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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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에 산기시랑이 되었고, 기민하고 농담을 잘해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다고 한다.
228년에 제갈량이 기산으로 진군했을 때 조예가 직접 나서려고 하자 종육은 다음과 같은 말로 조예를 말린다.
228년에 제갈량이 기산으로 진군했을 때 조예가 직접 나서려고 하자 종육은 다음과 같은 말로 조예를 말린다.
대체로 책략은 직접 전투를 하지 않고 조정에서 세운 계략만으로도 승리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며, 전공은 장막에서 세우는 것을 숭상합니다. 전당 위에서 내려가지 않고도 천리 바깥의 승리를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가가 중앙을 지키고 있어야 사방을 그 위세로 지원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대군이 서쪽으로 원정에 나선다면 비록 위세는 백배로 강해지겠지만, 관중의 비용이 증가되어 손실을 입는 것이 하나가 아닐 것입니다. 또 더운 날씨에 행군을 하는 것은 시인에게는 소중한 소재가 되겠지만 천하의 지존으로서는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이후 황문시랑으로 직책을 옮기고 조예가 온갖 공사를 지어 백성들이 힘들어지니 종육은,
수해나 가뭄으로 들지 않았을 때에도 창고는 텅텅 비어야 합니다. 대체로 이러한 일은 풍년에가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은 마땅히 관내의 황무지를 개간해 백성들이 농사에 전념하도록 해야 합니다.
라고 하니 조예가 그의 말을 따랐다고 한다.
239년에 조방이 즉위하자 산기상시으로 임명되어 정시 연간(240년 ~ 249년)에는 호소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추천했다. 244년에 조상이 촉을 공격하고 여의치 않아 구원군을 요청하자 종육은 조상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239년에 조방이 즉위하자 산기상시으로 임명되어 정시 연간(240년 ~ 249년)에는 호소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추천했다. 244년에 조상이 촉을 공격하고 여의치 않아 구원군을 요청하자 종육은 조상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묘승지책(廟 勝之 策 )이란 화살과 돌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왕자의 군대는 정벌에 나서도 전투를 하지 않습니다. 방패나 도끼로 유주목 묘증을 굴복시킬 수가 있었지만 물러나서 적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면 오한을 강관에 풀어놓고 한신을 정형으로 초빙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능하면 진격하고, 어려우면 물러나는 것이 예로부터 당연한 병법이었습니다. 공후께서는 이러한 점을 잘 살피십시오.
조상이 아무런 전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니 종육은 이 일로 미움을 사 시중으로 좌천되었다가 위군태수로 밀려났으며, 249년에 조상이 죽자 중앙으로 돌아와 어사중승, 시중, 정위 등으로 승진한다.
《태평어람》에 따르면 맹달을 상서였던 종육이 신성태수로 부임하는 주태한테 넌 미천한 출신이 뭐가 그리 출세를 빨리 하냐고 농담을 걸었다. 사마의가 신성태수로 부임하는 주태를 놀리라고 시킨거긴 하고 주태도 재치있게 '그러는 넌 아버지가 쩔면서 승진은 왜 못하냐?' 로 받아친다. 《세어》의 내용인데 여기서는 상서 종요라고 나와 있으나 종요는 이미 죽었고 태평어람에는 종육이라고 나와 있다.
대화의 시점이나 제반 정황으로 볼 때 저 대화의 주체가, 태위를 거쳐 226년 이래 태부를 지내다 230년에 죽은 조위의 최고위급 인사인 종요일 수는 없으니 오류임이 분명하다. 《삼국지집해》에 소개된 설들처럼 종육 아니면 종회의 와전으로 보이는데, 주태의 신성태수 임명 및 위의 대화가 이루어진 시점을 언제로 보는 지가 핵심 관건이다. 주태가 맹달의 반란(227년 ~228년) 이후에 사마의에 의해 벽소되고 도합 9년의 거상을 거쳤지만 부친, 모친, 조부가 주태가 벽소되자마자 딱딱 3년 간격으로 죽었을 것으로 보는건 너무 무리한 추정이므로 실제 소요된 총시간은 좀더 길게 잡아야하고 노필의 설처럼 청룡 연간으로 보는건 너무 이르다. 또한 만약 청룡 연간으로 본다면 225년생으로 당시 10살 전후인 종회는 아닌 것이 된다. 참고로 종회는 제왕 정시 연간에 비서랑으로 관직을 시작한다. 제왕 때인 250년(가평 2년,삼국지 왕창전), 251년(가평 3년, 삼국지 삼소제기)에 '신성태수 주태'라는 기록이 있는 걸 볼 때 이 시기가 하한이 될 것인데, 진경운의 설처럼 대략 제왕 초(대략 240년대 초중반)로 보는게 적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종육은 산기시랑 또는 산기상시였고 종회는 비서랑 또는 상서랑이었다. 둘 다 가능하지만 태평어람의 기록이 있으니 종육 쪽이 더 가능성이 큰 듯하고, 세어에서 '상서'로 표기한 것은 하작의 설처럼 뒤에 역임한 관직으로 칭한 것으로서 서술하는 사건의 시점과는 맞지 않다. 만약 종회가 맞는 것으로 본다면 이건 '상서랑'의 오기가 된다. 여기서는 태평어람에 따라 종육의 일화로 기록한다.
