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 (진나라)
백기 | |
명나라 때 그려진 그림 | |
별명 | 무안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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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미현(郿县) |
사망지 | 두우( |
복무 | |
복무기간 | 기원전 294년 ~ 기원전 257년 |
최종계급 | 상장군( |
주요 참전 | 이궐 전투, 장평 대전 |
백기(중국어:
왕전(
사마천(
생애[편집]
출생[편집]
백기는 미읍(郿邑) 출신으로 용병(
그의 출신은 불확실하나, 《신당서》 재상세계표에서는 진 목공(
한나라 정벌과 이궐전투[편집]
기원전 294년(소양왕 13), 백기는 좌서장(
기원전 293년(소양왕 14), 백기는 소양왕의 외삼촌인 위염(
이궐전투 당시의 정황은 기록이 부족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전국책》에 따르면, 당시 한나라와 위나라는 서로 눈치를 보며 먼저 군사를 내서 힘껏 싸우려 하지 않았다. 백기는 이와 같은 정황을 살피고는 군대를 나누어 거짓으로 한나라와 싸우는 척 하다가 불시에 위나라 군대를 급습하여 이를 격파하였다고 한다. 위나라 군대가 격파당하자 한나라 군대 또한 스스로 무너졌고, 백기는 그 틈을 노려 북쪽으로 달아나는 적군들을 밀어붙여 크게 승리하였다.[8]
또한 《전국책》에서는 이궐에서 백기에게 패배한 위나라 장수의 이름을 서무(
위나라 정벌과 원성점령[편집]
기원전 292년(소양왕 15), 백기는 대량조(
기원전 291년(소양왕 16), 백기는 객경(
《사기》 백기왕전열전에서 묘사된 해당 시기의 백기의 행보는 다른 기록과는 모순되는 점이 존재한다. 《사기》 진본기에서는 기원전 292년(소양왕 15)에 백기가 위나라의 원(
초나라 정벌과 영성점령[편집]
기원전 286년(소양왕 21), 백기는 조나라(
기원전 279년(소양왕 28), 백기는 초나라(
기원전 278년(소양왕 29), 백기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그 수도인 영(郢)을 빼앗았으며, 초나라 왕실의 묘역인 이릉(
《사기》 백기왕전열전에서는 백기가 초나라의 영을 점령한 후에 다시 초나라를 공격하여 무군(
삼진(三 晉 )과의 전쟁[편집]
기원전 276년(소양왕 31), 백기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2개 성을 빼앗았다.[11]
기원전 273년(소양왕 34), 백기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화양(
기원전 272년(소양왕 33), 초나라의 황헐(훗날의 춘신군)이 진 소양왕을 찾아가 "두 호랑이가 다투면 개가 이득을 얻는다."라 비유를 들며 지금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툰다면 곧 한나라 · 위나라 · 제나라 등이 그 틈을 타서 진나라와 초나라를 노릴 것이라 설파하였다. 그 말을 받아들인 소양왕은 초나라와 화친을 맺고 백기로 하여금 더이상 초나라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15]
기원전 264년(소양왕 43), 백기가 한나라의 형성(陘城)을 공격해 5개 성을 함락시키고 5만 명의 목을 베었다.[5]
기원전 263년(소양왕 44), 백기가 한나라의 남양(
조나라 정벌과 장평대전[편집]
기원전 262년(효성왕 4), 진나라의 공격을 받고 있던 한나라의 상당(
진나라 군대는 공세를 펼쳐서 6월에는 조나라의 군영을 함락시켜서 두 개의 보루를 빼앗고 네 명의 교위를 사로잡았다. 또한 7월에는 진나라가 조나라의 보루를 공격하여 교위 둘을 사로잡았다.[2] 그러나 조나라 군대를 지휘하던 염파는 흔들리지 않고 싸움을 피하며 보루를 쌓고 방어를 강화하는 등 장기전으로 대응하였다.[17] 그러자 진나라 측에서는 "진나라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마복군 조사(
전장에 도착한 조괄은 곧바로 출병하여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했다. 그러자 백기는 기병을 풀어서 패하여 달아나는 척 하였다. 조나라 군대는 진나라 측의 보루까지 추격하였으나 보루가 견고하여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자 진나라 측은 기병 2만 5천으로 조나라 군대의 퇴로를 끊었고, 또한 기병 5천으로 조나라의 보루 사이를 끊으니 조나라의 군대는 둘로 나누어지고 식량 보급로가 끊어졌다. 전세가 불리해진 조나라 측은 보루를 쌓고 수비하면서 구원병을 기다렸다. 조나라의 식량 보급로가 끊어졌다는 보고를 받은 진 소양왕은 몸소 하내까지 와서 백성들의 작위를 한 등급씩 올리는 한편 15세 이상을 모두 징발하여 장평으로 보내 조나라의 구원병과 식량 보급로를 차단했다.[2]
결국 9월이 되자 46일 동안 포위당한 조나라의 군사들은 굶주리게 되어 몰래 서로를 죽여서 잡아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진나라의 보루를 공격하여 탈출하려고 부대를 넷으로 나누어 4,5차례 공격했지만 탈출하지 못했다.[2] 조괄은 정예 부대를 내세워 직접 전투에 나섰으나 진나라의 군사가 조괄을 활로 쏘아 죽였다. 조괄의 군대는 패하여 결국 진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19] 이 싸움을 장평대전이라 한다.
