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계첩
최근 수정 시각:
기사계첩은 1719년 4월 17일부터 18일까지 양일간 열린 기로회를 기록한 궁중기록화첩이다. 기로회는 나라를 위해 청춘과 정년을 다 바친 70세 이상 노인들과 퇴직 관료들이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기념하고 기로에 대한 효와 감사의 마음을 널리 알리기 위해 나라에서 연 것이다. 그리고 그 행사 장면 및 노인들의 초상화를 김진여(金振汝 ), 장태흥(張 泰興 ), 박동보(朴 東 普 ), 장득만(張 得 萬 ), 허숙(許 俶) 등의 궁중화가들이 그려 기사계첩으로 남겼다.
어첩봉안도(御 帖 奉安 圖 ), 숭정전진하전도(崇 政 殿 進 賀 箋圖), 경현당사연도(景 賢堂 錫 宴 圖 ), 봉배귀사도(奉 盃 歸社 圖 ), 기사사연도(耆社私 宴 圖 ) 등 기로연의 행사 과정을 그린 여러 기록화들과 당시 참여한 인물들의 초상화가 그러져 있다. 이 때 기로연에 참석한 인물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가나다 순)
어첩봉안도(
인물 | 당시 관직 | 생몰년도 (당시 나이) | 비고 |
강현 ( | 지중추부사 | 영조, 정조 때에 문신이자 화가인 강세황의 부친. | |
김우항 (金宇 | 판중추부사 | ||
신임 ( | 우참판 | 당시 기로연에 참여한 사람들 중 최고령 | |
이선부 ( | 행사직 | ||
영중추부사 | |||
임방 ( | 좌참찬 | ||
한성부판윤 | |||
행판돈녕부사 | |||
황흠 ( | 지중추부사 | 당시 기로연에 참여한 사람들 중 최고령(신임과 같은 나이)이었고, 가장 오래 살았음(90세) | |
홍만조 ( | 우참찬 | 본 문서 내 문화재로 지정된 기사계첩 중 국보 제334호가 이 집안의 소장품임. |
1700년대 초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궁중기록화첩으로, 예술성과 작품성이 매우 뛰어나고 작품들의 보존상태 또한 양호하여 가치가 매우 큰 한국의 문화재로 인정받고 있다.
기사사연도(耆社
경현당사연도(
임방(
|
기사계첩 | |
소재지 | |
분류 | 유물 / 일반회화 / 기록화 / 계회도 |
수량/면적 | 1첩 (50면) |
지정연도 | 2019년 3월 6일 |
제작시기 | 1719~1720년(숙종 45~숙종 46) |
국보 제325호 기사계첩 |
‘기사계첩’은 1719년(숙종 45) 59세가 된 숙종이 태조 이성계의 전례를 따라 기로소(耆老所 )에 들어간 것을 기념한 행사에 참여한 관료들이 계(契 )를 조직해 만든 계첩(契 帖 )이다. 행사는 1719년에 실시되었으나 계첩은 초상화를 그리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 1720년(숙종 46)에 완성되었다. 기로소는 70세 이상, 정2품 이상 직책을 가진 노년의 문관(文官 )들을 우대하던 기관이다. 계첩은 기로신 중의 한 명인 좌참찬 임방(任 埅, 1640~1724)이 쓴 계첩의 서문과 경희궁 경현당(景 賢堂 ) 사연(賜 宴 ) 때 숙종이 지은 어제(御製 ), 대제학 김유(金 楺, 1653~1719)의 발문, 각 의식에 참여한 기로신들의 명단, 행사 장면을 그린 기록화, 기로신 11명의 명단과 이들의 반신상 초상화, 기로신들이 쓴 축시(祝 詩 ), 계첩을 제작한 실무자 명단으로 구성되었다. 행사 장면은 경희궁 흥정당(興 政 堂 )에서 기로소로 어첩을 봉안하러 가는 행렬을 그린 <어첩봉안도(御 帖 奉安 圖 )>, 이튿날인 2월 12일 기로신들이 경희궁 숭정전에서 진하례를 올리는 장면을 그린 <숭정전진하전도(崇 政 殿 進 賀 箋圖)>, 4월 18일 경현당에서 기로신들에게 내린 친림사연의 광경을 그린 <경현당석연도(景 賢堂 錫 宴 圖 )>, 경현당 석연에서 하사받은 은배(銀盃 )를 받들고 기로소로 돌아가는 기로신들의 행렬을 묘사한 <봉배귀사도(奉 盃 歸社 圖 )>, 기로신들이 기로소에서 연회를 행하는 모습을 그린 <기사사연도(耆社私 宴 圖 )> 가 순서대로 그려졌다. 