254년에 하후현 일당이 사마사의 암살을 꾀하다가 붙잡히자 종육이 하후현을 심문한 뒤 형의 집행을 했으며, 255년에 관구검의 반란 때는 지절을 들고 양주와 예주로 가서 사면령을 반포해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돌아와 상서로 임명되었다. 257년에 제갈탄의 반란 때는 사마소와 함께 계책을 논의했으며, 손일이 항복하자 다른 이들은 모두 오나라가 이 일로 큰 피해를 입어 더이상 구원을 보내지 못할 것이라 했지만, 종육은 손일이 이끌고 온 병사가 300명에 불과하니 수춘의 포위를 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 258년에 제갈탄의 난이 평정되자 종육은 청주자사, 후장군이 되었다가 259년 4월에 서주도독에 봉해져 서주의 군사를 총괄한다.
263년 겨울에 사망해 시호는 혜후라 했으며, 아들 종준이 뒤를 이었지만 동생 종회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해 조문을 가지 못했다고 한다.
하후혜와 논쟁을 많이 했지만 하후혜의 견해가 채택되는 일이 많았다고 하며, 관로와의 일화도 전해진다.
《세설신어》에는 어려서부터 동생 종회와 함께 명성이 있어 조비가 찾아오자 종육은 무섭고 떨려 식은 땀이 비오듯 흐르는데, 조비가 어찌 땀이 흐르냐고 묻자 두렵고 황공해 땀이 국물처럼 흐른다고 대답했다. 종회는 그대는 어찌 땀이 흐르지 않냐고 하자 두렵고 떨려서 감히 땀이 나오지 않는다고 대답했다.[2]
또한 아버지가 낮잠을 자는 틈을 타서 종회와 함께 술을 마셨는데, 종육은 배례하고 마셨지만 종회는 마시면서 배례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아버지 종요가 왜 배례했냐고 하자 종육은 술을 마시는 것은 그것으로써 예가 되기 때문에 감히 배례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지만 종회는 왜 배례하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훔치는 것은 본래 예가 아니기 때문에 배례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태평어람》에 따르면 맹달을 상서였던 종육이 신성태수로 부임하는 주태한테 넌 미천한 출신이 뭐가 그리 출세를 빨리 하냐고 농담을 걸었다. 사마의가 신성태수로 부임하는 주태를 놀리라고 시킨거긴 하고 주태도 재치있게 '그러는 넌 아버지가 쩔면서 승진은 왜 못하냐?' 로 받아친다. 《세어》의 내용인데 여기서는 상서 종요라고 나와 있으나 종요는 이미 죽었고 태평어람에는 종육이라고 나와 있다.
대화의 시점이나 제반 정황으로 볼 때 저 대화의 주체가, 태위를 거쳐 226년 이래 태부를 지내다 230년에 죽은 조위의 최고위급 인사인 종요일 수는 없으니 오류임이 분명하다. 《삼국지집해》에 소개된 설들처럼 종육 아니면 종회의 와전으로 보이는데, 주태의 신성태수 임명 및 위의 대화가 이루어진 시점을 언제로 보는 지가 핵심 관건이다. 주태가 맹달의 반란(227년 ~228년) 이후에 사마의에 의해 벽소되고 도합 9년의 거상을 거쳤지만 부친, 모친, 조부가 주태가 벽소되자마자 딱딱 3년 간격으로 죽었을 것으로 보는건 너무 무리한 추정이므로 실제 소요된 총시간은 좀더 길게 잡아야하고 노필의 설처럼 청룡 연간으로 보는건 너무 이르다. 또한 만약 청룡 연간으로 본다면 225년생으로 당시 10살 전후인 종회는 아닌 것이 된다. 참고로 종회는 제왕 정시 연간에 비서랑으로 관직을 시작한다. 제왕 때인 250년(가평 2년,삼국지 왕창전), 251년(가평 3년, 삼국지 삼소제기)에 '신성태수 주태'라는 기록이 있는 걸 볼 때 이 시기가 하한이 될 것인데, 진경운의 설처럼 대략 제왕 초(대략 240년대 초중반)로 보는게 적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종육은 산기시랑 또는 산기상시였고 종회는 비서랑 또는 상서랑이었다. 둘 다 가능하지만 태평어람의 기록이 있으니 종육 쪽이 더 가능성이 큰 듯하고, 세어에서 '상서'로 표기한 것은 하작의 설처럼 뒤에 역임한 관직으로 칭한 것으로서 서술하는 사건의 시점과는 맞지 않다. 만약 종회가 맞는 것으로 본다면 이건 '상서랑'의 오기가 된다. 여기서는 태평어람에 따라 종육의 일화로 기록한다.
