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lated by https://www.hiragana.jp/)
두문동칠십이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본문으로 이동

두문동칠십이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두문동 72현에서 넘어옴)

두문동칠십이인(もりもんほらななじゅうにん) 또는 두문동칠십이현(もりもんほらななじゅうけん)은 고려 멸망 직후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지켰다고 전하는 72인의 유신(遺臣いしん)들을 가리킨다. 공자가어사기공자의 승당제자를 72명으로 언급하고 있다.[1] 동국 18현이 우리나라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이며, 두문동칠십이현은 근대화 이전 우리나라의 대표적 절개(ふし槪)와 충(ただし)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72현의 구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1994년에 설립된 사단법인 고려역사선양회에서는 72현과 관련된 고려조, 조선조의 각종 역사서와 각 가문의 족보[2][3]와 문집 등을 고증하여 가장 공통된 인물만을 선별하여 2007년 8월 30일 경기도 파주에 완공된 고려대전 충신각에는 정몽주(ていゆめしゅう), 하자종(かわ自宗じしゅう), 문자종(ぶん自宗じしゅう), 조의생(曺義せい), 임선미(はやしさきあじ)을 포함한 72현을 배위하여 봉안했다.[4][5] 이들은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あさ峴)이라는 고개에서 조복(ちょうふく)을 벗어던지고 현재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기슭인 두문동(もりもんほら)에 들어와 새 왕조 조선에 출사하지 않았다.

이후 정조1783년, 당시 개경부유수였던 서유방(じょゆうぼう)이 두문동 72인 중 조의생(曺義せい), 임선미(はやしさきあじ)와 맹(はじめ)씨(이름이 전해지지 않음) 세 명을 숭절사(たかしぶしほこら)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여 그대로 배향이 시행되었다.[6] 이후 두문동에 표절사(ひょうぶしほこら)를 세워 그들을 모셨고, 후대에 박문수(ぼくかどひさし), 민안부(閔安とみ), 김충한(きむおきかん) 등이 추가로 이곳에 배향되었다.[7]

두문동에 관한 기록은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성사제의 후손인 성석주(なりせきしゅう, 1649~1695)가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もりもんほら實記じっき)》[8]가 가문 내에 전해지다 순조 1809년 간행되었고, 고종 때 사헌부 장령 성대진(しげるだい璡)이 두문동실기를 증보한 《두문동실기(병)속록(もりもんほら實記じっき(幷)ぞくろく)》이[9]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많은 선비들이 은거함에 따라 두문동이라는 곳이 나라 안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이 후 집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もりもん不出ふしゅつ)'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원래, '두문불출'이란 말은 '문을 닫고 나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마천의 《사기》 권68 상군열전 '公子こうしけんもりもん不出ふしゅつやめはちねん矣'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인원 구성

[편집]

1783년 개경부유수 서유방의 상소문에 의하면, 두문동 태학생(ふとし學生がくせい) 72인 중에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은 조의생, 임선미와 맹씨 뿐이라고 하였다.[6]

고려대전 《충신각》의 72현.[10]

[편집]

〈두문제현충렬록〉에 확인되는 인물들

[편집]

《두문동실기》〈두문제현충렬록(もりもん諸賢しょけんちゅうれつろく)에서 '두문동에 들어갔다(にゅうもりもんほら)'거나 '두문동에 살았다(きょもりもんほら)'고 기록되는 등 두문동과 관련된 인물들은 아래와 같다. 각각 호와 이름을 기재하였다. (두문동에 들어갔다는 기재가 없거나 다른 지역에서 은거한 것이 분명한 사람은 기재를 보류하였다.)

《두문동록》의 72현

[편집]

《두문동록(もりもんほらろく)》(김진근(かね) 지음, 1928년 발행,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여조병절신칠십이인록(うららあさ秉節しんななじゅうにんろく)〉에는 고려 말기 충절을 지킨 신하 72명의 이름을 적고 있다. 물론, 이들 중에는 두문동에 은거하지 않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두문동실기》, 《두문동록》에서 이름이 누락된 인물

[편집]

신라박씨 충헌공파 대종회의 72현인 목록[1]과 대조 하였다. 성사제(なりおもえひとし)는 국문표기 문제, 민보(閔普)는 마지막 글자 누락 문제로 간주하여 2명은 열거하지 않았다.

