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정변
신유정변(중국어 간체자:
배경
[편집]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한 와중 1856년에 제2차 아편전쟁이 벌어지면서 함풍제를 비롯한 황족 대부분은 만리장성 너머 열하(
- 호쇼이 우룬 친왕 애신각라 재원(
愛 新 覺 羅 載 垣 , 만주명 아이신기오로 자이유완 Aisin Gioro Dzai Yūwan) - 호쇼이 우전 친왕 애신각라 단화(
愛 新 覺 羅 端 華 , 만주명 아이신기오로 두완후와 Aisin Gioro Duwanhūwa) - 협판대학사(
協 辦大學士 ) 겸 호부상서(戶部 尙書) 애신각라 숙순(愛 新 覺 羅 肅順, 만주명 아이신기오로 수슌 Aisin Gioro Sušūn) - 부마도위(駙馬
都 尉 ) 푸차 징쇼 - 군기대신 겸 병부상서 토호로 모인
- 이부좌시랑 광원
- 예부우시랑 두한
- 태부사소경 초우영
쿠데타
[편집]서태후는 이들 팔대신의 필두인 숙순(肅順)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곧 권력다툼을 시작한다. 서태후는 자기보다 궁중 서열이 높은 동태후와 함풍제의 여섯째 남동생 공친왕, 일곱째 남동생 호쇼이 굴루 친왕 애신각라 혁현(
9월 14일, 산동도감찰어사 동원순이 양 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보정팔대신은 청나라에는 수렴청정 제도가 없다고 기각했고, 양 태후측과 팔대신 측은 격렬히 대립했다.[4] 10월 26일, 황실이 북경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자이유완과 두완후와는 양 태후와 함께 황제를 모시고 선발대로 출발하고, 숙순(肅順)은 함풍제의 운구를 호종하여 하루 늦게 후발대로 따라갔다. 선발대가 북경에 도착하자 공친왕이 즉시 쿠데타를 일으켰다.[5] 11월 2일, 양 태후와 황제는 보정대신들보다 먼저 자금성에 입궁하고, 뒤늦게 입궁한 자이유완과 두완후아는 입궁하자마자 쿠데타군에게 체포된다. 북경 북동쪽 밀운까지 왔던 숙순(肅順)은 거기서 체포되었다.[6]
11월 3일, 쿠데타 세력은 구왈기야 쿠일량 등 5인을 군기대신에 임명하여 의정처와 군기처를 장악했다. 공친왕은 의정왕(도르곤의 섭정왕보다는 격이 낮음)이 되었다. 11월 8일, 자이유완과 두완후와는 자살당하고 숙순(肅順)은 참수되었다.[7] 나머지 다섯 보정대신은 실각 선에서 처벌이 그쳤다. 11월 11일, 황제가 즉위식을 올리고 보정팔대신이 올렸던 연호 "기상(祺祥)"을 폐하고 이듬해인 1862년을 동치 원년으로 선포했다. 이로써 재순(
각주
[편집]- ↑ [네이버 지식백과] 신유정변 [
辛 酉 政變 ] (두산백과).....서태후 40년 집권의 길을 연 신유정변은 숙순(肅順)을 대표로 한 러허파[熱 河 派 ]와 함풍제의 러허 피난에도 베이징에 남아 연합군과 조약을 체결하여 이들을 철수시킨 공친왕 등을 중심으로 한 베이징파[北京 派 ]의 권력장악을 위한 암투로 시작되었다. 이는 곧 베이징파의 러허파 제거작전으로 전개되어 베이징파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 ↑ [네이버 지식백과] 서태후가 권력을 장악하다 [
那 拉 氏 奪 權 ] (중국상하오천년사, 2008. 4. 25., 풍국초, 이원길) - ↑ 溥仪
在 《我 的 前半 生 》中 记载:“相 传奕䜣化妆成萨满,在 行 宫见了 两宫皇太后 ,密 定 计,旋返京 做部署 。” - ↑ 《
越 缦堂国事 日 记》记载:肃顺等 人 恣意 咆哮 ,“声 震 殿 陛,天子 惊怖,至 于涕泣 ,遗溺后 衣 ”。 - ↑ 《
清史 稿 ·肃顺传》记载:此前,“肃顺方 护文宗 梓 宫在途 ,命 睿亲王仁 寿 、醇 郡 王 奕往逮,遇 诸密云 ,夜 就行馆捕之 。咆哮 不服 ,械系。下 宗人 府 狱,见载垣 、端 华已先 在 。” - ↑ 《
清穆 宗 毅 皇帝 实录》记载:“以醇郡 王 奕管善 捕 营事。” - ↑ 《
正 说清朝 十 二 帝 》:“将 行刑 ,肃顺肆口大 骂,其悖逆 之 声 ,皆 为人臣子 所 不 忍 闻。又 不 肯跪,刽子手 以大铁柄敲之,乃跪下 ,盖两胫已折 矣。遂 斩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