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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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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7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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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전쟁기념관 https://www.warmemo.or.kr
  •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군을 섬멸할 때 펼쳤던 진(じん)으로 학(づる)의 날개[つばさ] 형태를 닮아서 학익진(つるつばさじん)이라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적은 수의 전투선을 가로로 넓게 펼쳐서 줄을 지어 쳐들어오는 많은 수의 왜군함을 격파시켰습니다. 왜군은 30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후손들이 패전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학익진을 비롯한 이순신 장군의 전략 전술은 현대 전술의 교범으로 삼을 만큼 오늘날에도 매우 과학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제1차 연평해전(1999. 6.15)과 제2차 연평해전(2002. 6.29)은 북한군이 서해 연평도 인근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대한민국 영해를 침범해서 발생한 해상전투입니다. 제1차 연평해전에서는 우리 함정을 공격하는 북한 함정 10척을 대한민국 해군이 14분 만에 격퇴시켰습니다. 제2차 연평해전은 북한 경비정의 기습공격으로 최초의 참수리 357호정이 침몰했으며, 해군 병사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2차 연평해전 희생자 부조

  • 1987년 건조되어 1999년 6월 15일 제1차 연평해전에도 참가했던 역전의 초계함 천안함이 2010년 3월 26일 21:22경 북한 잠수함의 어뢰공격으로 침몰되었습니다. 당시 북한의 불법 기습공격으로 이창기 준위를 비롯한 46명의 젊은 용사들이 희생되었으며, 구조과정에서 한주호 준위가 순직하였습니다. 천안함 인양장면

  • 연해주에서 동의단지회(同義どうぎだんゆびかい)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안중근은 1909년 10월 『대동공보』를 읽고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장성 대신 코코프체프와 협상을 벌이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안중근은 동지 우덕순 및 통역 유동하와 10월 22일 하얼빈에 도착한 후 지형을 정찰하고,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렸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안중근은 코코프체프의 안내를 받으며 도열한 의장대를 사열하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권총을 발사하여 그의 가슴과 옆구리와 복부에 명중시켰다. 그리고 큰 소리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삼창했다. 안중근의거는 일제의 한국 침략을 전 세계에 알린 쾌거였으며, 침체되어 있던 항일운동을 다시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 1996년 대한민국에 침투했다가 좌초된 북한 잠수함이 강릉 해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때 우리나라 내륙으로 침투한 북한 공작원 14명은 국군과 경찰이 예비군과 함께 펼친 합동작전에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모두 소탕되었습니다. 좌초된 당시의 잠수함은 현재 강릉통일공원에 전시되어 안보체험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강릉 해안에 좌초된 북한 잠수함 강릉통일공원에 전시된 북한 잠수함

  • 2010년 11월 23일 북한은 우리의 평화로운 섬마을 연평도에 170여 발의 포탄을 퍼부었습니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해오던 북한이 우리나라를 공격할 빌미를 만들기 위해 국군과 주한 미군의 육·해·공군 연합 호국훈련을 핑계로 평화로운 연평도를 포격했던 것입니다. 북한은 연평도 포격 이후에도 “역적패당에게 연평도 불바다와는 대비도 되지 않을 강력하고 무자비하며 섬멸적인 징벌을 안기고야 말겠다”며 끊임없이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포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당시의 연평도

  • 6·25전쟁은 우리 민족이 치른 전쟁 중에서 가장 처참하고 피해가 컸던 전쟁이었습니다. 한국군(경찰포함) 62만 여 명과 유엔군 15만 여 명 등 77만 여 명이 전사, 부상, 실종되었고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이재민이 1,000만 여 명이 넘었습니다. 이는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가족을 잃거나 헤어진 사람들은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재산 피해도 추산이 어려울 정도로 컸습니다. 북한군에 밀려 마지막 교두보로 삼았던 부산을 제외한 전국토가 초토화되었고, 대한민국 제조업 42%가 파괴되었습니다. 군사작전에 이용될 수 있는 도로, 철도, 교량, 항만, 학교 등은 물론 개인 가옥도 대부분 파괴되어 사회 경제체제의 기반과 함께 국민의 생활터전이 황폐화되었습니다. 폐허가 된 수원성 폐허 속에 남겨진 아이들 폐허 속의 주민들

  • 2002년 한일월드컵이 한창 진행중이던 6월 29일, 대한민국 축구팀이 터키 축구팀과 3, 4위 결정전을 벌이고 있을 때 서해 연평도 해상에서는 남북한 해군 간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하자 우리 해군이 참수리 357, 358호 고속정 2대를 출동시켜 경고방송을 하며 접근했으나 북한 경비정이 갑자기 참수리 357호에 85mm포를 발사하며 선제 기습공격을 함으로써 전투가 발생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 해군은 북한군을 물리쳤지만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으며 이 전투를 제2연평해전이라 합니다.

