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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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안산시
안산시 행정구역 변천사(현재의 안산시 기준) | ||||||||
1914 → | 1986 → | |||||||
경기도 안산군 군내면( | ||||||||
1906 → | 안산군 북방면 일부·성곶면·월곡면 사사리 | 1949 → | ||||||
1973 → | 1994 → |
삼한(마한) 영역 중 한 국가였다가 이후 백제에 의해 정벌되었다. 삼국시대 전기에는 백제 땅이었으며, 고구려 장수왕이 빼앗아 고구려 시대에 '장항구현(獐項口 縣 )' 또는 '고사야홀차현(古 斯也忽 次 縣 )'이라 불렀다. 위쪽으로는 매소홀(미추홀)현[1], 북동부 경계 일부는 잉벌노현[2]과 접했다. 진흥왕 때 신라 땅이 된 이후 진덕여왕이 장구현(獐口縣 )으로 고쳤고 통일신라에서 9주 5소경 중 한주에 속했고 신문왕 때 장구군(獐口郡 )으로 승격되었다. 오늘날에도 안산읍치가 있었던 곳인 행정동 안산동 관할 법정동인 장상동(獐上洞 )과 장하동(獐下洞 )이라는 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
쭉 안산군이었다. 시흥시 연성동의 '연성(蓮 城 )'은 조선 시대 안산군의 별칭으로, 강희맹이 조성한 관곡지의 연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당시 범위는 지금의 시흥시 남부와 안산시 중서부 일대만 해당되었다. 상록구 동부는 광주 지역이었고, 대부도 일대는 남양 지역이었다.
1441년 목내동에 현덕왕후의 능인 소릉이 들어서면서 읍치가 수암동으로 이전되었다.[4][5] 진산(鎭山)은 수리산 근처에 있는 수암봉이었다.
1656년 초지동에 위치한 별망성에 있던 초지진이 현재 위치인 강화도로 이전했다.
1894년 제1차 중일전쟁때 풍도동에서 청나라와 일본 제국간에 전투가 있었다 (풍도 해전)
1906년 광주군 북방면[6]·성곶면[7]·월곡면[8]을 편입하였다.
당시 범위는 지금의 시흥시 남부와 안산시 중서부 일대만 해당되었다. 상록구 동부는 광주 지역이었고, 대부도 일대는 남양 지역이었다.
1441년 목내동에 현덕왕후의 능인 소릉이 들어서면서 읍치가 수암동으로 이전되었다.[4][5] 진산(鎭山)은 수리산 근처에 있는 수암봉이었다.
1656년 초지동에 위치한 별망성에 있던 초지진이 현재 위치인 강화도로 이전했다.
1894년 제1차 중일전쟁때 풍도동에서 청나라와 일본 제국간에 전투가 있었다 (풍도 해전)
1906년 광주군 북방면[6]·성곶면[7]·월곡면[8]을 편입하였다.
