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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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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안(田安たやす, ? ~ 기원전 206년)은 진나라 말기의 인물이다. 제왕 건의 손자며 항우가 책봉한 열여덟 제후왕 중 제북왕(すみきたおう)이다.

진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제나라를 재건한 전담(儋)·전가(かり) 형제의 세력과는 별도로, 항우가 조나라를 구원하러 출진할 무렵에 자기 힘으로 제북군의 몇 성을 함락했으며 이를 가지고 항우에 투항했다. 이 때문에 항우의 신임을 받아, 기원전 206년에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각지에 제후왕들을 봉건하면서 제나라를 삼분하여 나눈 삼제(さんひとし)[1]의 왕 중 하나인 제북왕(すみきたおう)이 되었다. 서울은 옛 진나라 때 제북군(すみきたぐん)의 치소인 박양현(ひろしけん)[2][3]에 두었다. 원래 제나라의 실권자 전영(さかえ)은 항우(項羽こうう)에게서 봉지를 받지도 못한데다, 자신이 옹립한 왕 전시()가 교동국(にかわ東國とうごく)으로 옮겨진 데 불만을 품었으나, 전시가 이를 따르려 하자, 전시를 죽이고 제왕(ひとしおう)을 자칭하였다. 마침내 재위 여섯 달 만에 전안(田安たやす)은 전영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4][5]

제나라 사람들은 전안의 집안을 '왕가'(王家おうけ)라 불렀고, 이 때문에 전안의 자손은 왕씨를 일컬었다. 효원황후(こうもと皇后こうごう) 왕정군(王政おうせいくん), 왕망(おう莽)도 전안의 자손이다.[6]

왕망이 신나라를 건국하자 전안은 시호 제북민왕(すみきた愍王), 묘호 왕조(おう)로 추존되었고 신의 종묘에 신주가 봉안되었으나 23년 신나라가 멸망하자 그의 신주는 철거되었다.[7]

가계[편집]

  • 제왕 건 (할아버지)
    • ?
      • 전안
        • ?
          • 왕수(おうとげ ♂)[8]
            • 왕하(おう ♂)
              • 왕금(おうきん ♂)[9][10]
                • 왕군협(おうくん俠 ♀)[11]
                  • 순우장(あつし于長 ♂)[12]
                • 왕정군(王政おうせいくん ♀)[13]
                • 왕군력(おうくんりょく ♀)[14]
                • 왕군제(おうくんおとうと ♀)[15]
                • 왕봉(おうおおとり ♂)[16]
                • 왕만(おう曼 ♂)[17]
                  • 왕영(おうひさし ♂)[18]
                    • 왕광(おうひかり ♂)[19]
                      • 왕가(おうよしみ ♂)[20]
                  • 왕망(おう莽 ♂)[21]
                    • 왕씨(おう ♀)[22]
                    • 왕엽(おう曄 ♀)[23]
                    • 왕첩(おうとし ♀)[24]
                    • 왕우(おう宇 ♂)[25]
                      • 왕수(おうひさし ♂)[26]
                    • 왕획(おう ♂)[27]
                    • 왕안(おうやすし ♂)[28]
                    • 왕림(おう臨 ♂)[29]
                    • 왕흥(おうきょう ♂)[30][31]
                    • 왕광(おうただし ♂)[32]
                • 왕담(おうたん ♂)[33]
                  • 왕인(王仁わに ♂)[34]
                    • 왕술(おうじゅつ ♂)[35]
                    • 왕반(おういわお ♂)[36]
                      • 왕숙(おう肅 ♂)[37]
                  • 왕거질(おうやまし ♂)[38]
                  • 왕굉(おう閎 ♂)[39]
                  • 왕향(おうこう ♂)[40]
                • 왕숭(おうたかし ♂)[41]
                • 왕상(おうしょう ♂)[42]
                • 왕립(王立おうりつ ♂)[43]
                  • 왕주(おうはしら ♂)[44]
                  • 왕단(おうまこと ♂)[45]
                    • 왕홍(おう泓 ♂)[46]
                • 왕근(おう ♂)[47]
                  • 왕섭(おうわたる ♂)[48]
                • 왕봉시(おう逢時 ♂)[49]
                  • 왕매지(おうかい ♂)[50]
              • 왕홍(おうひろし ♂)[51]
                • 왕음(おうおん ♂)[52]
                  • 왕순(おうしゅん ♂)[53]
                    • 왕연(おうのべ ♂)[54]
                    • 왕광(おうただし ♂)[55]
                    • 왕림(おうりん ♂)[56]


각주[편집]

  1. 제국(ひとしこく)·교동국(にかわ東國とうごく)·제북국(すみ北國きたぐに)을 일컫는다.
