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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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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2009. 1. 20. 책보러가기

리처드 카벤디쉬 외 2인 마로니에북스

  • 도요토미 영주들이 지었던, 재건된 성채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오사카 성의 당당한 주탑은 16세기의 원래 건물을 20세기에 복원한 것이며, 이 또한 21세기에 들어 한 차례 보수된 것이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사카 성은 여러 차례의 변모를 겪었으며, 이는 건축적인 면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면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오사카 성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도요토미 오사카 성과 도쿠가와 오사카 성이 그것이다. 1583년, 봉건 군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옛 이시야마 호간사가 서 있던 부지에 권력의 상징으로 오사카 성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이 성은 오다 노부나가의 아즈치 성을 모델로 삼았지만, 보다 더 웅장한 규모에 금으로 덮여 번쩍였다. 이 성은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 원정을 나가는 데에 본거지 역할을 했다. 히데요시가 죽고 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력을 일으켜 1603년 쇼군 정치를 열었다. 도쿠가와가 이끄는 세력은 오사카에서 '오사카 포위 공격'이라 알려진 일련의 전

  • 2세기부터 유래하는, 유태인과 기독교도의 고대 지하 무덤 1세기부터, 개종한 유태인으로 간주되었던 기독교도들은 종종 로마 영토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매장되었다. 바위를 대충 다듬어 만든 무덤으로 이는 팔레스타인의 바위 무덤을 연상시켰다. 죽은 이를 성벽 안에 묻는 것은 로마의 법에 어긋났으므로 이러한 묘지는 성벽 외부에 있었다. 성 베드로가 바티칸 언덕에 있는 커다란 공동묘지에 묻혔고 성 바울이 '오스티엔세 길'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힌 것도 이러한 연유이다. 2세기부터, 로마의 기독교도들은 이러한 방법을 유지했고 지하에 공동 매장 공간을 두는 풍습을 물려받았다. 육신은 언젠가 부활하게 되므로 로마의 관습에 따라 화장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 때문에 공간 부족 문제가 일어났는데, 지상의 묘지가 드물고 비쌌기 때문이기도 했다. 해결책은 지하 통로, 방, 이들을 서로 이어 주는 계단으로 이루어진 광대한 지하 네트워크를 만들고, 수백 마일 길이의 회랑에...

  • 검투사들의 대결과 호화로운 구경거리가 펼쳐지던 거대한 로마의 원형 경기장 로마의 콜로세움은 70년경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80년에 건축이 끝나 100일 축제 기간 동안 그의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개막식을 올렸다. 온천 침전물 대리석으로 건축된 이 커다란 원형 건물은 처음에는 플라비아누스 원형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이곳에서 열리는 검투사 경기를 보러 찾아드는 5만 명 가량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경기장은 또한 해상 전투를 재현하거나 고전극을 상연하는 무대로도 사용되었다.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 포로들 중에서 운동 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게 잘 싸우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서로 결투를 벌이거나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사냥해 보여 로마 관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검투사가 되면 이득도 있었다. 다른 노예들보다 생활환경이 훨씬 나은 군대식 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 미국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곳 목가적인 풍경의 오아후 섬은 제임스 쿡 선장이 1778년 세 번째로 태평양 탐험을 떠났을 때 그의 선원들이 가장 먼저 발견한 곳이다. 이 섬은 아름답고 풍부한 문화와 전설이 깃든 곳이지만, 이곳이 그토록 중요한 장소인 것은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주요한 미 해군 기지와 조선소가 있는 진주만이 바로 오아후 섬에 있으며,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무렵 일본군은 진주만에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 진주만은 19세기 이전까지 풍부하게 나던 진주를 만들어 내는 굴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이곳은 물이 얕기 때문에 원래는 항구로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미군의 방어 기지를 건설하기에 위치가 완벽했고, 1887년 미국은 이 지역에 대한 독점 권한을 획득했다. 준설 작업이 시작되었고 1908년에는 미 해군 기지와 조선소가 건설되었다. 이 조선소는 현재 이러한 해군 시설로써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이전에는 그리 알려져 있지 않던 진