1912년 2월 이전 | 1912년 2월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 부군면 통폐합 직후 | 현재 법정구역 | ||
대월면 | |||||
대월면 선부동( | 대월면 선부리() | 시흥군 군자면 선부리() | |||
마유면 | 시흥군 군자면 장현리 | 시흥시 장현동 | |||
마유면 장하리( | 마유면 | 시흥군 군자면 장곡리 | |||
마유면 | 마유면 | 시흥군 군자면 월곶리 | |||
마유면 | 마유면 정왕리 | 시흥군 군자면 정왕리 | 시흥시 | ||
마유면 대암이( | 마유면 죽률리 | 시흥군 군자면 죽율리 | 마유면 구정리( | 시흥군 군자면 군자리( | |
와리면 | 시흥군 군자면 초지리 | ||||
와리면 원상리( | 시흥군 군자면 원곡리( | ||||
와리면 선곡리( | 와리면 | 시흥군 군자면 신길리 | |||
와리면 성두리( | 시흥군 군자면 성곡리( | ||||
와리면 이목동( | 시흥군 군자면 목내리( | ||||
와리면 원하리( | 시흥군 군자면 원시리( | ||||
군내면 수암리 | |||||
군내면 장상리( | 군내면 장상리 | 시흥군 수암면 장상리 | 안산시 구 장상동 | ||
군내면 부곡리( | 군내면 부곡리 | 시흥군 수암면 부곡리 | 시 부곡동 | ||
군내면 양상리(楊上 | 시흥군 수암면 양상리 | ||||
군내면 소리개( | 군내면 성포리 | 시흥군 수암면 성포리 | |||
군내면 장하리( | 시흥군 수암면 장하리 | ||||
능말( | 인화면 능곡리 | 시흥군 수암면 능곡리 | 시흥시 능곡동 | ||
인화면 화정리( | 시흥군 수암면 화정리 | ||||
인화면 와상리( | 시흥군 수암면 와리( | ||||
인화면 고잔말( | 인화면 고잔리 | 시흥군 수암면 고잔리 | |||
인화면 다리피 | 인화면 | 시흥군 수암면 월피리 | |||
초산면 조남리 | 시흥군 수암면 조남리 | ||||
초산면 목감리( | 시흥군 수암면 목감리 | ||||
초산면 물왕리( | 시흥군 수암면 물왕리 | ||||
초산면 산현리( | 시흥군 수암면 산현리 | ||||
초산면 하상리( | 시흥군 수암면 하상리 | ||||
초산면 광석리( | 시흥군 수암면 광석리 | ||||
초산면 논곡리( | 시흥군 수암면 논곡리 | ||||
초산면 하중리( | 시흥군 수암면 하중리 | ||||
북방면 대야미리 | 수원군 | ||||
북방면 속달이리( | 북방면 | 수원군 반월면 속달리 | |||
북방면 둔데( | 북방면 | 수원군 반월면 둔대리 | |||
북방면 도마다리( | 북방면 | 수원군 반월면 도마교리 | |||
북방면 건건리( | 수원군 반월면 건건리 | ||||
북방면 팔곡일리( | 수원군 반월면 팔곡일리 | ||||
북방면 팔곡이리( | 수원군 반월면 팔곡이리 | ||||
소리웃면( | 소리웃면 일리 | 수원군 반월면 일리 | |||
소리웃면 이리( | 수원군 반월면 이리 | ||||
소리웃면 삼리( | 수원군 반월면 사리 | ||||
소리웃면 본오리( | 소리웃면 본오리 | 수원군 반월면 본오리 | |||
월곡면 사사리 | 수원군 반월면 사사리 | ||||
월곡면 당수리(棠樹 | 수원군 반월면 당수리 | ||||
월곡면 상초평리( | 월곡면 | 수원군 반월면 초평리 | [[의왕시| | ||
월곡면 월암동( | 월곡면 월암리 | 수원군 반월면 월암리 | |||
월곡면 갓됫말( | 월곡면 입북리 | 수원군 반월면 입북리 |
조선총독부가 1912년 2월 5일에 동리통폐합을, 1914년에 부군면 통폐합을 단행하며 시흥군과 수원군에 분할 통합되어 군이 사라졌다. 9개면이 시흥군 수암면, 군자면 및 수원군 반월면 3개면으로 합쳐졌다.
시흥군 군자면 | 시흥군 수암면 | 수원군 반월면 | 현재 안산시 |
현재 법정구역을 토대로 제작한 폐군되기 직전 안산군역도로 이건 현재 안산시가 시흥시와 통합을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다. 계속적인 간척으로 인해 적색과 청색에 해당하는 영역이 당시보다 더 크게 나왔다는 점에 유의바람.
도시개발 이전에는 한적한 농어촌이었다. 1990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지금의 중앙역 남부는 모두 갯벌이었고 배가 드나드는 포구였다. 지금 지도상으론 한참 육지 쪽으로 들어가있는 성포동이라는 지명에도 포(浦 )라는 글자가 있을 정도. 대규모 간척과 시화방조제의 건설로 지금은 안산 본토에서 해안 마을의 기능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대부도와 풍도 등 도서 지역에서만 그 기능을 수행할 뿐이다. 안산 본토에 접한 수역은 시화방조제로 인해 시화호가 되었다. 시화호는 1990년대 중반까지 전국적으로 악명 높은 환경 오염지대였는데, 1990년대 후반부터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 온 결과 지금은 철새가 드나드는 관광지가 되었다.
