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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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낭중에 임명되었고 물러났다가 대장군 두무에게 벽소되었고 168년에 제2차 당고의 금으로 두무가 죽으면서 이 사건에 연루되어 금고형으로 십여 년 동안 은거하고 침묵을 지켰다.
금고형이 풀리자 태위부의 부름을 받았고 네 번을 옮겨 여강태수가 되었으며, 후에 양주의 황건적이 여강군의 서현을 공격하고 성곽을 불태우자 양속은 현 내의 20살 이상인 남자를 징발하고 전원에게 어린이들에게는 물을 운반해 불을 끄게 했다. 양속이 수만 명을 모아 군을 이끌고 황건적을 격파하자 군 일대는 평화를 되찾았다.
그 후에 안풍의 도적인 대풍(戴風)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양속은 이를 격파해 3천여 급의 목을 베고 대풍을 붙잡았으며, 도적 무리들은 용서하고 평민으로 돌아가 농기구를 주어 농업에 종사하게 했다.
186년에 강하의 군졸인 조자가 반란을 일으켜 남양태수 진힐을 죽이고 여섯 현을 함락시키자 조정에서는 양속을 남양태수에 임명했으며, 양속이 군 경계에 들어갈 때 낡은 옷을 입고 샛길에서 군에 속하는 동자 한 명을 거느리고 현, 읍을 둘러보고 소문을 알아본 후에 군으로 들어갔다.
양속은 현령, 현장 중에서 탐욕스러운 자, 청렴한 자, 관리, 민중에서 선량한 자, 교활한 사람들의 실정을 미리 알고 있어서 군 내의 사람들은 크게 놀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양속은 즉시 병사를 출동시켜 형주자사 왕민과 함께 를 공격해 참수했고 5천여 급의 목을 얻었다.
남양의 여러 현에 있던 나머지 도적들은 양속에게 투항했으며, 양속은 도적의 편에 붙어있던 사람들을 용서하는 상주를 했고 도적은 모두 평정되었다. 양속은 정치에 대한 명령을 포고하고 백성의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조사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기뻐했다.
힘있는 호족의 집은 사치와 화려함을 중시하는 사람이 많아 양속은 마음이 아팠으며, 양속 자신은 항상 찣어진 옷을 입고 초라한 식사를 하면서 누더기가 있는 마차를 타고 다녔다. 과거에 부에 있던 승이 생선을 바친 적이 있어서 양속은 이를 뜰에 있는 나무에 매달았는데, 후에 승이 생선을 권하자 나무에 매달아놓은 생선을 주면서 그 제의를 거절했고 이에 관련된 고사성어로 양속현어가 있다.
후에 양속의 아내와 아들인 양비가 군의 관청에 찾아오자 양속은 문을 닫고 안에 들이지 않았으며, 아내는 양비를 데리고 가서 양속의 곳간을 열어 내용물을 꺼내게 했지만 허술한 이불과 찣어진 옷, 소금, 보리 몇 섬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양속은 돌아서서 양비에게 자신이 가진 것은 이런 것 뿐이라면서 어머니에게 무엇을 주겠냐고 묻자 양비는 어머니와 함께 돌아갔다.
양속의 이 행동은 목민심서에서는 청렴한 임지에 처자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에서 명나라의 관리들에 대한 사례와 언급하면서 이는 엄격함이 지나친 행동으로 인정이 아니니 본받을 것이 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189년에 영제가 양속을 태위에 임명하려 했고 당시 삼공에 임명된 자는 소부에 속한 관청인 동원에 천만 전을 바쳐야 했는데, 이를 좌추(左 騶)라 했고 궁중의 사신이 오면 맞이해 예로 공경하고 후하게 뇌물을 줬다.
양속은 궁중의 사신을 낡은 거적떼기에 앉혀놓고 솜을 둔 도포를 들어보이면서 신의 재물은 오직 이것 뿐이라 했으며, 이로 인해 양속은 공의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 대신 부름을 받고 태상에 임명되었지만 출발하기 전에 양속은 48세에 병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간소하게 하고 부조금을 받지 않도록 유언을 남겼으며, 옛 제도는 2천 석(태수)의 관리가 죽었을 때 관의 조의금은 백만전이었지만 부의 승은 양속의 유지를 받들어 한 푼도 받지 않았다. 황제는 조서로 이를 칭찬해 태산태수에 임명하고 군과 부의 돈을 양속의 집에 하사했다.
