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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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대중음악, 특히 록 음악 최고의 전성기였던 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레드 제플린은 Led Zeppelin IV를 발표,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헤비 메탈 열풍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해당 앨범은 무려 3,700만 장이 팔려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앨범 6위에 오른다. 이 외에도 존 레논의 Imagine과 에릭 클랩튼의 Layla가 이 해에 발표되었으며, 더 후의 Baba O'Riley,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 핑크 플로이드의 Echoes 등이 발매되었다.
이 해에 발매된 음반들만 해도 What's Going On, Led Zeppelin IV, Who's Next, Blue, Sticky Fingers, Imagine, Hunky Dory, At Fillmore East, Electric Warrior, There's a Riot Goin' On, Tapestry, Tago Mago등으로, 장르를 불문하고 전부 대중음악 역사에 길이 남을 명반들이다. 그렇기에 1967년과 더불어서 고전 록, 팝 음악 팬들에게는 가장 의미가 깊은 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68혁명의 마지막 불길이 잦아든 해로도 평가받는다. 1971년 4월, 참전용사 존 케리가 J. 윌리엄 풀브라이트가 주도하는 상원 청문회에서 닉슨을 비난한 것을 계기로 메이데이에 워싱턴에서 수만명의 대학생들이 행진했고, 닉슨 행정부는 이들을 전원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단 한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으며 닉슨의 지지율이 치솟았다. 메이데이 투쟁 이후 미국에서 68혁명의 불길은 완전히 잦아들며 산발적인 투쟁이 뒤따랐지만 이전과 같지 않았고, 1972년 대선에서 대학생들의 지지를 받은 조지 맥거번이 참패하며 68혁명의 패배는 명확해졌다.
국제연합은 이 해를 '인종차별 반대 투쟁의 해'로 지정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컬러로 제작된 영상 광고가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광고 품목은 다름아닌 코카콜라. 놀랍게도 유튜브에 올라와있다. 보러 가기
쥐띠부터 이어지는 12간지의 마지막 해인 돼지띠 출신의 1971년생은 유신 체제 이전의 3공화국 끝자락 시절에 태어났다. 이들은 학창시절을 1980년대까지 재학한 마지막 세대이면서 1980년대에 학력고사를 치른 마지막 세대이고[1], 동서대립이 이어진 마지막 시대에 대학에 진학한 끝자락 세대이기도 하다.[2] 1971년생의 경우 2017년(당시 만 46세) 기준 대한민국 인구통계상 가장 인구가 많으며 대한민국에서 100만명대의 인구가 태어난 마지막 세대라 한국의 2차 베이비붐 세대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세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5,000만 인구 중 71년생 ‘돼지띠’ 제일 많아[3]
대중음악, 특히 록 음악 최고의 전성기였던 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레드 제플린은 Led Zeppelin IV를 발표,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헤비 메탈 열풍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해당 앨범은 무려 3,700만 장이 팔려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앨범 6위에 오른다. 이 외에도 존 레논의 Imagine과 에릭 클랩튼의 Layla가 이 해에 발표되었으며, 더 후의 Baba O'Riley,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 핑크 플로이드의 Echoes 등이 발매되었다.
이 해에 발매된 음반들만 해도 What's Going On, Led Zeppelin IV, Who's Next, Blue, Sticky Fingers, Imagine, Hunky Dory, At Fillmore East, Electric Warrior, There's a Riot Goin' On, Tapestry, Tago Mago등으로, 장르를 불문하고 전부 대중음악 역사에 길이 남을 명반들이다. 그렇기에 1967년과 더불어서 고전 록, 팝 음악 팬들에게는 가장 의미가 깊은 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68혁명의 마지막 불길이 잦아든 해로도 평가받는다. 1971년 4월, 참전용사 존 케리가 J. 윌리엄 풀브라이트가 주도하는 상원 청문회에서 닉슨을 비난한 것을 계기로 메이데이에 워싱턴에서 수만명의 대학생들이 행진했고, 닉슨 행정부는 이들을 전원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단 한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으며 닉슨의 지지율이 치솟았다. 메이데이 투쟁 이후 미국에서 68혁명의 불길은 완전히 잦아들며 산발적인 투쟁이 뒤따랐지만 이전과 같지 않았고, 1972년 대선에서 대학생들의 지지를 받은 조지 맥거번이 참패하며 68혁명의 패배는 명확해졌다.