254년에 하후현 일당이 사마사의 암살을 꾀하다가 붙잡히자 종육이 하후현을 심문한 뒤 형의 집행을 했으며, 255년에 관구검의 반란 때는 지절을 들고 양주와 예주로 가서 사면령을 반포해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돌아와 상서로 임명되었다. 257년에 제갈탄의 반란 때는 사마소와 함께 계책을 논의했으며, 손일이 항복하자 다른 이들은 모두 오나라가 이 일로 큰 피해를 입어 더이상 구원을 보내지 못할 것이라 했지만, 종육은 손일이 이끌고 온 병사가 300명에 불과하니 수춘의 포위를 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 258년에 제갈탄의 난이 평정되자 종육은 청주자사, 후장군이 되었다가 259년 4월에 서주도독에 봉해져 서주의 군사를 총괄한다.
263년 겨울에 사망해 시호는 혜후라 했으며, 아들 종준이 뒤를 이었지만 동생 종회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해 조문을 가지 못했다고 한다.
하후혜와 논쟁을 많이 했지만 하후혜의 견해가 채택되는 일이 많았다고 하며, 관로와의 일화도 전해진다.
《세설신어》에는 어려서부터 동생 종회와 함께 명성이 있어 조비가 찾아오자 종육은 무섭고 떨려 식은 땀이 비오듯 흐르는데, 조비가 어찌 땀이 흐르냐고 묻자 두렵고 황공해 땀이 국물처럼 흐른다고 대답했다. 종회는 그대는 어찌 땀이 흐르지 않냐고 하자 두렵고 떨려서 감히 땀이 나오지 않는다고 대답했다.[2]
또한 아버지가 낮잠을 자는 틈을 타서 종회와 함께 술을 마셨는데, 종육은 배례하고 마셨지만 종회는 마시면서 배례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아버지 종요가 왜 배례했냐고 하자 종육은 술을 마시는 것은 그것으로써 예가 되기 때문에 감히 배례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지만 종회는 왜 배례하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훔치는 것은 본래 예가 아니기 때문에 배례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세설신어》에 나온 조비를 만난 이야기가 그대로 나온다. 하지만 종회는 225년에 태어났고 조비는 226년에 죽었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종회는 2세에 말도 하고 저런 말을 할 정도로 식견이 있다는 것이 되는데, 《세설신어》의 성격으로 볼 때 사실일 가능성은 적다. 그러나 조비가 아닌 그의 아들 조예라면 사실일 가능성도 있다.
《세설신어》에는 종육이 동생인 종회보다 한 살 많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228년에 조예에게 간언을 한 점을 보면 아마도 종육은 이때 이미 관직에 있었을 것이고, 14세에 처음으로 관직에 올랐다는 점을 보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종회보다 진짜 한 살 많았으면 고작 한국 나이로 5세에 한 나라의 황제에게 요지있는 설득을 한 것이 되므로 신빙성이 없다.[3]
《세설신어》에는 종육이 동생인 종회보다 한 살 많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228년에 조예에게 간언을 한 점을 보면 아마도 종육은 이때 이미 관직에 있었을 것이고, 14세에 처음으로 관직에 올랐다는 점을 보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종회보다 진짜 한 살 많았으면 고작 한국 나이로 5세에 한 나라의 황제에게 요지있는 설득을 한 것이 되므로 신빙성이 없다.[3]
삼국지 9, 10, 11 |
삼국지 13, 14 |
평범한 문관. 동생인 종회와 많이 비교된다. 조예 대(재위 226~239)에 이미 관직에 있었고 동생 종회는 유명한 늦둥이인데다 이복형제라 나이차도 많을 텐데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223년 생으로 설정 되어서 동생 종회 만큼이나 주요 시나리오에서 얼굴 보기 어려운 편. 생년도 말고도 코에이가 세설신어를 참고해서 종육을 만든 게 확실한 것이 종육의 열전에는 위 세설신어에 있는 '땀이 비오듯 흐른다'는 부분이 꼭 들어가 있다.
