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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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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움직이는 100가지 심리법칙

가 믿음

믿음과 믿음이 충돌할 때

[ Alief , かり- ]

진화론과 창조론 둘 중 어떤 쪽을 믿으시나요?

기독교 신자이자 동시에 의사인 저로서는 상당히 당혹스러운 질문입니다. 개인적 차원에서야 그냥 고개를 갸우뚱하고 넘어가면 될지도 모르지만, 정치와 교육의 문제로 비화되면 더 이상 그냥 묻어둘 논제는 아닌 듯합니다.

양 진영의 다툼은 1925년 미국 테네시 주에서 입법된 소위 ‘버틀러 법(Butler law)’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테네시 주 의원들은 진화론을 우생학과 유사한 위험한 주장이라고 생각했고, 이에 적어도 공립학교에서는 진화론 교육을 금지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교에서 생물을 가르치던 선생님이자 원래 법학을 전공했던 존 스코프스(John Scopes)와 동료들은, 버틀러 법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재판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전 미국의 언론이 이 사건에 주목했습니다. 이 사건은 기독교 전통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보수파와, 신앙과 과학은 별개라는 진보파 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빚어냈습니다. 이 사건을 소재로 제작된 영화 〈신의 법정(Inherit the wind)〉에서, 변호를 맡은 클래런스 대로(Clarence Darrow)는 검사에게 “태양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어떻게 하루를 측정할 수 있었습니까? 지구가 태양 주위를 회전하는데, 어떻게 여호수아는 태양에게 멈추라고 명령할 수 있었습니까?” 등 날카로운 질문을 쉬지 않고 던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원숭이 재판(Monkey trial)’이라는 오명을 쓴 채, 스코프스를 비롯한 진보파들이 패소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진화론 교육을 금지하는 법률이 위헌이라는 미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지는 1968년까지,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은 적어도 테네시 주에서는 여전히 불법이었던 것입니다.

2005년 펜실베이니아 주 도버에서는 시 교육위원들이 창조론의 한 변형인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 theory)을 진화론과 동일한 시간만큼 가르쳐야 한다는 조례를 통과시키려 하였습니다. 이에 반발한 교사와 학부모들이 소송을 제기하였고, 도버 시는 역시 이를 놓고 양 진영으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2005년 펜실베이니아 주 법정의 존 존스(John Johns) 판사는 지적설계론이 창조론의 변형에 불과하다며, 과학적 가설이 아닌 이상 진화론과 동등한 수업시간을 배정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결하였습니다. 원숭이 재판의 당사자인 스코프스가 기대했음 직한 판결은 무려 80년이 지난 후에나 내려진 셈입니다.

이러한 양 진영 간의 갈등은 맹목적 종교와 인간의 오만이 아마겟돈적 대결을 벌이는 것이라고 부풀려 선전되기도 하지만, 저를 비롯한 평범한 많은 사람들은 왜 굳이 두 이론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지 의아해합니다. 종교적 삶을 살 때는 하나님의 따뜻한 창조의 손길을 24시간 느끼며 살지만, 과학적 삶을 살아야 할 때는 137억 년 전 빅뱅을 통해 우주가 태어났고, 단세포 생물에서 인간까지 진화한 것을 믿습니다. 그뿐입니다. 두 가지 삶이 서로 얽혀서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방해하지는 않습니다.

〈톰과 제리〉라는 만화영화에서, 서로 원수지간인 두 주인공은 절벽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쇳덩이에 맞아 납작해지기도 하며, 감전되어 털이 다 타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열광하는 이 만화를 보면서 지극히 폭력적이고 잔인하다며 노발대발하는 부모는 본 적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술좌석에 모인 직장인 중 한 사람이 천안함 사건은 전쟁을 원하는 미국과 우리나라 정부의 자작극이라고 핏대를 올리면 모두들 고개를 끄떡거리며 맞장구를 치면서도, 다음 날 아무도 여당 타도에 앞장서지 않고 반미 시위에 나서지도 않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믿음(belief)이란 한 개인이 갖고 있는 마음의 상태로 어떤 상황에서나 일관되게 유지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등 그리스 철학자들은 신념의 일관성을 올바른 삶의 초석으로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위에서 든 예들과 같이 우리는 상황에 따라 서로 지극히 상반된 믿음을 보여주면서도 아무런 혼란을 느끼지 않습니다. 부모의 걱정과는 달리 어린아이들도 이야기 속의 상황과 현실의 상황을 혼동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있을 때와 학교에서 있을 때 각각의 상황에서 어떤 믿음을 갖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으며, 심지어 누구와 함께 이야기하느냐에 따라서도 다른 믿음, 다른 세계관을 구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태신앙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할지도 시험 문제에 “우주는 6,000년 전에 창조되었다”라는 지문이 나오면 틀렸다고 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가(かり) 믿음(alief)이란 개념을 도입합니다. 이는 원래 예일 대학의 철학교수인 타마르 젠들러(Tamar Gendler)가 이성에 입각한 믿음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믿음들 사이의 긴장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만든 용어입니다.

