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헌식
장헌식(
1895년 일본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1903년까지 일본에 유학하며 게이오 의숙의 보통과와 고등과 과정, 도쿄 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서 수학했으며, 일본 사법성과 요코하마항 지방재판소의 사무견습, 대장성의 사무견습으로 재직했다. 귀국 후 궁내부 주사로 임용되어 학부에서 근무하다가 한성부윤을 역임했다. 1910년 10월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어 평안남도 참여관, 1917년에 충청북도 장관(도지사)으로 승진한 뒤 충청북도 도장관, 조선총독부 사무관, 총독부 관방실 계원, 1924년 전라남도 지사 등을 역임했다. 1926년부터 중추원 참의에 선출되어 연임한 뒤 1945년 5월 이왕직장관에 임명되어 미군정 주둔 직후 11월까지 재직했다.
해방 후 황실 물품 횡령혐의로 고소되었으며, 1949년 반민특위에 친일혐의자로 자수, 수사를 받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생애[원본 편집]
생애 초반[원본 편집]
초기 활동[원본 편집]
1869년 음력 9월 21일 용인군 현내면(
1895년 관비 일본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그해 3월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의숙 보통과에서 수학했다. 당시 근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뽑아 보낸 관비 일본 유학생들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후 다양한 부문의 전문가이자 친일파로 활동하게 되는데, 장헌식도 그런 인물들 중 하나였다.
일본 유학 생활[원본 편집]
1896년 7월 25일 게이오의숙(
견습사무원으로 재직하면서 그는 도쿄 제국대학에 진학, 1898년 10월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교 법과에서 행정법을 전공하며 행정법 전문가로 일본 대장성 총무국에서 견습 근무했다. 1902년 7월 11일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교 법과를 졸업하였다. 1902년 10월 21일 도쿄 제국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1903년 3월 중퇴하였다. 1902년 11월 그는 일본 도쿄에 있는 대장성 총무국 사무견습 겸 사무촉탁이 되었다, 같은 달 그는 대장성 사무견습 통신사(
귀국과 관료 생활[원본 편집]
8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03년 3월 학부의 훈령으로 귀국한 뒤로는 대한제국의 궁내부에서 주사로 관직을 시작했다. 1904년 6월 24일 궁내부 어홍원(
1905년에는 관립한성외국어학교(
1907년 7월 한성부윤(
일제 강점기 활동[원본 편집]
일제 강점기 초반[원본 편집]
1910년 10월 2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평안남도 초대 참여관 고등관 3등(
1921년 2월 12일 조선총독부 사무관(
1923년 11월 25일에는 만주의 조선인 동포가 설립한 대성중학교에 장학금으로 써 달라고 금 40원을 기탁하였다.[2] 12월 27일에는 경성도서관에 도서구입비 1백 원을 기부하였다.
1924년 12월 1일에는 전라남도 지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퇴근 후에는 보통의 농군들과 같이 식수(
장헌식은 도 참여관, 도지사를 지낸 관료 가운데서도 1921년 총독부의 총독관방 근무 사무관(민정시찰 사무관)을 맡는 등 총독부와 특히 유착된 행보를 보였다. 3·1 운동 후 신설된 이 직책은 독립 운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주목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3] 1921년 2월 조선총독부 사무관(
일제 강점기 중반[원본 편집]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퍼지고 노동 운동이 활발해지자 이를 탄압하기 위해 설립된 친일 자본가 단체인 동민회에 가담했으며, 일제 말기 총독부 학무국과 밀착하여 또다른 친일 단체 대화동맹 결성을 조종했다는 증언이 있다.[4] 1924년 12월 1일 전라남도지사로 부임하였다. 전남 지사직에서 물러난 1926년부터 1945년까지 중추원 칙임참의를 7회에 걸쳐 중임하였다.[1]
1926년 5월 1일 정4위(
1927년부터 여성의 취직과 직업훈련을 목적으로 조선여자직업사(
일제 강점기 중반[원본 편집]
1926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선출되었다. 1931년 5월 25일 조선불교단(
그는 사회활동과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하는 각종 모임, 행사에 꾸준히 참석했는데 1932년 5월 27일일자 일기에서 김윤정, 이항구, 장헌식 등은 춤을 추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는 내용을 자신의 일기에 남겼다. 그해 9월 3일에는 경성부윤 주최하 사회복지사역에 참석하여 답사를 하였다. 1932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재선출되었다.
1930년대 청주에 개교 예정인 청주상업고등학교(
1935년 11월 27일 김천의 김천고등보통학교의 설립자 최송설당 기념 동상을 건립할 때 3원을 기부하였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7][8] 1935년 8월 14일 임기만료로 참의직에서 물러났으나 특별히 중추원 참의에 재임명되었다.