국제연합은 이 해를 '인종차별 반대 투쟁의 해'로 지정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컬러로 제작된 영상 광고가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광고 품목은 다름아닌 코카콜라. 놀랍게도 유튜브에 올라와있다. 보러 가기
쥐띠부터 이어지는 12간지의 마지막 해인 돼지띠 출신의 1971년생은 유신 체제 이전의 3공화국 끝자락 시절에 태어났다. 이들은 학창시절을 1980년대까지 재학한 마지막 세대이면서 1980년대에 학력고사를 치른 마지막 세대이고[1], 동서대립이 이어진 마지막 시대에 대학에 진학한 끝자락 세대이기도 하다.[2] 1971년생의 경우 2017년(당시 만 46세) 기준 대한민국 인구통계상 가장 인구가 많으며 대한민국에서 100만명대의 인구가 태어난 마지막 세대라 한국의 2차 베이비붐 세대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세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5,000만 인구 중 71년생 ‘돼지띠’ 제일 많아[3]
서울 기준 월별 평균기온은 다음과 같다.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년 | |
서울 월평균기온(°C) | -2.4 | -0.7 | 2.0 | 11.2 | 16.6 | 21.6 | 23.9 | 24.6 | 20.6 | 13.0 | 8.7 | -1.2 | 11.5 |
- 1월 4일 - '한국산업문제협의회'가 구성되었다.
- 1월 6일 - 윤보선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국민당이 창당되었다.
- 1월 8일 - '전국관광노동조합 조선호텔 지부(이하 조선호텔 노조)'가 결성되었다.
- 1월 13일 - 대구고법 판사들을 중심으로 한 자체 정화운동이 벌어졌다.
- 1월 16일 - 일본 정부측의 재일교포 영주권 신청이 이날부로 마감되었다.
- 1월 26일 - 북한 조선적십자회와 일본적십자사 대표가 재일교포 북송 재개에 합의하였다.
- 2월 2일 - 서울 북창동 한국회관 종업원 김차호가 “전태일 선배의 뜻을 따라 전국 요식업체 종업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죽음으로 호소하겠다”고 선언하면서 프로판 가스통을 열고 분신자살을 기도하였으나 경찰에 의해 저지되었다.
- 2월 6일 - 한국과 미국은 주한미군 감축과 국군 현대화 계획에 합의하였다.
- 2월 8일 - 정부는 155마일 휴전선을 국군이 전담한다고 발표했다.
- 2월 9일 -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다.
- 2월 12일 - <다리> 지 필화사건이 발생하였다.
- 2월 13일 - 이날 경기중학교가 마지막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 2월 15일 - 아이맥전자 노동자들은 저임금 및 임금 체불에 맞서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 아이맥전자 분회(이하 아이맥전자 노조)'를 결성하였다. 이에 사측은 해고, 직장폐쇄 등으로 노조 파괴를 기도하였다.
- 2월 17일 - 한필성 씨가 일본 아사히 신문의 주선으로 6.25때 헤어진 여동생 한필화(당시 북한 스피드스케이팅 대표)와 국제 전화통화로 상봉하였다.
- 2월 18일 - 서울 명동에 아리랑백화점이 개업하였다.
- 2월 23일 - 이날 국무회의에서 대학 교련교육 필수를 골자로 한 교육법 시행령을 의결하였다.
- 2월 25일 - 연세대 학생회 간부들이 '대학자유 수호 투쟁위원회'를 결성해 교련반대 투쟁을 결의하면서 교련반대 투쟁의 서막이 올랐다.