  • 명조와 청조의 궁전 단지로 1407년부터 있어 왔다 명조와 청조의 황제 궁전인 자금성의 건축은 1407년에 시작되었으며, 20만 명이라는 엄청난 사람들이 고생한 끝에 14년이 걸려 완공되었다. 황제의 권력과 위엄을 상징하기 위해 설계된 자금성은, 천제(天帝てんてい)의 거처와 동등한 지상의 등가물이라 여겨졌다.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황제의 허가 없이는 그 누구도 안으로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직사각형 모양의 건물 단지는–각 변에 주 성문이 나 있다–깊이 6m의 해자와 높이 10m의 벽에 둘러싸여 있다. 총 넓이가 약 72헥타르에 이르는 자금성 안에는 약 800채의 건물과 8,880개의 방이 있는데, 방의 개수가 좀 더 그럴싸한 숫자인 9999개라고 나와 있는 자료들도 있다. 이 건물들 중에 다섯 채의 커다란 전당과 열일곱 채의 궁전이 있었다. 자금성은 두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남쪽 구역, 즉 '전조'(ぜんあさ)는 황제가 매일의 정무를 보는 곳이었고, 황제와 그 가족

  • 브루넬레스키의 유명한 돔 지붕이 얹혀 있는, 한때는 세계 최대였던 성당 두오모, 혹은 피렌체 대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바실리카는 현재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밀라노 대성당에 뒤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성당이다. 그러나 이 바실리카가 처음 지어졌을 때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3만 명의 신도를 수용할 수 있었으며 피렌체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지배력을 상징하던 곳이었다. 성당을 짓는 작업은 1296년에 시작되었으나, 축성을 받은 것은 1436년에 이르러서였다. 이 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화려한 녹색과 붉은색, 흰색의 대리석 파사드, 르네상스 거장들 그림과 조각 작품 컬렉션,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돔 덕분에 명성이 높다. 이곳은 또한 1439년부터 피렌체 의회가 있었으며, 종교 개혁가이자 '허영의 소각'(죄가 된다고 여겼던 사치품과 이교도적인 미술품, 책 등을 공개적으로 불태운 사건)의 주동자 지롤라모...

  • 잉카인들이 거주했으며 버렸던 흥미로운 도시 거주지 흔적만 남은 놀라운 도시 마추픽추는 잉카 제국이 그 전성기에 다다랐던 1400년에서 145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사람이 거주했던 것은 한 세기가 채 안 되는 기간이었던 듯하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골의 숫자로 미루어 보아 마추픽추는 희생 제물을 바치는 장소였다는 추측이 선다. 유골의 대부분은 젊은 여자의 것이다. 이곳에 있는 많은 신전과 종교적인 장소는 마추픽추가 잉카인들에게 영적인 중요성을 지닌 장소였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오늘날 마추픽추를 방문하는 현대의 관광객들도 마추픽추에는 종교적으로 의미 심장한 분위기가 깃들어 있다고 묘사하곤 한다.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라 알려진 마추픽추는 바로 전설적인 도시 '엘도라도', 스페인 정복자들이 덧없이 찾아 헤매었으나 결코 발견해낼 수 없던 도시였을 거라는 추측도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마추픽추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원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 아직은 결실을 맺지 못한 가우디의 '사랑의 수고' 카탈루냐가 낳은 가장 유명하며 아마 가장 사랑받는 아들일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이 코르네트는 순전히 진심에서 우러난 마음으로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가족 성당)을 건축했다. 그는 자신의 역작이 될 만한 건물이자 종교적인 믿음의 발현 행위이기도 한 이 성당을 짓기 위해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일을 모두 포기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가 되도록 건물을 설계했으며, 건설 자금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기부를 통해서만 충당되고 있다. 1883년에 건축이 시작되었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가우디 사후 100주년이 되어야 완성될 거라고 예측하지만, 과연 그럴지조차 논란에 싸여 있다. 건물이 가우디의 원래 설계안대로 완성될 수 있을지도 상당히 모호한 문제인데, 스페인 내전 동안 가우디의 드로잉을 보관하고 있던 작업실이 불타 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류 예술가...

