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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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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옷 뒷면

활옷 뒷면 봉황 한 쌍과 모란꽃이 화려하게 수놓여 있다.

조선 중기와 후기에 여자의 혼례복으로 많이 사용한 것은 활옷과 원삼이다. 특히 활옷은 공주와 옹주의 대례복으로서, 서민에게는 혼례 때에 한하여 사용이 허락되었다. 활옷에는 다홍색 비단에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이성지합 백복지원, 수여산 부여해(せいごう ひゃくぶくみなもと, ことぶき如山 とみ如海)”라는 덕담이 쓰이고 앞길과 뒷길과 소매에는 장수와 길복을 뜻하는 모란꽃, 연꽃, 물결, 불로초, 어미봉, 새끼봉, 호랑나비, 동자(童子どうじ) 같은 문양이 화사하게 수놓였다. 혼례를 치를 때에는 활옷을 입고 화관을 썼으며, 갖가지 용잠이나 봉잠 비녀로 장식했다.

혼례는 의혼(こん), 문명(といめい), 납길(おさめきち), 납징(おさめちょう), 청기(請期), 친영(おやむかえ)의 육례로 이루어졌다. 그 절차가 복잡하여 헌종 10년(1844년)에 의혼, 납채(納采のうさい), 납폐(おさめぬさ), 친영으로 간소화했다.

의혼은 혼인 상대를 구하여 혼인을 합의하는 과정으로 남자는 열다섯 살 이상, 여자는 열두 살 이상이면 의혼할 수 있었다. 양가에서 혼인에 합의하면 신랑의 사주를 적어 신부 집에 보냈는데, 이를 납채라 했다. 사주를 받은 신부 집에서는 혼인날을 정해 신랑 집에 적어 보냈다.

혼인날이 정해지면 신랑 집에서 혼서(こんしょ)와 혼수(こん需)를 담은 함을 신부 집에 보냈는데, 이를 납폐라 한다. 혼서는 정식으로 예를 갖추어 혼인했다는 증거인 동시에 일부종사의 절개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자가 일생 동안 보관했고, 죽은 뒤에 관에 넣어 주는 풍습이 있었다. 혼수는 대개 청홍의 비단 치마 저고리 한 벌씩이었는데, 청색 비단은 붉은 종이에 싸서 청색 명주실로 맸고 홍색 비단은 청색 종이에 싸서 홍색실로 묶었다. 함에는 이 밖에 씨가 있는 목화송이와 팥을 넣은 주머니를 넣어 자손 번창을 기원했다. 함은 혼례 전날 밤에 함진아비가 등불을 앞세우고 가져왔고, 신부 집에서는 대청에 자리를 깔고 떡 한 시루를 준비해 놓고 함을 받았다.

유득공의 『경도잡지』에 혼례 행렬에 대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신랑은 흰 말을 타고 보랏빛 비단 단령(だんりょう)을 입으며 서대(さいたい)를 띠고 복시(ふく翅) 사모(しゃぼう)를 쓴다. 청사초롱 네 짝을 들고 앞에 늘어서서 가고 안부(かりおっと)는 주립(しゅかさ)에 흑단령 차림으로 기러기를 받들고 천천히 앞서 간다. 신부는 황동정(黃銅こうどういただき) 팔인교를 타고 사면에는 발을 드리운다. 청사초롱 네 짝이 앞서 가고 혼수를 들고 가는 사람 한 쌍, 대추와 포, 옷함, 경대, 부용향을 받든 열두 명의 계집종이 정장 여복 차림으로 짝을 지어 앞에서 인도한다. 유모는 검은 비단의 멱라를 쓰고 말을 탄 채 뒤를 따라간다. 또한 이예(吏隸 : 관아에 딸린 종)를 써서 혼행(こんぎょう)을 호행(まもるぎょう)시킨다.

친영은 신랑이 신부 집에서 초례(醮禮)를 올린 뒤 신방을 치르기까지의 과정이다. 초롓날 신부는 짙은 화장을 하고 혼례복을 갖춰 입고, 눈썹에 왜밀(やまとみつ)을 발라 눈을 막아 버려 보지 못하게 했다. 모든 거동을 수모(はは)가 부축하며, 불시에 뒷간에라도 가야 하는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식음을 하지 않았다. 신방을 치른 다음 날이나 사흘 후에 신랑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갔다. 이를 우귀(于歸) 또는 신행(しんくだり)이라 했다. 예전에는 달묵이, 해묵이라 하여 몇 달 또는 일 년 뒤에 가기도 하였으나, 사흘 만에 가는 경우가 가장 흔했다.

