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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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 |
소재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
수량/면적 | 1기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통일신라시대 9세기 |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
백장암(
한편 백장암 삼층석탑은 백장암이 오랜 시간 동안 여러 풍파를 겪어오던 와중에도 탑이 조성된 이후로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본 석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으로, 바로 옆에 위치한 석등[4]과 함께 상당히 정교한 통일신라 조각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평가 받는다.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은 1962년에 국보 제10호로 지정됐으며, 2021년 현재 백장암에 위치하고 있다.
1980년대 대한뉴스에 방영된 모습(31초) |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다른 석탑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통일신라의 대표적 이형석탑이다.
통일신라 후기로 들어서면서 석탑에 부조와 같은 다양한 조각을 새겼는데,[5]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도 몸돌[6]에 여러 부조와 장식들이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후기로 들어서면서 석탑에 부조와 같은 다양한 조각을 새겼는데,[5]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도 몸돌[6]에 여러 부조와 장식들이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백장암 삼층석탑 |
높이는 약 5m이고, 탑의 구조는 사각형 받침돌 하나로 이루어진 아주 낮은 기단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7] 그리고 지붕돌 위의 상륜부(相輪 部 )[8]로 구성되어 있어 전체적인 형상은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는 편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탑의 기단부는 2층(혹은 단층)기단으로 이루어지고 몸돌은 층수가 올라갈수록 이에 따라 체감률을 높여서[9] 시각적 안정감을 주려는 경향이 있으며 몸돌에 새기는 장식도 기껏해야 1층 몸돌에나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본 석탑의 기단은 거의 생략되다시피 되어 있다는 점과 1~3층 몸돌의 체감률이 아주 낮다는 점,[10] 그리고 매 층 몸돌마다 정교한 조각들이 가득 새겨져 있다는 점 등에서 백장암 삼층석탑은 일종의 파격을 보여준다.
또한 백장암 삼층석탑은 백장암이 오랜 시간 동안 여러 풍파를 겪어오던 와중에도 탑이 조성된 이후로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존 상태가 상당히 좋다. 몸돌과 지붕돌에 새겨진 장식들은 세월의 흐름을 감안하더라도 그 형체를 온전하게 지키고 있으며, 현존하는 대다수의 다른 탑들은 지붕의 머리장식이 사라지고 없지만 본 석탑의 머리장식은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그 상태도 양호하다.
또한 백장암 삼층석탑은 백장암이 오랜 시간 동안 여러 풍파를 겪어오던 와중에도 탑이 조성된 이후로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존 상태가 상당히 좋다. 몸돌과 지붕돌에 새겨진 장식들은 세월의 흐름을 감안하더라도 그 형체를 온전하게 지키고 있으며, 현존하는 대다수의 다른 탑들은 지붕의 머리장식이 사라지고 없지만 본 석탑의 머리장식은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그 상태도 양호하다.
1층 몸돌의 문비와 신장상 | 1층 몸돌의 사천왕상과 동자상 |
1층 몸돌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가 달린 문을 장식하고,[11] 이 문을 지키는 사천왕과 보살(普 薩) 및 신장(神 將 )을 새겨놨다. 2층과 3층의 몸돌에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천인(天人 )을 조각해 놨다. 2층 탑신에 새겨진 것들은 입상으로 면당 2구씩 배치되었고 3층의 것들은 좌상으로 각 면에 1구씩 배치되었다. 또한 천인의 아래에는 파만자(破 卍 字 ) 난간 장식을 양각으로 새겨놨다. 이는 신라만의 독특한 난간 양식이다.
3층과 상륜부 (지붕돌) 삼존상 (몸돌) 천인상과 파만자 난간 |
각층의 지붕돌 밑면에도 역시 조각들로 채워져 있다. 1~2층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3층에는 삼존상(三 尊像 )이 새겨져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 시대 (조각이 새겨져 있는) 석탑들과 마찬가지로 이 탑의 조각도 시간이 흐르며 어느 정도 손상을 입었지만 원래의 모습을 여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상륜부의 보존 상태도 수연과 용차를 제외하면 양호한 편이다.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탑의 형식이 파격적이고 독특하다. 또한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고 아름다운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어 신라 후기를 대표하는 이형석탑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0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상륜부의 보존 상태도 수연과 용차를 제외하면 양호한 편이다.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탑의 형식이 파격적이고 독특하다. 또한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고 아름다운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어 신라 후기를 대표하는 이형석탑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 서편에 위치한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 陟 )이 창건하였다. 이 곳에서 북쪽으로 얼마쯤 가다보면 백장암이 나타나는데, 실상사에 딸린 소박한 암자로, 그 아래 경작지에 이 탑이 세워져 있다.
낮은 기단(基壇 ) 위에 3층의 탑신(塔 身 )을 올린 모습으로, 각 부의 구조와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다. 즉,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 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난다. 기단과 탑신괴임에는 난간 모양을 새겨 멋을 내었고,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菩薩 像 )과 신장상(神 將 像 )을,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天人 像 )을, 3층에는 천인좌상(天人 坐像 )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만은 삼존상(三 尊像 )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 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갖가지 모습들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조가 돋보이고 있어, 당시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1] 본명은 홍척(洪 陟 )으로 남한조사(南 漢 祖師 )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참조: 두산백과 - 홍척[2] 세조 때인 1468년에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되었다는 설과 그 뒤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3] 출처: 두산백과 - 백장암[4] 보물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5] 이러한 양식의 신라 석탑으로는 경주 장항리 서 오층석탑,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등이 유명하다.[6] 한자로 탑신(塔 身 )이라 한다.[7] 한자로 옥개석(屋 蓋 石 )이라고 한다.[8] 이를 머리장식이라고도 한다.[9] =몸돌의 너비와 높이를 줄여서[10] 한마디로 전체적으로 삼각형을 이루는 일반적인 탑의 형상이라기보다는 돌기둥에 가까운 모습이라는 것이다.[11] 한자로 문비(門扉 )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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