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후담
신후담(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723년(경종 3)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이후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하였다. 그는 유학 뿐만이 아니라 도가(
그는 그리스도교나 불교의 사후세계관 모두 실체하지 않는 존재로 백성들을 혹세무민하고 협박한다고 보았다. 일찍이 순암 안정복과 함께 성호학파 가운데 가장 독보적으로 학문적 일가(
생애
[편집]출생과 가계
[편집]1702년 2월 8일 경기도 교하군 교하(현, 경기도 파주시 교하동)에서 태어났으며, 일설에는 한양 낙선방(
아버지 신구중은 통덕랑(
경기도 교하 출신이었으나[2], 어느 시점에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한성부로 상경한 시점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승정원일기 영조 15년 3월 14일자 기사에는 집은 교하로 나타나고, 사마방목의 진사시 합격 기록에는 거주지가 경(
호는 이로(
그의 누이 중 1명은 윤씨와 결혼했으나 일찍 죽자, 신후담은 그의 어린 딸 넷을 데려와서 길러 늦지 않게 결혼시켰고, 다른 매부(
생애 초반
[편집]당색으로는 남인으로, 그의 집안은 권대운 가문과 교류가 잦은 청남파였다. 5세 때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6세 때부터 박세흥(
12세 되던 해에 어려운 책이라도 읽을 수 있게 되고, 주변에서 능엄경(楞嚴
청소년기에 이르러 처음에는 노장사상(
성리학, 실학 수학
[편집]일찍이 이익을 만나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723년(경종 3년) 증광과의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하였다. 그 뒤 성균관에 들어가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다가 다시 23세 때 스승인 이익을 찾아 그 문하에서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이후로는 그의 학통을 이었다.
그는 스승 이익으로부터 천주교사상의 존재를 접하고 이것이 만만치 않은 사상임을 들어 경계할 것을 당부받았다. 이익의 제자였으나 그보다 10년 연하의 후배 제자인 안정복만큼 스승의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다. 이후 《칠극》(
23세에 그는 정도전의 《불씨잡변》을 본받아 천주교와 하느님관에 대한 반박론인 《서학변 (
1723년(경종 3년) 진사시에 '우감온공비(
그는 그리스도교의 영혼 불멸론, 사후세계를 허황된 교리이며 불교의 사상을 짜깁기한 것, 협박이자 혹세무민으로 보았다. 불교의 교리를 차용했으면서도 불교를 비판한다며 기독교를 비판하였다. 그는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천주교에 대한 것도 접하였다. 특히 1724년에는 이익에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보낸 문답에서 마테오 리치의 인물됨됨이를 이익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신후담이 서태(마테오 리치)의 인물됨을 묻자 성호 이익은 "이 사람의 학문은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그가 저술한 문자로서 천주실의와 천학정종 등 여러 서적을 보면, 비록 그의 도가 우리 유교와 반드시 합치되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그 도에 나아가 그것이 도달하는 바를 논한다면, 그 또한 성인이라 할 수 있다."고 답하였다.[3] 또한, 그는 평소 이익이 관심을 두었던 역사학과 지리학에도 몰두했다.[4]
이익의 제자들 중에는 서학을 사학
학문, 저술 활동
[편집]이후로도 신후담은 이익을 찾아가거나 편지를 통해 의심스러운 부분을 확인하거나 유교 경전 해석, 사물 등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는 건강이 회복되자 1728년(영조 4)부터 다시 활발한 연구와 저술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해 그의 외증조부 이서우의 서자인 이익관, 이순관, 서(庶)대이모부 민관효 등이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하고, 그의 외종조부 이홍관 역시 연좌제에 의해 참형당하였으므로 관직에 나갈 것을 단념하고 이익의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을 연구했다.