금고형이 풀리자 태위부의 부름을 받았고 네 번을 옮겨 여강태수가 되었으며, 후에 양주의 황건적이 여강군의 서현을 공격하고 성곽을 불태우자 양속은 현 내의 20살 이상인 남자를 징발하고 전원에게 어린이들에게는 물을 운반해 불을 끄게 했다. 양속이 수만 명을 모아 군을 이끌고 황건적을 격파하자 군 일대는 평화를 되찾았다.
그 후에 안풍의 도적인 대풍(戴風)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양속은 이를 격파해 3천여 급의 목을 베고 대풍을 붙잡았으며, 도적 무리들은 용서하고 평민으로 돌아가 농기구를 주어 농업에 종사하게 했다.
186년에 강하의 군졸인 조자가 반란을 일으켜 남양태수 진힐을 죽이고 여섯 현을 함락시키자 조정에서는 양속을 남양태수에 임명했으며, 양속이 군 경계에 들어갈 때 낡은 옷을 입고 샛길에서 군에 속하는 동자 한 명을 거느리고 현, 읍을 둘러보고 소문을 알아본 후에 군으로 들어갔다.
양속은 현령, 현장 중에서 탐욕스러운 자, 청렴한 자, 관리, 민중에서 선량한 자, 교활한 사람들의 실정을 미리 알고 있어서 군 내의 사람들은 크게 놀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양속은 즉시 병사를 출동시켜 형주자사 왕민과 함께 를 공격해 참수했고 5천여 급의 목을 얻었다.
남양의 여러 현에 있던 나머지 도적들은 양속에게 투항했으며, 양속은 도적의 편에 붙어있던 사람들을 용서하는 상주를 했고 도적은 모두 평정되었다. 양속은 정치에 대한 명령을 포고하고 백성의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조사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기뻐했다.
힘있는 호족의 집은 사치와 화려함을 중시하는 사람이 많아 양속은 마음이 아팠으며, 양속 자신은 항상 찣어진 옷을 입고 초라한 식사를 하면서 누더기가 있는 마차를 타고 다녔다. 과거에 부에 있던 승이 생선을 바친 적이 있어서 양속은 이를 뜰에 있는 나무에 매달았는데, 후에 승이 생선을 권하자 나무에 매달아놓은 생선을 주면서 그 제의를 거절했고 이에 관련된 고사성어로 양속현어가 있다.
후에 양속의 아내와 아들인 양비가 군의 관청에 찾아오자 양속은 문을 닫고 안에 들이지 않았으며, 아내는 양비를 데리고 가서 양속의 곳간을 열어 내용물을 꺼내게 했지만 허술한 이불과 찣어진 옷, 소금, 보리 몇 섬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양속은 돌아서서 양비에게 자신이 가진 것은 이런 것 뿐이라면서 어머니에게 무엇을 주겠냐고 묻자 양비는 어머니와 함께 돌아갔다.
양속의 이 행동은 목민심서에서는 청렴한 임지에 처자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에서 명나라의 관리들에 대한 사례와 언급하면서 이는 엄격함이 지나친 행동으로 인정이 아니니 본받을 것이 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189년에 영제가 양속을 태위에 임명하려 했고 당시 삼공에 임명된 자는 소부에 속한 관청인 동원에 천만 전을 바쳐야 했는데, 이를 좌추(
양속은 궁중의 사신을 낡은 거적떼기에 앉혀놓고 솜을 둔 도포를 들어보이면서 신의 재물은 오직 이것 뿐이라 했으며, 이로 인해 양속은 공의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 대신 부름을 받고 태상에 임명되었지만 출발하기 전에 양속은 48세에 병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간소하게 하고 부조금을 받지 않도록 유언을 남겼으며, 옛 제도는 2천 석(태수)의 관리가 죽었을 때 관의 조의금은 백만전이었지만 부의 승은 양속의 유지를 받들어 한 푼도 받지 않았다. 황제는 조서로 이를 칭찬해 태산태수에 임명하고 군과 부의 돈을 양속의 집에 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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