만약 영화 속에서 주인공의 손과 발이 잘려나가는 끔찍한 장면을 보게 된다면, 모든 것이 특수효과라는 것을 알면서도 몸서리가 쳐지고 가슴이 오그라드는 경험을 합니다. 영화 속 상황에서의 가믿음과 영화 외적 현실에서의 믿음이 충돌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스스로 인종 편견이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도(믿음), 막상 동등한 경력의 백인과 흑인 중에서 직원을 뽑을 때는 백인을 선택합니다(가믿음).

이러한 가믿음들은 국한된 상황에만 적용된다는 점에서 일반적 믿음과 궤를 달리합니다. 영화나 책을 읽을 때의 가믿음은 그 맥락에서만 적용되어야 합니다.

2012년 지구 멸망에 대한 이야기를 신나게 읽고 나서, 실제로 지구가 멸망하면 어떻게 하나 자나 깨나 걱정한다면 지나친 것이겠지요. 마치 일부 천문학자나 SF 작가들이 이야기하는 평행세계(parallel universe)처럼, 인간은 사회적, 심리적 상황들이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다양한 세계에 동시에 발을 걸치고 있으며, 그 각각에 대해 다른 믿음을 견지할 수 있습니다.

반면 SF 소설 속에서 평행세계가 서로 겹쳐지면 재앙과 혼란이 뒤따르듯이, 이러한 가믿음이 적절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서로 얽히면 불필요한 갈등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며 병역을 거부하고, 당장 수혈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운 자식에게 수혈을 허락하지 않아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아무리 참된 종교인이라 해도 윤리적 비난과 형사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이렇게 서로 충돌하는 가믿음 사이의 혼란은 점점 더 잦아지고 있습니다. 술좌석에서 분위기 띄우려 던진 이야기는 다음 날 소셜 사이트에 도배가 되어 당사자를 곤경에 빠뜨립니다. 호기심에 친북 사이트에 가입했다는 현역 장교들은 자신이 의식도 못하는 사이에 중요한 정보들을 빼돌리는 데 이용됩니다. 요새는 테러리스트라는 말이 종교적 근본주의자와 동등하게 사용되기도 하는데, 소위 근본주의자란 종교적 믿음을 정치, 사회현상에 곧이곧대로 적용시키려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들 역시 믿음과 가믿음 사이의 충돌 속에 혼란에 빠져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제대로 길을 잃지 않고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많은 교조와 신념, 가르침, 법 등을 수용하고 이에 따르겠다고 결정할 때, 각각이 어떤 맥락과 어떤 상황에서 적용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철저한 숙고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진실된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건 적용되고 실천되어야 한다는 강요도 지양되어야 합니다. 진화론 아니면 창조론 중에서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그러한 강요와 억압에 해당합니다. 다윈 역시 평생 기독교 신앙을 잃지 않았고 독실한 신자였던 부인의 영향하에 자신의 이론과 신앙을 조율하는 데 애썼지만, 후대 사람들은 그에게 기독교 신자의 지위를 허락하는 데 인색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이 좀 더 합리적이고 관용적이 되어간다면 그렇게 인색하게 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출처

제공처 정보

  • 지음 정성훈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모교 부속병원에서 정신과 수련생활을 마쳤으며 이후 동국대학교 일산병원 정신과 부교수, 인천광역시 의료원 정신과장을 거쳐, 현재는 대전 을지대학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본업은 진료와 연구를 하는 의사이지만, 세상의 모든 학문은 인간 정신의 이해에 필수불가결하다는 신넘하에 의학 및 뇌과학을 비롯하여 문학, 철학, 사회학까지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두고 있다. 연구자로서는 정신분열병을 비롯한 주요 정신질환의 정신약물학 및 유전자 연구에 주력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미디어 과잉 사회에 적응해나가는 인간의 인지 및 심리기전 변화와 그 병태생리를 밝히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역서로는 ≪마음의 증상과 징후≫가 있으며, 저서로는 ≪비정형 항정신병제의 임상≫, ≪클로자핀 임상사용의 실제≫, ≪리스페리돈 장기지속형 주사제≫가 있다. 자세히보기

  • 제공처 케이엔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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