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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쟁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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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쟁 2012. 3. 15.
  • 제1차 연평해전(1999. 6.15)과 제2차 연평해전(2002. 6.29)은 북한군이 서해 연평도 인근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대한민국 영해를 침범해서 발생한 해상전투입니다. 제1차 연평해전에서는 우리 함정을 공격하는 북한 함정 10척을 대한민국 해군이 14분 만에 격퇴시켰습니다. 제2차 연평해전은 북한 경비정의 기습공격으로 최초의 참수리 357호정이 침몰했으며, 해군 병사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2차 연평해전 희생자 부조

  • 1987년 건조되어 1999년 6월 15일 제1차 연평해전에도 참가했던 역전의 초계함 천안함이 2010년 3월 26일 21:22경 북한 잠수함의 어뢰공격으로 침몰되었습니다. 당시 북한의 불법 기습공격으로 이창기 준위를 비롯한 46명의 젊은 용사들이 희생되었으며, 구조과정에서 한주호 준위가 순직하였습니다. 천안함 인양장면

  • 1996년 대한민국에 침투했다가 좌초된 북한 잠수함이 강릉 해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때 우리나라 내륙으로 침투한 북한 공작원 14명은 국군과 경찰이 예비군과 함께 펼친 합동작전에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모두 소탕되었습니다. 좌초된 당시의 잠수함은 현재 강릉통일공원에 전시되어 안보체험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강릉 해안에 좌초된 북한 잠수함 강릉통일공원에 전시된 북한 잠수함

  • 2010년 11월 23일 북한은 우리의 평화로운 섬마을 연평도에 170여 발의 포탄을 퍼부었습니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해오던 북한이 우리나라를 공격할 빌미를 만들기 위해 국군과 주한 미군의 육·해·공군 연합 호국훈련을 핑계로 평화로운 연평도를 포격했던 것입니다. 북한은 연평도 포격 이후에도 “역적패당에게 연평도 불바다와는 대비도 되지 않을 강력하고 무자비하며 섬멸적인 징벌을 안기고야 말겠다”며 끊임없이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포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당시의 연평도

  • 6·25전쟁은 우리 민족이 치른 전쟁 중에서 가장 처참하고 피해가 컸던 전쟁이었습니다. 한국군(경찰포함) 62만 여 명과 유엔군 15만 여 명 등 77만 여 명이 전사, 부상, 실종되었고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이재민이 1,000만 여 명이 넘었습니다. 이는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가족을 잃거나 헤어진 사람들은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재산 피해도 추산이 어려울 정도로 컸습니다. 북한군에 밀려 마지막 교두보로 삼았던 부산을 제외한 전국토가 초토화되었고, 대한민국 제조업 42%가 파괴되었습니다. 군사작전에 이용될 수 있는 도로, 철도, 교량, 항만, 학교 등은 물론 개인 가옥도 대부분 파괴되어 사회 경제체제의 기반과 함께 국민의 생활터전이 황폐화되었습니다. 폐허가 된 수원성 폐허 속에 남겨진 아이들 폐허 속의 주민들

  • 북한은 1968년 특수요원 31명을 침투시켜 청와대 기습을 시도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정부 요인을 살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군과 경찰은 합동작전을 펼쳐 즉시 이들을 소탕하였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고 방위력 증강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체포된 북한 특수요원 김신조(좌측)

  • 북한군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UN군측 제3초소 부근에서 도끼로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하고 경비병 9명에게 중경상을 입혔습니다. 미군 6명과 한국군 5명이 민간노무자 5명과 함께 전방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제거하는 작업을 하던 중 북한군의 기습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 6·25전쟁 초기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되찾고 북진을 거듭하여 압록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이 참전하여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흥남부두를 통해 해상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이때 북한의 많은 주민들도 후퇴하는 유엔군을 따라 대한민국으로 내려왔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의 후퇴는 계속되어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북한군에게 서울을 내어주게 되었습니다. ‘1·4후퇴’ 당시 대부분이 주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혹독한 공산치하를 한 번 경험했기 때문에 집과 모든 재산을 버리고 고향을 떠났던 것입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굳세어라 금순아 피난을 가기 위해 흥남부두로 몰려든 사람들 무너진 대동강 철교 위로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

  • [소련과 중공이 승인하고 지원한 6·25전쟁] 북한의 김일성은 공산정권을 수립하자마자 남한을 적화 통일시키기 위해 전쟁준비를 시작하였고 소련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소련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북한에 주둔한 군사고문단과는 별도로 4,000여 명의 병력을 북한에 보냈습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 5일 소련을 방문하여 남침에 관한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하였고, 1950년 3월 30일 다시 소련을 찾아가 스탈린으로부터 ‘선제 남침’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소련에서 돌아온 김일성은 5월 13일 중공의 마오쩌둥을 찾아가 소련 스탈린과의 회담내용을 설명한 후 중공으로부터의 지원을 약속받고 마침내 6월 25일 남침을 결행하였습니다. [북한의 남침] 북한의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적으로 대한민국을 공격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이날 마침 일요일이라 대부분의 병력이 외출과 외박으로 병영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북한의 공격에 대비하지 않은...