그는 이익을 찾아가거나 편지를 통하여 의심나는 분야를 물어서 반드시 확인하였고, 새로운 지식도 얻으면서 주로 《중용》과 《역경》의 연구에 힘썼고 기존 학자들들의 연구와 해석 등도 확인, 검토하였다. 1734년 그동안 4년 동안 연구해온 《주역》에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붙인 《주역상신편》(
이익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서양의 신문물과 과학문명과 서양 의술, 천주교 등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생애 후반에는 과학 문명, 의술 정보보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과 오류 비판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밖에도 손자병법 등 병가(
1739년 영조가 단경왕후의 후손 중 관직에 있는 이를 챙길 때 그의 아버지 신구중이 군직에 임명되었다가[6], 군직에 붙이는 일을 중단하게 하고 사마시에 응시중이던 그를 특별히 면담하였다.[7] 그해 단경왕후의 친정아버지이자 신후담의 8대조 익창군 신수근이 영조의 특명으로 복권되자, 이를 기념하여 이 일과 관련되어 말하여진 영조의 발언과 백성들의 송덕(頌德)을 뽑아서 합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책 이름을 《소은(
1742년 단경왕후의 사적을 기록, 정리한 《온릉지(
부친상과 투옥, 석방
[편집]1744년 부친상을 당했다. 상중이던 1745년(영조 21년) 10월 10일 이익관, 이순관에 연관된 외삼촌 이색(
이때 신후담은 고향에 있었고, 동생 신후함(
1745년 겨울 다시 체포되어 국문을 당했으나 별 혐의점이 없어 풀려났다. 1747년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친 뒤 호서(
천주교에 대한 시각
[편집]18세기 전반에 이익이 천주실의의 발문을 쓰며 관심을 표명한 이후, 이익의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 이르렀다.[10] 그러나 이익은 천주교의 중심 교리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어도 부분적으로 취할 점도 있다고 본 데 반해, 신후담과 안정복[10] 등 공서파(
“ | 서학은 우리의 도( |
” |
그는 서학을 사학(
생애 후반
[편집]신후담은 학문을 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이나 천국 가려는 목적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공부한다면 이 것은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질 부족, 진리를 탐구하려는 자의 자세가 아니라 보았다. 그는 학문을 공부하는 데는 어떤 이익이나 편견을 구함이 없어야 된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천주교 비판을 통해서 진심으로 배우고자 한다면 사사로운 이익을 생각하지 말고 그 학문부터 먼저 생각할 것을 주문한다.
“ | 지금, 천국에 올라가는 복을 구하고자 학문을 한다면
그 학문하는 의도가 완전히 이익에서 나온 것이라서 |
” |
그는 학문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학문 연구나 공부가 목적이 아니고 어떤 이익을 바라고 공부한다면, 이것은 참된 공부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는 기복신앙에 대한 비판 및 학문, 지식을 독점하고 그것으로 이익을 챙기려는 것에 대해 진짜 학문을 하는 학자의 행동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자신도 후학, 문하생을 양성하고 가르치면서도 성호 이익의 문하를 계속 출입하거나 편지서신을 주고받으며 자문을 구하였고, 단경왕후의 친정 후손으로 단경왕후와 단경왕후릉인 온릉의 사적과 기록을 담은 《온릉지 (
안정복만큼 인정받지는 못하였으나 스승 이익으로부터는 학문 연구의 자세와 재주를 높이 평가받았다. 1756년(영조 32)에 조모상을 당했고, 그해 가례차의(
사후
[편집]시신은 경기도 용인군 수진면(
후일 그의 후손의 요청으로 향산 이만도(
그의 문하생들과 순암 안정복의 문인들은 남인 내 천주교에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공서파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노론에 의해 신서파 남인이 숙청당한 뒤에도 조선 말까지 정치세력으로 남아 있었지만 그 힘은 미약하였다.
그는 소설에도 필재(
영향력
[편집]그는 이익의 대를 이은 일세의 석학으로 많은 영향을 후세에 끼쳤는데, 특히 그의 서학서에 대한 비판은 장차 천주교에 대한 배척의 논리적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1]
이황을 이은 남인의 맥은 허목을 거쳐 이익, 신후담, 안정복 등으로 이어졌었다.[12]
저서
[편집]저서
[편집]- 《하빈문집》(
河 濱 文集 ) - 《서학변》(
西 學 辨 ) - 《상사신편》(
象 辭 新篇 ) - 《역통의》(
易 通義 ) - 《온릉지》(
溫 陵 誌 )
편저
[편집]- 《내교》(內敎)
- 《유의》(
幼 儀 ) - 《소은》(
昭 恩 )
소설
[편집]- 《속열선전》(
續 列 仙 傳 ) - 《태평유기》(
太平 遺 記 ) - 《금화외편》(
金華 外篇 ) - 《남흥기사》(
南 興 記事 ) - 《김화외전》(
金華 外傳 ) - 《홍장전》(
紅 粧傳), 강릉부사가 경포대 뱃놀이에 선녀같이 꾸민 홍장을 보내 안렴사 박신(朴 信 )을 유혹하게 했다는 사연을 소재로 한 팩션소설 - 《용왕기》(
龍王 記 )
사상과 신념
[편집]기독교 비판
[편집]초기에는 스승 이익의 문하에서 서양의 신문물과 과학문명과 서양 의술 정보를 접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과학 문명, 의술 정보보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정보도 접하면서 그리스도교 비판과 오류 비판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각종 천주교 관련 서적 외에도 성서의 한자 번역본을 입수해서 내용을 분석했다.
