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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국가유산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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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처 정보

국가유산청은 국가유산 멸실 또는 훼손 시 원형복원을 위한 기초자료 축적을 위해 대한불교 조계종 등 국가유산 관리단체와 협력 3차원 스캐닝 기술 등을 활용한 3D 원형기록 통합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구축한 데이터를 국민과 기업이 콘텐츠 제작에 활용할 수 있도록 3D 국가유산 서비스를 통해 개방하고 있습니다. 자세히보기

  •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きだん) 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えんとう)를 올리고 맨 위에 정()자형의 정상부(いただき上部じょうぶ)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 9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기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 빛벌가야(지금의 창녕군)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시하면서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당시 창녕군은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 신라에 병합되었고, 565년에는 대야주(지금의 합천군)와 합쳐져 비사벌군(斯伐ぐん) 또는 비자화군(ぐん)으로 불리게 되었다. 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 안에 모셔 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めぐかりかんさかい)’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나, 후반부는 명확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다른 순수비의 내용을...

  • 삼국시대 신라의 비석으로, 1988년 봉평리 논 객토작업으로 2-3개월 방치되어 있던 것을 마을 주민(권대선)이 발견하고 신고하였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에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나,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비는 자연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전체적인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깝다. 비문은 한쪽 면에만 새겨져 있는데, 글자수는 400자 정도이다. 글씨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조의 영향을 받은 해서체이나, 예서체의 모습도 보인다. 내용은 전형적인 한문이 아니라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체를 사용하여 파악이 어렵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만하다. 기본 줄거리는 울진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들어감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이 일어나자, 신라에서는 육부(六部) 회의를 열고 대인(大人おとな)을 보내어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신라가 동북방면으로 진출하면서 건립한 비로,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는 ‘신라의 미소’라고 널리 소개된 신라시대 원와당(えんかわらとう)으로, 일제시기 경주 사정리(すなせいさと, 현 사정동)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수막새는 1934년 일본인 다나카 도시노부(田中たなか敏信としのぶ)가 골동상점에서 구입하여 당시부터 고고학술 자료를 통해 존재가 알려졌으며, 이후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나 1972년 10월 국내에 반환되었다. 일반적인 와당 조성방법처럼 틀(かわら范)에 찍어 일률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와범으로 먼저 형태를 잡은 후 손으로 직접 빚어 얼굴의 세부 형상을 만들고 도구를 써서 마무리한 작품이다. 자연스럽고 정교한 솜씨로 보아 숙련된 장인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실제 사용한 흔적도 있다. 오른쪽 하단 일부가 결실되었으나 이마와 두 눈, 오뚝한 코, 잔잔한 미소와 두 뺨의 턱 선이 조화를 이루며 신라인들의 염원과 이상향을 구현한 듯한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알려진 손으로 빚은 얼굴무늬 수막새이자...

  • 불국사 서북쪽 언덕의 밭 가운데에 서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きだん) 위에 3층의 탑신(とう)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4매, 위층 기단은 8매의 돌로 짜여져 있다. 각 층 모두 모서리에 하나씩,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3층을 이루는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이며, 네 귀퉁이와 아래면에는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이 나타나 있지 않아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역에 널리 유행하던 소박하고 단정한 모습의 석탑 중의 하나로 보인다.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측되며, 불국사와도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자리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경주 마동 삼층석탑

  • 경주 남산 동쪽 기슭 부처 골짜기의 한 바위에 깊이가 1m나 되는 석굴을 파고 만든 여래좌상이다. 불상의 머리는 두건을 덮어쓴 것 같은데 이것은 귀 부분까지 덮고 있다. 얼굴은 둥그렇고 약간 숙여져 있으며, 부은 듯한 눈과 깊게 파인 입가에서는 내면의 미소가 번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인왕리석불좌상과 유사하지만 전체적으로 자세가 아름답고 여성적이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아래로 길게 흘러내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だいざ)까지 덮고 있는데, 옷자락이 물결무늬처럼 부드럽게 조각되어 전체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석불은 경주 남산에 남아있는 신라 석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삼국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 불상으로 인하여 계곡 이름을 부처 골짜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

