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룡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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鑄 得 雙龍 劍 千 秋氣 尙雄盟 山 誓 海 意 忠 憤 古今 同 (주득쌍룡검 천추기상웅 맹산서해의 충분고금동)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런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쌍룡검에 새겨진 글귀
1910년 조선 미술 대관에 실려있는 쌍룡검이라고 흔히 알려진 사진. 다만 이 사진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검을 검집에 넣은 상태라 검에 새겨진 글귀를 확인할 수가 없고 이게 쌍룡검이 맞다는 확실한 설명 또한 전혀 해놓지도 않았으며 원융검기에 묘사된 쌍룡검의 형태와도 전혀 다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에 수군 최고 지휘관의 신분이었던 만큼 직접 무기를 들고 적과 교전한 사례가 없기에 이순신이 지니고 다닌 무기가 실제 전투에 쓰였는지 의장용인지 구분을 하는건 큰 의미가 없는 일임에도 이상하게 쌍룡검이 실전용 무기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그래서 쌍룡검을 소개할때마다 '이순신이 실전에서 사용했다'는 수식어가 항상 붙어다니지만 이순신이 실전에서 사용한 무기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사실 기록이 전혀 없다.
더구나 원융검기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쌍룡검은 길이가 1장이 넘는다고 묘사되어 있다. 즉 영조척으로 환산하면 3m가 넘으며 주척으로 환산해도 현재 남아있는 거환도와 길이가 비슷한 장검이다. 쌍룡검이 짧은 환도라는 인식이 붙은건 쌍룡검이라고 주장하는 흑백 사진으로 인한 것인데 이 사진에 나온 도검이 쌍룡검이라는 근거는 없고 원융검기에 묘사된 쌍룡검 묘사와 차이가 심하게 크다.
사실 이미 18세기에 한 차례 실종됐다가 1811년 훈련대장 박종경에게 발견[1]되어 조선 전체를 한 번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전적이 있다. 다만 이것이 실린 《돈암집》권6 <원융검기>에는 "쌍룡검은 궁내부[2]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라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나와있지 않아 있다.
박종경의 기록에 따르면 1811년 가을에 병조판서 심상규로부터 이순신이 차고 다녔다는 칼 한 자루를 받았는데, 그 칼에는 '쌍룡검을 만드니 오랜 세월이 지날지라도 그 기운은 오히려 웅혼할 것이구나. 산에 맹세하고 바다에 맹세한 그 뜻, 충성을 다하려는 분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구나(鑄 得 雙 龍劒 千 秋氣 尙雄 盟 山 誓 海 意 忠 憤 古今 同 )'라는 시(검명)가 새겨져 있었고, 박종경은 시구의 ‘쌍룡검’이라는 것에 착안해 다른 한 자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머지 한 자루를 탐문해 열흘 뒤 아산 사람으로부터 똑같은 다른 칼을 구했고 이후 이 쌍룡검을 충무공 이순신의 칼로 여겨 간수했고 이후 검이 궁내부 박물관이 소유하게 되었다고 기록해 놨다.
박종경의 기록에 따르면 1811년 가을에 병조판서 심상규로부터 이순신이 차고 다녔다는 칼 한 자루를 받았는데, 그 칼에는 '쌍룡검을 만드니 오랜 세월이 지날지라도 그 기운은 오히려 웅혼할 것이구나. 산에 맹세하고 바다에 맹세한 그 뜻, 충성을 다하려는 분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구나(
1909년 대한민보[3]에서 "충무공의 군도는 동궐 내 박람회에 출품되었다."라고 했으며 1910년 사진집인 《조선미술대관》에 사진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후 행방이 묘연했으나 주간경향이 1912년 5월 26일자 권업 신문에 "동관 대궐에 이순신의 원융검(元 戎 劍 ) 및 조선 유물들이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다 치우고 그림이나 글씨같은 것들만 전시해놨다."라는 기사를 발견했다. 이 기록으로 궁내부 박물관 측에서 소유하고 있다가 어느순간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후 일제강점기 초기에 행적이 점점 묘연해지기 시작해서, 현재는 193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몇 장만 남아있다고 하나 그나마 그 사진들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 초기에 행적이 점점 묘연해지기 시작해서, 현재는 193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몇 장만 남아있다고 하나 그나마 그 사진들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고 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위에 서술된 내용이 보도된 2001년 11월 23일 한국일보 보도.