- 2월 28일 - 한국노총은 노조의 정치참여를 선언하며 '노총 정치교육위원회'를 신설키로 하였다.
- 3월 2일 - 고려대 총학생회 및 서클 대표 40여 명은 교련 수강신청을 거부하고 교련반대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 3월 3일 - 서울대 총학생회는 학생 기본권 탈환/신장, 교권의 권력으로부터의 독립 등을 주장하며 ‘학원 대 민주화운동 지침'을 발표하였다.
- 3월 4일 - 한-미 합동 프리덤볼트 작전이 개시되었다.
- 3월 9일 - 서울대 총학생회가 '교련철폐 투쟁선언'을 발표하였다.
- 3월 15일 - 서울대 법대 학생회는 학생총회를 열고 교련문제에 대해 토론한 결과 교련 수강 여부에 대한 찬반투표를 벌인 결과 95%가 반대했다고 발표하였다. 같은 날 동 대학 문리대 학생회는 <다시 맞는 3월 15일>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3월 17일 - 고려대 총학생회가 <우리는 거부한다>는 제목의 교련반대 투쟁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 3월 18일 - 한영섬유공업 노조원인 김진수가 사측의 사주를 받은 노동자 정진헌에게 드라이버로 머리를 찔려 중상을 입었다. 이후 김진수는 2개월간 사경을 헤메다 5월 16일에 숨을 거두었다.
- 경남 동래에서 고리 원자력 발전소 기공식이 열렸다.
- '재일교포 강석만 간첩 사건'이 발생하였다.
- 서울대 상대 학생회는 학생총회를 열어 교련 강화에 대한 토론과 찬반 투표를 실시하였다. 학생회 측은 투표 결과 97.3%가 교련 강화에 반대했다고 밝히고 교련 수업을 거부하기로 결의하였다.
- 3월 27일 - 주한미군 7사단이 철수하였다. 이는 해방 이래 첫 주한미군 철수로 기록되었다.
- 각 군의 미국 군사고문단이 통합해 '주한미국합동군사지원단'으로 발족되었다.
- 육군보안사령부는 재일동포 서울대생인 서승-서준식 형제 등 4개 간첩단 51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재일교포 간첩단 조작 사건).
- 4월 6일 - 성대생 500여 명이 '교련반대 자유 성토대회'를 열고 가두 시위를 벌였다. 같은 날 고려대에서도 '민주수호 투쟁위원회'를, 서울대 상대생도 '교련철폐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이에 동참했다.
- 4월 7일 - 서울대 법대생들도 "깨져라 교련, 깨어라 언론"이란 플랜카드를 걸고 성토대회를 열며 교련복 화형식을 벌였다. 같은 날 고려대와 연세대도 교련반대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경북대 학생인 정만기도 <반독재 구국선언>을 각 대학 및 언론사에 배포하였다.
- 4월 8일 - 각계 민주인사 25명은 <민주수호 선언>을 발표하며 '민주수호 국민협의회'를 결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 4월 9일 - 연세대생 1,000여 명은 성토대회를 열어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는 한편, 굴다리에서 교련복 화형식을 벌었다.
- 이날 4.19 혁명 11주년을 맞이해 기독교 학생들은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고 부활절 예배에 참석하려다 무장 경찰관들에 의해 십자가가 파손되었다.
- 방글라데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 4월 11일 - '전국화학노동조합 삼영화학 분회(이하 삼영화학 노조)'가 결성되었다.
- 4월 12일 - 주한 미국대사관 경비원 90여 명이 단체협약 체결을 위해 농성을 벌였다.
- 4월 14일 - 최초의 학생운동 연합체인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이 결성되었다.
- 4월 15일 - 동아일보 기자들이 언론에 대한 외부의 압력을 배격하고자 '언론자유 수호선언'을 발표하였다.
- 4월 16일 - 한국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 수호선언'을 발표하였다.
- 김재준 등 재야인사들이 '민주수호 국민협의회'를 결성했다.