  • 방문객들이 물속에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비는 바로크 양식의 분수 높이 26m, 너비 20m로 우뚝 서 있는 폰타나 디 트레비(트레비 분수)는 로마의 트레비 구역에 있는 자그마한 폴리 궁전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이 분수는 폴리 궁전의 파사드를 배경으로 하여 웅장하게 위치하고 있는 그 극적인 형태로 바로크 양식을 보여 주는 훌륭한 예이다. 분수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로마에서 22㎞ 떨어진 살로네 샘으로부터 오는데, 기원전 19년에 세워진 '아쿠아 비르고' 수도교를 통해 운반된다. 분수를 짓자는 생각은 1629년에 등장했다. 교황 우르바노 8세는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잔로렌초 베르니니에게 몇 가지 디자인을 고안해 달라고 명했다. 베르니니는 분수의 위치로 당시에는 교황이 거주하던 곳이었으며 지금은 이탈리아 대통령의 공식 거처인 건물 맞은편에 있는 광장을 선정했다. 그러나 1644년 교황이 사망하면서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가 교황 클레멘스 12세가...

  • 옛 기념물에 남아 있던 부분이 통합된, 312년에 세워진 개선문 이 웅장한 개선문은 로마의 손꼽히는 명소 중 하나로, 로마 황제들이 축하 행렬을 벌일 때 택했던 오래된 길인 '비아 트리움팔리스'에 서 있는 주요 유적이다. 이 개선문은 티투스 개선문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과 더불어, 고전기 로마 시대부터 온전한 상태로 살아남은 세 개의 로마 개선문에 속한다. 이는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로마 황제라 알려지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바로 외부에서 벌어진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312)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이 승리로 인해 그는 서로마 제국의 단일한 지배자가 되었으며 기독교 세력이 성장하는 데에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이 인상적인 건축물의 높이 21m, 너비 25.7m, 두께 7.4m이다. 개선문의 아래쪽은 콘스탄티누스가 전리품들과 더불어 지나갔을 육중한 중앙 아치와 사이드 아치, 대리석으로 된 지지 교각, 코린트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티카

  • 종합적으로 필요 시설을 완비한 지하 도시 중앙 아나톨리아의 카파도키아에 있는 황량한 평원 아래에는 이 지역의 특징인 부드러운 화산암 속에 파서 세운, 완전한 도시들이 숨겨져 있다. 이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데린쿠유인데, 이 도시에는 2만 명에서 3만 명의 사람들이 살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터널과 동굴들은 4천 년이나 그 전에 처음으로 파였던 듯하며, 기원전 700년에는 그 안에 많은 이들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 분명하다. 이 지역의 기름진 화산성 토양에서 경작을 하기 위해 왔던 정착민들은 혹독한 날씨를 피해 기꺼이 지하로 들어가 보호를 받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쳐들어오는 적들로 인해, 노출된 위쪽 땅이 여러 차례 히타이트와 트라키아인, 기독교도와 무슬림의 싸움터가 되면서 지하에서의 생활은 점점 더 영구적인 방편이 되어 갔을 것이다. '깊은 우물'이라는 의미를 지닌 데린쿠유는 8층까지 내려가며, 아마 더 깊은 층들이 있을 것이다(아직 완전히 발굴해 낸...