  2. 지금의 산둥성 타이안 시 남동쪽에 있었다.
  3. 박양현(ひろしけん)은 전한 태조(ふとし) 고제 원년(こうみかど 元年がんねん, BC 206), 항우(項羽こうう)가 제북국(すみ北國きたぐに)을 세우고 전안(田安たやす)을 제북왕으로 봉했을 때, 제북국의 서울이 되었다. 이후 전한 태조(ふとし) 고제 5년(こうみかど ねん, BC 202)에 이르러, 다시 제북군(すみきたぐん)을 설치하고, 제북군을 나누어 박양군(ひろしぐん)을 설치했다. 이후 고제 6년(こうみかどろくねん, BC 201)에 이르러, 군치(こおりおさむ)를 박양현(ひろしけん)에서 동평릉현(東平とうへいりょうけん)으로 옮기고 군명(ぐんめい)을 박양군(ひろしぐん)에서 제남군(すみみなみぐん)으로 바꿨다.
  4. 사마천: 《사기》 권7 항우본기제7 중국어 위키문헌에 이 글과 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사기 권7 항우본기
  5. 위와 같음, 권16 진초지제월표제4 중국어 위키문헌에 이 글과 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사기 권16 진초지제월표
  6. 반고: 《한서》 권98 원후전제68 중국어 위키문헌에 이 글과 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한서 권98 원후전
  7. かん書卷しょかん·きゅうじゅうきゅう》:きゅうびょう:一曰黃帝太初祖廟,二曰帝虞始祖昭廟,三曰陳胡王統祖穆廟,四曰齊敬王世祖昭廟,五曰濟北愍王王祖穆廟,凡五びょう墮云;六曰濟南伯王尊禰昭廟,七曰元城孺王尊禰穆廟,八曰陽平頃王戚禰昭廟,九曰新都顯王戚禰穆廟。
  8. 제북왕(すみきたおう) 전안(田安たやす)의 손자로서, 일가의 성을 전씨()에서 왕씨(おう)로 개성(改姓かいせい)한 인물이다.
  9. 자는 치군(ややくん)으로, 왕하(おう)의 장남이다. 전한 고종(こうはじめ) 원제(もとみかど) 초원 2년(はつもとねん, BC 47) 4월, 양평후(陽平ようへいこう)에 봉해졌고 영광 2년(永光ながみつねん, BC 42) 사망하였다. 시호는 경(ごろ)이다.
  10. 왕금과 동생 왕홍(おうひろし)은 청주(あおしゅう) 제남군(すみみなみぐん) 동평릉현(東平とうへいりょうけん)에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 왕수(おうとげ)가 일가를 이끌고 동평릉현에서 기주(冀州) 위군(ぐん) 원성현으로 이거(うつりきょ)했다. 그 후대는 전부 원성현에서 나고 자랐다.
  11. 원시 4년(元始げんしよんねん, AD 4)에 탕목읍을 하사받고 광은군(こうおんくん)으로 봉해짐.
  12. 광은군 왕군협의 아들로, 자는 자홍(おおとり) 또는 자유(儒). 아버지의 집안은 미약하였다고 하며 아버지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13. 전한 효원황후(こうもと皇后こうごう).
  14. 원시 4년(元始げんしよんねん, AD 4)에 탕목읍을 하사받고 광혜군(廣惠ひろえくん)으로 봉해짐.
  15. 원시 4년(元始げんしよんねん, AD 4)에 탕목읍을 하사받고 광시군(こうほどこせきみ)으로 봉해짐.
  16. 자는 효경(こうきょう). 陽平ようへいけいなりこう
  17. 자는 원경(もときょう)으로 왕망(おう莽)의 아버지다. 요절한 터(のみ)라,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작위를 받지 못하였으나, 영시 원년(えいはじめ元年がんねん, BC 16)에 신도애후(新都しんとこう)라는 봉호와 애(あい)라는 시호를 받았다. 신나라가 서자, 황제가 된 아들 왕망이 자신의 아버지를 신도현왕(新都しんとあらわおう)으로 추증하였다.
