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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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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국은 최대의 위기를 이겨내고, 1942년에 이어 전쟁의 주도권을 계속 쥐고 있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이래 모조리 뜯어 동부로 이송시켰던 산업 시설이 우랄 너머에서 본격적으로 막대한 물자를 쏟아내기 시작했으며 미국의 대 소련 랜드리스 루트가 안정되어 소련의 전쟁수행 능력이 조금씩 폭발하기 시작했다.
동부전선에서는 소련의 예상치 못한 공세로 인해 독일의 청색작전이 막히고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이 포위당하는 등 막대한 손해를 입었으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은 괴벨스의 총력전 연설과 동시에 총력전 체제에 돌입했다. 이후에도 소련의 지속적인 공세로 쿠르스크와 하르코프를 빼앗길 위기를 맞았는데, 만슈타인의 기지를 사용해 간신히 하르코프를 사수하는 데 성공한다. 하르코프를 사수한 독일은 근소한 우위에서 동부전선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치타델 작전을 발동했으나 이미 수 번 지연된 탓에 목표지점인 쿠르스크는 완벽히 요새화 된 상황이었으며, 이로 인해 독일군의 기갑 전력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며 동부전선의 주도권은 완전히 소련에게 넘어갔다.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은 북아프리카를 거의 되찾고 허스키 작전을 통해 이탈리아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태평양에서는 지난해에 제해권을 잡은 미국이 여러 섬들을 공략하며 과달카날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태평양에서 일본 제국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북아프리카 전장, 과달카날 전투에서 승리에 가까운 상황에 도달하자 연합군은 전쟁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판단. 카사블랑카 회담을 개최해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다.
조선반도를 통치하던 조선총독부는 전황이 악화되자 해군지원병제와 대학생 지원병 제도까지 마련하는 등 기존의 징병제도 밖에 있던 조선청년들까지 동원하기 시작했다.
추축국 중 이탈리아 왕국이 졸전 끝에 가장 먼저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하게 되면서 무솔리니를 축출한 뒤 연합국으로 전향하였고 오토 슈코르체니를 이용해 축출 후 연금당했던 무솔리니를 탈출시킨 뒤 통제권이 남아있던 북이탈리아에 독일의 괴뢰국인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운다.
이후 실질적인 추축국은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 두 국가만 남게 되었으며 이들의 만행과 발악은 2년 후 종전 때까지 계속되었다.
동부전선에서는 소련의 예상치 못한 공세로 인해 독일의 청색작전이 막히고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이 포위당하는 등 막대한 손해를 입었으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은 괴벨스의 총력전 연설과 동시에 총력전 체제에 돌입했다. 이후에도 소련의 지속적인 공세로 쿠르스크와 하르코프를 빼앗길 위기를 맞았는데, 만슈타인의 기지를 사용해 간신히 하르코프를 사수하는 데 성공한다. 하르코프를 사수한 독일은 근소한 우위에서 동부전선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치타델 작전을 발동했으나 이미 수 번 지연된 탓에 목표지점인 쿠르스크는 완벽히 요새화 된 상황이었으며, 이로 인해 독일군의 기갑 전력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며 동부전선의 주도권은 완전히 소련에게 넘어갔다.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은 북아프리카를 거의 되찾고 허스키 작전을 통해 이탈리아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태평양에서는 지난해에 제해권을 잡은 미국이 여러 섬들을 공략하며 과달카날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태평양에서 일본 제국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북아프리카 전장, 과달카날 전투에서 승리에 가까운 상황에 도달하자 연합군은 전쟁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판단. 카사블랑카 회담을 개최해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다.
조선반도를 통치하던 조선총독부는 전황이 악화되자 해군지원병제와 대학생 지원병 제도까지 마련하는 등 기존의 징병제도 밖에 있던 조선청년들까지 동원하기 시작했다.
추축국 중 이탈리아 왕국이 졸전 끝에 가장 먼저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하게 되면서 무솔리니를 축출한 뒤 연합국으로 전향하였고 오토 슈코르체니를 이용해 축출 후 연금당했던 무솔리니를 탈출시킨 뒤 통제권이 남아있던 북이탈리아에 독일의 괴뢰국인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운다.
이후 실질적인 추축국은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 두 국가만 남게 되었으며 이들의 만행과 발악은 2년 후 종전 때까지 계속되었다.
- 2월 25일: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독일 남부집단군이 파블로그라드로 진격한 소련 포포프 전차군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 3월 17일: 독일 제2 SS 기갑군단이 하르코프를 재점령함으로서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이 나치 독일의 승리로 끝났다.
- 7월 12일: 프로호로프카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차 수백 대가 맞붙었다. 이것이 사상 최대의 전차전인 프로호로프카 전투이다.
- 7월 27일: 조선총독부는 칙령 제108호로 '해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였다.
- 9월 3일: 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했다.
- 10월 13일: 이탈리아 왕국이 연합국에 항복하고,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 10월 20일: 조선총독부는 20세 이상의 대학/전문학교 재학생과 졸업생들에게도 학도지원병 제도를 적용시켰다.
- 날짜 미상: StG44를 생산과 동시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 날짜 미상: 베수비오 강삭철도가 폐쇄되었다.
- 1월 1일 ~ 12월 31일 - 무수히 많은 군인과 시민들
- 2월 22일 - 백장미 단원: 독일의 저항운동가들. 독일 대학생들이 결성한 저항단체 백장미의 일원인 이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만행을 폭로하고 나치에 저항하자는 내용의 전단을 제작하고 배포했다. 1943년 2월 18일에 체포되었고, 체포된지 4일만에 처형되었다.
- 소피 숄
-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 한스 숄
- 일자불명: 루돌 폰 슈트로하임 - 죠죠의 기묘한 모험
[1] 1월 8일부터 12월 27일까지는 이슬람력 1362년이다.[2] Before Present[3] 일본 제국이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개시 이후에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할 것과 만주, 대만 및 팽호도와 같이 일본 제국이 청나라로부터 빼앗은 지역 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또한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구축될 것이다. 앞의 3대국은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4] 마피아 2의 튜토리얼 장인 1장이면서 첫 번째 시대배경.[프로필상] 실제로는 1941년생.[6]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의 어머니 하나님으로 유명하다.[호적상] 실제로는 1941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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