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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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원소군의 참군사로 시작했다. 풍문을 흘리는 적의 계책을 족족 밝혀내어 예방을 하고, 교역을 하는 척하면서 적을 이간시켜 토벌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위군태수까지 오른다. 그러나 그의 동생 동방(董 訪 )이 장막 휘하에 있어, 원소와 장막의 사이가 나빠지자 원소는 동소를 죽일 생각을 한다. 그때 동소는 헌제를 보러 하내까지 갔다가 장양에게 붙잡혀 항복한다.
194년, 헌제가 이각, 곽사에게서 도망칠 때 양표가 조조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연주에 있던 조조는 하내 일대를 지나가게 해달라고 장양에게 요청한다. 여기서 동소는,
194년, 헌제가 이각, 곽사에게서 도망칠 때 양표가 조조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연주에 있던 조조는 하내 일대를 지나가게 해달라고 장양에게 요청한다. 여기서 동소는,
조조가 지금은 약해 보일지 몰라도, 원소와는 비교도 안 될 천하의 영웅이므로 그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친해져야 합니다. 천자를 구하러 가는 조조가 우리를 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길을 내주어 영원한 친분을 쌓아야 합니다.
라고 하여 장양은 조조에게 길을 내줬고, 조조는 결국 천자를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196년에 양봉, 한섬, 동승, 장양의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 조조는 동소의 계책에 따라 허창으로 천도를 하게 되며[1], 양봉과 한섬의 군대도 동소의 계책으로 박살나 원술에게 의지하러 간다.
198년에는 장양이 부하 양추에게 죽자 성을 지키던 설홍과 무상을 설득해 하내를 들어다 조조에게 바치고 그 공으로 기주목이 되었으며, 유비가 원술을 막으러 갈 때 유비를 보내면 안 된다고 말했다. 조조는 이미 보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고, 결국 유비는 차주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조는 후회하면서 유비를 처리하라며 동소를 서주목에 임명한다.
200년에는 위군태수가 되어 백마에서 동소의 군이 안량과 싸워 관우가 안량을 벨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며, 안량이 죽고 난 후 업성을 포위할 때 원소의 동족 원춘경을 위군태수로 임명하였고, 원춘경은 성안에 있었다. 그의 부친 원원장이 양주(
211년에는 마땅히 옛 제도를 고쳐서 다섯 등급의 작위제를 부활시켜 봉해야 한다고 했고 조조가 번국(
《헌제춘추》에 따르면 동소는 조조의 권력이 한 왕실의 권력을 능가하는 것에 반대한 순욱에게 '조조는 갖은 고생으로 지난 30년 동안 여러 흉적들을 베어 버렸고 이는 백성들에게 해악이 되는 것들을 없애고, 한왕실을 다시 존속시켜 유씨가 제사를 받들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더며 지금 여러 장수들과 공신들을 하나의 현을 차지하는 제후로 봉하고자 하니 이는 천하가 바라는 일'이라고 편지를 보냈다.
219년에는 손권이 비밀동맹을 맺자고 하자 "손권 쪽에는 비밀인 것처럼 하되 우리가 이 일을 널리 알리면 관우가 스스로 군대를 돌려 조인에 대한 포위가 풀릴 것이고 관우가 죽은 것을 오나라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라고 하여 그 계책대로 하니, 손권은 관우를 배신하여 뒤치기를 한 셈이 되고 그걸 또 서황의 군대로 그 뒤를 후리니 관우는 결국 사로잡히게 되었다.
관우가 조인(曹仁)을 번성에서 포위하자, 손권은 사자를 파견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저는 군대를 서쪽 위로 보내어 몰래 관우를 습격하려고 합니다. 강릉(江 陵 )과 공안(公安 )의 요충지는 겹겹이 이어져 있으므로, 관우는 두 성을 잃게 되면 반드시 멀리 달아나게 될 것이고, 번성의 귀군(貴 軍 )의 포위는 구원하지 않아도 스스로 해결될 것입니다. 이 일은 비밀을 구하니 장군께서는 누설하여 관우가 방비를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태조(조조)가 이 말을 듣고 모든 신하들에게 물어보니, 신하들은 한결같이 그것을 비밀에 부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러나 동소는 말했다.
"군사(軍事 )는 임기응변을 숭상하므로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합리적이고 마땅함을 기약해야 합니다. 마땅히 손권에게는 비밀로써 호응하면서 속으로는 그것을 누설해야 합니다. 관우가 손권이 서쪽으로 온다는 것을 듣고 군사를 돌려 스스로를 보호하게 된다면, 번성의 포위는 속히 제거 될 것이므로, 우리 군은 곧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오나라와 촉나라 두 적이 서로 대치하게 하여 앉아서 피폐함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만일 비밀로 하고 누설하지 않으면 손권으로 하여금 뜻을 얻게 하는 것이 되니, 계책 중에서 상책(上策 )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포위망 속에 있는 장수와 관리들은 구원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매일 같이 곡식의 양을 계산하면서 두려워할 것이며, 만일 다른 뜻을 품기라도 하면, 위험스럽게 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일은 누설하는 것이 이롭습니다. 게다가 관우는 사람됨이 비교적 정직하여, 스스로 두 성을 믿고 굳게 지킬 것이며, 재빨리 퇴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태조가 말했다.