포로학살[편집]
장평대전에서 패하여 백기에게 항복한 조나라 군사는 40만 명이었다. 백기는 이 군사들을 살려두면 훗날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였다. 때문에 이들을 거짓말로 속여서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버렸으며, 나이가 어린 240명만을 남겨서 조나라로 보냈다. 이로 인하여 장평대전에서 죽은 조나라 군사가 45만 명에 달하였으며, 이에 조나라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2]
1995년, 중국 산서성 고평시(
질병과 실각[편집]
장평대전에서 조나라의 대군을 모조리 살상하고 크게 승리한 백기는 오랫동안의 싸움으로 인하여 진나라의 나라살림이 크게 피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조나라를 계속해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8]
그리하여 기원전 259년(소양왕 48)에는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여 피뢰(
한편 백성들을 휴식케하고 군대를 정비한 소양왕은 다시 조나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무안군 백기는 이를 반대하였다. 소양왕이 이전에 장평대전의 여파로 나라가 피폐해졌을 때에는 전쟁을 주장하더니 왜 지금은 반대하는지에 대해 묻자, 백기는 장평대전 이후로 큰 고난에 처한 조나라 군신과 백성들의 단합력이 훨씬 강해졌고, 연나라 · 위나라 · 제나라 · 초나라 등도 조나라를 도울 것이므로 이런 때에 조나라를 치는 것은 어렵다고 답하였다.[8]
그해 9월에 진나라가 다시 오대부(
이듬해인 기원전 258년(소양왕 49) 정월까지도 왕릉이 한단을 빼앗지 못하자 진나라에서 군사를 증원하여 왕릉을 도왔다.[5] 그러나 왕릉은 교위 5명을 잃었을 뿐 이기지 못했다. 이 때에 백기의 병이 낫자 소양왕이 왕릉 대신에 백기를 장수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자 백기는 오랜 전쟁으로 진나라 또한 피해가 막심할뿐더러, 지금 조나라와 다른 제후들이 안팎에서 호응하여 공격해온다면 진나라 군대는 반드시 패할 것이라 주장하며 공격을 반대하였다. 소양왕은 백기가 말을 듣지 않자 범수를 보내 출전을 부탁하였으나 백기는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2]
당시에 범수가 백기를 질책하면서 과거에 그가 이궐 · 언영 · 장평에서 적군을 격파한 일을 거론하며 이전의 전적이 신과 같은데 조나라를 이기지 못하겠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백기는 자신이 과거에 거둔 승리는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힘을 빌은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식에 따라 승리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탓이라 반박하였으며, 장평대전 직후에 조나라를 멸하지 못했다가 도리어 그들의 단합력을 더욱 튼튼하게 하고 다른 제후국들이 조나라를 도울 시간을 벌어준 것이야말로 그런 승리의 기회를 놓친 것이라 주장하여 범수를 부끄럽게 하였다.[8]
결국 진나라는 왕릉 대신에 왕흘(
결국 소양왕은 백기를 파면하여 사오(
죽음과 사후[편집]
기원전 257년(소양왕 50) 10월, 소양왕이 백기를 재촉하자, 결국 백기는 진나라 수도인 함양(咸陽)을 떠나 서문(
백기는 검을 받아들고 스스로 목을 베려다가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 하였다. 백기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나는 죽어 마땅하다. 장평 싸움 때에 조나라 병졸로서 항복한 자들 수십 만명을 내가 속여서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버렸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을만하다."라 하고는 자살하였다. 백기가 죄없이 죽었기에 진나라 사람들이 그를 불쌍히 여기며 그 고향에서 제사를 지내주었다.[2]