《두문동서원지》에 확인되는 인물

[편집]

재령이씨 창원종친회에서 2012년 10월 발행한 《초역 두문동서원지》에 인물들이다. 이 번역본의 출간으로 재령 이씨 모은공파 대종회는 함안문화원에서 2013년 1월 17일에 발간 기념회를 열기도 하였다.[13]

두문동 서원은 4실 22간으로 이루어졌는데 4실은 표절실(ひょうぶししつ), 순절실(殉節しつ), 항절실(こうふししつ), 정절실(やすしふししつ)이고 표절실은 순절반, 항절반, 정절반으로 나누어 두문동 72현을 배향하였는데, 순절실은 순절반, 항절실은 항절반, 정절실은 정절반으로 두문동외 제현을 배향하였다.[14] 두문동서원의 배향된 인원은 55위과 두문동외 제현은 65위 총 120위를 봉안하고 있다.[14]

구분 봉안위수 소계 총계
두문동 72현 표절실 순절반 17 55 120
항절반 31
정절반 7
두문동외 제현 순절실 순절반 11 65
항절실 항절반 34
정절실 정절반 20

[14]

표절실 순절반 (17현)

[편집]
성명 본관 관직 시호 비고
박문수(ぼくかどひさし) まつ 竹山たけやま 찬성사(贊成さんせいごと) 충현(忠顯ただあき) 초명(はつ)은 문주(門柱もんちゅう)
임선미(はやしさきあじ) きゅう あつしあきら 태학생
조의생(曺義せい) とおむら あきらやすし 태학생
맹호성(はじめこうせい) りゅうみずうみ しんあきら 태학생
성사재(なりおもえひとし) もりもん あきらやすし 보문각직제학 정절(貞節ていせつ)
조대운(曺大うん) やまきょう あきらやすし 문하시중
신익지(さるつばさ) 退すさどう 平山ひらやま 이부상서
신이(さる彛) まきとき 平山ひらやま 판도판서(版圖はんとばんしょ)
신우(さる瑀) 平山ひらやま 판문하성사(はん門下もんかしょうごと)
국유(きく濡) ふくがけ 潭陽 호부상서(戶部とべ尙書)
고천상(高天こうてんさち) 開城かいじょう 밀직사(ひそかちょく使つかい)
심원부(沈元) たけかくれ あおまつ 전리판서(てんばんしょ) 민안부(閔安とみ)의 처조카
이경(瓊) ゆうどう かわはま 목사(まき使)
서중보(じょなか輔) せきいわお 長城ちょうじょう 봉정대부(たてまつせい大夫たいふ)
신순(さる珣) 平山ひらやま 직랑(ちょくろう)
신기(さる淇) 平山ひらやま 온수감(溫水おんすいかん)
현계생(げんつぎせい) 義昌よしまさ 태학생

[14]

표절실 항절반 (31현)