2010년 7월 10일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분에서 추적을 해봤지만 찾은 건 애먼 사인검 마이너카피(?)인 삼인검이었다. 한 미 해병대 부사관이 조선칼과 왕관(Korean sword and crown)을 해외로 반출했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 이후의 조사는 힘들었다. 일본이나 미국 어딘가에서 가치도 모른채 떠돌고 있을 것이다(...) 만약 소장하고 있는 사람이 쌍룡검의 가치를 알게 된다면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 될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데 2019년 1월 7일 주간경향 1309호를 통해 국내 이순신 연구자 가운데 한 명인 역사평론가 박종평이 놀라운 견해를 내놓았다.충무공 이순신이 직접 사용했던 쌍룡검이라는 이름의 검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먼저 박종평은 고종 때의 문신 임헌회가 쓴 삼도수군통제사 이복연(李 復 淵 ·1688~?)의 묘갈명인 <통제사 이공 묘갈명(統制 使 李 公 墓 碣銘)>에, 쌍룡검에 새겨져 있었다는 명문과 거의 비슷한 내용의 한시가 이복연의 시라는 기록과 그 내용이 있음을 제시했다.
먼저 박종평은 고종 때의 문신 임헌회가 쓴 삼도수군통제사 이복연(
"공(통제사 이복연)이 한 쌍의 장검을 만들고 ‘산에 맹세하고 바다에 맹세한 그 뜻, 충성을 다하려는 분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구나’라는 글귀를 새겼다(公 鑄 得 一雙 長 劒刻 以盟山 誓 海 意 忠 憤 古今 同 之 句 ). 대개 공은 평생 이 충무공을 우러르며 그리워했기에 그 마음을 이처럼 시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박종평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내었다. 위에서 언급한 박종경이 쌍룡검을 얻었다는 시점과 거의 멀지 않은 시점인 1819년에 이순신의 후손 이호빈(
“충무공에게 한 쌍의 장검이 있어 검면에 자명(自 鳴 )을 새겼다. 하나는 ‘석 자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두려워 떨고(三 尺 誓 天 山河 動 色 , 삼척서천 산하동색)’, 또 하나는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핏빛이 산하를 물들이도다(一 揮掃蕩 血 染 山河 , 일휘소탕 혈염산하)’라고 했다. 지금까지 후손 집에 전해져 오고 있다.”-현충사 소장 장검에 대한 기록.
“이복연은 단석(端 錫 )의 아들로 통제사로서 한 쌍의 장검을 만들었다. 검명은 ‘산과 바다에 맹세한 그 뜻, 충분은 예나 지금이나 같도다(盟 山 誓 海 意 忠 憤 古今 同 )’라고 했다. 모두 이 충무공을 우러르는 뜻이다[5]”- 쌍장검(쌍룡검)에 대한 기록.
아울러 원융검기보다 이전의 기록으로 충무공의 4대손 이홍의(李弘
이러한 증거를 토대로, 박종평은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충무공 이순신이 실전에서 사용했다고 알려진 쌍룡검이라는 검은 사실 이순신의 것이 아니라 그의 후임인 이복연이 이순신을 경모하는 마음에서 그를 기리기 위해 제작했던 것이며 이를 후대에 이순신의 검으로 착각한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박종평에 따르면 이순신과 이복연 모두 아산 지역에 연고가 있고[6], 똑같이 이씨이며[7]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한 전력이 있어서[8] 더욱 착각하기 쉬웠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충무공 이순신이 직접 사용한 검이 아니라고 해서 조선시대의 도검 유물로서의 가치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박종평의 견해대로 지금까지 이순신의 유물인 줄로 믿고 애타게 찾아다녔던 칼이 사실은 병조판서 심상규와 훈련대장 박종경의 오해에서 기인해 이순신의 유물로 잘못 알려진 것이었다고 하면 매우 김이 빠지는 것은 사실이다.