《서학변》에서 신후담이 우려하고 있는 바는, '서학이 유학의 정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당시 사회윤리와 정치의 사상적 기반을 부정한다는 것이며, 결국 한 문화의 뿌리를 뽑아놓겠다는 것이다.'라고 본 것이다.[13] 공서파들은 천주교 포교가 갖는 정치적 함의에 매우 민감했던 사람들이다.[13]
'그들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오로지 천상의 복일 뿐이다. ..... 이것은 윤리를 경멸하고 도리를 어기며 사사로운 이익을 찾는 데 머무르는 것이니, 어찌 심히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14]'라며 공리공담으로 평하였다. 이어 그는 '오호라, 이른바 배운다는 사람이 지성(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도 편견이고, 사람 따라 달라지는 편애라고 주장했다. 그는 "천주된 자가 널리 천하의 모든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 중에서 사사롭게 사랑함이 있어서 혹은 은총을 내려 주기도 하고 혹은 내리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공우(
기독교 비판의 원인
[편집]안자경은 그의 기독교 비판 원인을 종교가 갖는 정치적 목적을 파악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천주교의 중심 교리인 원죄설, 천당지옥설, 처녀잉태설, 신 강림설, 예수부활설 등에 대해서는 이익이나 신후담이나 안정복이 모두 비판적이었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익은 천주교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고 보며 이단에 대해서 허용적이고 호의적이었던 데 반해, 천주교를 공부한 신후담이나 안정복은 천주교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종교와 정치의 관련성에 대한 관념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라고 본다.[11]'는 것이다. 한우근은 천주교에 대한 이익의 허용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한 입장은 현실적으로 국민의 생활이 ...... 극도의 곤궁에 달하게 되는 그 이유가 정치의 잘못에 있는 것이지 이단의 폐해 때문은 아니라"고 보았다는 것이다.[16] 이에 반해 신후담과 안정복은 철학이나 종교가 갖는 정치적 함의를 제대로 간파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11]
영혼, 사후세계에 대한 비판
[편집]천주교와 하느님관에 대한 반박론인 《서학변》에 의하면 현실의 삶도 알지 못하면서 사후세계를 어떻게 재단하느냐는 것과 인간에게 죄를 짓고도 하느님만 믿으면 모든 죄가 사라지는가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신후담은 그리스도교의 영혼불멸설이 이 세상에서 고통스럽고 수고로움과 죽어서 땅에 묻히는 근심을 말한다고 보았다. 그는 영혼과 사후세계를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거짓 궤변으로 규정하였다.
신후담은 천주실의를 읽어본 뒤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해 "그 귀결은 천국, 지옥의 설로 사람들을 겁주어 유혹하고, 사람이 죽어도 정령(
영혼불멸설을 주장하는 마테오 리치는 죽을 때 소멸하는 것은 신체의 혼일 뿐 백이 아니라고 보며,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혼이 죽었다는 말이 아니라 백이 죽었다는 말일 뿐이며, 인간의 몸이 죽었다는 말일 뿐이다."라고 말한다.[18] 그에 대해 그는 혼은 형체에 의지해 있는 것이고, 형체가 이미 없어지면 흩어져 없어지는 것이다. 어찌하여 혼이 자립하여 실체가 될 수 있겠는가?[18]라며 의문을 제기하였다.