  18. 왕만의 장남이자 왕망(おう莽)의 형으로, 어머니는 공현군 거씨(こうあらわくん みぞ(?~AD 8).)다. 왕영은 제조(しょ曹)가 되었으나, 아버지 왕만처럼 요절했다. 사후에 연공후(衍功こう)에 봉해졌다.
  19. 왕영의 아들로, 요절한 아버지의 후위를 습작(襲爵しゅうしゃく)하였다. 사위(つかさたけし) 진숭(ちんたかし) 상주(上奏じょうそう)하여, 연공후(衍功こう) 왕광이 집금오(金吾きんご) 두황(竇況)으로 하여금 살인케 하였다고 하자, 왕망(おう莽)이 대노하여, 조카 왕광과 자신의 형수를 스스로 목매 죽게 하였다.
  20. 왕광의 아들이다.
  21. 왕만의 차남이다.
  22. 왕망(おう莽)의 장녀로서, 이름은 실전되었으며, 모친은 효목황후(こうむつみ皇后こうごう) 왕씨다. 전한 평제의 황후인 효평황후(孝平たかひら皇后こうごう)다. 신나라 때는 황황실주(皇室こうしつぬし)에 봉해졌다.
  23. 왕망(おう莽)의 차녀로서, 모친은 왕망의 시첩, 증질(ぞう秩)이다. 신나라 때는 목수임(あつしおさむにん)에 봉해졌다.
  24. 왕망(おう莽)의 삼녀로서, 모친은 왕망의 시첩, 개명(開明かいめい)이다. 신나라 때는 목체임(むつみ逮任)에 봉해졌다.
  25. 왕망(おう莽)의 장남으로서, 모친은 효목황후(こうむつみ皇后こうごう) 왕씨다.
  26. 왕우의 차남으로서, 공명공(こうあかりこう)에 봉해졌다. 지황 2년(すめらぎねん, AD 21) 병사했다.
  27. 왕망(おう莽)의 차남으로서, 자는 중손(ちゅうまご)이며, 모친은 효목황후(こうむつみ皇后こうごう) 왕씨다. 신나라 때는 목체임(むつみ逮任)에 봉해졌다.
  28. 왕망(おう莽)의 삼남으로서, 모친은 효목황후(こうむつみ皇后こうごう) 왕씨다. 신나라 때는 목체임(むつみ逮任)에 봉해졌다.
  29. 왕망(おう莽)의 사남으로서, 모친은 효목황후(こうむつみ皇后こうごう) 왕씨다. 신나라 때는 목체임(むつみ逮任)에 봉해졌다.
  30. 왕망(おう莽)의 오남으로서, 모친은 왕망의 시첩, 회능(ふところのう)이다. 신나라 때는 공수임(こうおさむにん)에 봉해졌다.
  31. 지황 2년(すめらぎねん, AD 21) 효목황후 왕씨가 죽고 삼남인 신천왕(しん遷王) 왕안의 병세가 심해지자, 망은 병들고 자식이 없자 왕안으로 하여금 주서(そうしょ, 군주에게 올리는 문서)를 쓰게 하여, 사절을 보내 상언하기를, "왕흥(おうきょう) 등은 어미가 비록 비천하나, 마땅히 황자(皇子おうじ)에 속하니, 버리는 것은 불가하옵니다."하였다.(きょうとうはは雖微賤, ぞくなお皇子おうじ, 不可ふか以棄.)…(중략)…이에 왕차(おうしゃ)로 하여금 사자를 보내어 왕흥 등을 맞이하게 하고 왕흥을 공수공(こうおさむおおやけ)으로, 왕광을 공건공(いさおたてこう)으로, 왕엽을 목수임(むつみ逮任)으로, 왕첩을 목체임(むつみ逮任)으로 봉하였다.(於是以王しゃ使者ししゃむかえきょうとう, ふうきょうためこうおさむにん, ただしためこうたてこう, 曄爲むつみおさむにん, としためむつみ逮任.)
