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 (고려)
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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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고려 국왕 | |
재위 | 1170년 9월 2일 ~ 1197년 9월 23일 (음력) |
전임 | 의종 |
후임 | 신종 |
섭정 | |
이름 | |
휘 | 왕호( |
묘호 | 명종( |
시호 | 황명광효대왕( |
능호 | 지릉( |
작호 | 익양공( |
신상정보 | |
출생일 | 1131년 10월 17일(음력) |
출생지 | 고려 개경 정궁 |
사망일 | 1202년 11월 17일(음력) | (71세)
사망지 | 고려 개경 창락궁 |
부친 | 인종( |
모친 | 공예왕후 ( |
배우자 | 의정왕후 김씨 |
자녀 | 1남 2녀 (8남 2녀)
강종, 연희궁주, 수안궁주 |
명종(
휘는 호(晧), 자는 지단(
개요
[편집]1170년(의종 24년), 의종이 무신정변으로 폐위되자 무신들에 의해 옹립되었다. 재위 기간 내내 크고 작은 반란과 농민봉기가 발생하였으며, 재위 기간 내내 이의방(
생애
[편집]정변과 즉위
[편집]명종은 1170년 음력 8월 30일에 무신정변이 일어나 음력 9월에 의종이 폐위되고 무신들에게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그러나 실권은 무신 정권의 지도자인 이고, 이의방, 정중부 등에게 있었다.
재위기간 중
[편집]1173년에 동북면병마사(
1179년 정중부의 전횡을 탐탁지 않게 여긴 경대승이 정변을 일으켜 정중부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경대승이 죽자, 명종은 경주로 달아난 이의민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의민은 새로운 무신 권력자가 되어 자신의 아들들을 모두 요직에 앉히고 부정부패를 일삼아 갖은 횡포를 부리다가, 나중에 가서는 스스로 임금이 되려는 야심까지 품게 된다.
유폐와 최후
[편집]1196년 음력 4월, 최충헌이 이의민을 참살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최씨 정권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때 최충헌은 거사의 명분을 얻기 위하여 앞으로의 국정개혁안의 내용을 담은 봉사십조(
그러나 최충헌의 난 초기의 혼란기를 기회로 무신 정권을 타도하려 하였으나 1197년에 최충헌 형제가 정변을 일으켜 평량공을 옹립함으로써 폐위를 당하고 창락궁(
기타
[편집]재위시기에 남해 금산 정상에 봉수대를 건설한다.[1] 당시 전국의 봉수 경로 5개 가운데 동래에서 개경에 이르는 경로에 속한 최남단에 자리잡고 있어 출발지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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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편집]
왕후[편집]
왕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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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이 등장하는 작품
[편집]드라마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남해금산봉수대”. 《남해군여행》. 남해군청. 2020년 10월 23일.
- ↑ 폐첩(嬖妾)의 소생으로 왕선사(
王 善 思 ), 왕홍기(王 洪 機 ), 왕홍추(王 洪 樞 ), 왕홍규(王 洪 規 ), 왕홍균(王 洪 鈞 ), 왕홍각(王 洪 覺 ), 왕홍이(王 洪 貽) 등이 있었다.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소군(
小 君 )이란 고려시대 어머니가 궁인이거나 혹은 국왕의 사랑을 받은 첩에서 태어난 왕자들을 출가시켜 승려로 삼은 왕의 서자들을 말한다. 고려사회에서는 이들의 어머니가 천민 출신이기 때문에 승려가 될 수 없었으나, 이들의 정치참여를 제도적으로 막기 위해 출가시켰다.
- 허흥식,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86, 330·510~511쪽.
- 채상식, 『고려후기불교사연구』, 일조각, 1991.
- 황병성, 『고려무인정권기연구』, 신서원, 1998, 285쪽.
- 김당택, 『고려의 무인정권』, 국학자료원, 1999, 326~327쪽.
- ↑ 인종의 4녀 영화궁주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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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임 의종 |
1170년 ~ 1197년 | 후 임 신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