  • [소련과 중공이 승인하고 지원한 6·25전쟁] 북한의 김일성은 공산정권을 수립하자마자 남한을 적화 통일시키기 위해 전쟁준비를 시작하였고 소련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소련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북한에 주둔한 군사고문단과는 별도로 4,000여 명의 병력을 북한에 보냈습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 5일 소련을 방문하여 남침에 관한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하였고, 1950년 3월 30일 다시 소련을 찾아가 스탈린으로부터 ‘선제 남침’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소련에서 돌아온 김일성은 5월 13일 중공의 마오쩌둥을 찾아가 소련 스탈린과의 회담내용을 설명한 후 중공으로부터의 지원을 약속받고 마침내 6월 25일 남침을 결행하였습니다. [북한의 남침] 북한의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적으로 대한민국을 공격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이날 마침 일요일이라 대부분의 병력이 외출과 외박으로 병영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북한의 공격에 대비하지 않은...

  • 북한은 1999년 6월 7일부터 9일간 약 11회에 걸쳐 우리 해역을 침범하던 중 6월 15일 총 10척의 북한 함정이 소총사격과 함께 25mm 기관포를 발사하며 아군측 함정을 공격해오자 우리 해군은 40mm와 76mm 기관포로 응사하여 14분 만에 북한 함정을 격퇴하였습니다. 이 전투를 제1연평해전이라 말하며 전투결과 우리 해군의 사기와 전투능력이 북한에 비해 월등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싸우면 이긴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 이순신 장군은 왜 신호연을 만들었을까? ‘어떻게 하면 멀리 있는 군사들에게 빨리 명령을 전달할 수 있을까?’ 이순신 장군은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병사들에게 빠르고 정확하게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궁리를 거듭한 끝에 군사명령과 신호를 나타내는 다양한 연을 만들어 군사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늘 높이 띄웠다. 그리고 여러 모양의 방패연을 만들어 각각의 연이 나타내는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훈련시킨 결과 군사들은 신호연을 보고 이순신 장군의 명령을 받아 재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하늘에 연을 띄워 통신수단으로 사용한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략과 지혜로 조선은 왜적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연을 통해 명령을 내리는 용도로 사용했던 신호연은 이순신 장군의 호를 따서 충무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놀이기구로 사용되는 연에는 산, 반달과 같은 자연을 표현하는 무늬를...

  • 북한은 1968년 특수요원 31명을 침투시켜 청와대 기습을 시도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정부 요인을 살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군과 경찰은 합동작전을 펼쳐 즉시 이들을 소탕하였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고 방위력 증강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체포된 북한 특수요원 김신조(좌측)

  • 6·25전쟁 초기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되찾고 북진을 거듭하여 압록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이 참전하여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흥남부두를 통해 해상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이때 북한의 많은 주민들도 후퇴하는 유엔군을 따라 대한민국으로 내려왔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의 후퇴는 계속되어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북한군에게 서울을 내어주게 되었습니다. ‘1·4후퇴’ 당시 대부분이 주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혹독한 공산치하를 한 번 경험했기 때문에 집과 모든 재산을 버리고 고향을 떠났던 것입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굳세어라 금순아 피난을 가기 위해 흥남부두로 몰려든 사람들 무너진 대동강 철교 위로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

  • 군대가 해산되었던 1907년 안중근은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에 도착하였다. 그는 1908년 연추(けむりあき)에서 최재형, 이범윤 등과 동의회(同義どうぎかい)를 조직하고, 그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동의회 내 의병부대인 동의군의 우영장으로 국내에 진입하여 함북 경흥의 홍의동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적 수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 회령 영산전투에서 패배하여 자신을 자책하던 그는 1909년 2월 26일 연추 하리에서 동지 11인과 단지를 결행하고, 동의단지회(同義どうぎだんゆびかい, だんゆび同盟どうめい)를 결성하였다. 의병 봉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톡에서 1909년 10월 『대동공보』를 읽고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장성 대신 코코프체프와 협상을 벌이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안중근은 동지 우덕순 및 통역 유동하와 10월 22일 하얼빈에 도착한 후 지형정찰을 하고 자신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 1968년 120명의 무장공비가 강원도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하였습니다. 군·경은 물론 반공정신이 투철한 우리 주민들까지 나서서 무장공비 소탕작전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당시 평창군 속사초등학교 계방분교 2학년이었던 이승복 군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무장공비들에게 저항하다가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무장공비들이 잠입했던 당시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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