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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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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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 106년 ~ 125년 |
전임 | 상제(殤帝) |
후임 | 소제( |
이름 | |
휘 | 유호( |
묘호 | 공종( |
시호 | 효안황제( |
신상정보 | |
부친 | 덕제( |
배우자 | 황후 염희 공민황후 이씨 |
자녀 | 순제( |
묘소 | 공릉( |
한 공종 효안황제 유호(
사적[편집]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모후(
이후 등 태후가 죽자 안제는 환관과 연합하여 등씨 일가를 축출,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후 환관이 득세하자 나라가 혼란해졌다.
시중(
연광(
- 영초 4년(111) 서북 변방에 있는 티베트계의 유목민족인 강족(羌族)이 빈번하게 침략해 오자 대장군 등즐은 양주(凉州)를 포기하고 변방을 지키자고 주장했으나 낭중(
郎 中 )인 우후(虞 詡)는 서슴지 않고 반대하여 등즐은 우후를 미워하게 되었다. 마침朝 歌 縣 (조가현: 안휘성)에 도적 떼가 일어나자 등즐은 갑자기 우후를 조가현 장관에 임명해서 분풀이를 대신했다. 조가에 부임한 우후는 지혜와 용맹으로 도적을 평정했다. 그리고 이후 강족이 다시 침략하자 우후는 군사 수천 명을 이끌고 진격하여 이를 물리쳤다. - 영초 4년(111) 반웅(
班 雄 )이 해적을 격퇴하고 장백로(張 伯 魯)를 참수하였다. - 원초 원년(114)에 「알자경군묘표(謁者
景 君 墓表 )」를 세웠다. - 원초 4년(118)에 선비족이 상곡(
上谷 )에 침입했고, 이듬해 마성(馬城 )에 침입하였다. - 영녕 원년(120), 부여의 왕자 위구태(
尉 仇 台 )가 사신으로 와 인수(印綬 ) 및 금색의 비단 등을 내렸다. 이듬해 고구려가 마한과 예맥의 병사를 동원하여 현도군(玄 菟 郡 )을 포위하자, 그는 2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한군과 합세하여 이들을 격파하였다. - 태자가 병이 들어 유모 왕성(
王 聖 )의 집으로 피접을 하였는데, 그 때 주감(廚監) 병길(邴吉)이 왕성의 집은 새로 수리하여 토신을 범했기 때문에 오래 거할 수 없다고 하였다. - 호광을 효렴으로 봉하고 다시 한달 만에 상서랑(尙書
郞 ) 사도에 봉하였다. - 반초가 죽은 후 잠시 서역과의 교통이 두절되었으나, 그의 아들 반용(
班 勇 )을 보내 다시 서역을 경영하였다.
가족 관계[편집]
- 황후 : 안사황후 염씨(
安 思 皇后 閻氏) - 정변 후에 출궁당함. - 황후 : 공민황후 이씨(
恭 愍皇后 李 氏 ) - 염황후에 의해 독살됨.- 장남 : 한 순제 유보(
順 帝 劉 保 )
- 장남 : 한 순제 유보(
기년[편집]
안제 |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9년 | 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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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 |
107년 | 108년 | 109년 | 110년 | 111년 | 112년 | 113년 | 114년 | 115년 | 116년 |
간지 ( |
정미( |
무신( |
기유( |
경술( |
신해( |
임자( |
계축( |
갑인( |
을묘( |
병진( |
연호 ( |
영초(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원초( 원년 |
2년 | 3년 |
안제 | 11년 | 12년 | 13년 | 14년 | 15년 | 16년 | 17년 | 18년 | 19년 | |
서력 ( |
117년 | 118년 | 119년 | 120년 | 121년 | 122년 | 123년 | 124년 | 125년 | |
간지 ( |
정사( |
무오( |
기미( |
경신( |
신유( |
임술( |
계해( |
갑자( |
을축( | |
연호 ( |
4년 | 5년 | 6년 | 7년 영녕( 원년 |
2년 건광( 원년 |
2년 연광( 원년 |
2년 | 3년 | 4년 |
각주[편집]
전임 상제 유융 |
제6대 후한 황제 106년 - 125년 |
후임 소제 유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