- 경향신문, 신아일보, MBC 기자들은 '언론자유 수호선언'을 발표하였다.
- 4월 20일 - 합동/동양통신 기자들이 '언론자유 수호선언'을 발표하였다.
- 4월 21일 - 4.19 및 6.3 항쟁 참가학생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민주수호청년협의회'가 결성되었다.
- 5월 6일 - 신민당 진산파동이 발생하였다.
- 5월 10일 - 청평호에서 버스 추락사고가 발생하여 80명의 익사자가 발생했다.
- 5월 25일 - 제8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다. 이 선거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113석을, 신민당은 89석을, 나머지는 2석을 각각 차지하였다.
- 6월 12일 - 종전의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이 연세대 민권쟁취 청년단과 통합하여 '전국학생연맹'이 새로 결성되었다.
- 6월 16일 - 국립의료원 인턴 집단사표 파동이 발생하였다.
- 7월 20일 - 이날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새 당수에 김홍일을 선출시켰다.
- 7월 26일 - 이날 국회의장에 백두진, 부의장에 장경순/정해영을 주축으로 한 제8대 국회가 개원되었다.
- 7월 28일 - 서울지검은 이범열 판사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하였다. 이에 다음날 서울형사지법 판사들이 사표를 집단 제출하여 사법파동으로 확대되었다.
- 8월 6일 - 북한의 김일성은 이날 캄보디아 싸이아누 국왕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 연설에서 남한의 민주공화당 등 각 정당 및 사회단체들과 접촉할 용의가 있다고 표명하였다.
- 8월 12일 - 대한적십자사는 북한 조선적십자회에 남북 이산가족 찾기 회담을 제의하였다.
- 8월 18일 - 서울대 문리대 교수들이 대학의 자율성과 처우개선, 도서/실험실습 시설 확충 등을 요구하며 자주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는 각 대학에 파급되었다.
- 8월 20일 - 남북 양국 적십자사 연락관이 분단 26년만에 만나 연락장을 교환하였다.
- 8월 28일 - 서울형사지법 판사들이 사표를 철회하면서 사법파동이 마무리지어졌다.
- 9월 15일 - 한진상사 파월 노동자들이 체납임금 지불을 요구하며 대한항공 본사를 점거/방화하였다.
- 9월 17일 - 대구 동아백화점이 개점하였다.
- 9월 20일 - 남한과 북한의 적십자사가 남북이산가족 찾기 예비회담을 개최하였다.
- 9월 27일 - '전국화학노동조합 한국비료 지부(이하 한비노조)'가 결성되었다.
- 10월 2일 - 국회는 오치성 내무부 장관에 대한 해임 결의안을 가결시켰다. 3일 뒤 길재호와 김성곤 의원이 당을 나갔다.
- 10월 6일 - 이날 열린 남북적십자회담 3차 예비회담에서 남북 양측은 본회의를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열 것에 합의하였다.
- 10월 7일 - 상공부는 유통근대화 계획의 일환으로 전국 1천 5백여개 일반시장과 중앙 도매시장을 단계적으로 근대화하겠다고 발표하였다.
- 10월 15일 - 박정희 대통령은 학원질서 확립을 위해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선포하여 10개 대학 휴업, 서클 74개 해체, 7개 대학 학생회 기능 정지, 미등록 간행물 13종을 폐간시키고 1,889명을 강제 연행하였다.
- 10월 23일 - 상공부는 체인스토어 조직망을 확대하여 백화점 직영화 방침을 시사하였다.
- 11월 11일 - 한국천주교주교단은 부정부패, 빈부격차, 도의타락 등의 시정요구를 담은 공동교서를 발표하였다.
- 이날 열린 남북적십자회담 11차 예비회담에서 남북 양국은 이산가족 찾기에 친척도 포함키로 하였다.
- 인도군이 동파키스탄으로 진공하기 시작했다. 고립된 동파키스탄의 파키스탄군은 인도군의 침공을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 12월 6일 -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였다.