안산선 남쪽으로는 1990년대 후반까지도 소를 키우는 농가를 볼 수 있었을 정도로 시골이었다. 이후 안산이 개발되면서 이 지역은 주택가와 공단으로 변했다. 동시에 상업 중심지도 지금의 원곡동과 초지동 근방에서 고잔동으로 완전히 옮겨갔다. 초지동에 가면 그 증거로 1980년대 지어진 건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 때의 전통이 지금도 남아 초지동 시민시장에서는 5일장이 열려 문전성시를 이룬다.
안산선 남쪽으로는 1990년대 후반까지도 소를 키우는 농가를 볼 수 있었을 정도로 시골이었다. 이후 안산이 개발되면서 이 지역은 주택가와 공단으로 변했다. 동시에 상업 중심지도 지금의 원곡동과 초지동 근방에서 고잔동으로 완전히 옮겨갔다. 초지동에 가면 그 증거로 1980년대 지어진 건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 때의 전통이 지금도 남아 초지동 시민시장에서는 5일장이 열려 문전성시를 이룬다.
1985년까지 | 개편 후 행정구역 | 법정구역 | |||||
1986년 1월 1일 | 1988년 10월 1일 | 1991년 11월 18일 | 1993년 12월 1일 | 1994년 1월 1일 | 1994년 7월 15일 | ||
화성군 반월면(일리, 이리) | 반월동 | 일동 | 일동, 이동 | ||||
화성군 반월면(사리) | 본오동 | 사동 | 사동 | ||||
화성군 반월면(본오리 일부, 팔곡이리) | 본오동 | 본오1동 | 본오동 일부, 팔곡이동 | ||||
화성군 반월면(본오리 일부) | 본오2동 | 본오동 일부 | |||||
시흥군 수암면(양상리, 부곡리, 월피리) | 수암동 | 월피동 | 양상동, 부곡동, 월피동 | ||||
시흥군 수암면(와리) | 와동 | 와동 | |||||
시흥군 수암면(성포리) | 중앙동 | 성포동 | 성포동 | ||||
시흥군 수암면(고잔리) | 고잔1동 | 고잔동 | |||||
고잔2동 | |||||||
시흥군 군자면(신길리, 원곡리 일부) | 군자동 | 원곡본동 | 신길동, 원곡동 일부 | ||||
시흥군 군자면(성곡리, 목내리) | 원초동 | 공단동 | 성곡동, 목내동 | ||||
시흥군 군자면(원시리, 초지리) | 초지동 | 원시동, 초지동 | |||||
시흥군 군자면(원곡리 일부) | 원곡동 | 원곡1동 | 원곡동 일부 | ||||
원곡2동 | |||||||
시흥군 군자면(선부리) | 선부동 | 선부1동 | 선부동 | ||||
선부2동 | 선부2동 | ||||||
선부3동 |
시 승격 당시 제정된 1기 로고. 2000년 이후부터는 현재의 2기 로고로 변경되었다.
한적한 바닷가의 시골 마을들이 지금과 같이 탈바꿈하기 시작했을 때는 1976년이었다. 경제 발전에 따라 수도권에 산업이 몰리기 시작하자 이를 흩어놓기 위해 반월국가산업단지를 개발하면서 화성군 반월면 일부, 시흥군 군자면·수암면의 각 일부를 관할하는 경기도 반월도시개발지원사업소가 설치된 것. 기사[10] 3년 뒤 반월도시개발지원사업소는 반월출장소로, 1986년에는 반월출장소가 안산시로 승격하였다. 1914년 사라진 안산군의 정체성이 이때 되살아난 것이다. 시명은 반월공단과 반월출장소에서 따와 '반월시'가 될 뻔했으나, 옛 '안산군'의 역사 되살리기 차원에서 향토사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안산시'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반월'이라 부를 수 있는 지역은 당시 반월출장소 내에서도 일부일 뿐이었고, 반월공단도 당시 반월면이 아닌 군자면에 있었기 때문에, 반월시가 시명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은 적절한 것이었다.