  32. 왕망(おう莽)의 육남으로서, 모친은 왕망의 시첩, 증질(ぞう秩)이다. 신나라 때는 공건공(いさおたてこう)에 봉해졌다.
  33. 자는 자원(もと)으로 하평 2년(かわひらめねん, BC 27) 평아후(たいらおもねこう)에 봉해졌다. 시호는 안(やす)이다.
  34. 왕담(おうたん)의 장남으로, 영시 원년(えいはじめ元年がんねん, BC 16) 평아후(たいらおもねこう)에 봉해졌다. 원시 3년(元始げんしさんねん, AD 3), 자살을 강요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호는 자(とげ)이다.
  35. 왕인(おうひとし)의 장남으로, 원시 4년(元始げんしよんねん, AD 4)에 아버지 왕인의 평아후 작위를 이었다. 건무 2년(たてたけしねん, AD 26)에 사망하였다. 왕망의 신나라가 망할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
  36. 자는 자석(せき)으로, 왕인(おうひとし)의 차남이다. 마원의 조카사위(侄婿)였다. 사례교위(つかさ隷校じょう)인 소업(ぎょう)과 정홍(ちょうひろし)의 죄에 연좌되어 낙양에서 투옥돼, 옥사했다.
  37. 왕반(おういわお)의 아들이다. 왕숙은 패헌왕(沛獻おう) 유보(りゅう輔) 빈객(賓客ひんきゃく)이 되어, 여러 왕공제후의 부제(だい)에 출입하였다. 경시제의 아들 수광후(壽光としみつこう) 유리(りゅうこい)를 빈객으로 두어 총애하였는데, 유리가 유분자(りゅうぼん)를 원수로 여기자 그를 위하여 손을 써, 빈객들로 하여금 그의 형인 식후(しきこう) 유공(りゅうきょう)을 살해했다. 광무제(光武みつたけみかど)는 패헌왕을 하옥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용서하였으나, 조서를 내려, 왕숙을 비롯한 패헌왕의 빈객 수천 명을 주살하였다.
  38. 왕담(おうたん)의 차남으로, 전한 애제(あいみかど)가 태자(太子たいし)일 때 서자(庶子しょし, 태자부의 사무를 담당하는 직책)가 되었다. 왕거질은 애제가 즉위한 뒤에도 꾸준하게 애제의 신뢰를 얻어 관직이 시중(さむらいちゅう)·기도위(じょう)에 이르렀다.
  39. 왕담(おうたん)의 삼남으로, 소함(しょう咸)의 딸과 결혼하였다. 직책이 중상시(ちゅうつねてら)에 이르렀으나, 왕망이 선양을 받아, 신나라를 세운 뒤에 왕굉은 자신인 왕망에게 살해당할까 두려워 독약을 지니고 다녔다. 그 후, 왕망이 패망하자, 경시제에게 항복했다.
  40. 왕담(おうたん)의 사남으로, 왕망의 신나라에서 안정군(安定あんていぐん) 대윤(だいいん)이 되었다. 경시 원년(更始こうし元年がんねん, AD 23) 7월, 외효(隗囂)는 왕향의 항복을 받기 위해 서신을 수차례 보냈으나, 왕향은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외효는 안정군을 공략하였고 왕향을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그러자 안정군 전체가 외효에게 항복하였다.
  41. 자는 소자(少子しょうし)으로 하평 2년(かわひらめねん, BC 27) 안성후(安成やすなりこう)에 봉해졌다. 시호는 공(とも)이다.
  42. 자는 자하(なつ)으로 하평 2년(かわひらめねん, BC 27) 성도후(成都せいとこう)에 봉해졌다. 시호는 경성(けいなり)이다.
  43. 자는 자숙(叔)으로 하평 2년(かわひらめねん, BC 27) 홍양후(べにこう)에 봉해졌다. 시호는 황(あら)이다.
  44. 홍양황후(べにあらこう) 왕립(王立おうりつ)의 장남으로, 원시 4년(元始げんしよんねん, AD 4)에 아버지 왕립의 홍양후(べにこう) 작위를 습하였다. 신나라가 멸망하자, 대가 끊어졌다.
  45. 신나라의 상산군(常山つねやまぐん, 전한(前漢ぜんかん)의 중산국(ちゅう山國やまぐに)이다.)의 대윤(だいいん, 신나라 때는 태수(太守たいしゅ)를 대윤이라 불렀다.)이었는데,후에 후한 세조() 광무제(光武みつたけみかど)에 귀순하여 장군이 되었으나,얼마 후 전사했다.