[편집]
성명 본관 관직 시호 비고
김충한 かくれ 慶州けいしゅう 예의판서(禮儀れいぎばんしょ) 문민(文敏ふみとし)
민안부(閔安とみ) のうかくれ 驪興 예의판서(禮儀れいぎばんしょ) 심원부(沈元)의 고모부
이치(致) りょうかくれ 陜川 보문각직제학 초명(はつ)은 감(敢)
전귀생(貴生たかお) 耒隱 潭陽 보문각대제학 문혜(文惠ふみえ)
이유(ひろし) うみかくれ 瓮津 전객서령(てんきゃくしょれい) 초명(はつ)은 덕유(とくひろし)
구홍 まつかくれ あやじょう 문하시중 문절(文節ぶんせつ) 초명(はつ)은 성두(なり)
곽추 仰天ぎょうてんとき 淸州きよす 예문관제학 문량(ぶんりょう)
송인(そうとら) 松村まつむら 南陽なんよう 문하시중
고천우(こう天祐てんゆう) 開城かいじょう 도총제(摠制) 고천상(高天こうてんさち)의 제(おとうと)
전오륜 ぜんまいのき 旌善 전법판서(てんほうばんしょ)
채귀하(蔡貴かわ) 多義たぎどう 仁川にがわ 호조전서(曹典しょ) 정의(貞義さだよし)
박침(ぼくまこと) みつ 호조전서(曹典しょ)
이맹운(はじめげい) かわかくれ 瓮津 호조전서(曹典しょ) 이유(ひろし)의 자()
변숙(あたり肅) 慕麗どう はらしゅう 호조전서(曹典しょ) 문절(文節ぶんせつ)
조안경[(ちょうやすしきょう) ちくとき 成安なりやす 호조전서(曹典しょ)
서보(じょ輔) しん とぎがわ 공조전서(こう曹典しょ)
박심(ほお諶) うみかくれ 沔川 공조전서(こう曹典しょ) 초명(はつ)은 용고(用吉もちよし)
박영(ぼくやすし) ほうむら 공조전서(こう曹典しょ)
범세동 ふくがけ 瑯揶 덕영부윤(とくやすしいん) 문충(文忠ふみただ)
신안(さる晏) ころもおきな 平山ひらやま 종부시령(むね簿てられい)
원선(もとせん) むら はらしゅう 판삼사좌윤(はんさんつかさひだりいん)
조승숙(ちょううけたまわ肅) とくだに 成安なりやす 부여감무(扶餘かんつとむ)
신감(平山ひらやま) 平山ひらやま 집현전랑(しゅうけん殿どのろう)
성부 眉山びざん あきらやすし 형부총랑(刑部おさかべ摠郞)
김약시(きむわか) かげむら 光山こうやま 진현관직제학 충정(ちゅうじょう)
조유도(曺由どう) あきらやすし 보문각직제학 조대운(曺大うん)의 자()
도동명(とう東明とうめい) そうひのきどう じゅんてん 남대장령(南臺みなみだいてのひられい)
임탁(はやしたく) しゅう 해남감무(海南かいなんかんつとむ)
이명성(あきらまこと) まつかくれ おおやけしゅう 감찰어사(かん察御) 문성(文成ふみなり)
이오(うま) ちがやかくれ やすし 진사
이수생(とげせい) みことあん とげやす 생원

[14]

표절실 정절반 (7현)

[편집]
성명 본관 관직 시호 비고
배상지(裵尙こころざし) かしわたけどう おきかい 판사복사사(はんぼくてらごと)
변윤(卞贇) くさけい 문하평리(門下もんかひょうさと)
이유인(おもんみひとし) 安城あき 밀직부사
채옥택(蔡玉さわ) たいらやすし 영호군(りょうまもるぐん)
최문한(ちぇぶんかん) ちゅうとき こうりょう 판군기시사(はんぐんてらごと)
이탕휴(きゅう) やすしがわ 한림학사
허징(もとちょう) かわ 용진현령(りゅうけんれい)

[14]

순절실 순절반 (11현)

[편집]
성명 본관 관직 시호 비고
정몽주 圃隱 のべ 문하시중 문충(文忠ふみただ) 문묘(ぶんびょう)에 배향(はいとおる)
이숭인(たかしひとし) すえかくれ ほししゅう 보문각제학 문충(文忠ふみただ)
이종학(たねがく) 麟齋 かんさん 추밀학사 이색(穡)의 자()
신득청(さるとくきよし) 猷軒 平山ひらやま 이부상서
김진양(きむしん) 草屋くさや 慶州けいしゅう 산기상시(つねさむらい)
김자수(きむいき) 桑村くわむら 慶州けいしゅう 도관찰사(觀察かんさつ使)
손등(まごとう) みつ 부사(使)
하경(かわ檠) すすむしゅう 헌납(獻納けんのう)
홍노(ひろし魯) けいとき かんけい 한림학사
이초(はじめ) 旌善 중랑장(ちゅうろうしょう)
차원부(くるまげん頫) くもいわお のべやす 정언(せいげん)

[14]

항절실 항절반 (34현)