삼국지 9에서 처음으로 등장했으며, 통솔력 26/무력 13/지력 70/정치력 74의 능력치를 가진 문관이다. 병법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조영, 배반, 고무를 가지고 있어 나름 쓸만하다.
삼국지 10에선 223년 생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솔력 27/무력 11/지력 71/정치력 74/매력 70에 아버지와 동생을 잘 둬서 짤리지도 않고 명사 특기까지 가지고 있다. 나머지 특기는 농업으로 그나마 정치가 74라 특기를 살릴 수 있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2/무력 12/지력 71/정치력 76/매력 72의 전형적인 문관형에 특기 기원을 소유하고 있다. 238년 등장이라 종회와 마찬가지로 사실 시나리오에서는 얼굴 구경할 일이 별로 없고, 가상 시나리오에서는 특기 덕에 영입 순위가 약간 높다.
삼국지 12에서는 짤렸다가 삼국지 13에서 복귀했는데 능력치는 매력만 빠진 상태에서 전작과 같으며 특기는 상업 1, 설파 2. 전수특기는 설파이며 전법은 기속강화.
삼국지 14에서는 통솔 32, 무력 12, 지력 71, 정치 75, 매력 70으로 전작에 비해 정치력이 1 하락했다. 개성은 위무, 주의는 예교, 정책은 병참개혁 Lv 3, 진형은 방원, 전법은 고무, 치료, 친애무장과 혐오무장은 모두 없다.
아버지인 종요가 최유기의 현장 삼장으로 패러디 되었기 때문에 전생인 금선 동자로 등장한다. 광명 삼장으로 착각할 수도 있으나 광명 삼장이라기엔 눈매가 다르며 꽁지머리도 없다. 거기다 장집 역시 아버지인 장기의 패러디인 저팔계의 전생인 천봉원수로 등장했으니 금선으로 보는게 확실할 듯. 전투외편 6-1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 세설신어에는 종회와 1살 차이라고 기술돼 있으나 그리 생각하면 오로치 출세에만 핀트가 맞춰진 종회보다도 빠른 출세가 이해되지 않는다며 소개컷에서 이를 부정하는 의견을 서술하기도 했다.
적도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이풍의 난 시점(254년) 기준 정위였으며 이풍의 난이 발각된 이후 난에 연루된 하후현을 직접 심문하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종육은 하후현에게 죄를 인정하라고 했지만 하후현은 정위[5]가 직접 나섰다는 것은 어차피 죄를 부여할 생각이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담담히 죽음을 선택했다.
전투외편 6편에서는 가충이 정위에 임명될 때 언급된다. 정위는 이전 종육이 역임했던 직책인데, 종육 본인은 청주자사 겸 후장군으로 승진해서 청주로 갔다고 언급됐다.
적도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이풍의 난 시점(254년) 기준 정위였으며 이풍의 난이 발각된 이후 난에 연루된 하후현을 직접 심문하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종육은 하후현에게 죄를 인정하라고 했지만 하후현은 정위[5]가 직접 나섰다는 것은 어차피 죄를 부여할 생각이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담담히 죽음을 선택했다.
전투외편 6편에서는 가충이 정위에 임명될 때 언급된다. 정위는 이전 종육이 역임했던 직책인데, 종육 본인은 청주자사 겸 후장군으로 승진해서 청주로 갔다고 언급됐다.
[1] 자에 '숙(叔)' 자가 들어가는 것을 보아, 4남 중 3남인 것 같다.[2] 이 기록 자체가 사실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조비가 죽을 때 종회는 고작 2살이였기 때문. 조예라면 어느 정도 말이 된다.[3] 삼국전투기에서도 만약에 종회와 고작 1살 차이였으면 출세에 중심을 맞췄으며 실제로 승진속도가 매우 빨랐던 종회보다도 승진이 빠른 셈이라며 회의적으로 보았다. 중국 위키백과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종육의 생년을 210년대로 서술하였다.[4] 어차피 사망년이 정해져 있는 인물이라면 생일이 빠른 게 이익이다. 관례를 하는 15세 이후로 조금이라도 더 활약할 가능성이 높고 나이가 들면 능력치가 오르는 몇몇 시리즈에서 높은 능력치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5] 현대로 치면 교도소장 겸 수사반장이라고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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