년(융희 3) 초, 안중근은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どうぎだんゆびかい)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중근은 이때 왼쪽 손의 약손가락(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혈서로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의 수인(しるし)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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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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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 직전의 이토 히로부미(왼쪽에서 두 번째)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15]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つよし)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哈尔滨, 哈爾はま(하얼빈), Harbin)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あずまきよし鐵道てつどう)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みなみ長春ちょうしゅん), 관성자(ひろししろ)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みぞ)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16]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했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사격하였다.총알은 할로포인트를 사용하였으며,현재는 금지되어있는 총알이다.[17] 이외에도, 일곱 발의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もりやすし二郞じろう),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かわかみ俊彦としひこ), 남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たなか淸次郞せいじろう)에게 총격하였다.[15]

총격 후, 안중근은 가슴 안에 있던 태극기를 높이 들어 올리며 에스페란토어

코레아 우라!

이라고 3번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대한 독립만세라는 뜻이었다.[15]

총격 30분 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가끔 사용)를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기록에서는 죽기 직전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 누구지"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체포와 국내외 변호 모금 운동 그리고 사형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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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군에 체포되었고 1차 조사 이후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겨졌다.[18] 최재형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제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안중근이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관동주 뤼순(료준)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やす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묻는 말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이유.


첫 번째, 명성황후시해한 죄

두 번째,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세 번째,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네 번째, 고종황제폐위시킨 죄

다섯 번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 번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 번째,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 번째,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 번째,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번째,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한 번째, 한국이 300만 영국 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두 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세 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네 번째,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죄

열다섯 번째,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이다.