[편집]
성명 본관 관직 시호 비고
이색 まきかくれ かんさん 한산부원군(かんやまいんくん) 문정(ぶんやすし)
길재 冶隱 うみひらた 문하주서(門下もんかちゅうしょ) 문절(文節ぶんせつ)
최윤덕(ちぇまこととく) へりくだ ふけ 영도첨의(りょう僉議)
최첨노(ちぇ添老) いしけい 慶州けいしゅう 내시령(內侍れい)
도응(膺) あおまつどう ほししゅう 찬성
공은(あな㒚) やま きょく 문하시랑
이중인(なかひとし) りゅうひとし 문하시중
이옹(邕) つりかくれ きばやま 문하시중
남을진(みなみおつちん) へいとき むべやすし 참지문하(まいり門下もんか)
장안세(ちょう安世やすよ) まつかくれ ひとしどう 덕영부윤(とくやすしいん) 충정(ただしさだ)
맹희도 東浦ひがしうら しんあきら 한성윤(かんじょういん) 맹유(はじめひろし)의 자()
최양(ちぇ瀁) ばんろくどう ぜんしゅう 보문각대제학 충익(ちゅうつばさ)
조호(ちょう瑚) 檜谷ひのきだに 平壤ぴょんやん 보문각대제학
최유강(ちぇ有江ありえ) もりろう 慶州けいしゅう 전법판서(てんほうばんしょ)
박덕공(ぼくいさおおおやけ) 竹山たけやま 도총제(摠制) 박문수(ぼくかどひさし)의 재종질(さいしたがえめい)
조열(ちょうえつ) きんかくれ 咸安 공조전서(こう曹典しょ)
문익점 さんゆうどう 南平みなみだいら 대사성 충선(ちゅうせん)
김사렴(かねれん) 梧隱 安東あんどう 안렴사
신우(さるゆう) 退すさとき 鵝洲 안렴사
손효정(まご孝貞こうてい) みつ 좌윤(ひだりいん)
이옥(沃) じょう 강릉절제사(こうりょう節制せっせい使) 정절(やすしぶし)
이린(璘) 東岡とうこう はらしゅう 종부시령(むね簿てられい)
박익(ほお翊) まつかくれ みつ 예부시랑 충숙(ちゅう肅) 초명(はつ)은 천익(てん翊) 구홍(おおとり)의 생질(おいめい)
최이(ちぇ邇) 遯翁 慶州けいしゅう 온수감무(溫水おんすいかんつとむ)
조유(ちょう瑜) けんたに 玉川たまがわ 전농시부정(てんのうてらふくせい)
옥사온(たま斯溫) せいかくれ むべはる 진현관제학
허기(もと麒) みずうみかくれ きむうみ 중랑장(ちゅうろうしょう)
정희(てい熙) だまかくれ 河東かわとう 진현관직제학
서견(じょ甄) 竹松たけまつ とぎがわ 장령(てのひられい)
윤충보(いんただし輔) 驪江 茂松しげまつ 안성군사(安城あきぐんごと)
최원(ちぇげん) しょう 水原みずはら 종부시사(むね簿てらごと)
신포시 つぼむら こうれい 진사 신덕린(さるとくとなり)의 자() 김충한(きむおきかん)의 서(婿むこ)
원천석(もとてんすず) 耘谷 はらしゅう 진사
이양소(ようあきら) きんかくれ じゅんてん 진사 문열(ぶんれつ)

[14]

정절실 정절반 (20현)

[편집]
성명 본관 관직 시호 비고
김주(きむ澍) かごいわお ぜんやま 예의판서(禮儀れいぎばんしょ) 충정(ただしさだ)
나천서(たかしみず) 安定あんてい 안천군(安川やすかわくん)
민유(閔愉) おもえ 驪興 찬성 초명(はつ)은 사평(おもえたいら)
전조생(祖生そう) こうかくれ 潭陽 찬성 문원(ぶんもと)
김전(きむ鈿) うらおきな 安東あんどう 찬성
조공(ちょう珙) 白川しらかわ 영삼사사(りょうさんつかさごと)
전자수(田子たつこひさし) みそてい 潭陽 첨의평리(僉議ひょうさと) 전조생(祖生そう)의 손(まご)
노신(魯愼) たけかくれ 咸豊 상호군(うえまもるぐん) 무열(たけれつ) 초명(はつ)은 철(あきら)
신아(さるみやび) かん川子かわご 平山ひらやま 밀직사사(みつ直司なおじ使) 신익지(さるつばさ)의 자()
홍재(ひろし) ばんかくれ 豊山とよやま 판도판서(版圖はんとばんしょ) 문정(ぶんさだ)
신덕린 あつしかくれ こうれい 예의판서(禮儀れいぎばんしょ)
맹유(はじめひろし) しんあきら 이부상서 구홍(おおとり)의 재종고숙(さいしたがえしゅうと叔)
이춘계(はるけい) 陜川 호조상서
양우(りょうゆう) 默齋もくさい 南原なんばら 집현전대제학(しゅうけん殿どのだいひさげがく)
송교(そうこう) ねむくもあん 曞山 전의령(てんれい)
김약(きむ瀹) どるくだ 光山こうやま 군기상서(ぐん尙書)
선윤지 退すさきゅうどう たからじょう 안렴사
민유의(閔由よしみ) りょういっ 驪興 한림학사
이조(蓨) 慶州けいしゅう 문하사인(門下もんか舍人とねり)
민보문(閔普ぶん) 驪興 군사(ぐんごと)