계첩에 수록된 그림과 기로신들의 초상화는 당대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았던 도화서 화원 김진여(金 振 汝 ), 장태흥(張 泰興 ) 등이 그린 것으로, 화려한 채색과 섬세하고 절제된 묘사, 명암법을 적절하게 사용해 사실성이 뛰어난 얼굴 표현 등 조선 후기 궁중회화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18세기를 대표하는 궁중행사도 중 하나로, 후대 궁중회화 제작에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평가된다. 제작 당시의 원형을 거의 상실하지 않았고 제작 시기와 제작자가 분명하며 그림의 완성도나 기법이 매우 높아 국보로 승격하여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
- 문화재청 홈페이지 : 기사계첩 (耆社
契 帖 )(과거 설명)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숙종 45년(1719) 4월 17일과 18일에 열린 70세 이상의 퇴직관리들의 모임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참석자들의 초상화와 모임 장면을 비롯해 축시와 회원 명단이 들어있는 화첩으로 모두 50면으로 이루졌다.
가로 36㎝, 세로 5㎝로 장태흥·허숙 등이 그림을 그리고, 이의방이 글씨를 썼다. 숙종 때에 12부를 만들었으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3부이다. 이 화첩에 그려진 반신상의 초상화는 정장관복의 차림으로 18세기 초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 계첩은 보존상태가 좋고 원형이 훼손되지 않아 당시의 기사계첩 형식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
기사계첩 및 함 耆社 | |
소재지 | |
분류 | 유물 / 일반회화 / 풍속화 |
수량/면적 | 화첩 1첩, 내함 1점, 호갑 1점, 외궤 1점 |
지정연도 | 2020년 12월 22일 |
제작시기 | 1719~1720년(숙종 45~숙종 46) |
국보 제334호 기사계첩_함 |
‘기사계첩’은 1719년(숙종 45) 59세가 된 숙종이 태조 이성계의 전례를 따라 기로소(耆老所 )에 들어 간 것을 기념해 기로소에서 주관한 계첩(契 帖 )으로, 18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궁중기록화이다. 기로 소는 70세 이상, 정2품 이상 직책을 가진 노년의 문관(文官 )들을 우대하던 기관이다. 행사는 1719년에 실시되었으나 계첩은 초상화를 그리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 1720년(숙종 46)에 완 성되었다. ‘기사계첩’은 기로신들에게 나눠줄 11첩과 기로소에 보관할 1첩을 포함해 총 12첩이 제작 되었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사계첩’(국보 제325호)를 포함해 5건 정도가 알려져 있다. 국보 제334호 ‘기사계첩’은 기로신 중의 한 명인 좌참찬 임방(任 埅, 1640∼1724)이 쓴 계첩의 서문 과 경희궁 경현당(景 賢堂 ) 사연(賜 宴 ) 때 숙종이 지은 어제(御製 ), 대제학 김유(金 楺, 1653∼1719)의 발문, 각 의식에 참여한 기로신들의 명단, 행사 장면을 그린 기록화, 기로신 11명의 명단과 이들의 반신상 초상화, 기로신들이 쓴 축시(祝 詩 ), 계첩을 제작한 실무자 명단으로 구성되어 현재까지 알려 진 ‘기사계첩’과 구성이 유사하다. 그러나 다른 ‘기사계첩’에서는 볼 수 없는 제1-2면의 “만퇴당장 (晩 退 堂 藏 )”, 제53-54면의 “전가보장(傳家 寶藏 )” 글씨는 이 계첩이 1719년 당시 행사에 참여한 기로 신 중의 한 사람인 홍만조(洪 萬 朝 , 1465∼1725)의 소장품이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 내용은 풍산 홍씨 문중에 대대로 보존되어 온 전승 경위를 확실하게 증명해 준다고 하겠다. 아울러 이 계첩을 보호하고 있는 내함(內函), 호갑(護 匣 ), 외궤(外 櫃 )가 일괄로 온전하게 남아 있는 사실은 조선시대 궁중회화와 관련된 유물 중 매우 희소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유물의 완전성을 돋 보이게 하는 요소이다. 