  • 대한민국은 국가안보와 민족통일을 주장하며 정전협정 체결을 결사 반대하였으나 결국 38선 대신 휴전선으로 남북은 다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휴전선은 서쪽의 예성강과 한강 어귀의 낙도인 교동도에서부터 개성 남방의 판문점을 지나 중부의 철원과 금화를 거쳐 동해안 고성의 명호리에 이르는 248km(600리)의 길이로 한반도를 가로지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6·25전쟁 이전의 38선에 비해 서해안의 옹진군이 북한으로, 그리고 중동부의 철원·금화·인제·고성군의 일부가 대한민국에 넘어온 것으로, 38선은 국경 아닌 국경선이 되어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비무장지대(DMZ)와 민간인 출입통제구역] 휴전선(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각각 2km씩 공간을 두어 양측 병사들끼리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해 설치된 이 공간을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라고 합니다. 물론 이곳에서는 군사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 북한은 휴전선 비무장지대에 여러 개의 대한민국 기습용 땅굴을 파 왔습니다. 북한이 땅굴을 파기 시작한 1972년은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이라는 조국평화통일 3대 원칙을 담은 7·4남북 공동성명이 선언된 시기였습니다. 겉으로는 평화를 내세우며 속으로는 남침을 준비하는 북한의 태도를 땅굴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2땅굴(1975. 3.19) 제3땅굴(1978.10.17)

  • 1968년 120명의 무장공비가 강원도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하였습니다. 군·경은 물론 반공정신이 투철한 우리 주민들까지 나서서 무장공비 소탕작전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당시 평창군 속사초등학교 계방분교 2학년이었던 이승복 군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무장공비들에게 저항하다가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무장공비들이 잠입했던 당시의 마을

  • 2005년 2월 10일 핵무기 보유를 선언한 북한은 2006년 10월 제1차 핵실험을 시작으로 2017년 9월 제6차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감행하였습니다. 북한은 수시로 핵무기 실험과 미사일 발사 실험을 계속하며 한반도와 세계평화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Tip 북한의 경제는 폐쇄적 자력갱생 경제체제를 고집하고 선진기술과 외국자본의 도입을 막아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또한 GNP의 25% 이상을 군사비로 충당하고 있어 주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지 못한 주민들은 줄지어 북한을 탈출하고 있으며, 많은 어린 아이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북한의 현실입니다. 대포동 미사일 발사

  • 반만년 역사를 이어오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행복한 삶을 일궈온 우리 민족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기며 큰 불행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패망으로 빼앗긴 나라는 되찾았지만 우리 민족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쟁의 비극을 치르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나라를 되찾은 광복의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미국과 소련이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해 38도선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눠 진주했습니다. 이로써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일반명령 제1호일본군이 어디에서 누구에게 항복할 것인가에 대한 책임구역 할당 ① 만주,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 지역, 사할린 및 쿠릴 열도에 있는 일본국의 선임 지휘관과 모든 육·해·공군과 보조 부대는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에게 항복하라. ② 일본국과 일본국 본토에 인접한 모든 작은 섬,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국, 류큐 열도와 필리핀 제도에...

  • [우리의 해군] 21세기는 해양시대!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해양국가! 세계로 나가는 길은 바다에 있습니다. 바다를 지키면 번영하고 바다를 잃으면 위기에 빠집니다. 바다에는 언제나 우리 해군이 있습니다. 우리 조국, 우리의 바다! 대한민국 해군이 지킵니다. 5천 년의 바닷길을 지켜온 해군. 우리의 국난극복 역사 속에는 언제나 해군이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을 물리쳤고, 해상왕 장보고는 동북아 해상을 호령하였습니다. 대한민국 해군은 광복 직후에 발족한 해사대가 결성한 해방병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후 조선해안경비대를 거쳐 1948년 대한민국 해군으로 정식 발족하였습니다. 우리 해군은 21세기 해양시대를 맞아 국익수호의 핵심전력으로서 대양을 향해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불멸의 호국정신과 필승의 신념! 이것이 바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해군의 전통입니다. 해군의 어제와 오늘 해군의 힘, 대한민국의 미래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곧 바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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