[14]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고려시대의 제도 고려충신 72현”. 신라박씨 충헌공파 대종회. 2017년 2월 15일에 확인함. 
  2. 고려충열록
  3. 광산김씨족보 권1'서문 고려두문동72현선생제명기'(1898년)
  4. 파주통일동산 '고려통일대전 30일 준공', 연합뉴스
  5. 고려대전 충신각
  6. 정조실록》 정조 7년 7월 14일조.
  7. 순조실록》순조 10년 9월 10일,순조 22년 12월 26일조.
  8. UC Berkeley 소장 링크: http://kostma.korea.ac.kr/dir/viewIf;jsessionid=2B8BEA98A4C44AEABD3FC62A2033577B?uci=RIKS+CRMA+KSM-WZ.1927.0000-20090722.RICH_0129
  9. 조선말에 재간한 두문동선생실기에는 권두에 정종로(ていはじめ魯)의 서문과 권말에 김굉의 발문이 있고, 속록에는 성대진(しげるだい璡)과 한주(かんしゅう) 이진상(しんしょう)의 발문이 있다. 규장각 도서ㆍ국립중앙도서관ㆍ연세대학교 도서관ㆍ경북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10. 고려대전 충신각 배향위 현황
  11. 절개의 뜻을 굽히지 않기 위해 독자인 아들의 이름을 두문동의 첫 자인 두(もり)로 고치고, 아들 '두'를 관향인 창녕으로 피신시켰다. 성두(なりもり)의 후손들이 후일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곽재우 가문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조선을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http://wisrl.kaist.ac.kr/papers/BulOnDangJib.pdf
  12. 길재: 안향,우탁,신현,정몽주의 고려 성리학 대통을 조선 사림성리학으로 잇는 조선 사림 성리학의 시조이다. 고려 멸망 후 고향인 영남으로 내려와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이 고려 성리학의 사림적 학맥은 길재의 제자 강호(江湖こうこ) 김숙자(きむ叔滋), 김숙자의 아들 점필재(佔畢とき) 김종직(きむ宗直むねなお), 김종직의 제자 탁영(濯纓) 김일손(きむ馹孫), 일두(いち蠹) 정여창(ていなんじあきら)과 한훤당(かん暄堂) 김굉필(きむひろし弼), 김굉필의 제자 정암(せいあん) 조광조(ちょうひかり)로 이어진다. 한훤당 김굉필의 제자인 한양 출신 정암 조광조가 바로 이 영남 사림의 맥을 기호 지역으로 전파하여 조광조의 제자 청송(ちょうまつ) 성수침(なりもり琛)과 휴암(きゅうあん) 백인걸(はくひとしすぐる) 그리고, 성수침의 아들 우계(ぎゅうけい) 성혼(なり渾, 후일 소론), 백인걸의 제자 율곡(栗谷くりや) 이이(珥, 후일 노론)로부터 기호 사림이 형성된다. 영남우도에서는 김숙자(きむ叔滋), 김종직(きむ宗直むねなお), 김일손(きむ馹孫), 정여창(ていなんじあきら), 김굉필(きむひろし弼) 등의 학맥을 이어받아 창녕 조씨인 남명 조식을 통해 남명학파가 형성된다. 한편, 영남좌도에서는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의 독자적 학문 성취로 퇴계학파가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중후기를 이끈 조선 4대 성리학파인 남명학파 (북인), 우계학파 (소론), 퇴계학파 (남인), 율곡학파 (노론) 모두 순절 고려 충신 정몽주와 그 제자 길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결국, 이방원과 정도전이 아닌 선죽교에서 순절한 정몽주가 조선의 정신을 지배하였다.
  13. “재령이씨 국역 두문동서원지 발간”. 함안인터넷신문. 2013년 1월 29일.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4. 《초역 두문동서원지》. 재령이씨 창원종친회. Oct 2012. 2016년 10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2년 9월 7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