이 내함, 호갑, 외궤는 형식과 제작기법 등으로 보아 계첩과 유사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왕실의 봉과(封 裹) 방식을 알려주고 세부적인 공예 제작 기술에 대해서 도 귀중한 정보를 알려주므로 함께 지정할 필요가 있다. ‘기사계첩’은 숙종의 기로소 입소라는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고 후에 고종(高 宗 )이 기로소에 입소할 때 모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아울러 제작시기 및 제작자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 어 학술적으로 중요하며, 기로신들의 친필(親筆 ) 시문과 더불어 그림은 높은 완성도와 화격(畵格)을 갖추고 있어 현존 하는 궁중회화를 대표할 만 한 예술성도 갖추었다. 계첩과 동시기에 같이 만들어 진 함(내함, 호갑, 외궤)도 공예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므로 함께 국보로 함께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
- 문화재청 홈페이지 : 기사계첩 (耆社
契 帖 )(과거설명)
홍완구(개인) 소장본
<기사계첩(耆社契 帖 )>은 숙종 45년(1719)에 있었던 소속이 같은 문인들이 서로 친목을 도모하고 풍류를 즐겼던 모임인 계회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글과 그림으로 만든 화첩으로, 크기는 가로 53㎝, 세로 37.5㎝이다.
70세 이상 대신들의 모임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왕의 시문, 전체 내용을 요약한 김유의 발문과 참석자 명단, 행사장면의 그림 등 50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사계첩은, 보물 638호와 거의 비슷하지만, 김창집을 비롯한 계회참석자 10인의 초상화에서 평소 집무복인 단령의 모양이나 색채가 다르며, 조선 후기 문신인 홍만조의 축시제목이 없는 점 등으로 두 기사계첩을 대조하여 연구해 볼 수 있다.
임금의 초상을 그렸던 박동보·장득만·허숙 등의 화원들이 초상화를 그린 이 기사계첩은 보물 제638호로 지정된 기사계첩과 거의 같으나, 보물 제638호가 1974년 2면을 1면으로 붙인데 반해 이 화첩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작품으로 10여 명의 초상화와 자필로 쓴 축시, 화원 명단이 들어 있어 당시 화풍과 서체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기사계첩(耆社 |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본
<기사계첩(耆社契 帖 )>은 70세 이상의 노신들을 우대하는 뜻에서 만들어진 기사의 모임 장면과, 그들의 초상 등으로 꾸민 화첩으로 비단 바탕에 채색되어 있으며, 가로 76㎝, 세로 59.5㎝ 크기 이다.
숙종 45년(1719)에 왕과 기로소 신하들의 모임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임방의 서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왕의 시문, 전체내용을 요약한 김유의 발문과 참석명단 및 행사장면의 그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화첩에는 이유·임방 등 참석자 10인의 반신상 초상과 스스로 쓴 축시 및 화원의 명단 등도 포함되어 있다. 모두 12권인데, 한 권만 기로소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참석한 사람들이 각자 소유하였다.
김진여 등 여러 화원이 참여하여 숙종 46년(1720)에 완성한 이 화첩에서의 초상은 반신상이며 화법에 있어서 18세기 초의 전형적인 초상화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같은 종류의 화법 중에서 시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