장헌식은 관직에서 퇴임한 뒤로도 일본의 전쟁을 지원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37년에는 각지에 시국강연을 다녔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을 후원한 활동을 인정받아 1937년 일본 육군대신 명의의 표창을 받은 바 있고,[1]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때 활동[원본 편집]
37년 8월 21일에는 애국금차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로는 시국강연반에 가담하여 전쟁 지원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38년 친일 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뒤 1941년 국민총력 조선연맹과 조선 임전 보국단에도 가담했다. 이때는 이미 70대의 노구였으나, 학병 지원을 독려한다며 전국에서 강연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38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 칙임관대우 참의에 임명되었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1926년부터 1945년 광복 시점까지 19년 동안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으며, 1945년 5월 이왕직 장관으로 관직에 복귀해 있었다. 광복 당시 그는 이왕직 장관이었고, 11월 8일 구황실사무청이 설치될 때까지 계속 재직하였다.
해방 이후[원본 편집]
미군정기 활동[원본 편집]
1945년 9월 2일 미군정 주둔과 동시에 미군정 자문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당시 그는 이왕직 장관이었다. 이왕직장관직은 11월 8일 사퇴하였다. 이때 구왕궁의 물품을 유용했다는 의혹으로 수사받았다. 그를 수사한 것이 해방 이후의 첫 수사, 재판으로 기록된다.
1946년 1월 3일 이왕직 재산 관련 공금횡령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이때까지도 출국하지 못한 일본인 이왕직 회계과장 사이토 치로(
1946년 3월 15일 공금횡령 및 공문서 위조 혐의로 서울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형을 언도받은 뒤, 투옥됐다가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다시 미군정 자문관으로 복직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원본 편집]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과 동시에 관직에서 물러나 경기도 용인의 자택으로 돌아갔다.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령이 떨어지자 자수하였으며, 반민특위 조사관들이 오자 담담하게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며, 손자며느리에게 뒷일을 부탁한다 하고 출두하였다. 이후 조사에 순순히 응하여 구속 수사를 받았으며 치질(
1949년 4월 20일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11]
1950년 8월 20일에 사망했는데, 일설에는 조선인민군에 살해되었다는 설이 있다.
사후[원본 편집]
관료 재직 중 조선총독부로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학식이 풍부한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는데, 잡지 대륙자유평론 사업인물호 제8호의 인물소개란에 수록돼 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광복회와 함께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으며 부인인 임정재도 친일 여성 단체인 애국금차회에서 활동했다.
가족 관계[원본 편집]
1917년 당시 그는 본처와의 사이에 2남 3녀를 두었다 한다. 당시 장녀 장홍식은 성년으로 한성은행 직원이었으며, 아들 장홍식은 당시 14세로 평양중학교에 재학중이었다.[12] 그의 딸들 중 한명은 민대식의 아들과 결혼하였다.
같이 보기[원본 편집]
참고 자료[원본 편집]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2월 1일). 〈장헌식 : 중추원 칙임참의를 20년 간 역임한 일제의 충견 (장세윤)〉.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 임종국 (1991년 2월 1일). 〈「혈의 누」의 이인직은 한일합방의 주역〉.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ISBN 8971990368.
- 김윤정, 《조선총독부 중추원 연구》 (경인문화사, 2011)
각주[원본 편집]
- ↑ 가 나 다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85~86쪽쪽. ISBN 8971990368.
- ↑ "
大成 中學 寄金 寄附 人士 芳名 錄 ", 동아일보 1923.11.25. 5면, 사회면 -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2월 1일). 〈장헌식 : 중추원 칙임참의를 20년 간 역임한 일제의 충견 (장세윤)〉.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이 직책은 3·1 운동 후 한국인들을 감시하고 민심의 동향을 정탐하기 위해 총독 사이토 마고로(
齋藤 實 )가 특설한 직책으로 일종의 특무요원이라 할 수 있었다. - ↑ 일제 말기 총독부 학무국과 밀착하여~ : 반민특위 조병상 공판조서 (제1회) 중 조병상의 수기 (1949).
- ↑ "
佛敎 團 役員 ",朝鮮 新聞 1931년 5월 25일자 2면 8단 - ↑ "
水産 會 役員 改選 ",每日 申 報 1931년 12월17일자 8면 1단 - ↑ 성강현 (2004년 3월 18일).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일요시사. 2008년 6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3월 6일에 확인함.
- ↑ 성강현 (2004년 3월 18일).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일요시사. 2008년 6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3월 6일에 확인함.
- ↑ 가 나 "전
李 王 職 장관인張 憲 植 수감명령", 자유신문 1946년 1월 3일자, 2면 10단 - ↑ "
張 憲 植 보석출감", 자유신문 1946년 1월 16일자, 2면 5단 - ↑ "30여 명의 반민피의자들, 보석 등으로 석방", 연합신문 1949년 4월 23일자
- ↑ "
新 도장관의 가정, 슬하에 자녀 5남매",每日 申 報 1917년 6월15일자 3면 2단
전임 원응상 |
제3대 전라남도 지사 1924년 12월 1일 ~ 1926년 8월 14일 |
후임 석진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