좋은 일을 한다 해서 사후에 천당에 오른다는 보장이 없다고 보았다. 더욱이 하느님을 믿어야만 천당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두고 하느님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차별적인 시혜를 베푸는 하느님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영언려작의 서문에서도 강조하는 '천상에 변함없이 있는 복'이란 사람이 죽은 뒤에 영혼이 불멸하여 선한 사람이 천당에 오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19]
그는 천당과 지옥을 논하는 것이 공허한 공론이라 보았다. 그는 '스스로 즐거운 곳에 있으니, 군자의 마음은 어느 때나 편안하고, 순조롭게 대하여 살고 죽는 것에 대 해 근심을 하는 일이 없다"고 하여, 죽음을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그리스도교의 태도와 유교의 당당한 사생관을 대비시켰다.[20]
사후세계 역시 현실을 망각하거나, 현실에서 이탈하려는 행동으로 보아다. 그는 유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일상의 규범인 사친, 사군에 대한 일인데 반해 천주교의 가르침은 하늘의 복, 천상의 복을 구하는 것만을 옳게 여겨서 사친, 사군 등 일상의 도리를 저버리게 되는 것이라고 대비하였다.[21] 따라서 이것은 "윤리를 업신여기고 이치를 어그러뜨리는 것이며, 사사로움을 따르고 이익을 바라는데 머무는 것이니 어찌 심히 미워할 것이 아니겠는가. ... 저들이 학문하는 방법은 오로지 자기 복을 구하는데서 나왔으니, 그것은 역시 불성(
천주교에서의 인간의 영혼은 생혼과 각혼을 내포하고 있다가 죽은 뒤에는 생혼과 각혼은 소멸되어 기능이 정지되지만, 영혼은 불멸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하였다. 신후담은 "생혼과 각혼을 쓰지 않는다면, 비록 불멸한다 하더라도 소멸된 것과 다르지 않다. 비록 천당의 즐거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 즐거움을 깨닭을 수 없을 것이며, 비록 지옥의 괴로움이 있더라도 그 괴로움을 깨닭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혼의 가장 기본적 기능을 지각이나 의지로 보고, 그에 따라 죽음과 더불어 혼의 기능은 정지된 것으로 봤다.[22] 또한 사후 세계의 실용성에도 의혹을 제기하였다. 사후 세계와 천당과 지옥이 현실 생활에 어떠한 이익을 주는가를 의문점으로 제기하였다.
영혼에 대한 관점
[편집]그는 영혼은 육체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천주교에서 영혼은 인간의 바깥으로 드러난 형체의 모상인 외모가 아니라, 인간의 안에 존재하는 실체의 모상인 체모라고 한 데 대해, 신후담은 "형체가 있은 다음에 혼이 있는 것이지, 먼저 혼이 있고 이 혼의 모상에 의지하는 것이 형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여, 혼이 체모(
혼이 신체적인 것을 초월한 존재로 보는 종교의 입장과 달리, 신체적인 것에 의존하는 존재라고 보는 성리학적 인식을 따른 것이다.[23]
사람이 먼저 태어남에는 먼저 형체가 있고 그 다음에 양기가 와서 붙어 혼이 된다고 하고 혼은 형체의 기와 이질적인 실체가 아니라 기의 한 요소라고 하여, 혼의 독립적 실체성을 거부하였다.[22]
그는 영혼의 존재가 실체규명이 불가능, 불분명하며 죽은 뒤에 혼은 흩어지고, 몸은 땅에 들어가 썩어서 소멸한다고 보았다. 신후담은 주역의 귀신생사설을 근거로 "사람이 태어남은 음(
태극과 도덕성의 개념
[편집]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에서 천주(하느님)을 유교 경전의 '상제'나 '천(하늘)'과 일치시키면서 송나라 성리학의 태극이나 리의 궁극적 실재성을 부정하였다.[24]
신후담은 상제를 공경하여 제사를 드리지만, 태극을 공경하여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 태극이 만물의 시조가 될 수 없다는 마테오 리치의 지적을 반박하였다. 신후담은 "태극이란 그 이치는 실재 존재하지만 그 자리는 비어 있다. 상제가 하늘에서 주재하여 정해진 자리가 있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공경하는 의례를 베풀 수 있는 곳이 없다."고 하여 상제는 주재하는 역할과 하늘에 있는 자리를 갖추고 있지만, 태극은 이치로서 자리가 없으므로 '이치'(