백기의 부장으로서 장평에서 함께 조나라 군대과 싸웠던 사마근(
평가[편집]
- 전한 시대의 역사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진나라의 대표적인 명장들인 백기 · 왕전 등의 열전을 함께 묶어서 구성하였다. 이들의 열전은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에 수록되었다. 여기서 사마천은 "백기는 적을 잘 헤아려 변화에 맞추어 무궁하고 기발한 계책을 내었으니 그 명성이 천하를 떨게 했다. 그러나 응후의 근심으로부터 자신을 구하지는 못했다."라 하였다. 또한 이 점을 꼬집여서 왕전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각자 단점이 있었다."라 평하였다.
-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에서 소대는 백기가 쌓은 공적에 대하여 "무안군(
武安 君 , 백기)이 진나라를 위해 싸워서 이기고 70여 개의 성을 공격해 빼앗았는데, 남쪽으로 언(鄢)ㆍ영(郢)ㆍ한중(漢 中 )을 평정하였고, 북쪽으로는 조괄(趙 括 )의 군대를 모두 사로잡았으니, 비록 주공(周 公 )ㆍ소공(召公)ㆍ태공망(太公望 )의 공적이라도 이보다는 못할 것이다."라 말하였다. - 《사기》 권4 주본기에서는 소려(
蘇 厲)가 서주의 왕에게 "진나라가 한나라 · 위나라를 격파하여 사무(師 武 )를 패배시키고, 북쪽으로 조나라의 인(藺 )과 이석(離 石 )을 빼앗은 것은 모두가 백기의 공입니다. 그는 용병(用兵 )에도 능할뿐더러 또한 천명(天命 )까지 지녔습니다."라 말하였다. - 남조 시대의 문인 주흥사는 《천자문》에서 "기전파목(
起 翦頗牧 ) 용군최정(用 軍 最 精 )"이라 하였는데, 이는 곧 전국시대에 백기 · 왕전 · 염파 · 이목 등이 군사를 가장 잘 부렸다는 뜻이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각주[편집]
- ↑ 《전국책》 권18 조책1 〈진왕위공자타〉 ; 《전국책》 권20 조책3 〈평원군청풍기〉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너 더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 ↑ 《신당서》 권75
下 재상세계표5下 - ↑ 《전당문》 권680 〈고공현령백부군사장〉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사기》 권5 진본기,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 ↑ 《사기》 권72 양후열전
- ↑ 가 나 다 《사기》 권5 진본기 ;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 《사기》 권15 육국연표
- ↑ 가 나 다 라 《전국책》 권33 중산책 〈소왕기식민선병〉
- ↑ 《전국책》 권2 서주책 〈소려위주군〉
- ↑ 《전국책》 권2 서주책 〈서무패어이궐〉
- ↑ 가 나 다 《사기》 권5 진본기
- ↑ 《사기》 권44 위세가
- ↑ 《수경주》 권28
- ↑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 《사기》 권15 육국연표
- ↑ 《사기》 권78 춘신군열전 ; 《사기》 권40 초세가
- ↑ 《사기》 권15 육국연표 (《사기》 권43 조세가,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등에서는 염파가 장평에 파견된 시기를 기원전 260년이라 하였다.)
- ↑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 ↑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 ↑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 《사기》 권15 육국연표
- ↑
山西 省 考古 研究所 , 〈長平 之 戰 遺 址 永 祿 1號 屍 骨 坑 發掘 簡報〉, 《文物 》, 1996 - ↑ 《전국책》 권33 중산책 〈소왕기식민선병〉 ;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 ↑ 《사기》 권130 태자공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