충무공과 관련된 검은 총 8자루로 다음과 같다.
|
이순신 장검 | |
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시 현충사길 126 (염치읍) |
분류 | 유물 / 과학기술 / 무기병기류 / 무기무구류 |
수량/면적 | 2자루 |
지정일자 | |
시대 | 조선시대(1594년) |
현충사에서 보관중인 이순신 장검 2자루. |
三 尺 誓 天 山河 動 色 (석자 검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一 揮掃蕩 血 染 山河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길이가 무려 2m에 육박하는데다 무게중심이 안 맞아서 실전용 검은 아니다. 일단 만들어진 이유부터가 태구련 등을 생포한 뒤에 이들이 대장장이라는 주장을 확인할 겸 제작한 물건이기 때문.
길이 때문에 쌍수도라 칭하는 경우가 꽤 있으나, 그와는 전혀 다른 규격의 물건이다. 참고로 태구련 등은 임진왜란 훨씬 이전에 남해안을 노략질하던 왜구들에게 잡혀가 일본도를 납품하다가 요행으로 탈출한 도검장들이다.# 코등이와 손잡이 장식은 일본도의 양식이고 물고기 꼬리형 자루끝은 명나라 양식으로 꽤나 국제적이고 복합적인 디자인을 자랑한다.[10]
참고로 예전에는 혈조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는데, 누군가 칠한 페인트였다는 것이 뒤늦게 확인되면서 문화재청이 2015년에 벗겨냈다.
본래 보물 326-1호로, 보물 326호 '이순신 유물 일괄'에 포함되어 있던 유물이었지만, 2023년 국보로 승격이 결정되어 8월 24일 국보로 등록되었다.
길이 때문에 쌍수도라 칭하는 경우가 꽤 있으나, 그와는 전혀 다른 규격의 물건이다. 참고로 태구련 등은 임진왜란 훨씬 이전에 남해안을 노략질하던 왜구들에게 잡혀가 일본도를 납품하다가 요행으로 탈출한 도검장들이다.# 코등이와 손잡이 장식은 일본도의 양식이고 물고기 꼬리형 자루끝은 명나라 양식으로 꽤나 국제적이고 복합적인 디자인을 자랑한다.[10]
참고로 예전에는 혈조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는데, 누군가 칠한 페인트였다는 것이 뒤늦게 확인되면서 문화재청이 2015년에 벗겨냈다.
본래 보물 326-1호로, 보물 326호 '이순신 유물 일괄'에 포함되어 있던 유물이었지만, 2023년 국보로 승격이 결정되어 8월 24일 국보로 등록되었다.
[1] 조선 후기 무기개설서 융원필비의 저자이자 순조의 외숙부이기도 하다.[2] 조선 말기, 왕실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던 관청.[3] 처음으로 시사만화가 실린 신문이다.[4] 아산의 다른 이름이 아주이다.[5] 李 復 淵 端 錫 也 以統制 使 鑄 一雙 長劍 銘 曰 "盟 山 誓 海 意 忠 憤 古今 同 " 蓋 慕李 忠武 之 意 也[6] 이순신은 아산이 외가였고, 이복연은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아산에서 살았다.[7] 다만 이복연은 전주 이씨다.[8] 이순신은 초대와 3대, 이복연은 99대[9] 검 하나에 8자씩 새겨져 있다.[10] 조선 시대에는 군용 도검을 모조리 환도라고 불렀으므로 조선인인 태구련이 만든 이 검 또한 엄연히 환도에 해당한다. 애초에 환도의 원류인 환두대도부터 사르마티아와 한나라의 영향을 받는 등 여러 국적의 디자인이 복합적으로 섞인 결과물이다.[11] 충무공 사후에 명나라에서 보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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