다만 반월출장소의 영향으로 '반월'이란 명칭을 쓰는 경우가 안산시 곳곳에 꽤 찾아볼 수 있으며, 안산시에 오래 거주한 사람들 중에는 간혹 안산시를 '반월'로 통칭하는 경우도 있다. 시흥시와 광명시 거주 향토예비군훈련을 담당하는 반월교장도 안산시에 있다. 이와 반대로 안산농협(수암농협에서 개칭)·군자농협·반월농협의 3개 지역농협이 안산시내에 있는데, 이건 반월출장소 이전 시대의 관성이 남았기 때문이다(시흥시 연성동·목감동까지 안산농협이, 시흥시 군자동·정왕동까지 군자농협이, 군포시 대야동과 수원시 입북동까지 반월농협이 맡고 있는 것도 같은 연유).
1994년 12월 25일까지 | 개편 후 행정구역 | 법정구역 | |||||
1994년 12월 26일 | 1995년 3월 2일 | 1995년 4월 20일 | 1996년 1월 22일 | 1997년 5월 28일 | 1998년 10월 12일 | ||
일동 | 일동, 이동 | ||||||
사동 | 사1동 | 사동 | |||||
사2동 | |||||||
본오1동 | 본오동 일부, 팔곡이동 | ||||||
본오2동 | 본오2동 | 본오동 일부 | |||||
본오3동 | |||||||
월피동 | 부곡동 | 부곡동 일부 | |||||
월피동 | 양상동, 부곡동 일부, 월피동 | ||||||
와동 | 와동 | ||||||
성포동 | 성포동 | ||||||
고잔1동 | 고잔동 | ||||||
고잔2동 | |||||||
원곡본동 | 신길동, 원곡동 일부 | ||||||
공단동 | 초지동 | 성곡동, 목내동 | |||||
초지동 | 원시동, 초지동 | ||||||
원곡1동 | 원곡동 일부 | ||||||
원곡2동 | |||||||
선부1동 | 선부동 | ||||||
선부2동 | |||||||
선부3동 | 선부3동 | 선부동 일부 | |||||
시흥시(화정동 일부) | 화정동 | ||||||
화성군 반월면(팔곡일리, 건건리, 사사리) | 반월동 | 팔곡일동, 건건동, 사사동 | |||||
옹진군 대부면(동리, 남리) | 대부동 | 대부출장소 | 대부동동, 대부남동 | ||||
옹진군 대부면(북리, 선감리, 풍도리) | 대부출장소 | 대부북동, 선감동, 풍도동 | |||||
시흥시(수암동, 장상동, 장하동) | 안산동 | 수암동, 장상동, 장하동 |
1994년 옹진군에서 대부도와 풍도를 1995년 당시 구 삼척군 하장면 전체를 통합하지 않고 4개리만 떼어 사조동으로 편입하면서 도농통합이 무산된 강원도 태백시의 사례처럼, 안산시 대부면이 되지 못하고 대부동으로 편입되는데 그쳐 도농통합시의 대열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 이후로 2000년에 시승격 이후 동으로 있다가 불편을 느끼자 2014년 10월에 읍으로 전환된 남양면 때문인지 2014년부터 2015년 두 차례 대부면으로 전환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찬반이 팽팽해서인지 한동안 감감 무소식이다가 2020년에 들어 재추진 움직임을 보이는 동시에 안산시와 단원구 지역구 국회의원이 도농복합시 관련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발의까지 나서기까지 하여금 안간힘을 쓰고 있고 안산시장도 직접 적극적으로 가세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동이 대부면으로 전환으로 인한 이득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면 전환을 통해 도시계획 변경으로 공장 설립 등이 가능해져 녹지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의견도 있어 주민들간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만 시에서는 적극적으로 전환에 추진중에 있다.[11] 화성군에서 팔곡일리·건건리·사사리를 편입해 왔다. 이듬해인 1995년 시흥시 수암동·장상동·장하동과 화정동 일부를 편입해 오면서 현재의 영역이 확정되었다.[12]
1986년 안산시는 7개 동에 127,231명의 인구가 있었다. 하지만 9년 뒤 안산시의 인구는 약 4배에 달하는 507,952명으로 증가했다. 7개였던 동은 21개가 되었으며 출장소 1개까지 있었다.