안중근의 체포와 수감 소식이 접해지자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 모금 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미즈노 기타로(水野みずの吉太郞よしたろう)와 가마타 세이지(鎌田かまた政治せいじ)를 관선 변호사로 선임했다. 수감 중에도 그는 동양 평화론의 저술을 하였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마지막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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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사망한 3월 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 관동주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음.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사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함. 자신의 사형 집행일로 성금요일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함.
  • 1910년 2월 17일: 안중근은 고등법원장을 면담하여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함.
  • 1910년 3월 9일: 고해성사조제프 빌렘 당시 황해도 천주교 신천본당 주임신부에게서 받음.
  • 1910년 3월 10일: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마지막 미사를 봉헌.
  • 1910년 3월 25일: 사형 집행 연기. 세계적으로 성탄절, 정월 초하루, 황제의 탄신일에는 사형이 없다는 관례와 대한제국내의 의병활동이 강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에서 이를 고려, 사형을 연기 요청. 이날은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태어난 건원절이었음.
    • 이에 안중근은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당부를 남김. 당부 내용은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를 용서를 청하였고, 장남을 천주교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 동생 안정근에게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공업 또는 식림 같은 한국을 위한 일에 종사토록 부탁.
  •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사형 집행. 향년 32세. 참석자: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당시 안중근을 지원한 사람은 거부 최재형이었는데, 최재형은 안중근의 체포에 대비, 변호사와 상의할 정도로 안중근을 현실적으로 도왔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 감옥 수감 때 많은 유묵을 남겼고 보물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東洋とうよう平和へいわろん)》을 남겼다. 2008년 3월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다롄(大連たいれん)시 뤼순(旅順りょじゅん)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19]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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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매일신보(大韓たいかん每日まいにちさるほう) 1910년 3월 25일자에는 '안씨 결고(あん 訣告)'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도되었다. 거월십오일(2월 15일)에 변호사 안병찬(やす秉瓚)씨가 여순감옥내에서 안중근씨를 면회 고별할 시에 안중근씨가 한국동포에게 결고(訣告)하는 사의(辭意じい)를 안병찬씨에게 설급(せつ及)하였는데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유지를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여한이 없겠노라" 하였다.[20]
  •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항소를 포기한 안중근 의사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인 1910년 3월 9~10일경, 어머니가 준비한 하얀 명주천으로 지은 수의를 가져온 두 동생 안정근안공근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21]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22][23][24]
  •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의 사형은 뤼순 감옥에서 행해졌다. 구리하라 전옥은 안에게 “금년 2월 24일 뤼순 지방 법원의 언도와 확정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소노키의 통역이 끝나자 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구리하라 전옥은 다시 한 번 안에게 “뭔가 남길 말이 없느냐”라고 물었다. 안은 "아무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일이 동양 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한·일 양국인이 서로 일치 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25][24]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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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중근은 자신이 사형 당하면 조국에 운구하여 매장해줄 것을 최후로 당부했다. 그러나 사형당한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의 근처 죄수 공동묘지에 묻혔다. 일제는 안중근을 매장한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지 않아 그의 유해가 묻혀 있는곳을 찾을 수 없었고,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 당시 안중근의 동생인 안정근안공근이 형인 안중근의 시신을 돌려달라 요구했지만 일본은 안중근의 시신 인수를 거부하고 숙소에 있던 형제를 감금하고, 강제 귀국 시키는등 안중근의 시신을 못가져가게 하기위해 안달이였다. 왜냐하면 안중근의 묘지가 한국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될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해방 후 1945년 11월 중화민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는 1946년 6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독립운동 3의사의 유해를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였고, 그 옆에 언젠가는 안치될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만들었다. 이것은 안중근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김구 선생은 1949년 안두희의 암살로 사망하였고 김구 선생도 이곳에 안장됐다. 가묘 앞에는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모셔질 자리로 1946년에 조성된 가묘입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26]
  •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었다.
  •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유해는 찾지 못하고 위치 또한 찾지 못했다. 중국 랴오닝(遼寧りょうねい)성 다롄(大連たいれん)의 뤼순(旅順りょじゅん)감옥 북쪽 야산 어딘가에 안 의사의 유해를 묻었다는 일제 당시 간수들의 증언에 따라 정부는 2008년 1차 발굴 작업을 진행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안태근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회장은 “당시 정부가 발굴 작업을 진행했던 곳은 일본인 공공묘지로, 태평양전쟁 직전에 일본인들이 유해를 파서 본국으로 가져갔다”며 “10억원의 예산을 들여 3000여평의 땅을 파는 대대적인 사업을 진행했으나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말했다.[27]
  • 안태근 회장은 뤼순감옥구지묘지(旅順りょじゅん監獄かんごく舊址きゅうし墓地ぼち)에 유해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발굴을 벌였던 지점과는 반대 방향으로 감옥에서 동쪽으로 500여m 떨어진 곳이다. 가장 오래된 죄인 묘역이다. “1943년 그곳으로 수학여행을 갔던 사람, 아버지와 함께 안 의사의 묘를 참배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모두 그곳을 안 의사 묘지로 지목해요. 묘지가 있는 뤼순에 가면 해당 주민들이 실제 그곳을 묘지로 알고 있기도 하고요. 1차 발굴지에서 불과 500m 떨어진 곳인데, 1차 작업 때 거길 파지 않은 게 못내 아쉽습니다.” 현장에는 이미 아파트가 들어서 유해 발굴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27]
  •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기리며 따르자는 취지로 2022년 전반기 신앙의 선조[29]에 신자 안중근을 선정하였다.[30]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대한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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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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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이토를 사살한 조선인을 적대하는 감정이 가속되었으며, 이후 조선의 강점을 주장하는 논리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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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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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가 김산은 “춥고 긴긴 겨울밤에 학교 기숙사에서 우리는 수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기차에서 내려온 이토히로부미를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어떤 식으로 저격했는가 하는 이야기와 한국독립을 위해 대담무쌍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많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라고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수록하고 있다.
  •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안중근을 한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 바오로라고 부른다.[31] 즉, 안중근을 한국 교회에서는 모세의 애국심과 바오로의 신앙심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평가한 것이다. 안중근의 서예 작품 경천은 감정가가 6억원으로 감정이 되었는데[32] 카톨릭 서울대교구는 이 작품을 기증받았고 서대문 순교성지 교회사박물관에 전시한다고 발표하였다.[33]
  • 안중근은 그의 저서 《동양 평화론》의 집필을 위해서 사형 집행을 한 달 늦추도록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았으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다. 그래서 《동양 평화론》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그런 상황이었으나 뤼순 감옥에서 일하던 간수 지바 도시치는 안중근을 존경하여 그의 사후에 그의 유품들을 간직하다 유족들에게 반환을 하였다.
  • 안중근의 일본인 교도관 다카오 미조부치는 그를 동아시아의 의인이라고 평하였다.
  •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노길명 교수는 안중근을 독실한 천주교 신앙과 애국심을 조화시킨 인물로 평하였다.[31]
  • 미래사목연구소 황종률 박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정의의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것으로 하느님이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평가하였다.[31]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20세기 초 우리나라 반일애국운동가”, “일제의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애국열사”로 평가하며 북조선의 역사서인 “조선전사”에 저격장면, 계기 등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15차 남북 장관급 회담(2005년 6월 21~24일, 서울)에서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사업 공동 추진’에 합의했다.
  •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회에서 안중근 의사 국제평화상을 제정하였다.
  • 김삼웅은 안중근의 동양평화 제안을 유럽공동체(EU)와 같은 것으로 평가한다. 당시 안중근의 제안 내용은 한국, 중국, 일본이 동양평화회의를 결성하며, 여순을 중립화하고, 관련 3국으로 운영되는 동양평화회의본부를 여순에 설치한다. 또한 평화지역 창설, 공동개발은행과 공동화폐 발행 등이 포함되어 있다.[34]
  • 안중근은 또한 문명개화를 통해 실력을 닦는 것이 한국 독립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한 문명개화론자이면서, 일본의 보호정치가 한국의 문명개화가 아닌 국권침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바로 무장투쟁의 선두에 나선 행동가라고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평했다.[35]
  • 안중근이 자신을 존경했던 일본인 간수 지바에게 남긴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ためくに獻身けんしん軍人ぐんじん本分ほんぶん,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군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이라는 글귀는 현재 대한민국 국군의 표어 중 하나가 되었다.
  • 청산리 전투주역 김좌진은 안중근의 의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36]
  • 김경천은 자신의 일기인 경천아일록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이는 안응칠씨라 한다. 아 위대하다. 우리에게도 사람이 있구나!"라고 평가했다.
  • 국제태권도연맹에서는 '중근'이라는 틀을 정하여 태권도의 기본 품세를 연습하도록 하고 있다.[37]