"좋소."
즉시 칙령을 내려 번성을 구할 장수 서황(徐 皇 )에게 손권의 서신을 포위된 번성과 관우가 주둔해 있는 가운데로 쏘게 하였다. 포위된 조군(曹軍)은 이 소식을 듣고는 사기가 백배가 되었다. 관우는 과연 마음속으로 주저주저하면서 퇴각하지 않았다. 손권의 군대가 도착하여 그 두 성을 취해 버리자, 관우는 곧 산산이 무너졌다.동소전
221년에 식읍 8백 호를 받고 시중으로 가게 된다.[2] 222년에 정동대장군(
제가 보건대, 폐하께서 근심하는 기색이 있는 것이 단지 조휴가 강을 건너려는 것 때문입니까? 지금 강을 건너는 것은 인정(人情 )으로 보아도 어려운 것입니다.(중략) 신은 폐하께서 그들에게 강을 건너게 하는 조칙을 내리셔도 그들이 반드시 주저하면서 즉시 명에 따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 후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폭풍이 오군의 배에 불어 닥쳐 모두 조휴 등의 군영 곁으로 흘러왔다. 위군은 적을 죽이고 사로잡아 붕괴시켰다. 조비는 군사들에게 조서를 내려 급히 강을 건너게 했다. 군대가 이때 아직 강을 건너 나아가지 않았는데, 오군의 구원병과 배가 도착했다.
222년, 하후상이 강릉을 공격하면서 부교를 이용해 삼각주에 기병을 주둔시켰는데, 동소는 조조도 적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며 설령 마땅히 깊이 들어갔다 해도 돌아오는 길은 비교적 편리해야 하는데 군대가 삼각주에 주둔하는 것은 주위가 모두 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는 것이고, 부교로써 건너려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며, 한 길로 가려는 것은 지극히 협소한 것이라 잘못 싸우면 이들은 오나라에 항복할 것이고 또 그랬다가 홍수가 일어나면 위험하다고 하여 이를 억지로 물러나게 했다. 하후상의 기병들이 퇴각하다가 적에게 습격까지 당해 많은 군사들을 잃게 되자 사람들은 동소를 원망하였으나 열흘 후 강이 범람해 삼각주가 물에 잠기자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동소를 찬양하기 시작하였다. 조비는 장량과 진평도 이보다 더할수 없다고 하였다.
224년에는 성도향후, 태상이 되었고 또 광록대부, 급시중으로 직위가 옮겨졌다. 조비를 따라 동쪽 정벌에 나갔다가 226년에 돌아와 태복이 되었다가 조예가 즉위하자 악평후, 위위가 되었으며, 232년에는 사도가 되었다. 동소는 상소하여 말류(
그는 이런 부류의 사람 중에서 가까이로는 위풍이 건안 말기에 처형되었으며, 조위(曹偉)가 황초 초에 참혹하게 처형되었는데 지금 젊은 사람들은 다시 학문을 근본으로 삼으려 하지 않고, 태도를 바꾸어 서로 교유하는 것을 전업으로 삼으려 하고 있으며 권세에 따라 놀고 이익이나 추구하는 사람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고 했고 도당을 만들고 무리를 연합하여 서로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훼방하고 비난으로써 형벌과 살육을 삼고 우리들이 하는 일을 찬미하여 작위와 상으로 삼으며, 자신에게 아부하는 자에게는 그를 찬미하는 말을 가득히 하며, 자신에게 아부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자와 틈을 만든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그의 노비와 식객을 '재직가인(
조예는 이에 말류의 우두머리인 제갈탄과 등양 등을 배척하여 파면시켰다. 236년, 81살의 나이로 죽었으며 시호를 정후(
동진시기 지인소설 어림에 따르면 동소는 위무제(조조)의 중신이었으나 나중에 권세를 잃었다. 문제(조비), 명제(조예) 시대에 조정으로 들어다 위위가 되었다. 동소는 궁중 광대들을 후하게 생각해 주었다. 정월 초하루 큰 조회에서 광대가 동위위(동소)의 우는 얼굴을 흉내 내면서 옛날 태조(조조) 때의 일을 이야기했더니 온 좌중이 크게 웃었다. 명제(조예)는 슬퍼하며 기뻐하지 않았으며, 한 달 안에 동소를 사도로 삼았다.
본전에서는 이렇다 할 흠이 나오지 않지만, 소칙의 무릎을 베려 했다가 소칙에게 “내 무릎은 아첨하는 사람의 베개가 아니오.”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진수의 《삼국지》 중 <소칙전>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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