  46. 왕단(おうまこと)의 아들이다. 후한 세조() 광무제(光武みつたけみかど) 건무 원년(たてたけし元年がんねん, AD 25), 광무제가 왕단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그의 아들 왕홍(おう泓)을 무환후(たけ桓侯)로 봉하였다.
  47. 자는 치경(ややきょう)으로 하평 2년(かわひらめねん, BC 27) 곡양후(きょくこう)에 봉해졌다. 시호는 양(煬)이다. 왕근이 죽은 뒤, 곡양후 작위는 폐지되었다. 신나라가 세워지자, 왕망(おう莽)이 왕근의 은혜를 잊지 않고 천봉 5년(てんおおとりねん, AD 18)에 그에게 직도공(直道なおみちおおやけ)의 작위와 양(ゆずる)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48. 전한(前漢ぜんかん) 곡양양후(きょく煬侯)이자, 신(しん) 직도양공(直道なおみちゆずるおおやけ)인 왕근(おう)의 아들로, 왕망(おう莽)이 왕근의 은혜를 감사하여 천봉 5년(てんおおとりねん, AD 18)에는 왕섭을 직도공(直道なおみちおおやけ)에 봉하고 위장군(まもる將軍しょうぐん)으로 삼았다. 지황 4년(すめらぎよんねん, AD 23) 6월에 술사(じゅつ) 서문군혜(西門にしもん君惠きみえ)이 도참(讖)을 두고 "성발(ほし孛, 살별)이 궁실을 없애고, 유씨가 마땅히 다시 일어날 것인데, 국사공(國師こくしこう, 유흠(りゅう歆)을 일컫는데, 유흠은 전한 건평 원년(けんひらた元年がんねん, BC 6)에 유수(りゅうしげる)로 이름을 바꾸었다.)의 성명이 이러합니다."(ぼし孛掃宮室きゅうしつ, りゅうとう復興ふっこう, 國師こくしこう姓名せいめい是也これや.)라고 하자, 왕섭은 이를 믿고 국사공 유수(りゅうしげる), 대사마 동충(ただしただし) 그리고 사중대췌(つかさ中大ちゅうだいぜい)인 기무후(おこりたけこう) 손급(まご伋)과 결의하여 군대로 왕망을 협박하여 항복을 받고는 경시제(更始こうしみかど) 유현(りゅうげん)에게 투항하여, 일가를 보전하려 하였다. 그러나 손급이 변심하여 왕망에 몰래 고변하여 모든 일이 드러나자, 국사공 유수(りゅうしげる)와 직도공(直道なおみちおおやけ) 왕섭은 자결하였고 동충은 왕망에게 끌려가 목이 베여지고 그 일족은 주멸되었다.
  49. 자는 계경(きょう)으로 하평 2년(かわひらめねん, BC 27) 고평후(高平たかひらこう)에 봉해졌다. 시호는 대(戴)이다.
  50. 고평대후(高平たかひら戴侯) 왕봉시(おう逢時)의 아들로, 전한 원연 원년(もとのべ元年がんねん, BC 12)에 왕봉시가 죽자, 작위를 이었다.
  51. 왕하(おう)의 차남이다. 전한 고종(こうはじめ) 원제(もとみかど) 초원 2년(はつもとねん, BC 47) 4월, 원제가 그를 불러, 장락위위(長樂ながらまもるじょう)로 삼았다.
  52. 왕홍(おうひろし)의 아들로, 홍가 원년(おおとりよしみ元年がんねん, BC 20), 안양후(安陽あんようこう)에 봉해졌고 영시 2년(えいはじめねん, BC 15)에 죽었다. 시호는 경(たかし)이다.
  53. 왕음(おうおん)의 아들로, 성격이 매우 엄정하였으며, 전한 애제 시기에는 부마도위(駙馬じょう) 겸 태복(ふとしぼく) 안양후(安陽あんようこう)가 되었고 평제 시기에는 거기장군(くるま將軍しょうぐん )이 되었다. 왕망(おう莽)이 그를 심복으로 생각하여, 만호(まん)에 봉하고 태보(ふとし)로 삼았다. 왕망이 광척후(こう戚侯) 유현(りゅうあらわ)의 아들인, 유자(孺子じゅし) 유영(りゅう嬰)을 옹립하자, 태부좌보(ふとしでんひだり輔)가 되었다. 왕망이 선양을 받아 신나라를 건국한 뒤, 왕순을 대사(ふとし) 안신공(安新あんしんこう)에 봉했다.