신후담은 상제(하늘)와 태극의 관계를 성인과 도덕의 관계로 비유하여, "사람이 요, 순, 공자, 맹자를 높이는 것은 그 도덕이 높고 두텁기 때문이나, 도덕을 높이 받드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다."고 하였다.[24] 곧 성인에게는 실제 자리가 있여서 제사를 드리지만, 도덕은 자리가 없으니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24]고 하였다. 신후담은 태극과 도덕성은 존재하고 작용하지만, 모양이 정해진 어떤 형태, 형상화된 존재는 아니기에 태극과 도덕을 존경하거나 숭배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태극과 도덕 그 자체는 형태가 없지만 도덕적인 인간은 존경받는다고 보았다. 그는 도덕성은 인간의 내면에서 작용하는 것이고 영향을 주지만, 도덕성이 그 자체로 어떤 형상을 하거나 스스로 움직여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덕, 도덕성이라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마테오 리치는 리가 인심이나 사물에 있다는 것은 리가 사물의 뒤에 존재하는 것은 리가 사물의 뒤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사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하여, 리
인신 동일론
[편집]그는 태극의 허령불매한 자기자각성으로서의 심은 천지의 심이고 성인의 심이며, 이것이 상제다. 이 심에서는 천과 인이 하나다. 신후담은 서학이 인간과 신을 별개의 실체로 놓는 것은 이와 같은 인간 심의 허령한 본성을 간과하기 때문이라고 본다.[26]
“ | 아니마의 학문(천주교의 영혼론)은 심성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 아니며, 하늘과 사람이 꼭 맞아 들어가는 묘함을 살피지 못한 것이다.[26] | ” |
그는 인간의 마음이 곧 신의 마음이고 성인의 마음이며, 인간의 정신을 수양해야 되는 이유를 인간과 신이 동일한 존재라는 것에서 도출해냈다.
창조론 비판
[편집]그는 하느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했다는 구약성서의 내용이 허황되다고 비판했다. 신후담은 집이 저절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목수의 제작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비유로 천지의 개벽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천지는 태극(
기독교와 불교 비교
[편집]신후담은 기독교가 영혼불멸론, 천국지옥을 불교와 동일하거나, 불교의 아류로 보았다. 그는 천주교 교리에서 말하는 천당지옥설과 정령불멸설은 유교에서는 없는 불교의 설이라 지적하였다. 그는 "천주교가 불교와 다른 것이 무엇인지, 우리 유교와 같은 것은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다.[28]"고 하였다. 그리스도교 비판에 앞서 그는 삼봉 정도전의 《불씨잡변》을 통독, 완독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영혼이나 사후세계, 천당 지옥론은 불교의 그것과 다를바 없는 허위, 혹세무민으로 보았다.
그는 또 그리스도교 자체가 '불교의 자질구레한 설을 주워 모아서 오히려 불교를 배척하는 명목을 삼으니, 마테오 리치 등은 유교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불교의 역적이다.[28]'라 하였다. 마테오 리치가 제시하는 천주교의 입장이 유교와 일치를 주장하지만 유교와 다르고, 불교를 배척하지만 불교와 같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천주교의 '천당지옥설'과 '영혼 불멸설'과 더불어 '동정을 지킴'과 '세속(세상)과 인연'을 끊음은 불교와 같고, 천주교에서 세상 사람을 교화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것은 불교의 '권선'(
신후담은 또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 "대부분이 불교의 남은 부스러기들을 본받아서 서술하였으니, 그 식견의 비루함이 불교보다 열등하다" 하고, "이런 설명들은 불교보다도 더더욱 천박하니 어찌 사람을 속일 만 하겠는가? 스스로 그 허황됨을 드러낼 다름이다."라고 하여, 천주교를 불교의 아류로서 불교보다 더욱 열등한 것이라고 규정하였다.[28] 일부 남인은 보유론을 주장하여, 기독교의 교리가 유교를 보완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남인 내 신후담과 그의 문하생들은 사후세계관, 천국지옥, 영혼의 존재 등은 불교나 미신, 혹세무민, 협박이라며 반박하였다.