  • 탑리리 마을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5층 석탑이다. 낮은 1단의 기단(基壇きだん) 위에 5층의 탑신(とう)을 세운 모습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전탑(塼塔)양식과 목조건축의 수법을 동시에 보여주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단은 여러 개의 돌로 바닥을 깐 뒤, 목조건축을 본떠 가운데기둥과 모서리기둥 모두를 각각 다른 돌로 구성하였다. 탑신은 1층이 높으며 2층부터는 높이가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는데,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がんしつ)을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전탑에서 보이는 모습처럼 밑면 뿐만 아니라 윗면까지도 층을 이루고 있는데 윗면이 6단, 아랫면이 5단이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목조건축의 지붕 끝을 떠올리게 한다. 각 부분에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응용하는 한편, 곳곳에서 전탑의 조성기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독특한 특징으로 인해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과 함께 통일신라 전기의 석탑양식을 연구하는데...

  • 쌍자총통(そうじゅうとう)는 조선 중기에 사용하던 개인용 소용화기(小用しょうよう火器かき)의 일종으로, 총구에 화약과 실탄을 장전, 불씨를 점화하여 발사하는 유통식이다. 총신이 쌍으로 이루어져 한쪽 총신에서 3발을 동시에 장전, 발사할 수 있어 양쪽 6발을 목표에 집중 사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비, 눈, 바람이 있을 때는 거의 사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총신이 짧아 원거리 사격에 적합하지 않다. 임진왜란 때 총신이 긴 반자동식 조총이 도입되면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길이 52.2cm, 구경 1.7cm, 손잡이 6cm인 이 총통의 총구쪽은 2개의 마디(죽절)가 있고, 손잡이 부분은 단순하게 처리하여 세련미를 자아낸다. 총신에는 글이 쓰여 있는데, 선조 17년(1583)에 제작되었음과 사용법이 쓰여 있다. 사용법에 의하면 탄환을 2개씩 장전할 수 있으므로 총 12발을 발사할 수 있는 희귀한 예이다. 쌍자총통

  •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쌍탑이 동 · 서로 건립된 특이한 예의 두 탑이다. 동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고, 서탑은 전형적인 3층석탑의 양식이다. 동탑은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이 넓게 2중으로 깔려있고, 그 위에 잘 다듬은 돌 여덟개를 한 단처럼 짜 맞추어 기단부(基壇きだん)를 이루고 있다. 탑신부(とう)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돌 하나로 만들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과 낙수면이 모전석탑처럼 똑같이 각각 5단으로 층을 이루고 있다. 서탑은 위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2단의 기단은 한 면을 둘로 나누어 팔부신중(はちかみしゅう)을 새겼다. 팔부신중은 신라 중대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신앙의 한 표현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돌 하나로 되어 있고 각 층에 모서리기둥을 조각하였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5단이다....

  •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비(いしぶみ)들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비몸 위의 머릿돌에는 용의 모습을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그 최초의 예가 되고 있다. 비각 안에 모셔져 있는 비는 현재 비몸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 위로 머릿돌만이 얹혀져 있다.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등에는 큼직한 벌집 모양의 육각형을 새긴 후,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いしぶみ :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 주위로 연꽃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머릿돌 좌우에는 6마리의 용이 3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받들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ふとし宗武むねたけ烈大おういしぶみ)’라고 새겨 놓아 비의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통일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건립되었으며, 명필가로 유명했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글씨로 비문을 새겨 놓았다. 표현이...

  • 이름 없는 옛 절터에 남아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きだん) 위에 3층의 탑신(とう)을 올린 모습이다. 1975년에 보수하였는데 이 때 위층 기단의 북쪽 가운데돌을 새로 보충했을 뿐 대부분은 원래의 모습대로 잘 남아있다. 아래층 기단은 밑돌 · 가운데돌 · 맨윗돌을 모두 붙여서 4장의 돌로 짰고, 가운데돌의 모서리와 네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겨두었다. 위층 기단에도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에서도 역시 몸돌의 네 모서리에 기둥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커서 탑 전체에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밑면의 받침수는 각각 4단씩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기단부의 섬세한 조각과 완벽함에 비해 탑신의 꾸밈이 형식화된 면이 보인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석탑양식에 간략과 생략이 심했던 9세기 말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경주 남사리 삼층석탑