  • 중세 고딕 양식을 보여 주는 뛰어난 대성당 세비야 대성당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일 뿐 아니라, 고딕 양식을 보여 주는 뛰어난 건물이다. 성당이 서 있는 자리에는 본디 알모아데 모스크가 있었으나, 스페인 사람들은 세비야가 누리고 있던 부유한 무역 중심지라는 위치를 반영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웅장한 규모의 성당을 짓기 위해 모스크를 허물어 버렸다. 건축은 1400년경 직사각형의 모스크 토대를 기반으로 시작되었으며, 완공되는 데에는 100년 이상이 걸렸다. 원래의 모스크에서 남아 있는 부분은 '파티오 데 로스 나란호스'(오렌지 나무 안뜰)라는 이름의 현관 안뜰뿐인데, 한때는 이슬람 신도들이 샘에서 손과 발을 씻던 장소였으며 1184년에서 1196년까지 미나레트가 세워지기도 했다. 1198년에는 미나레트 꼭대기에 구리로 만든 네 개의 구체(球體きゅうたい)가 올라갔으나 1356년 일어난 지진으로 파괴되고 말았다. 성당이 지어지는 과정에서 옛 미나레트에는 종이 설치되고...

  • 1700년 동안 잿더미에 파묻혀 있던, 완벽하게 보존된 그리스-로마 도시 서기 79년 8월 24일 정오 무렵, 베수비우스 화산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화산 쇄설물이 폼페이 시에 비 오듯 쏟아졌고, 다음 날에는 타는 듯한 뜨거운 가스의 구름이 휩쓸었다. 건물들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압사하거나 질식사했으며, 도시는 재와 화산암 더미 밑에 파묻혀 버렸다. 몇 세기 동안 폼페이는 재로 된 장막 아래, 밑에 깔린 잔해가 완벽하게 보존된 채 잠들어 있었다. 1700년대에 이 도시가 마침내 발굴되자 전 세계가 경악했다. 약 2만 명의 주민이 살았던 그리스-로마 도시가 시간의 흐름을 넘어 그대로 얼어붙은 채 남아 있었던 것이다. 훌륭한 포럼과 원형 극장 등 커다란 공공건물들이 서 있었다. 기원전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호화로운 저택과 온갖 종류의 집들도 있었다. 내부에는 폭발을 피해 집으로 숨은 사람들의 유해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달아나던 모습 그대로 묻혔으며,

  •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과 어깨를 견주도록 건설된, 키이우의 비잔틴 성당 10세기 말, 키이우 대공인 블라디미르는 바이킹이 서쪽으로, 그리고 동쪽의 다른 러시아 영토들로 진출하며 가하는 위협을 알아채고서, 세례를 받고 콘스탄티노플의 무시무시한 통치자인 바실리우스 2세의 누이와 결혼을 함으로써 비잔틴 제국과의 유대를 강화하기로 했다. 블라디미르의 아들인 야로슬라프 현공은 1017년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모방한, 그리고 그와 어깨를 견주고자 하는 키이우의 성 소피아 대성당을 세워 이 새로운 유대를 굳건하게 다졌다. 성 소피아 성당의 가장 위풍당당한 자랑거리는 열두 개의 돔에 둘러싸인 중앙 돔으로, 이는 예수와 열두 사도를 상징한다. 내부도 마찬가지로 웅장한데, 260㎡ 넓이의 모자이크와 3000㎡ 넓이의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장식에는 '수태 고지', '기도하는 성모 마리아', '사도들의 영성체' 등의 장면이 찬란하게 나타나 있으며...

  • 모든 신에게 바쳐진 신전이며, 웅장하고 여전히 제 모습을 간직한 돔으로 유명한 곳 로톤다 광장에 있는 판테온은 로마 건축 기술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여겨지는 돔으로 유명하다. 습지의 지반에 세워졌지만 2천 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특히 대단하다. 판테온 안에는 화강암과 노란 대리석으로 된 바닥이 깔리고 반구형 돔이 있는 커다란 원형 방이 있다. 이 원형 홀에서 43.3m 높이의 돔 꼭대기까지는 반구의 지름과 정확히 일치하며 완벽한 반구형을 이룬다. 돔 꼭대기에 있는 '커다란 눈'(오쿨루스)이라는 이름의 둥근 천창을 통해 자연광이 들어온다. 판테온은 120년경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예전에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인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기원전 27년에 지었던 신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아그리파의 건물은 화재로 80년에 파괴되었으나, 하드리아누스가 지은 우아한 건물의 현관 위편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 건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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