신랑 집에 도착하여 신부는 시부모께 인사를 드리는데 이때 친정에서 마련해 온 대추, 밤, 술, 약포 등으로 폐백상을 차렸다. 시댁에서 새사람으로서의 예를 치른 신부는 사흘 또는 일주일 뒤에 신랑과 함께 친정으로 갔다. 이를 재행(さいくだり)이라 하고 대개 사흘 동안 머무르며 처가의 친척과 마을 어른께 인사를 다녔다. 다시 시집으로 돌아가 시집살이를 하다가 추수가 끝나면 햇곡식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친정을 찾았는데, 이것이 근친(覲親)으로 이틀이나 사흘 동안 머물렀으나 집안이나 지방에 따라 일 년 또는 첫아이를 낳을 때까지 살기도 했다. 이로써 정식으로 예를 갖춘 혼례 절차가 끝나고 신부는 일생을 시집에서 살게 된다.

활옷(앞)

활옷(앞) 원래는 궁중 예복이지만 민가에서는 혼례 때에 한해 입을 수 있었다.(19세기)

활옷(뒤)

활옷(뒤)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이옥(李鈺)이라는 여인이 신혼 시절을 시로 남겼는데, 조선 여인의 삶을 읽을 수 있기에 소개한다.

활옷 본문 이미지 1

신랑은 목안(かり)을 쥐고
신부는 건치(いぬい雉)를 쥐었으니
그 꿩이 울고 그 기러기 날 때까지
두 정 그치지 않으리

복 있는 손으로 홍사배(べにいとさかずき) 들어
낭군에게 권하나니 합환주를
첫 번 잔에 아들 낳고
세 번 잔에 오래 사네

시어머님께서 예물 주시니
한 쌍 옥동자에
끼어 보자는 말도 못 하고
보에 싸 장 속에 넣었네

사경에 일어나 머리 빗고
오경에 시부모님께 문안 올릴 제
기왕에 시집왔으니 다짐하기를
침식 잊고 힘쓰리라고

사람들은 다 비단 바느질을 꺼리나
나는 병정 옷 그 바느질 중히 하리
농부는 가문 밭에 호미질하고
가난한 집 부녀는 베를 짜는데

임은 흰 말 타고 장가왔고
나는 붉은 가마 타고 시집갔네
어머님이 문에 나와 분부하되
시부모님 잘 모시라 하시네

누에 쳐 주먹만 하매
뜰아래에 가 뽕을 따네
동해주(東海とうかいつむぎ) 없는 바 아니로되
몸소 쳐 보고 싶어 치노라

임의 옷 짓고 깁다가
꽃내음이 서리어 시들해지는 때면
굽은 바늘 옷섶에 꽂고
앉아서 숙향전을 읽는다

초록 상사단(相思そうし緞)1)을 베어 내어
쌍침(そうはり) 바느질로 귀주머니 지었네
손수 세 겹으로 접어
얌전히 손을 내어 임에게 바치도다

사람들은 다 그네놀이 하는데
나는 홀로 그 틈에 못 끼누나
팔의 힘 여리다 들었거니
옥룡 비녀 떨구면 나는 어이리

해 무늬 고운 보에 싸서
피죽상에 간직한 옷감
밤에 임의 옷 마르니
손에도 향기, 옷에도 향기로다

진홍빛 화포(はなぬの) 요에
아청빛 토주(つむぎ) 이불일레
게다가 운문단(くももん緞)인데
황금빛 거북이 네 귀를 눌렀도다

관련이미지 2

활옷

활옷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소장. 겉길에는 연화, 모란, 봉황, 원앙.나비와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의 문양과 인간의 소망을 표현한 문자를 수를 놓은 가례 때 착용하던 조선시대의 여자 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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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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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처 정보

자수의 역사와 바느질 도구, 수베겟모 꽃신 부채 수댕기 등 생활용품에 나타난 자수, 병풍자수와 불교자수, 비녀, 한지공예, 누비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규방문화의 면면을 컬러사진과 함께 자세히 소개했다. 자세히보기

  • 저자 허동화

    1926년생으로 동국대 법학과 및 동 대학원 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 Linda Vista Baptist 대학에서 명예 인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사전자수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사전자수연구소 소장, 한국박물관협회 회장, 문화재 전문 위원을 맡고 있다. 문화훈장 보관장, 국무총리 표창, 문화부 장관 표창, 국가 유공자증을 받았으며 『한국의 자수』로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을, 『옛 보자기』로 한국출판문화상 제작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는 『한국의 자수』, 『세상에서 제일 작은 박물관 이야기』, 『한국의 고자수』(일문판), 『규중 공예』(영문판), 『옛 보자기』(국ㆍ영문판), 『이렇게 예쁜 보자기』(전2권) 등이 있다.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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