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아편 전쟁
제2차 아편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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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 전쟁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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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대영 제국 프랑스 제2제국 미국 러시아 제국 | 청나라 | ||||||
지휘관 | |||||||
빅토리아 여왕 알렉산드르 2세 | 수완구왈기야 싱포 |
제2차 아편 전쟁(중국어 간체자:
배경
[편집]제1차 아편 전쟁(1839~1842년)이 끝난 뒤, 영국은 대중(
- 청 농촌에서 생산하는 면포가 값이 싸고 품질이 좋다.
- 청의 사회경제적 구조가 여전히 자급자족적인 성격이 강해서 수입제품을 꺼려했다.
- 늘어난 아편 수입으로 은이 유출되면서 구매력을 잃었다.
- 제1차 아편전쟁 이후 광동을 중심으로 외국인 배척이 전개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영국의 대중 무역은 여전히 차의 수입과 아편의 수출이었다. 영국은 지속적으로 시장 개방을 확대하라고 청에 압력을 넣었다. 이것은 1851년 태평천국 사건을 유발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수출이 지지부진하게 되자, 영국은 조약개정을 청나라에 요구하게 된다. 1854년 4월 영국, 프랑스, 미국 공사는 함께 광저우로 가서 양광총독(
하지만, 청나라 조정에서는 조약개정에 응하지 않자, 영국은 무력을 사용하고자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때 마침 1856년 10월 광저우 앞 주강(
제2차 아편전쟁
[편집]1857년 영국은 애로호 사건을 구실로 프랑스와 연합군을 구성해 광저우 시내로 침입하여 이 해 12월, 광저우는 점령되고 시가지 곳곳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을 죽였다. 영국-프랑스군은 광저우를 점령한 이후에도 3년 동안 지방관의 괴뢰정권을 앞세워 연합군위원회(영국, 프랑스)의 점령행정이 실시 되었다. 이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1858년 북상하여 대구포대(
1858년 6월에 맺어진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톈진 조약
[편집]-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은 외교사절이 베이징에 상주할 권리를 가진다.
- 무역을 위해 10개의 항구를 개방한다.
- 외국 상선의 자유로운 장강 통상을 승인한다.
- 이전에 금지했던 중국 내 외국인 여행을 허가한다.
- 아편무역을 합법화한다.
- 개항 항구를 확대한다.
- 기독교를 공인한다.
-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에 대한 배상금으로 은 200만 냥을 지불한다.
- 영국 상인에게 재산 손실의 위로금으로 은 200만 냥을 지불한다.
- 배상금을 낼 때까지 광둥성과 보장을 점령한다.
- 애로호 사건의 결과로 체결되었다.
전쟁의 재개
[편집]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다구포대를 잃은 불리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약이 체결되긴 하였지만, 청 정부의 강경파들은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이에 청 황제는 강경파들에게 심적으로 동요하여 1858년 후반 베이징에서 톈진조약 비준을 강행하려고 하는 영프 연합군을 막기 위해 다구포대에 포대와 기병을 추가 배치하였다. 따라서 조약을 체결하려는 영프 연합군과 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청나라 군대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고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영국 함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고 근방에 있던 관전한 미국군 조시아 탈트날(Josiah Tattnall)의 도움을 받아 철퇴하게 되었고, 이 잠깐의 승리로 인하여 청 정부에서는 강경론이 득세하였다.
하지만 1860년 6월 영국과 프랑스는 전년도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1859년의 소함대의 8배가 넘는 병력과 군함을 모아서 나타났다. 이들은 발해만의 여러 항구를 점령하고 다구포대에서 떨어진 곳에 병력을 상륙시켰다. 다구포대와 청정부의 방어군을 격파한 영-프 연합군에 놀란 청 조정은 평화협상을 제의하였지만 영-프 측은 협상을 거절하였다. 9월 하순 프랑스군과 영국군 베이징 근교 퉁저우 장자완과 바리차오에서 청나라 군대를 패퇴했다. 프랑스군 사령관 샤를 쿠생몽토방(Charles Cousin-Montauban)귀국 후 나폴레옹 3세 황제로부터 팔리카오 백작(Comte de Palikao)이라는 작위를 수여했다. 이윽고 그들은 10월 베이징에 입성하였지만, 점령하지는 않고 베이징 근교에 머물렀다. 베이징에 머무는 과정에서 수많은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청황제는 베이징에서 멀리 북쪽으로 떨어진 여름별장에 피신하였고, 황제의 형제 중 한 명인 공친왕을 남겨 협상을 하게 하였다.