이(理 )의 존재에 대한 관점
[편집]마테오 리치는 사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공허(
마테오 리치는 리가 영(
독서에 대한 관점
[편집]그는 젊어서 안정복을 만나 독서하는 방법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때 그는 "성인과 현자의 글은 만 번 정도 읽어야 비로소 의미를 깨닭을 수 있다.[30]"고 하였다.
예를 들면, 백 아름쯤 되는 나무를 베고자 한다면 반드시 큰 도끼로 찍은 다음에야 나무를 얻을 수 있다. 성현의 말이 담고 있는 의미와 이치는 큰 나무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하다. 그러므로 반드시 많이 읽은 후에야 대략이나마 그 뜻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은 독서의 어려움을 견뎌내지 못하고, 한두 번 대충 훑어본 다음 스스로 안다고 한다. 그러나 글의 참 뜻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자그마한 낫으로 큰 나무를 베다가 겨우 나무껍질을 벗겼을 뿐인데, 나무를 모두 베었다고 중단하는 것과 똑같은 행동이다.[30]"라고 하였다. 그는 최대한 많이 읽어봐야만 그 뜻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에 대한 비판
[편집]인간과 천주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인간이 천주를 알 수 없다고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신후담이 보기에 더 심각한 문제는 천주에 대한 불가지성(또는 불가시성)을 주장하면서도 그들 자신만은 하느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설파한 것이다.[31] 그는 이러한 기독교의 교리를 오만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다른 지역의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인간의 지혜가 신에 미칠 수 없으므로 다 인간의 헛된 생각이고 미신일 뿐이라고 간주하면서, 유독 자신들의 종교에 대해서만 하느님을 바로 안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독한 독단이며 자기모순이라는 것이다.[31]
“ | 진광( |
” |
유교 외에도 불교나 도교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으며 어느 한가지 만이 진리는 아니라는 허목의 보편적 진리 사상 측면에 입각하여 기독교의 구원론을 비판하였다. 그는 또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복을 찾는다는 것도 허황된 생각으로 보았다. 자칫 현실문제를 회피, 외면하는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도 봤다.
교육에 대한 관점
[편집]줄리오 알레니(Giulio Aleni)는 서양의 초등교육, 중학교 과정, 고등학교 과정의 교육을 한자로 의역해서 동양에 소개하였다. 또한 대학교 과정을 설명, 의과 대학, 치과, 교육과, 윤리학과 등이 있다고 설명했다. 알레니가 치과(
알레니는 직방외기를 통해 서양의 교육 제도를 설명했고, 신후담은 이 부분도 비판하였다. 신후담은 이런 서양의 교육제도가 도덕적 교양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두는 교육과는 어긋난 것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32] 또, 의학이란 일종의 기술에 속하는 것으로, 다른 분야와 함께 논할 것이 아니라고도 지적하였다.[32]
여성, 아이 교육
[편집]그는 부인들과 어린아이들은 다루기가 어렵다고 했으나, 여성,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내교(內敎)》, 《유의(
복고적 원시유학
[편집]신후담은 주자학(
평가
[편집]근기(
현실적 좌절과 신체적 병약을 딛고 20대 초반부터 일관되게 학문에 몰두하고 학문적 성취를 이뤘으며, 1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한 바 있다. 한국의 문학, 사상사에서 손꼽히는 다독가이자 저술가 중 한 사람으로, 현재 그 100여권 가운데 절반 정도의 저술이 남아 있다.
향산 이만도는 인륜을 저버린 예수를 물리쳤다며, 그가 앞을 내다본 안목과 도를 지킨 공로가 있다 하였다. 이만도는 "저 야소(
기타
[편집]스승인 성호 이익은 그의 아들에게 성(
가족 관계
[편집]승정원일기에는 1794년 진사시 합격자 신승과 1795년 유학 신신이 다른 인물로 나타난다.