  54. 왕순(おうしゅん)의 장남으로, 천봉 3년(てんおおとりさんねん, AD 16)에 아버지 왕순(おうしゅん)이 죽자, 안신공(安新あんしんこう)의 자리를 이었다. 지황 4년(すめらぎよんねん, AD 23) 9월, 경시제(更始こうしみかど) 유현(りゅうげん)의 군대가 상안(常安つねやす)에 입성하였다. 왕망(おう莽)이 살해된 뒤에, 신도건(さるほふけん)이 승상 유사(りゅうたまもの)로 하여금 오위중성장군(中城なかぐすく將軍しょうぐん) 설부후(せつこう) 최발(ちぇはつ)을 참수하자, 안신공 왕연과 위장군(まもる將軍しょうぐん) 설덕후(せつとくこう) 왕림(おうりん) 형제, 좌대대부(ひだりたい大夫たいふ) 왕오(おう), 입국장군(立國りっこく將軍しょうぐん) 조굉(ちょう閎), 영시장군(やすしはじめ將軍しょうぐん) 화평후(和平わへいこう) 사심(ふみ諶)이 경시제에게 투항했다. 그러나 모두 신도건에게 살해되었다.
  55. 왕순(おうしゅん)의 차남으로, 전한 거섭 원년(元年がんねん, AD 6), 자신은 동심후(同心どうしんこう)에, 동생 왕림(おうりん)은 설덕후(せつとくこう)에 봉해졌다. 신 천봉 3년(てんおおとりさんねん, AD 16)에 아버지 왕순(おうしゅん)의 직위인 태사장군(ふとし將軍しょうぐん) 자리를 맡았다. 지황 3년(すめらぎさんねん, AD 22), 적미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왕망은 정예병 10만을 왕광과 경시장군(更始こうし將軍しょうぐん) 염단(れん)에게 맡겨 적미(あかまゆ)를 토벌하려 하였으나, 성창(なりあきら)에서 동헌(ただしけん)에게 대패하였고 염단은 인수(しるしなる)와 부절(符節ふせつ)을 왕광에게 넘기고 도주하게 한 뒤, 자신은 남아서 싸우다 죽었다. 왕광은 낙양으로 도주하여, 국장(くにしょう) 미신공(よししんおおやけ) 애장(あいあきら)과 함께 낙양을 수비했다. 그러나 경시제가 보낸 정국상공(定國さだくにうえこう) 왕광(おうただし)의 공격을 받아, 지황 4년(すめらぎよんねん, AD 23) 9월에 낙양성이 함락되자, 왕광과 애장은 항복하였다. 그러나 완(あて)으로 압송되어 모두 경시제에게 참수됐다.
  56. 왕순(おうしゅん)의 삼남으로, 전한 거섭 원년(元年がんねん, AD 6), 자신은 설덕후(せつとくこう)에, 작은 형인 왕광(おうただし)은 동심후(同心どうしんこう)에 봉해졌다. 지황 4년(すめらぎよんねん, AD 23) 9월, 경시제(更始こうしみかど) 유현(りゅうげん)의 군대가 상안(常安つねやす)에 입성하였다. 왕망(おう莽)이 살해된 뒤에, 신도건(さるほふけん)이 승상 유사(りゅうたまもの)로 하여금 오위중성장군(中城なかぐすく將軍しょうぐん) 설부후(せつこう) 최발(ちぇはつ)을 참수하자, 위장군 설덕후 왕림과 그의 큰형 안신공(安新あんしんこう) 왕연(おうのべ), 좌대대부(ひだりたい大夫たいふ) 왕오(おう), 입국장군(立國りっこく將軍しょうぐん) 조굉(ちょう閎), 영시장군(やすしはじめ將軍しょうぐん) 화평후(和平わへいこう) 사심(ふみ諶)이 경시제에게 투항했다. 그러나 모두 신도건에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