2002년 11월 1일 구 설치 당시 행정구역 | 개편 후 행정구역 | 법정구역 | |||||
2003년 3월 3일 | 2004년 7월 1일 | 2005년 4월 20일 | 2007년 2월 22일 | 2017년 7월 1일 | |||
상록구 | 일동 | 일동 | 일동 일부 | ||||
이동 | 일동 일부, 이동 | ||||||
사1동 | 사1동 | 사동 | 사동 | ||||
사3동 | 해양동 | ||||||
사2동 | 사이동 | ||||||
본오1동 | 본오동 일부, 팔곡이동 | ||||||
본오2동 | 본오동 일부 | ||||||
본오3동 | |||||||
부곡동 | 부곡동 일부 | ||||||
월피동 | 양상동, 부곡동 일부, 월피동 | ||||||
성포동 | 성포동 | ||||||
반월동 | 팔곡일동, 건건동, 사사동 | ||||||
안산동 | 수암동, 장상동, 장하동 | ||||||
단원구 | 와동 | 와동 | |||||
고잔1동 | 고잔1동 | 고잔동 | 고잔동 | ||||
호수동 | |||||||
고잔2동 | 중앙동 | ||||||
원곡본동 | 신길동 | 신길동 | |||||
원곡동 | 원곡동 | ||||||
원곡1동 | 백운동 | ||||||
원곡2동 | |||||||
초지동 | 성곡동, 목내동, 원시동, 초지동 | ||||||
선부1동 | 선부동 일부 | ||||||
선부2동 | |||||||
선부3동 | 선부동 일부, 화정동 | ||||||
대부출장소 | 대부동 | 대부동동, 대부북동, 대부남동, 선감동, 풍도동 |
[1] 지금의 인천광역시 원인천권과 시흥시 북부[2] 지금의 서울특별시 영등포, 경기도 광명시[3] 지금의 부평구, 계양구, 부천시, 구로구 중 안양천 서쪽 지역[4] 목내동에 있던 읍치가 시흥시 군자동에서 이전해 왔다는 설이 있다.[5] 이후 소릉은 현덕왕후의 가문이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세조가 현덕왕후를 폐위시키면서 파괴되었다. 그 후 현덕왕후의 시신은 바닷가 모래밭에 묻혔다가 중종 치세에 현덕왕후가 복위되면서 문종의 능인 현릉에 합장되었다.[6] 현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팔곡일동·팔곡이동, 군포시 대야미동·둔대동·속달동·도마교동[7] 현 안산시 상록구 일동·이동·사동·본오동[8] 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수원시 권선구 입북동·당수동, 의왕시 월암동·초평동[9] 조선후기에 에서 개칭[10] 참고로 이거 발표한 건설부 장관이 바로 이 사람이다.[11] 주민투표 결과 안산시 50.4%, 시흥시 48.8% 등으로 안산시 편입안이 간발의 차이로 앞섰기에 대부면의 안산시 편입이 결정되었다.[12] 수암동·장상동·장하동은 시흥시 시절부터 행정동 안산동으로 묶여있다가 안산시로 넘어온 뒤에도 그대로 안산동이 되었는데, 사실 이곳은 원래부터 안산시 생활권인 데다가 조선시대 안산군 관아가 있던 곳이었다. (지금은 내륙 구석처럼 보이지만, 간척 사업 이전엔 바다와도 꽤 가까운 중심지였다.) 시흥시가 재정의 압박으로 안산시에 떠넘겼다는 카더라도 있는데... 진실은 저 너머에. 사실 재정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역사성, 생활권 측면에서 안산동이 안산시로 편입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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