  • 양감이 좋은 15세기의 전형적인 분청사기 형태에 특징적인 상감문양이 장식된 병이다. 어깨와 아랫도리에는 흰 선상감으로 연판문대를 돌리고, 그 사이 동체 중심에는 모란과 버드나무를 엇갈려 4곳에 배치하였다. 앞 · 뒷면에는 각기 모양이 다르게 모란을 큼직하게 장식하고 그 사이에는 늘어진 버드나무를 흰 선상감으로 도안화시켜 베풀었다. 특히 강하게 추상화된 매우 율동적인 모란문을 면상감으로 처리하고 검은 윤곽선을 돌려 대담하게 표현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약은 회록색을 띠고 광택이 좋으며 굽바닥에 모래를 받쳐 구웠다. 대담한 추상성을 보이는 문양의 창의성이 현대적 디자인 감각과 상통하는 놀라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기형과 문양 모두 분청사기 특유의 미학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수작이다. 분청사기의 미학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며, 15세기 전반 경의 상감분청사기 전성기의 무르익은 감각을 창의적으로 구현한 점을 볼 수 있어 역사적 · 예술적 가치가...

  • 백자 상감모란문 병(白磁はくじ 象嵌ぞうがんおす丹文 びん)은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백자 병으로 높이 29.6cm, 아가리 지름 7.4cm, 밑지름 9.6cm의 크기이다. 짧은 목에 나팔처럼 벌어진 아가리와 몸체가 풍만하고 약간 높은 굽다리를 지닌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술병이다. 목 부분에 두 줄씩의 선을 흑상감 기법으로 위 · 아래에 각각 두르고 그 사이에 물결모양의 덩굴무늬를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백자에 이런 흑상감기법을 사용하여 문양을 내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청자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15세기에 사용되었다. 목 부분에는 유약의 색이 변색되어 검은 점들이 있으며, 굽다리에 작은 흠이 있다. 표면의 광택은 담청색을 머금은 회백색으로, 고려 상감백자 계열의 부드러운 감각이 묻어난다. 백자가 주는 부드러운 흰색의 바탕 위에 검은색을 넣어 상감한, 단순하고 큼직한 모란 모양의 장식이 풍만하고 안정감 있는 그릇 모양에 잘 어울리고 있다. 백자 상감모란문 병

  • 조선 초기에 제작된 분청사기 병으로 높이 28cm, 아가리 지름 5.8cm, 밑지름 17cm이다. 이 병은 면상감법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면상감법이란 청자상감이 분청사기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나온 새로운 장식기법의 하나이다. 몸통에는 힘차면서도 거침없는 솜씨로 덩굴 꽃무늬를 흰색으로 상감하고, 꽃잎과 덩굴 사이에는 선명한 검은색을 상감하여 흰 면상감의 특이한 효과를 더하고 있다. 담녹색의 투명한 광택이 흐르고 있고, 어두운 회색빛 바탕 흙의 질감 위에 상감 문양이 맑게 어우러져 투시되고 있다. 전체 형태는 몸통이 둥글고 허리가 가늘며, 굽다리가 넓다. 조선 초기 특유의 곡선을 이루는 것이 고려 시대의 반듯하고 아담한 매병 양식에서 조선 초기 양식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국전쟁 중 당시의 소장자인 장택상의 집이 소실될 때 그 잿더미 속에서 기적적으로 원형이 살아 있었으나, 원래의 모습에서 변화되어 아쉬움을 준다. 하지만 대담한 면상감법에 의한...

  •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한 높이 23.2cm, 폭 14.7cm, 밑 지름 9.2cm의 인물형 토기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나팔모양의 받침 위에 직사각형의 편평한 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말을 탄 무사가 올려져 있다. 받침은 가야의 굽다리 접시(고배)와 동일한 형태로, 두 줄로 구멍이 뚫려 있다. 받침의 4모서리에는 손으로 빚어 깎아낸 말 다리가 있다. 말 몸에는 갑옷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고, 말갈기는 직선으로 다듬어져 있다. 말 등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고 있는 무사가 앉아있다. 무사는 머리에 투구를 쓰고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는데 표면에 무늬가 채워져 있다. 특히 지금까지 실물이 전하지 않는 방패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주목된다. 무사의 등 뒤쪽에는 쌍 뿔모양의 잔을 세워놓았다. 이 기마인물형토기는 가야의 말갖춤(마구)과 무기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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