부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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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천주교 신자 자격 미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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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카톨릭 조선 대목구 교구장 뮈텔 대주교는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안중근의 신자 자격을 박탈한다. 처형을 앞두고 안중근의 종부성사 요청을 거절하였으나, 프랑스 선교사 니콜라 빌렘이 종부성사를 집전하니 그에게 징계를 내린다.

교육보다는 투쟁을 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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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빌렘 신부의 안중근에게 베푼 성사는 안중근의 의거를 이해한 때문이 아니라 천주교 사제로서 신자에게 성사를 주어야 한다는 신념에 의한 행위였다는 견해가 있다.[38] 이 판단의 근거로 빌렘 신부의 서한의 프랑스어 원문을 오역하였기에 가공해 낸 내용이었기 때문에, 빌렘 신부가 이토가 죽은 것이 잘된 일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는 2010년의 서강대학교에서 연구 결과가 있다.[38] 빌렘 신부가 조선의 독립을 추구하는 방법에 대해서 안중근과 의견을 크게 달리하게 되어 투쟁보다는 교육을 중시하였다는 것이다.[38]

서양에 관한 부정적 견해 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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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대학교 국제관계학과 박광득 교수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미완성으로 보존하기 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완성 작품으로 채워갈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한 시기라고 하였다.[39] 하지만 미완성인 동양평화론에서 안중근은 동서양의 문명적, 인종적 차이에 대한 선입견을 매우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고 하였다.[39] 당연히 서양의 장점을 수용하여 동양을 발전시킬 수 있다.[39] 그런데 문명적으로 개화를 통한 국가발전을 고려하는 거시안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을 만큼, 서양에 대한 경험과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개화를 소유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은 서양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동양평화론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 한계와 허점을 논하였다.[39]

일본 국익에 반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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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우익들은 안중근을 존경하는 지바 도시치를 비판하거나 위협을 하였다.[40]

사상과 신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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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평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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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평화론》의 서문에서 안중근은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지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 황인종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의론이 한국·청국 두 나라 사람의 마음속에 용솟음쳐 위ㆍ아래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 나설 수밖에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わか政略せいりゃくあらため 逼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