- 친 할아버지 : 신지일(
慎 之 逸 , 1653년 ~ 1703년 12월 16일), 아버지 신구중의 생부, 신승복의 7대손 - 친 할머니 : 교하노씨(交河
盧 氏 , ? ~ ?년 4월 25일), 노필득(盧 必得)의 딸- 백부 : 신만적(
慎 萬 迪 ) - 중부 : 신만길(
慎 萬吉 ) - 숙부 : 신만중(
慎 萬 重 )
- 백부 : 신만적(
- 양 할아버지 : 신휘오(
慎 徽五, 1660년 10월 20일 ~ 1716년 5월 18일), 아버지 신구중의 양부, 신승복의 동생 신승선의 7대손 - 양 할머니 : 파평윤씨(坡平
尹 氏 , 1654년 7월 15일 ~ 1696년 4월 15일), 통덕랑 윤횡의 딸 - 양 할머니 : 전주이씨(
全 州 李 氏 , 1680년 10월 20일 ~ 1756년 1월 29일), 이대년(李 大年 )의 딸 - 외할아버지 : 이정관(
李 正 觀 , 1655년 ~ 1705년)- 외삼촌 : 이번(
李 番 ) - 외삼촌 : 이내(
李 來 +田 ) - 외삼촌 : 이색(
李 嗇)
- 외삼촌 : 이번(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신후담:마리아사랑넷
- ↑ 승정워일기 영조 15년 기미(1739) 3월 14일(경신) 17번째 기사, 소대를 행하여 이세필의 〈왕조례〉에 관하여 논의하고 《대학연의보》를 진강하였다
- ↑ 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61페이지
- ↑ 신병주,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332페이지
- ↑ 정성희, 《주머니 속의 한국사》(가람기획, 2003) 167페이지
- ↑ 승정원일기 영조 15년 기미(1739) 3월 14일(경신) 12번째기사, "신귀중을 군직에 붙이고 대령하게 하라는 전교"
- ↑ 승정원일기 영조 15년 기미(1739) 3월 14일(경신) 17번째기사, "소대를 행하여 이세필의 〈왕조례〉에 관하여 논의하고 《대학연의보》를 진강하였다"
- ↑ 영조실록 영조 18년 임술(1742) 6월 28일(을묘) 3번째 기사, "이익정이 단경 왕후가 가례를 올린 데에 대해 아뢰다"
- ↑ 가 나 영조실록 62권, 1745년(영조 21년, 청 건륭 10년) 11월 3일 경오 4번째기사, "숙장문에 나아가 권두령, 이용발, 신후담, 신후함 등을 국문하다"
- ↑ 가 나 한자경, 《한국 철학의 맥》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8) 238
- ↑ 가 나 다 라 마 바 한자경, 《한국 철학의 맥》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8) 239
- ↑ 한자경, 《한국 철학의 맥》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8) 320
- ↑ 가 나 한자경, 《한국 철학의 맥》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8) 240
- ↑ 가 나 한자경, 《한국 철학의 맥》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8) 268
- ↑ 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107페이지
- ↑ 한우근, 《성호 이익 연구》 (한국학술정보, 1980) 69
- ↑ 가 나 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90페이지
- ↑ 가 나 한자경, 《한국 철학의 맥》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8) 253
- ↑ 가 나 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101페이지
- ↑ 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100페이지
- ↑ 가 나 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102페이지
- ↑ 가 나 금장태, 《한국유교의 과제》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196페이지
- ↑ 가 나 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106페이지
- ↑ 가 나 다 라 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97페이지
- ↑ 가 나 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98페이지
- ↑ 가 나 한자경, 《한국 철학의 맥》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8) 259
- ↑ 가 나 금장태, 《한국유교의 과제》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188페이지
- ↑ 가 나 다 라 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91페이지
- ↑ 가 나 다 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99페이지
- ↑ 가 나 한정주, 《조선 지식인의 독서 노트》 (포럼, 2008) 90페이지
- ↑ 가 나 다 한자경, 《한국 철학의 맥》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8) 266
- ↑ 가 나 박성래, 《인물과학사》 (책과 함께, 2011) 277페이지
참고 문헌
[편집]- 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 한자경, 《한국 철학의 맥》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8)
- 최동희, 《신후담·안정복의 서학비판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1975)
-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천주교회사, 논문선집 제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76)
- 한우근, 《성호 이익 연구》 (한국학술정보, 1980)
외부 링크
[편집]- 신후담:네이트 한국학[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신후담[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신후담의 서학변에 대한 연구 - 최동희
- [문화단신] 실학자 하빈 신후담 ‘하빈선생전집’
外 동아일보 2006년 8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