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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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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인
とら
조선국 평안도 관찰사
(朝鮮ちょうせんこく 平安へいあんどう 觀察かんさつ使)
임기 1686년 2월 15일 ~ 1689년 2월 15일
군주 조선 숙종 이순

이름
별명 자 원징(もとちょう)
호 양곡(だに)
시호 충정(ただしさだ)
신상정보
출생일 1624년
출생지 조선 경기도 양성현(ぐすくけん)
사망일 1689년 (향년 66세)
사망지 조선 경기도 파주
국적 조선의 기 조선
학력 1649년 문과 장원 급제
경력 문관 겸 정치인 출신
경기도 관찰사
한성부판윤(かん城府じょうふばんいん)
공조 판서
형조 판서
정당 무소속
본관 해주
부모 오상(しょう)
고성 이씨 부인(かたじょう 夫人ふじん)
배우자 초배 여흥 민씨 부인(驪興 閔氏 夫人ふじん)
계배 원주 김씨 부인(はらしゅう きん 夫人ふじん)
삼취 상주 황씨 부인(尙州 夫人ふじん)
자녀 5남 6녀
친인척 장인 민성휘(閔聖徽)
장인 김숭문(きむたかしぶん)
장인 황연(埏)
외조부 이성길(成吉せいきち)
며느리 명안공주(あかりやす公主こうしゅ)
손자 오원(瑗)
종교 유교(성리학)

오두인(とら, 1624년 ∼ 1689년)의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うみしゅう). 자는 원징(もとちょう), 호는 양곡(だに). 증조부는 병마절도사 오정방(じょうくに)이고, 할아버지는 좌찬성(ひだり贊成さんせい)에 추증된 오사겸(けん)이며, 아버지는 이조판서 오상(しょう)이다. 어머니는 병조 참판(兵曹へいそうさんばん) 이성길(成吉せいきち)의 딸이다. 며느리는 조선 제18대 왕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あかりやす公主こうしゅ)다.[1] 1649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경기도관찰사, 공조판서(こう曹判しょ), 한성 판윤(かんじょうばんいん),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ただしさだ)이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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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인은 해주 오씨 시조 오인유(ひとしひろし)의 17세손이다. 오두인은 됨됨이가 차분하고 중후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총민하여 문장이 있었다. 숙부인 오숙(䎘)에게 입양되어 황해도 해주에서 성장하였다. 10살 때 명(あきら)나라 사신인 부총(ふく摠) 정용(ほどりゅう)이 와서 오두인을 보고 예사롭지 않게 여겨 운자(韻字いんじ)를 주어 시()를 짓게 하니, 오두인은 붓을 당겨 즉석에서 ‘한정(かんほど)’이라는 글자를 써서 알지 못하게끔 비유를 하자 정용이 크게 경탄해 하며 진귀한 선물을 두터이 주었는데, 오두인이 다 사양하고 다만 부채 하나만을 받으니, 정용이 더욱 중히 여기며 말하기를, “다른 날 얼마나 크게 될지 헤아릴 수 없도다.” 하고 그 시를 《황화집(すめらぎはなしゅう)》에 실으니, 오두인의 명성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2]

1648년(인조 26년) 진사시(進士しんしためし)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49년(인조 27년)에 별시(べつためし)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650년(효종 1) 사헌부 지평(もちたいら)을 거쳐, 1656년 장령(てのひられい), 1661년(현종 2) 헌납(獻納けんのう)·사간, 1665년 사헌부 집의(よし), 1667년 부교리(ふくこう)·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1668년 좌부승지를 했고 1672년 광주목사를 거쳐서 1673년 병조참의가 되었다.

1679년(숙종 5) 공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3] 아들인 오태주숙종의 여동생인 명안공주(あかりやす公主こうしゅ)의 부마가 되었다.

1680년 호조 참판(曹參ばん), 1681년 도승지(うけたまわむね), 1682년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4] 1683년 공조 판서(こう曹判しょ)에 올랐다.[5]

명성왕후(あきら聖王せいおうきさき)의 상() 때에 감동(かんただし)한 공로로 정헌대부(正憲まさのり大夫たいふ)로 승진되었고, 한성 판윤(かんじょうばんいん)에 제수되었으며, 1686년 평안도 관찰사(平安へいあんどう觀察かんさつ使)가 되었다.[6]

1689년 형조판서로 재직 중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知義ともよしきんごと)에 세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당하였다. 이해 사직(司直しちょく)을 지내고, 5월에 인현왕후 민씨(じんあらわおうきさき閔氏)가 폐위되자 이세화(はな박태보(ぼくやすし輔)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 도중 파주에서 객사 하였으나, 그 해에 복관되었다.

1694년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충정(ただしさだ)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고향인 경기도 양성(じょう: 현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의 덕봉서원(とくほう書院しょいん)에 제향되었다.[7]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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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곡집》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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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부 : 오사겸(くれけん)
  • 조모 : 전주 이씨(ぜんしゅう) - 한성 서윤(かんじょう庶尹) 이시중(ちゅう)의 딸, 세종의 6대손
    • 아버지 : 오상(しょう)
    • 어머니 : 좌랑(ろう) 이효길(孝吉こうきち)의 딸
    • 처부 : 민성휘(閔聖徽)
      • 부인 : 정경부인(さだけい夫人ふじん) 여흥 민씨(驪興閔氏) - 판서(はんしょ) 민성휘(閔聖徽)의 딸
        • 장자 : 오관주(くれかんしゅう)
        • 장녀 사위 : 군수(こおりまもる) 남택하(みなみたくなつ, 1643년 ~ 1718년)
    • 처부 : 김숭문(きむたかしぶん)
      • 부인 : 정경부인(さだけい夫人ふじん) 원주 김씨(はらしゅうきん)
        • 차자 : 오정주(かなえあまね) - 직장(じきちょう)
        • 차녀
    • 처부 : 황연(埏)
      • 부인 : 정경부인(さだけい夫人ふじん) 상주 황씨(尙州) - 부사(使) 황연(埏)의 딸
        • 3남 : 오태주(やすししゅう, 1668년 ∼ 1716년)
        • 며느리 : 명안공주(あかりやす公主こうしゅ, 1667년 ~ 1687년) - 제18대 현종대왕(顯宗けんそう大王だいおう, 1641~1674, 재위 1660~1674)의 딸, 제19대 숙종대왕(肅宗大王だいおう, 1661~1720, 재위 1674~1720)의 여동생
        • 4남 : 오진주(すすむしゅう)
        • 며느리 : 김운(김창협의 삼녀)
          • 손자 : 문목공(ぶんきよしおおやけ) 오원(瑗, 1700년 ~ 1740년) - 오태주와 명안공주의 양자로 입적
        • 5남 : 오이주(くつしゅう)
        • 며느리 : 이숙의 딸 - 인현왕후의 형부인 이만창의 누이로 6녀 사위인 이재의 고모이기도 하다.
        • 3녀 사위 : 현감 김창설(きむあきらせつ)
        • 4녀 사위 : 수찬 최창대(ちぇあきらだい)
        • 5녀 사위 : 김영행(かねれいぎょう)
        • 6녀 사위 : 이재(縡) - 인현왕후의 이질

드라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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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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