원명원의 약탈
[편집]연합군은 베이징 근방에 주둔한 후, 황제의 별궁인 원명원으로 쳐들어갔다. 영프 연합군은 금은 세공품과 장식품 등을 약탈 후 원명원에 불을 질렀다.
전쟁의 종결
[편집]공친왕과 영-프 연합군의 협상에 의하여 전쟁은 종결되었고, 러시아 제국의 중재하에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었다. 베이징 조약에 의해 청 조정은 천진 조약(톈진 조약)을 인정하게 되었고, 아편의 거래도 합법화 되게 된다. 여기에 추가로 외국공사의 베이징 주재, 톈진을 포함한 11개 항구 개항, 내지에서의 여행, 통상, 포교의 자유, 장강 및 통상항으로의 군함진입권, 청나라 노동자의 이민 허용, 영국-프랑스에 전쟁배상금으로 은 800만냥, 그리고 영국에 홍콩의 인접한 구룽반도(주룽사)를 할양 조차하는 등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었다.
이후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는 데 중재하여 도움을 준 러시아 제국에게도 연해주 지역을 할양하게 된다.
2차 아편전쟁의 패배는 청나라에 살고 있던 한족들에게 1차 아편전쟁의 패배보다 훨씬 거대한 충격을 주었다. 청 황제의 피신과 베이징의 점령은 단순한 전쟁의 패배가 아니라 한족의 머리 속에 박혀있던 중화사상을 그 뿌리부터 뒤흔들게 되는 사건이었다.
이후 서양 문물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청 조정은 양무운동을 실시하게 된다. 그리고 청 조정과의 조약으로 청 내에서의 이권을 확보한 서양세력은 아직까지 청 남부에서 영향력을 떨치고 있던 태평천국을 토벌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표교열, 〈제1․2차 중영전쟁〉, 서울대 동양사학연구실 편, 《강좌 중국사(Ⅴ)》, 서울: 지식산업사 (1989)
- ↑ 김용구. 《세계외교사》 1995(
上 •下 合本 )판. 서울대학교 출판부. 206쪽. ISBN 89-7096-413-4.애로우
號 는 로챠르(Lorchar)型 의中國 帆船 으로서 중국인의 소유였으나船籍 을 홍콩에 두고 있었고船長 은 영국인이었다. 이 선박이廣東 앞에 정박하고 있던 1856년 10월 8일淸國 관헌이 그 선박의 선원 11명을 해적의 용의자로 체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 영국의 주장에 의하면 이 선박은 홍콩에船籍 을 둔 영국선박으로서 선원을 체포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고 더욱이 게양된 영국국기를 내리게 한 것은 국가모독이라는 것이다. - ↑ 가 나 신승하, 《근대중국:개혁과 혁명(상)》 서울, 대명출판사(2004)
- ↑ H.B. Morse, 《The International Relations of the Chinese Empire, Vol. 1》 (Shanghai:1910; Taipei:Ch'engWen Publishing Co., 1978)
- ↑ Edgar Holt, 《The Opium Wars in China》 (London: Putnam, 1964)
- ↑ 김용구. 《세계외교사》 1995(
上 •下 合本 )판. 서울대학교 출판부. 207쪽. ISBN 89-7096-413-4.파머스턴수상은 전쟁수행에 관한 예산안의 통과를
上 •下院 에 요구하였다. 1857년 2월上院 은 정부안을 통과시켰으나下院 에서는 부결되었다. 수상은下院 을 해산시키고 총선거에 의한 신임을 묻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 구성된下院 에서는 파머스턴의 청 전쟁 수행을 동의하였다.