- 12월 9일 - 파월 국군 병력이 6년만에 철수하였다.
- 12월 10일 - 대한민국에 첫 민방공 훈련이 개시되었다.
- 12월 17일 - 재일 북송교포 237명이 자비북송 형식으로 일본 니카타항을 출발하였다.
- 12월 27일 -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하 국가보위법)'이 국회 변칙 통과 및 제정되어 유신체제로 가는 길이 형성되었다.
- 일자 불명
- 11/12월 - 놀런 부슈널이 만든 아케이드 게임 '컴퓨터 스페이스'가 미국에 출시되었다.
- 영화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의 배경연도.
- 아폴로 계획이 실패하면서 1971년 8월 22일에 소련이 결국 인류 최초로 달에 도달했으며, 냉전에서의 승자나 다름없다는 신문기사가 존재한다. - 홈프론트: 더 레볼루션
- 임미진: 대한민국의 성우.
- 강성진: 대한민국의 배우.
- 후루타 준코(~1989):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의 피해자.
- 김영민: 대한민국의 배우.
- 정훈석: 대한민국의 성우.
- 와타나베 야스시: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의 범인 (소년 D).
- 다이도: 영국의 가수
- 일자불명 : 정영선(?) - 자이언트
- 밀물썰물
- 강병철, 박기상
- 바니걸스(토끼소녀)
- 윤항기와 키 브라더스
- 씬 리지
- 신영식 - <승리의 그날>
- 김성준
- 롯데공업
- 10월: 라면땅
- 11월: 새우깡
- 동방유량
- 해표식용유
- 서울우유협동조합
- 6월 5일: 서울 탈지분유
- 화녀
- 한국
- 해외
- Yes - Roundabout
- 젊은 느티나무 - 강신재 저.[18]
- 엑소시스트 - 윌리엄 피터 블래티 저
[1] 5~9대 대통령으로 재임한 당시 8대 대통령 박정희가 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78년에 국민학교에 들어가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1989년까지 학창시절을 보냈다. 베를린 붕괴 이후 동독은 이들이 대학에 재학중이던 1990년 10월에 서독에게 흡수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로 재탄생하게 된다.[2] 이들이 대학에 진학한 1990년에는 동독과 서독 그리고 소련까지 모두 존재했다.[3] 2위는 1968년생, 3위는 1969년생.[4] 당시 명칭 한국과학원(KAIS)[5] 이유는 고려대생이 작성한 부정축재자 명단에 윤필용, 이후락, 박종규 등이 포함되어 있으므로.[6] 투과니보다 3초 늦어 은메달을 딴 선수가 다름아닌 이봉주.[7] 주민등록상은 1972년 1월 13일생[8] 우리가 아는 유행하는 인사법의 그 사람(전지현, 전지윤) 맞는다.[9] KOF 시리즈에선 시공이 꼬여서 생일만 같고 연도는 다르다.[10] 1988년 기준. TVA에서는 1970년생. 일단 별자리가 물병자리라는 공식 설정이 있어서, 1월 21일 ~ 2월 18일 사이인 빠른 생일 확정.[11] 마곳 킴의 어머니.[12] 그를 고자로 총으로 쏜 김두한이 사망한 년도보다 1년 빠르다.[13] 사사 <몽고식품 100년의 발자취>에 따르면, 음력으론 11월 7일이라 한다.[14] 70~80년대 KBS 대표 여자 탤런트로 활약한 한혜숙의 첫 주연작이자 출세작[15] TV드라마 편람에 따르면 1971년 방영된 일일연속극 중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같은 해 개봉한 영화 화녀와 함께 장희빈 역의 윤여정을 톱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한 드라마.[16] 1971년 방영 개시 이래 꾸준히 인기를 모으다가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17] 노래 자체는 이전부터 있었고 이때 정식으로 앨범이 발매되었다.[18] 최초 발표는 1960년[19] 1971년 방영 개시 이래 꾸준히 인기를 모으다가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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